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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나는 칼미온에서 견습 비슷한 위치이긴 했지만 일은 오자마자 받고 있었다. 병원에서 야채 다듬기와 잔심부름 했던 걸 살려 잔업 전반 및 보조. 아직 명확한 일은 받지 못했지만, 오히려 일은 병원에 있을 때보다 많은 것 같기도 했다. 칼미온은 언제나 일손이 부족했기에 잔업 및 보조라는 게 장난이 아니었던 것이다.
검술을 웬만큼 할 수 있는 유능한 여자, 게다가 칼미온의 애매한 기준(긍지높고 선량하며 강인한)에 적합한 하녀라는 건... 생각보다 구하기 어려운 듯 했다.
물론 나도, 거의 낙하산 수준으로 그 기준을 만족시키진 못했다. 다만, 히아신스 에이나라는 뒷배는 그 기준을 웃도는 증명인 듯 했다.
“내 이름은 앤 설리라고 해. 나이는 24살, 당신보다 3살 정도 많네.”
아니거든, 이라는 말은 하지 않고 나는 미소를 유지한 채 존경의 눈을 하고 내 멘토를 바라보았다. 칼미온에서 나에게 마저 일을 가르치고 지도하게 될 아가씨는 칼미온 소속 말단 기사의 딸로 어릴 때부터 이곳에서 일했다고 한다.
싹싹하고 구김살이 없는, 좋은 의미의 체육계 같은 아가씨다.
“솔직히 말할게. 기록은 봤어.”
“...아.”
최대한 괴로운 표정을 지으면 그녀는 쓴웃음 짓는다.
“기록만으로는 정말 최악이더군. 너.”
“...”
“하지만. 너는 에이나님이 직접 신뢰한 여자잖아. 부럽기도 하지만, 칼미온에 있는 사람이라면 그 신뢰가 진짜라고 믿는 쪽을 택해. 대부분. 그리고 나는 대부분이지.”
그녀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내 어깨를 잡았다.
“그러니까, 환영해. 어린 나이에 고생했네. 앞으로는 긍지 높은 칼미온의 일꾼으로서 힘내자.”
말간 밤색 눈동자에 진심으로 환영하는 빛이 스민다. 역시 밝은 미소다. 정말 엘킨 다이브가 대장에 히아신스 에이나가 마스코트로 있는 기사단다웠다.
앤 설리 뿐만이 아니었다. 칼미온은 좋게 말하면 대범했고 나쁘게 이야기하자면 조금 순진한 면이 있었다.
실제 전투에 나서거나, 신뢰를 배신하는 사람이 있으면 그들이 얼만큼 단호해지는지는 알고 있다. 순진하다고 결코 바보가 아니라는 점은 ‘셀리안 크레이누의 기억’이 더 잘 알고 있었지만.
“칼미온에 온 사람은 누구나 긍지 높은 영혼을 가지고 있으니까. 그걸 믿어.”
나는 감격스러움을 가장해 조금 쓴웃음을 지었다.
*
“...귀, 귀여워.”
“...감사해요.”
“진즉 칼미온에 데려오는 거였다는 생각이 드네.”
“하하.”
히아신스는 말그대로 감격한 듯 눈을 반짝였다.
그녀는 오늘 나왔다는 내 유니폼을 들고 아침부터 하녀들의 방을 방문했다. 이 멋진 기사님의 등장에 난리도 아니었다.
들어가면 또 질문세례를 받겠지. 뭔가 유명인과 아는 사람이 된 기분이다.
“병원에서 입고 있던 원피스도 나쁘진 않았지만. 역시 상상대로네요.”
칼미온의 유니폼은 푸른 계열이었는데 체크무늬 브라우스에 짧은 조끼를 입는다. 치마는 여느 메이드복과 같은 길이였지만, 치마 밑으로는 반드시 가터벨트 형식의 스타킹을 신고 단검을 하나씩 소지하게 된다. 여자 스파이처럼 단검을 가터벨트에... 처음 발상한 사람이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교복 같은 느낌의 옷이 단번에 수위가 높아진다.
“잘 어울릴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정말 잘 어울려요.”
“감사해요.”
“...감사하다고만 하네. 오랜만인데 왠지 서먹한 느낌...”
히아신스가 섭섭한 듯 눈을 찌푸렸지만 그녀도 태도가 애매하긴 마찬가지였다. 병원에서와 호의는 달라지지는 않았지만 존대 빈도가 많아진 게... 아무래도 칼미온 내라 거리를 어떻게 잡아야 할지 고민하는 것 같았다.
게다가... 온지 일주일 정도, 실제로 기사단에 들어오자 히아신스를 만날 시간이 줄어버렸다. 기사단 자체가 워낙 크고, 히아신스는 기사단 내부에 있으면 백이면 백 부대장이나 단원들에게 끌려갔다. 그녀 자체가 성실해서 거절도 못 했다.
“으으, 어떻게든 시간을 낼 테니까. 하영이 검을 살 때는 꼭 같이 사러 가요.”
“앤 선배가 섭섭해하셔요.”
“그럼 앤도 같이 가면 되지.”
새로운 신입은 담당해주는 선배가 함께 단검을 사는 게 칼미온 기사의 관례. 그것은 칼미온 소속 하녀들도 비슷해서. 최근 내 검술 지도는 앤 설 리가 하고 있고, 멘토도 그녀이니만큼 검은 그녀와 사는 게 맞았다.
히아신스는 셋이 가는 한이 있더라도 내 검을 함께 살 마음 만만인 것 같지만.
*
이것저것 신변에 대해 이야기를 하기도 전, 어느새 사람들이 분주해지기 시작했다. 아무도 없다고 생각해 들어온 방에도 몇 번인가 사람들이 들어왔다 나가고, 히아신스도 이제 시간이 다 되었다는 걸 인식한 것 같긴 했지만 아쉬운 눈치였다.
“...으음, 하영은 오늘도 바쁜가?”
“히아신스 님이 더 바쁘잖아요.”
언니라고 하지 않아도 지적하지 않을 정도의 애매한 자리. 그게 왠지 안심된다.
“그렇긴 하지만... 환영회 전에 일부터 줘서 미안...”
“앗, 죄송합니다.”
“하...”
또다시 사람이 왔다 간다. 히아신스를 보자 재빠르게 고개를 숙이고 나갔지만.
“...그럼 난 안타깝지만 나가볼게.”
“네.”
“으으, 어째서 칼미온에 있는데 병원에서보다 못 만나는 거야.”
“하하.”
사실 내 쪽에서 직접 그녀를 만나러 가지는 않으니까 이렇게 엇갈리는 일이 앞으로도 많아질 것이다. 그렇게 질리고, 멀어져, 어느새 기사와 그냥 하녀가 되고. 가까운 시일 내에 내가 칼미온을 나가 어딘가 먼 곳에서 나도 모르는 새 원래 세계로 돌아가거나 해서, 히아신스가 죽었다는 것도 듣지 못할 정도로 멀어지고 싶다고 어렴풋이 생각하며 그녀를 배웅했다.
*
“히아신스 님은 역시 멋지셔. 자세가 다르잖아.”
“그렇군요.”
그런가요, 싶었지만 그녀의 자세가 예쁘다는데는 동의하니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나 앤은 다른 의도였던 것 같다.
“그건 보고 배워야 해. 그런 식으로 걸으면 평소에도 호흡이 좋아져서 검을 휘두를 때 말이야.”
“그런 이야기셨군요. 하하.”
“응?”
그녀는 나에게 부담이 없었다. 칼미온의 하녀지만 셀리안과는 직접적인 접촉이 없고 그의 전생에 관계가 없는 사람이었으니까. 그녀라면 마음 놓고 친구가 되어도 된다고.
“어라?”
“?”
“엘킨님이시다.”
“에?!?”
앤이 난간에 살짝 기대 연병장 쪽에 시선을 준다. 그러면 안 되는데 자연스레 연병장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나는 다시 엎어졌다.
“읏.”
“하영?!”
히아신스와의 관계가 자연스레 해소되고 있는 반면 이 미묘하게 고민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한 상대. 엘킨 다이브-
앤을 따라 시선을 던지면 멀리 연병장에 있던 그와 우연히 눈이 마주쳤다. 눈이라도 안 마주쳤으면 넘어지지라도 않았을 텐데. 나는 손에 들고 있던 수건 바구니도 함께 떨어뜨리며 다시 엉덩방아를 찧는다. 앤이 경이적인 반응속도로 얼른 잡아주려 했지만 흘린 수건도 있었다.
바닥은 흙바닥이었는데 큰일이었다.
“죄, 죄송해요.”
오자마자 이게 무슨 일이야. 싶어 눈치를 보았지만 심장이 제정신이 아니다. 반즈음 정신 못차리고, 일어서지도 못하고 사과를 하고 있으면 그녀가 쭈그리고 앉아 수건을 줍고 나를 보았다.
“...너-.”
“윽.”
“순진하구나.‘
“아니, 저 순진하지...”
“이게 만약 순진한 척 하는 거고, 얼굴색까지 네가 조정할 수 있는 거면... 하녀가 아니라 정보부에 추천해줄게.”
“...”
그리고, 유감스럽게도 그날이 신호탄과도 같았다.
엘킨 다이브는 나를 태연히 대하면서도 필요이상으로 가까워지지 않아줬지만 문제는 나였다.
나는 그만 보면 넘어졌다.
그를 보면 얼굴이 빨개졌다.
그가 예의상 인사라도 건네면 딸국질을 했다.
어느새 칼미온 내에서 새로 들어온, 히아신스 에이나의 편애를 받는 하녀가 엘킨 다이브를 열렬히 짝사랑한다는 건 소문 날 만큼 나게 되었다. 그건 칼미온의 사람들이 나에게 호의를 갖게 하는 또다른 이유이기도 했다.
그들은 철벽같은 자신의 대장을, 제 감정도 숨기지 못하고 짝사랑하는 어린 하녀를 귀엽게 봐줬다.
조금 눈치가 없는 어떤 여자 하녀는 심지어 ‘너 같은 애들이 생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런 일을 했지, 더 순진하다고 하던데... 진짜구나’라고 대놓고 이야기하기도 했다. 악의는 없었고, 내가 그런 데 별로 관심이 없어서 다행이었지만.
‘어서 여길 나가든가 해야지.’
정말정말 절실해졌다.
============================ 작품 후기 ============================
안녕하세요, 나무바라기입니다.
오늘 새벽에는 정말 죄송했습니다.
어제 제 정신이 아니었는데...; 오늘 새벽에 저지른 실수... 정말 죄송합니다.
봐주셔서 감사하고요. 선추코도 감사합니다.
글은 완결까지 초고가 있어서(300번은 고쳐야 할 멍청한 초고지만) 완결까지 꼭 쓸 예정이에요/ㅁ/ 한 분이 봐주셔도 끝까지 열심히 가겠습니다.
초심, 초심이네요. ㅎㅎ 분명 초반에 한 분이 코멘을 주셨던 글인데 어느새 10분 이상 코멘을 주셔서, 감사한 마음입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