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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엘킨 다이브인가.”
“당신은?”
푸른 눈동자에 은발의 미남- 소문대로다. 귀신 같이 활을 쏘고 칼을 휘두르면서도 한 명도 죽이지 않았다.
그가 속해 있던 용병단에서 일탈한 무리가 마을을 덮쳤다. 그들은 목숨을 걸고 일을 완수했지만 뒤에서 손을 잡은 영주와 용병단의 대장에게 배신당했다. 그들은 분노했고 폭주한 것이다. 원래 좋은 무리였다고는 말하지 않겠다. 그런 그런 어중이 떠중이들이 모인 것이었으니까.
오합지졸의 무리가 범죄를 저질렀고, 마을이 짓밟힌 후에 범죄자들은 몰살당한다- 그런 흔해빠진 시나리오였다.
상정외는 ‘엘킨 다이브’와 ‘나’겠지.
셀리안은 조금 미소지었다.
약탈이 일어나기 전 단신으로 마을에 나타난 엘킨 다이브는, 마을도 구하고, 일탈한 무리 역시 죽이지 않았다.
바보같이 우직한 남자다.
역시 히아가 이야기한 대로의 남자.
“나는 셀리안 크레이누, 리안이라고 부르면 되고.”
우직한 놈은 꽤 좋아하니까.
*
귀찮다. 관여하고 싶지 않다. 히안시스가 나에게 달라붙는 거고 나는 맞춰주는 거다. 그녀가 나를 좋아하긴 해도 나는 그녀의 운명을 바꾸지 않을 것이다.
바꿀 능력도 없다.
그런데도.
“꺅! 너 뭐 하는 거야?”
난 뭘 하고 있는 걸까.
넘어진 하녀와 당황하는 여자들을 바라본다.
“아, 죄송합니다. 빨래감을 밟고 계신 줄 모르고. 그냥 집으려다가.”
내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도 모르겠다.
나 바보야? 왜 내가, 직접적으로 히아신스에게 욕을 한 것도 아닌데.
나한테 뭐라고 했을 때도 참았는데 왜 지금 ‘화’를 내는 걸까.
“이게!!”
내 말에 정신을 차린 듯 엎어져 있던 하녀가 일어나 내 뺨을 갈겼다. 뺨이 얼얼하다.
‘...아 데자뷰.’
그래도 채찍질은 안 당하겠지.
뺨을 신호로 뒤에 있던 여자들이 나에게 달려들었다. 여자들이 무시무시한 모습으로 달려드는 걸 보고 눈을 감았다. 29살이나 쳐먹고 어린 여자인 척하며, 마음이 쏠리고 쏠려 결국은 ‘무시해야 할’ 상대를 위해 화를 내고 얻어 맞고. 제 마음도 조절을 못해서.
“...”
한심하다고, 생각하며 폭력을 기다렸지만 아무 일도 생기지 않는다.
“...?”
깜빡깜빡 눈을 뜨고 실눈으로 그녀들을 바라보았다. 그녀들은 굳은 듯 움직이지 않는다. 조금 두려워하는 것 같기도 하고 당황한 것 같기도 하고, 홍조를 띠고 있기도 하고.
‘뭐지?’
이상한 광경일세. 정지화면 같은데 부들부들 떠는 걸 보면 재생중인 것 같다. 나도 모르게 눈을 완전히 뜨는 순간 뒤에 누군가가 있다는 걸 알았다.
“하영 양, 여기 있었군요.”
“!”
그리고 나도 새빨개졌다. 심장이 아프게 뛰기 시작하는 건 덤이다.
“다, 다이브 님-”
여자 하나가 부르르 떨면서 입을 연다. 그녀는 당혹스러운 듯 얼굴에 홍조를 띠고, 한결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애원하듯 엘킨의 이름을 불렀다.
“이건, 이 하녀가 감히 저희를 모욕해서.”
누가 물었어?
그녀의 말에 옆에 있던 두명이 당황한다. 엘킨 다이브가 히아신스 에이나를 아끼는 건 유명한 이야기다. 나는 칼미온 소속에 히아신스의 총애를 받고 있다. 그 둘은 내 입을 주시하며 불안하게 친구와 나를 번갈아 본다.
걱정할 필요 없는 게, 나는 엘킨을 마주하면 완전 머저리에 벙어리가 되어서... 지금은 떨리는 심장을 진정시키는 것만으로도 버거울 지경이었다.
그 기묘한 정적과 떨림을 불식시킨 건 아마 제일 제정신인 엘킨 다이브일 수밖에 없었지만.
그가 하는 말이 또 의외였다.
“죄송합니다만, 하영 양에게 급한 볼 일이 있어서, 이 빨래들을 옮겨주실 수 있겠습니까.”
“!!”
엘킨이 하녀의 말을 못 들은 척 그녀들에게 부드럽게 이야기했다. 나는 멍한 머리로도, 그 말이 생소해서 눈을 뎅그랗게 뜨고 귀를 기울인다. 이 기사님이 무슨 생각인지도 모르겠고 나에게 볼일이 있다는 것도 당황스럽다.
“다, 당연하죠!”
“네!”
“물론입니다!”
나보다는 덜하지만 하녀3인방도 지들이 뭘 말하는지도 모르고 있는 듯 하다. 여자들은 감전 된 듯 끄덕거리며 내 손으로부터 빨래 바구니를 뺏어 허둥지둥 바닥에 떨어진 빨래들을 주운 뒤 반짝이는 눈으로 엘킨을 바라보았다. 칭찬이라도 해달라는 듯한 모습이다.
“...”
그나마 움직이기라도 하는 그녀들은 나은 것이다. 나는 차마 뒤돌아보지 못하고 여전히 굳어 있었다.
“그럼, 따라와주시겠습니까. 하영 양.”
“에?”
“급한 일입니다.”
“네? 네?!?!!”
엘킨이 나와 반대방향으로 걷기 시작하는 게 느껴진다.
“하영양.”
“가, 가요.”
가긴 어딜 가?
역시 감전 된 듯 부르르 떤 나는 빨래감을 들고 있는 그녀들을 힐끔 본 뒤 엘킨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
복도를 걷는다. 왕궁의 중앙복도를 지나 서쪽 복도로 넘어온다. 이쪽은 사람이 많이 다니는 편은 아니다. 왜냐하면 높은 지위의 귀족들이 잠시 머물거나 사신들이 머무는 곳으로 지금은 세류 키스톤 외에는 머무는 사람이 없는 걸로 알고 있다.
그 세류 키스톤은 오늘 아침 나에게 시시껄렁한 농담을 하러 온 뒤 성을 나갔다. 그는 칼미온 기사단과 함께 하루드의 꼬리를 잡는데 동참하고 있다고 한다.
웃기는 일이다. 웃기는 일이라고, 게스톤 남작도 셀리안도 알고 있을 것이다.
‘이런 일은 전생에 없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세류 키스톤’이란 남자가 키오스에 파견되는 일은 없었다. 몇 년 앞당겨 노예마차를 포착한 게 역사를 뒤틀기 시작한 걸까.
‘...쓸모없는 생각이네.’
엘킨을 신경쓰지 않기 위해 나와는 관계도 없는 역사나 스파이에 대해 생각을 기울이려 노력한다. 노력하면서도 눈은 앞서 걷는 엘킨의 등을 뚫어져라 쳐다 보고 있다. 머리가 빙글빙글 돌고, 그가 영원히 뒤돌지 않으면 좋겠다는 생각과 뒤돌아 그 눈동자로 나를 봐줬으면 하는 생각이 교차한다.
‘이건 완전히 셀리안이잖아.’
아마 그는 아직 엘킨을 좋아하지 않을 테지. 셀리안이 자신이 엘킨을 좋아한다는 걸 깨닫는 건 히아신스가 죽은 날이었고, 아마, 아마 아직 셀리안은 엘킨에게 반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직 ‘그 추락사건’이 시작되지도 않았고.‘
그런데도.
셀리안은 아직 엘킨을 좋아하지도 않는데 윤하영이 엘킨에게 두근거리고 있다. 농담이 아니다.
“...죄송합니다.”
엘킨이 멈춰섰다.
나도 멈춰섰다.
그가 뒤돌아섰다. 푸른 눈이 나를 담는다. 꿈에 그리던, 바라면서도 바라지 않았던 그 눈동자가 나를 담는다. 규칙적으로 빠르게 뛰던 내 심장이 다시 불규칙적으로 뛰는 걸 눈치챈다. 멍하니 그의 눈을 바라본다.
구역질과 설렘이 뒤섞인다. 미칠 것 같다. 그런데도 시선을 뗄 수 없다.
“일을 방해하고 이런 곳으로 끌고 와버렸네요. 이곳은 칼미온과도 꽤 멉니다만.”
“에? 뭐, 뭐...히익.....”
바보 같은 소리, 또다. 또 딸꾹질이 시작되었다. 그와 말을 섞으면 정신을 차릴 수 없다. 좋아하는 건 똑같은데! 셀리안은 그 앞에서 갖은 폼이라면 폼은 다 잡았던 것 같은데. 왜 나만.
“히끅-”
엘킨이 내 모습에 조금 웃었다. 쓴웃음이 아닌 부드럽고 다정한 웃음이다. 입가가 느슨하게 휘어지는 걸 슬로우모션마냥 바라본다.
‘이대로라면 죽겠어.’
왕궁을 나가기 전에 죽을 거다.
“히아신스가 왜 당신을 좋아하는지 알겠습니다.”
순간, 엘킨 앞에서 처음으로 심장이 평온을 되찾았다.
============================ 작품 후기 ============================
약속했으니까. 연참 시작합니다. 몇개까지 연참이 되는지 주욱 지켜봐주세요. 꼬르륵...
후원쿠폰 주신 뱅구리님, 선추코 주신 독자님들 다 사랑하고요. /ㅁ/히힛
에이리엘 님 // ㅎㅎ 고3이시군요. 힘들었던 걸로 기억합니다!>ㅁ< 그치만 열심히 한 만큼 열매는 달답니다! 라고... 고리타분한 말을 해봅니다. 항상 코멘 달아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