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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전생의 엄마를 만났다.
그런데 아무 느낌도 안 들었다. 셀리안 크레이누가 그녀를 싫어하는 건 안다. 그게 사실은, 사랑받지 못했기에 기원하는 미움이란 것도.
'그 남자에게 매우 안 어울리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녀에 대한 그의 심정은, 셀리안 크레이누의 과거사 중 내가 제일 이해가 가는 부분이기도 했다.
'생각과는 다르네.'
하지만 실제 그녀는 내게 아무 감정도 일으키지 않았다. 엘킨을 만났을 때의 죽을 것 같은 느낌이나, 히아신스를 볼 때마다 드는 죄책감은 물론 아니겠지만. 좀더... 아무래도 엄마니까.
‘왜일까.’
별 느낌이 없었기 때문인지 금방 나는 그녀에 대해 생각하는 것을 멈췄다. 이상할 정도로 '아무 느낌'도 없다는 것이 기묘하긴 했지만, 그 부분까지 이상하다고 파헤칠 필요는 없겠지.
지금은, 하루 종일 오프였던 연유를 짜내는 게 급선무다. 밖으로는 석양이 지고 있다. 그렇게 생각하며 칼미온의 구역으로 들어가면-
"환영해! 하영!"
히아신스를 필두로 미실랭 부대장과 앤이 축포를 터뜨린다. 뒤로는 하녀들과 기사들도 빙글빙글 웃는다. 내가 시선을 피하려고 노력하고 있지만 사실 히아신스 옆에는 엘킨도 있었다.
"늦었지만 하영의 환영회를 하기로 했어."
...이런 뒷북이라니.
*
변명거리를 생각하지 않게 된 점은 좋은 일이었지만 부담스럽다. 일단 주인공을 배려한답시고 나를 엘킨 대장 옆에 앉힌 게 부담스럽다. 그리고... 누가 말했는지 숨기고 싶었던 비밀을 알게 된 히아신스가 가장 적극적으로 나를 엘킨 옆으로 끌어들인 게 제일 부담스러웠다.
이놈의 기사단은 너무 허물이 없어. 어떻게 하녀 따위를 대장 옆에 앉히냐고.
난 히아신스에게 입이 제일 가벼웠을 미실랭을 가볍게 노려보았다. 눈이 마주친다.
"아하하, 하영은 은근 귀엽다니까. 어떻게 내가 이 환영회의 대부분을 기획한 걸 안 거지?!"
"..."
그래, 왠지 환영회의 컨셉이 지나치게 소녀소녀해서 히아신스인가 의심했지만. 그녀는 소녀소녀한 부분에서는 꽤나 고급스러운 취향을 갖고 있었다. 이렇게, 유치원 환영회 같은 소녀소녀함은 '여자애는 이런 걸 좋아할 거야'라는 고정관념에 사로잡힌 근육마초남 머리에서 나왔을 법하다.
"부대장님은 참 언제 봐도 밝으세요."
생글 웃으며 살짝 비꼬았지만 그는 말그대로 받아들였는지 더 흥이 나서 음식을 이것저것 내 앞에 늘어놓는다. 류와 마찬가지로 몹쓸 뇌지만, 상사고 타입이 다른 몹쓸 뇌이기에 포기하기로 한다. 이런 타입은 상대하기 힘들다. 웃으며 비꼬아봤자 나만 피곤하다.
*
환영회는 날이 어두워질 무렵에는 술파티가 되어 버렸다. 하녀들끼리, 기사들끼리, 기사와 하녀들끼리 끼리끼리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술을 마신다. 기본적으로는 다같이 즐기지만 여느 술파티가 그렇듯 서로서로 모여서 이야기를 나누는 분위기가 된다.
나는 그 분위기를 타 슬금슬금 엘킨 다이브 옆에서 벗어나려고 했다. 술을 몇 잔 안 먹었는데도 새빨갛게 달아올라 밖에까지 들리는 것 같은 심장박동을 더이상 견디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이쿠, 한 번 주인공 옆에 앉아 볼까."
미실랭이 나와 히아신스 사이에 끼어들듯 자리를 잡는다. 자리를 잡으며 나를 도로 앉힌다. 끼어들거면 차라리 엘킨과의 사이에 앉아라, 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치밀어 오른다.
그는 내 기분을 아는지 모르는지 내 귓가에 대고 속삭인다.
"내가 엘킨 대장과 급격히 가까워지는 비장의 수를 써주지."
하지마, 이 병신아.
목구멍까지 또 치밀어오를 뻔했다. 꿀꺽 삼키고 거절하려고 했지만 그는 일어나서 손뼉을 착착 친다.
"지금부터 무서운 이야기 시간!"
"구려요, 대장."
내 말이.
미실랭은 야유하는 부하들을 시선으로 제압했다.
생각보다 다행인 건 미실랭이 멍청이라는 것이다. 귀신의 집이 연인들 사이를 돈독하게 해준다는 단순한 생각. 무서운 이야기에 '꺄악 무서워' 하고 내가 엘킨에게 안기기라도 할 거라 생각하는 건가.
설사 세상이 무너지고 내 발밑에서 정말 귀신이 기어나와 내 목을 조여도! 옆에 있는 미실랭을 제물로 줄 지언정 엘킨에게는 기대지 않을 것이다.
더군다나 나는 무서움을 타지 않는다.
"그럼, 우리 하영이부터 해볼까."
"..."
먼저 하게 하고, 완전히 나를 관객으로 빼놓을 생각인 것 같지만, 별 의미도 없으니 타주기로 한다.
흠, 무서운 이야기인가.
"가만히 잘 살고 있는데 갑자기 모래바람이 부는 딴 세상에 떨어진다든가."
"에이, 그건 재미있는 일이지!"
아, 그래?
"길을 걷는데 귀신 (같은) 여자 때문에 피흘리고 어느새 마을 왕따가 된다든가."
"그건 좀 무섭지만... 길을 걷는데 나타나는 귀신이라니 임팩트가 없네. 에이, 됐어. 됐어. 이 몸이 무서운 이야기를 해주지."
"..."
유감스럽게도 미실랭의 이야기는 썰렁하기 그지없었다.
*
야유가 있긴 했지만, 늦은 봄날씨는 적당히 덥고 시간도 딱 어둑어둑할 때라 그런지 난데없는 괴담타임은 무르익어갔다. 각자 돌아가면서 괴담을 하는데 이야기 자체가 퍽 재미있었다. 칼미온은 귀족부터 민중까지 두루두루 모여 있었는데 모두 경험이 풍부했다. 미실랭 쪽도 나에 대해서는 잊고 이야기에 몰입하고 있었다.
특히 앤 설리는 이야기 하는데 특히 재능이 있었다. 비단 무서운 이야기가 아니라 그녀의 목소리에 호소력이 있다. 그녀의 마을에서 진짜 있었다는 이야기에 모두 귀를 기울이고 있다.
"우리 마을은 꽤 작아. 굳이 이야기하면 시골이지 그래서 괴담도 꽤 있는 편이야. 작은 마을일수록 좀, 그런 게 있잖아. 나는 뭐, 아버지가 농사에는 관심이 없으셔서 어렸을 때 함께 칼미온으로 왔거든. 결국 들은 것 뿐이지만 말이야."
어깨를 으쓱한 뒤 그녀는 담담한 목소리로 조곤조곤 이야기를 시작했다.
"한스라고, 아버지 친구셨는데 잘은 기억나지 않지만 상냥하고 부지런한 아저씨였던 걸로 기억해. 아버지랑 달리 성실한 농사꾼이셨지. 아내를 무척 사랑했었어. 그런데 내가 아버지랑 수도로 올라오고 1개월 정도 지난 뒤인가. 마을에 전염병이 돌았어. 다행히 우리가족은 무사했지만... 한스 아저씨의 아내분은 죽고 말았지."
집중해서 듣고 있으면 언제 왔는지 류가 엘킨과의 사이에 끼어들듯 앉는다. 그 모습에 몇몇 하녀들이 꺄악 가볍게 소리 지르는 게 보인다. 그들의 눈에 어떻게 보이는지 짐작은 간다. 자신이 사랑하는 소녀 하녀가 철벽 기사님 옆에서 얼굴을 붉히니 질투로 끼어든 귀족남 ...정도일까.
민망하다.
‘얘는 그냥 아무 생각도 없어.’
자신이 스파이란 자각도 없을 것 같다.
"그게 또 왔냐는 표정이지?"
"어휴, 어떻게 내 마음을 아셨는지 과연 귀족님은 대단하세요."
"큭."
속삭였는데 가볍게 웃는 소리가 들린다. 깜짝 놀라 웃음소리가 나는 쪽을 바라보면 엘킨이다. 그와 눈이 마주치자 얼른 피했지만, 놀랐다. 그렇지. 엘킨 다이브는 요정의 혼혈답게 타고난 사냥꾼이었다. 귀가 매우 밝았다.
'그럼 아까 미실랭의 헛소리도 들은 건가.'
갑자기 이 괴담자리가 더욱 불편해진다.
내 마음과 별개로 앤의 이야기는 계속 된다.
아내를 잃은 한스는 한동안 죽은 사람처럼 우중충했다. 그러다가 갑자기 생기를 찾았다. 아내를 그렇게 사랑했으면서 마을의 다른 여자들에게 집적거리기 시작했다. 마을 사람들은 이상하다 여기면서도 아내를 잃은 슬픔을 잊기 위해 현실도피를 한다고 생각하며 동정했다. 그런 사람들 중에 앤이라는 여자가 있었다.
"나랑 이름이 같지. 우리 마을에서 앤은 굉장히 흔한 이름이거든. 무슨 무슨 귀족과 불꽃 같은 사랑을 했다는 몇대몇대 전의 아가씨가 앤이었거든. 그래서 딸들 이름은 거의 앤이야 .그런 사랑을 하라고."
"나 어때?"
"어휴, 미실랭 부대장은 다른 앤에게 양보할게요."
앤은 손사레를 치며, 다시 이야기를 이어나간다.
"앤은 한스를 동정하고 연민했고 사랑했어. 그를 보듬고 치유해줬지. 그런데..."
한순간 앤은 공백을 둔다.
이야기는 어느새 클라이막스였다.
"앤이 실종된 거야. 마을 사람들은 찾았지, 한스도 함께 찾았어. 그렇게 한 달, 두 달이 흘렀어."
모두 이야기에 집중한다. 류는 심드렁한 얼굴로 술을 들이킨다. 미성년자가...일까, 뭐 19살이나 쳐먹었고 류인데 뭐 어떠냐 싶다.
"앤이 발견되었어. 그것도 한스의 집, 그의 아내 방에서 말이야. 이상한 냄새가 나고 여자의 흐느끼는 소리가 난다고 이웃이 의심했다는 것 같아.”
사람들은 설마 설마 하며 한스의 집을 찾는다. 그리고.
“그녀는 살아 있었어. 살아 있었지만, 곧 죽을 것 같았지. 끔찍한 몰골이었다고 하는데 솔직히 이 부분은 마을에서 쉬쉬해서 자세히는 몰라. 모르지만."
앤은 얼굴을 찌푸린다. 자신과 이름이 같은 여자의 이상한 모습에 대해 고민하는 얼굴이다.
"...음. 소문에 의하면 한스가 그녀에게... '죽은 아내'를 낳게 하려고 했던 모양이야."
*
괴담은 앤의 이야기로 끝을 맺었다. 무서운 이야기를 하며 은근히 달아올랐던 분위기는 한풀 꺾여 찝찝함만이 남는다.
어떻게 '아내'를, '죽은 아내'를 낳게 한다는 것일까.
"흑마법이지, 맹목적이고 저열하긴 하지만."
내 의문을 아는 건지 류가 심드렁한 얼굴로 이야기한다. 그 말에 끼어든 건 괴담 시간 때도 조용히 있었던 엘킨이다.
"흑마법입니까."
"왜, 관심 있으십니까?"
류는, 나를 제외하고는 제법 귀족스러운 말투로 대했다. 나에게는 류였지만, 타인에게는 완전히 세류 키스톤이었다.
"별 건 아닙니다만. 어머니께 들은 이야기가 떠올라서 말입니다."
"아아. 마탑주가 다이브 경의 어머니셨지. 하지만, 고고한 마탑에서 그런 저급한 주문에 관심을?"
"관심이라기보다는... 키오스 국경 지역의 빈민가를 중심으로 제가 태어나기 전까지 비슷한 류의 사건이 꽤, 오랫동안 있었던 모양입니다."
"흐음."
"어느 한 순간 없어졌다고는 합니다만, 단순한 미신이 아니라. 누군가 의도적으로 퍼뜨린 ... 아니, 소중한 사람을 잃은 사람의 심리를 이용해 실험하고 있는 듯한 냄새가 나서... 어머니께서는 꽤 꼬리를 잡고 싶어하셨습니다."
엘킨은 어느새 칼미온 기사단 대장의 얼굴을 하고 있다. 류는 그 시선을 마주하며 멋쩍게 미소지었다.
"이런- 가볍게 한 말인데. 도움을 못 드려 죄송합니다. 제가 아는 건, 흑마법이라는 것과, '알려진' 성공한 사례는 없다는 것뿐입니다만"
"알려진?"
"흐음- 방금 건 살짝 과장이고. 그 흑마법은 어차피 졸작이니 가능하지도 않겠지만... '젊은 여자'의 몸을 통해 '죽은 자'가 이 세상에 다시 현신하는 사례는 하나 알고 있어서."
류가 웃는다. 류답지 않게 뒤틀린 웃음이다. 방금까지 예의를 차리던 게 거짓말 같은 떠보는 웃음. 의미없는 악의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진짜로 악의가 가득 찬 조소이다.
그리고 류가 웃는 순간 엘킨의 분위기가 일변한다. 언제나 온화하게 잔잔했던 눈빛이 탁하게 가라앉고, 살기를 띤다. 엘킨의 입가에 고요하게 미소가 감돈다. 태풍전야와 같은 그런 미소였다.
"무슨 의미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말씀은 조심하는 편이 좋습니다."
"흐음- 이 이야기를 알아들은 것 같군요. 과연, 엘킨님. 이야기하는 맛이 있습니다."
"..."
엘킨의 푸른 눈이 서늘하게 류를 바라본다. 류는 더이상 조롱할 생각이 없는지 다시 술을 들이켰다.
"..."
사랑스러운 엘킨-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그것은 셀리안 크레이누의 애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