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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또네.'
또다. 또 머리맡에 이 귀신도 아니고, 생령도 아니고, 환상도 아닌 가위가 서 있다.
나는 이 환상이 싫었다.
‘꺼져. 히아신스는 살아 있단 말이야.’
첫날에는 당황했지만 계속 되니 욕도 중얼 거릴 수 있게 되었다. 감히 히아신스에게 꺼지라니.
이 히아신스는 바레이션도 다양했다. 첫날처럼 내 위에 올라타기도 하고 머리맡에 서 있기도 하고 이불 속에서 나를 바라보기도 하고.
무엇보다 ‘이’ 히아신스님은 꼭 추락사건이 일어나기 전날 나타났다. 아니 소식이 알려지기 전날 이니까, 이미 죽었을 수도 있겠다. 죽는 순간인가. 그럼... 내일 또 추락 사건 소식이 있겠다 싶다.
‘7번째 사건이겠네.’
지치지도 않는지, 부지런한 가위다.
‘...’
히아신스의 눈동자는 공허하다. 아름다운 녹음이라고 칭송 받던 생기 있는 눈동자가 멀거니 나를 바라본다.
'생각하고 있어.‘
나는 변명하듯 이야기한다. 생각하고 있어. 이제 무시하지 않아. 방치할 수 없어.
히아신스가 어떻게 하면 살아날지, 생각하고 있어. 생각하고 있으니까.
이런 나지만, 그녀를 살릴 방법을 생각하고 있으니까.
부탁이니까, 이런 히아신스를 내게 보여주지 마.
안타깝게 애원한다. 목소리는 나오지 않는다.
그때 마주친 그녀의 눈동자가 조금 일렁인다고 생각했다.
"!"
히아신스가 고개를 숙인다.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녀가 움직인 건. 나타만 났지 움직이지는 않았건만.
그녀가 고개를 숙이는 순간 피에 젖은 그녀의 머리카락이 뺨을 간지럽힌다.
섬뜩하도록 사랑스럽다고, 그런 이상한 감정을 느끼는 순간, 그녀의 파랗게 질린 입술이 ‘내’게 키스했다.
*
“왜그래? 하영?”
살아 있는 히아신스가 고개를 갸웃한다. 그녀의 입술을 너무 오래 바라보고 있었던 것 같다.
“아, 죄송해요..”
“내 입에 뭐 묻었어?”
그녀의 입술은 핑크빛이다. 도드라진 핑크빛이 지난 번 거리에서 산 입술연지를 바른 것 같다. 꾸미지 않는 그녀가, 눈에 띄진 않지만 입술연지를 바른 건 드문일이다.
“입술 색 예뻐서요.”
“우왓, 몰라.”
히아신스가 내 어깨를 퍽 쳤다. 정말 퍽이다. 이 분은 가끔 자신이 기사라는 걸, 내가 그냥 하녀란 걸 잊는다. 남자 동료 기사 대하듯 나를 대한다.
“~~~”
“으악, 하영! 미안!”
“이런, 우리 히아신스 군은 자기 힘을 너무 몰라.”
“부대장!”
앞에서부터 칼미온의 부대장 키도스 미실렝이 다가온다. 여전히 그의 근육은 무슨 보디빌더 같고, 구릿빛 피부에 머리는 붉은색 스포츠머리, 눈에는 길게 찢어진 상처가 있는데... 이게 참 전반적으로 내 취향이 아니었다. 이런 스타일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지만 나는 아니었다.
“가녀린 하영이 부러뜨릴 일 있어? 민간인을 때리다니 기사 실격이야.”
“...부대장...”
“가뜩이나 뒤숭숭한데 부대에까지 살인 사건이 있어야겠어?”
“그런 농담은 좀 아닌 것 같습니다만.”
“알아, 알아. 답답해서 그러지”
미실랭이 고개를 젓는다. 그는 우리들이 앉은 테이블에 의자를 끌고 와 쓰러지듯 주저앉았다. 지친 듯한 얼굴로 꺼낸 건 그 화제다.
“또야. 또라고. 이번에는 어떤지 알아. 또 머리부터-”
일곱 번째다. 그 꿈을 꾸고 짐작했듯 어김없이 사람이 죽은 것이다.
“부대장.”
“아, 알아. 미안, 하영. 충격 먹은 거 알고 있는데 그만.”
“괜찮아요. 어차피 칼미온에서도 곧 이야기가 돌 테고...”
“그렇지... 크윽... 대체 어떤 미친놈인지...”
“부대장은 타살이라고 결정한 건가요?”
“엥? 그럼 그게 자살이냐?”
“그건 아니지만.”
히아신스가 입술을 깨물며 말끝을 흐린다.
누가 민 건 아니다. ‘마치 자신의 의지로 떨어진 것 같지만’ 자신의 의지로 떨어질리 없다- 고.
확실히 이 사건은 타살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때 이 사건이 어떻게 끝났지.’
히아신스를 마지막으로, 범인은 어떻게 되었더라.
‘...셀리안이 죽였다.’
범인이 히아신스를 죽이고, 동상에서 내려오는 범인을 셀리안이 죽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범인의 얼굴이 생각나지 않는다.
여전히 이상하게 성긴 기억이다.
동상에 가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범인을 알면, 미리 알면 사건을 막고 히아신스도 구할 수 있지 않을까. 단순하기 그지없는 생각이지만, 지금은 그 방법밖에 모르겠다고.
멀거니 나를 보던 ‘그’ 히아신스를 떠올리며 나는 결심을 굳혔다.
*
히아신스와 점심을 먹고 오후 일을 마친 뒤 자유시간을 이용해 시내로 나왔다. 광장까지 주욱 걸어 동상 쪽에 도착하면, 동상은 반경 30m부터 접근할 수가 없다. 얇은 막으로 덮혀 있는 것처럼 사람의 접근을 막고 있었다.
‘마법진인가.’
전생의 지식으로 생각하건대, 자살이든 타살이든 사람의 접근을 막기로 결정했던 것 같기도 하다. 확실히 소용은 있었다. 마법진이 생기고 정말로 한달은 사건이 없었으니까. 다만, 다시 한 달 뒤, 마법진이 있음에도 사람이 추락해 죽기 시작한다.
“이곳을 금하는 쇠사슬이여, ‘나’를 너희의 우리로 들여보내라.”
다가갈 수 있는 최대한 다가가 마법진을 통과할 수 있는 주문을 외웠지만 역시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 내게 지식뿐인 마법을 행사할 능력이 없다는 건 진즉에 깨달았기에 포기하고 주변을 살피기로 했다.
동상에 가까워질 수 없다면 근처에서 기억을 더듬어봐야겠다.
‘오늘로 일곱 번째라고 해서 그런가. 사람이 별로 없네.’
인적이 드문 광장 주변을 어슬렁거릴수록 조금 메슥거린다. 동상은 크기도 커서 광장의 어느 곳에서도 제법 잘 보였다. 어떻게 저 위로 올라가서, 사람을 떨어뜨리는 걸까.
어떻게 ‘그’ 히아신스 에이나를 동상으로 올려보낸 걸까, 그녀를 떨어뜨린 걸까.
동상의 아래에 있던 밤색 머리카락의 부서진 머리통이 순간적으로 스쳐지나간다. 메스껍다. 다른 게 아니라 이곳에 있을수록 선명해지는 건 사건에 대한 기록이 아닌, 첫 살인사건과 겹쳐 떨어지는 히아신스의 잔상이다.
아득한 느낌에 다시 한 번 동상을 바라보았다. 에피룬 크레이누의 동상. 초대 크레이누 왕조의 동상, 이 재수없는 동상에서 사람이 떨어진다. 류는 그 때문에 ‘셀리안’이 기분이 나쁘리라 생각했지만.
천만에. 그때 셀리안은 생각했다.
이 동상에서 계속 사람이 떨어지면, 이 유서깊은 동상을 무너뜨릴 수도 있지 않을까 하고.
‘정말이지 끝까지 이기적인 남자네.’
구역질이 치민다.
“윽...”
산의 사랑을 받거나, 엘킨에 대한 사랑을 느낄 때와는 다른- 혐오감에 바탕이 된 구역질, 그 메스꺼운 느낌에 나도 모르게 비틀거리면, 누군가가 나를 지지한다.
“아, 고맙습니다.”
“왜, 여기 있는 겁니까.”
“...!?”
그 목소리에 나를 잡은 손을 확인하고 정신없이 떨리기 시작하는 마음에 고개를 올리면 엘킨이었다. 혐오에 바탕을 둔 메스꺼움이 금시에 황홀함을 바탕에 둔 메스꺼움으로 바뀐다. 토할 것 같다.
‘어떻게 이런 상황에서도.’
순수한 나에 대한 혐오에 미간을 찌푸리면서도 엘킨으로부터 시선을 떼지 못하는 헛웃음 나는 상황이 또. 지긋지긋한 일이다.
내 표정을 어떻게 해석했는지 엘킨의 말투가 조금 부드러워진다. 그는 부드럽게 달래듯 조언한다.
“여기는 위험합니다.”
“알고 있어요, 돌아가려는 참이었달까...”
“...”
언제부터 날 본 걸까, 어쨌든 그는 내 말을 별로 믿지 않는 것 같다. 다시 엄한 얼굴이다.
“당신은...”
“엘킨, 뭐 하고 있는 거지?”
“!”
멀리서 목소리가 들렸다. 또다른 목소리. 낮게 가라앉는 듯한, 그러면서도 한없이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신뢰하는 단 두명에게만 들려주는 그런 목소리. 그의 뒤로부터 누군가가 걸어오는 게 보였다.
‘설마.’
석양이 지는 에피룬의 동상 주변, 그와 똑같이 생긴 남자가 걸어오고 있다.
“...”
남자는 엘킨 옆으로 걸어온 뒤 그가 붙잡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눈이 마주친다.
황금빛 갈기처럼 흩어지는 적금발은 마치 피에 젖은 것 같다. 진득하게 녹아든 것 같은 붉은 눈동자가 나를 바라보고 있다. 미지근한 봄바람이 불고, 나는 기묘한 감각에 싸여 남자와 시선을 마주하고 있다.
전혀 다른 '두렵고 거대한 것', 절대적인 지배자- 하지만 이런 남자가, 사랑하고 사랑 받길 갈구해 끝도 없이 구애하고 무너져 간다.
"아, 폐하 소개하겠습니다. 이쪽은."
"아아, 누구인지 알고 있어."
나도 알고 있어. 당신이 누구인지.
남자의 앞에서 대부분의 사람은 '자신'이 없어지는 것 같은 감각을 느낄 것이다. 자신보다 훨씬 거대한 존재에 의해 압도당하는 기분으로.
하지만 기묘하게도... 나는 거울을 보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거울을 보고, 그제야 나는 ‘내’가 ‘나’라는 걸 깨달았다.
그것은 남자도 마찬가지이리라고- 문득 생각한다.
============================ 작품 후기 ============================
연참 끝...^^;; 좋아하시면 좋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