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루나 패러독스-34화 (34/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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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불임이라고 이야기 되었던 ‘아실리안 헤르티아'가 아이를 낳았다.

아이가 들어서자마자 예상치 못했던 적통 황자의 탄생에 여러번의 마법 판정이 있었다. 아실리안 헤르티아는 그, 유약한 왕비였다고는 생각지도 못할 만큼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판정을 받았다.

아이는 적통 크레이누 왕가의 핏줄을 이은 것으로 밝혀졌다. 두말할 것 없이 다리안 크레이누의 자식이라고.

‘셀리안 크레이누’가 태어난 날, 온 왕국이 축복했다. 아이는 태어나자마자 근 몇백년간 왕조에서 나오지 않았던 마나를, 그것도 선대 마법왕을 웃도는 마나를 갖고 있었다.

왕가에 마법이 돌아왔다. 백성들은 기뻐하고 귀족들은 안심했으며 일부 귀족들과 타국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나.

소문이 돌기 시작한 건 언제부터였을까.

‘적통 황자 셀리안 크레이누는 [크레이누] 그 자체지만, 결코 [다리스 크레이누의 아들]은 아니다.’

소문의 진원지는 헤르티아 본인이다. 그녀는 아이가, 고대 선왕 ‘에피룬 크레이누’의 현신이라고 이야기했다. 그가 자신을 통해 이 세상에 현현한 거라고 즐거운 듯 하녀들에게 말하곤 했다. ‘마법도 쓰지 못하는 쓸모없는 남자’가 마법왕을 탄생시키는 데 도움을 줬을 리가 없지 않냐고-

사실, 헤르티아는 성정도 유약했지만 정신적으로도 심약한 사람이었다. 본국에서 쓸모없는 공주로 학대와 비슷한 냉대 속에서 살아왔다. 팔리듯 키오스국에 정비로 들어온 것도, 곧바로 치우기 위해서였으니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녀가 지나치게 흥분했고 광증을 보이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의 부군 다리스 크레이누가 에피룬 크레이누의 후손이기 때문에 그녀의 말은 신빙성이 없었다. 그 본인에게는 마력이 없다 해도, 마법사의 혈통이 흐릿해졌던 왕가에서 선조의 피가 강하게 발현된, 일종의 격세 유전으로 ‘셀리안 크레이누’가 태어났다고 생각하면 별로 이상한 일도 아니었으니까. 셀리안 크레이누의 외모가 날이 갈수록 ‘에피룬 크레이누’의 동상과 닮아가는 것도, 그런 이야기로 충분히 설명이 된다.

소문은 오히려 좋게 해석되었다. 다리스와 헤르티아 사이에서 마치 ‘고대 마법왕 에피룬’의 현신 같은 소년왕이 태어났으니 다시 크레이누는, 키오스는 번성할 것이다-라고. 그 정도로 굳어졌다.

‘헤르티아’의 괴이한 이야기에 휘둘리는 건 헤르티아 자신과 다리스 왕, 셀리안 뿐이었다.

*

석양이 지는 에피룬의 동상 주변, 동상과 똑같이 생긴 남자를, 전혀 닮지 않은 내가 거울처럼 바라보고 있다.

수초도 안 되는 순간이었지만, 굉장히 오랫동안 나는 그를 바라본 것 같았다.

순간으로 충분했다. 그 순간만으로도, 나는 지난 29년의 삶 동안 고민했던 전생에 대해,  그가 ‘나’라고 인식했으며 동시에 윤하영과는 완전히 다른 존재라고 어렴풋이 느꼈다.

“...폐...폐하?! 서, 설마...!!”

나는 땅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방금 엘킨이 ‘폐하’라고 불렀던 것에 화들짝 놀란 하녀처럼- 제대로 인사도 못하고 그저 당황해 비굴하게 몸을 굽히는, 귀족들이 생각할 만한 천민처럼 행동한다.

“폐하-”

나의 행동에 엘킨이 셀리안을 부른다. 나를 일으키라는 의도를 담은 목소리였다.

그와 동시에 길게 드리워진 그림자가 바로 내 등으로 기울어졌다. 바닥을 향한 시선으로 그가 한쪽 무릎을 땅에 붙이는 게 보였다.

무슨 생각일까.

“...일어나거라.”

고개를 들면 바로 마주 볼 수 있을 만큼 가까운 거리까지 몸을 낮추고, 다정한 목소리로 허락을 내렸다.

"?"

셀리안 크레이누는 황제가 되자마자 노예제와 흑발흑안에 대한 불합리한 편견을 없애기 위해 노력했으며 고통 받는 국경 지대의 마을들을 돌보았다. 왕조가 마법의 힘을 잃은 뒤 계속해서 오르던 세금 문제도 해결했다. 다리스 때 부득이 유지하는데 그쳤고, 그것만으로도 칭송받던 세금을 과감하게 줄인 것이다. 고귀한 자들은 차마 꺼리던 상업을 번성시키고 국가 사업을 키워 일자리를 만들고 국고를 채웠다. 밑으로는 어둠 속에서 암암리에 성행하던 어두운 돈들을 국가적으로 거둬들였다.

현명하고 유능한 군주였다.

또한 백성들에게는 한없이 부드러웠다. 그들과 눈을 맞추고 귀를 기울였다.

"일어나도 된다."

"..."

그러나 그것은 한없이 인간에게는 먼 절대적인 힘을 가진 왕의, 신의 자비와도 같은 다정함이라고, 오만일 뿐이라고 그를 반대하는 자들은 비난하곤 했다. 천민도 귀족도 셀리안 크레이누가 보기에는 한없이 미물과도 같기에. 그들을 향한 다정함은 애완동물에 대한 인간의 자비와도 같다고.

그 말의 의미를, 완전히 공감하는 것은 아니지만 어느정도 맞다고 생각한다.

셀리안 크레이누와 나를 같은 선상에 올려놓는 건 매우 혐오스러운 일이었지만. 그와 나는 닮았다. 나는 타인과 얽히는 것에 관심이 없었다. 이기적이고, 무심하다고 해도 좋았다.

다만, 나는 평범한 여자에 마음도 몸도 원하는 만큼 강하지 못했다. 언제나 타인을 거부하는 주제에 수지나 히아신스 같은 사람에 끌리기도 했으며 때로는 누군가의 악의에 휘말려 감정이 흔들리기도 했다. 인간이니까 그럴 수밖에 없다.

셀리안도 인간이다. 그도 흔들린다. 문제는 그에게 다가올 수 있는 사람이 별로 없다는 것이다. 그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그는 보통 사람이 생각하기엔 너무도 대단해서- 그의 무관심이나 이기심을 부수고 그에게 들어올 수 있는 강한 사람은 세상에 많지 않았다.

그러니까, 그가 진정으로 다정할 수 있는 사람은 엘킨과 히아신스 뿐이었다. 그 외의 모든 사람은 자신이 다스려야 할 백성과 백성이 아닌 사람 둘 뿐이었다. 백성이 아닌 자는 밟는다. 밟아 군림한다.

그게 성군 ‘셀리안 크레이누’다.

하지만, 지금의 목소리는 조금 다르다. ‘연기’하고 있다.

“‘윤하영’- 이번에 칼미온에 들어온 아이구나.”

“제 이름을...가, 감사합니다.”

믿기지 않는 이야기지만, 나 같은 천민에게 그는 다정함을 연기 하고 있었다. 내려다보며 '그에 걸맞게' 상냥하게 대해야 당연한 존재에게 굳이 다정함을 연기하고 있다.

여기서 그것을 부자연스럽다고, 연기라고 느끼는 건 내가 '셀리안 크레이누'란 남자를 알기 때문이다.

머뭇머뭇 일어나 의아함에 그의 발끝만 바라보면, 다시 다정한 목소리가 떨어진다.

“만나는 건 처음이구나. 고개를 들어보거라.”

“...”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어, 그의 붉은 눈동자를 마주한다. 마주하고 다시 내린다. 허락하긴 했지만 왕과 오랫동안 눈을 마주하는 건 옳지 못하다.

“미숙하구나.”

“?”

“그렇지만... 그래. 재미있구나.”

“폐하?”

이상하다. 엘킨도 기묘한 위화감을 느꼈는지 되묻는다. 셀리안이 가볍게 웃었다.

“히아가 말한 대로 재미있는 아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그래.”

“아아.”

엘킨은 이해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인다. 정말로 '셀리안'과 같은 의미로 이해했는지는 모르지만, 그가 의도한 대로 이해한 건 맞는 것 같다.

히아신스가 뭐라고 말했다는 걸까.

“그렇습니다. 솔직하고 맑은 사람입니다.”

“?!”

이번에는 얼굴을 갈무리하지 못했다. 고개를 들어 엘킨을 바라본다. 바라보고 얼굴이 새빨갛게 변한다. 엘킨이 조금 웃는다. 셀리안도 다시 웃었다.

“엘킨의 평가도 후하군. 흐음... 히아가 부탁한 것도 있으니.”

셀리안이 엘킨을 보고 있는 나에게 눈을 맞춘다. 뭘 생각하는지 알 수 없는 피 같이 붉은 눈동자가 진득하게 나를 옭아맸다.

“금번 휴일에 히아신스가 너를 만나줬음 하더구나.”

“!”

“히아신스에게 좋다고 이야기해둘테니, 히아신스와 나를 만나러 오거라.”

말도 안 돼-

"아- 여, 영광입니다."

거절할 수 없었다.

감히 어찌 제가, 라는 말도 그에게는 무리다. 지금 황제가 만나러 오라고 명령한 것이다.

“엘킨도 시간이 있다면 오도록 해, 셋이 함께 자리를 갖는 건 오랜만일 것 같으니까.”

“그렇군요. 그렇게 하겠습니다.”

*

마법진이 있었기 때문일까, 일곱 번째 추락사건 이후 3일째 아무 일도 없다. 연달아 일어났던 추락사건은 뚝 그쳤다.

‘그’ 히아신스도 내 앞에 나타나지 않고 있다. 그러나 한 달 후면, 다시 시작될 것을 알고 있다. 나는 때때로 동상 근처를 배회하기도 하고, 기억을 더듬으며 ‘범인’을 생각해내려고 노력했다.

노력했지만 별로 성과가 없었다.

‘범인’은 누구였지.

'처음에 ... 범인...이라고 지목되었던 남자. 어렴풋이 기억은 나. 하지만 그 남자는 히아신스를 죽이지 않았어.'

내가 찾아야 하는 건, 얼굴을 아는 그 범인인가, 아니면 기억나지 않는 다른 범인인가.

누가 진짜인가, 왜 이런 일을 벌인 거지. 히아신스는 왜 죽은 거지- 같은.

그렇게 시간은 흘러 어느새 셀리안 크레이누가 이야기했던 휴일이 다가왔다.

*

히아신스와 엘킨도 함께 자리를 갖기로 했지만, 각자의 일 때문에 부득이 각자 황제의 궁정 정원에서 만나기로 했다.

히아신스 에이나와 엘킨 다이브, 셀리안 크레이누. 그리고 윤하영.

이게 무슨 미친 조합이란 말인가. 남이 안다면 기함을 할만한 만남이다.

나는 히아신스에게 받은 정원으로 가는 약도를 꾸깃 접으며 기억 속의 정원으로 더듬더듬 걸어갔다.

궁정정원은 셀리안이 제법 좋아하는 장소였다. 그곳에서 그는 주로 휴식을 취했다.

궁정정원은 왕궁 동쪽 복도, 가장 먼저 해가 뜨는 걸 볼 수 있는 장소였다. 셀리안은 그곳에서 정무를 보기도 하고 휴식을 취하기도 했다.

그곳에서 히아신스나 엘킨과도 꽤 자주 만났다.

처음에는 호위기사인 히아신스와- 엘킨을 칼미온에 데려왔을 때는 셋이서. 히아신스가 죽은 다음에는 다시 엘킨과.

그렇지만 대부분은 혼자서.

아름다운 정원이었다.

갖은 꽃과 나무, 커다란 인공호수와 작은 오르골 같은 분수- 황제가 아끼는 만큼 정원사들이 신경써서 가꾸는 것도 있었지만 그가 남아도는 마력으로 언제나 활기를 불어넣었다.

나무도, 꽃도, 호수도, 마치 노래를 부르는 것처럼 마나가 넘쳐 흘러 반짝이는 정원. 보통 사람들도 그 신비롭게 살아있는 정원에 감동했지만 마법사들은 그야말로 기절을 했다. 그곳은 마치 하나의 살아있는 마법공간 같았다.

"아-"

정원으로 들어서자, 기묘한 공기가 나를 따뜻하게 감싼다.

그의 마나가 넘쳐흘러 감싼 신비로운 공간. 나는 마나가 뭔지, 내게 그런 게 있기나 한지 아직도 모르겠지만- 이곳을 셀리안이 가끔 커다란 자신 안에 있는 것처럼 안락하게 느낀 건 이해가 간다.

‘괴짜야, 쟤도.’

푸른색과 보라색이 섞인 비현실적인 장미로 꾸며진 아치 밑을 지나 정원 중앙의 정자로 다가간다. 그곳에는 의자에 기대 눈을 감고 있는 셀리안 크레이누가 있다.

‘눈을 감고 있으면 어떻게 하는 거지.’

자고 있을지도 모르는데 하녀가 자기가 왔다고 깨우는 것도 미묘하다. 나는 10걸음 정도 떨어진 거리에서 셀리안 크레이누를 바라보았다.

오늘은 어깨까지 오는 적금발을 푸른 끈으로 하나로 묶고 있다. 마법사라기보다는 로마 장군같이 생겼다.

‘저게 나란 말이지.’

이상하다. ‘나’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다. 생전 처음 보는 남자 같기도 하고 가장 가까운 누군가 같기도 하고.

“얼굴 뚫어지겠군.”

“...”

역시.

그가 젖혀 있던 고개를 바로 하며, 꼬고 있던 다리를 풀어 고쳐 앉은 뒤 손으로 자신의 턱을 받친다. 붉은 눈동자가 나를 바라본다. 다정한 눈동자다.

‘왜 나에게 연기를 하는 걸까.’

셀리안은 백성에게 연기를 하지 않는다. 군림하고 지배하는 건 그에게는 숨쉬는 것처럼 당연한 것이었다. 다정하게 어루만지듯 백성을 보는 것도 쉬운 일이다. 하지만 나에겐.

일단 나는 무릎을 굽히고 예를 표했다.

“폐, 폐하께서 주무시고 있어서 감히 어떻게 할 줄 몰라. 소녀가 아는 게 없어 그만... 죄, 죄송합니다. 아! 다시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흐음. 일단 고개를 올려볼까?”

“아...네, 네!”

얼른 고개를 올려 다시 그를 봤다. 그와 눈을 마주하고, 다시 살짝 시선을 빗겨서.

“봐도 된다.”

“에?”

“미숙한 주제에 하나하나 연기하는 것도 일이구나.”

셀리안이 눈가를 곱게 접는다. 진짜 당황해 눈을 둥그렇게 뜬 나를 보며 그가 쿡쿡 웃는다.

"내게 재미있는 하녀가 생겼구나."

연기 같던 다정함이 사라지고, 그는 백성을 대하는 것도, 히아신스와 엘킨을 대하는 것도 아닌 다정함으로 장난스럽게 미소지었다.

============================ 작품 후기 ============================

연참이란 걸 해보고 싶었다기보다는, 제가 지난번에 주말까지 셀리안이 나올 거라고 했잖아요. 그래서 해봤어요. 하루 한 화로는 셀리안이 안 나와서. 폭풍 수정하고 폭풍 올려봤습니다ㅜㅜ 사랑해요?

뱅구리님은 저를 왜이렇게 예뻐하세요? 이렇게 후원쿠폰 주면 제가 몸둘바를 모르겠잖아요. 아휴, 사랑합니다.

에이리엘님 // 셀리안을 왜 싫어하세요.ㅜㅜ 앞으로 많이 나올 예정이니 많이 사랑해주세요 ㅎㅎ 오늘 월요일이에요. 월요일입니다. 학생도, 직장인도 모두가 힘들어하는 월요일.ㅡ_ㅜ; 힘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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