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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추락사건의 첫번째 범인이 잡힌 날 일어났다.
범인이 잡혔다, 아니 자백했다. 그리고, 그날 엘킨은 셀리안에게 이별을 고했다.
추락사건으로 계속해서 사람이 죽는다. 엄밀히 말해 칼미온 기사단은 경찰은 아니고, 기사단 단장인 엘킨에게 책임은 없다.
문제는 범인이 엘킨 다이브가 변경 지역에서 구해낸 이민족 청년이라는데 있었다. 구출 당시 그는 변경 지역에서 노예로 부려지며 가혹한 학대를 당하고 있었고 얼굴에는 낙인이 찍혀 있는 등 꽤 심한 상태였다고 한다.
구출 뒤에는 치료를 받고 수도에서 일자리를 얻어 성실하게 일했고, 자주 엘킨에게 들러 감사를 전했다.
그랬던 그가 첫 사건이 일어나고 4개월 정도 지났을 무렵 자백했다. 자신이 범인이라고. 머릿속에서 누군가가 하라고 시켜서 그런 일을 했다고.
처음에는 여자들이 싫었던 것뿐이었다고 했다. 얼굴의 낙인 따위 제 잘못도 아닌데 무시하고 수군거리는 여자들. 그런 건방진 여자들에게 천벌을 내릴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겠다고 누군가가 속삭여온 게 6개월 전,
횡설수설 자백한 내용은 황당하기 그지없었지만 헛소리라고 치부하기에는 증거가 너무 많았다. 범행에 대한 남자의 이야기는 세세했고, 그의 집에서는 마법진을 뚫은 마법도구와 동상 위로 올라갈 수 있는 부유 마법의 스크롤 등이 발견 되었다.
범인이 잡히자 가장 먼저 엘킨을 공격한 건 레시온 공작이었다.
[정신도 온전치 않은 자를, 그것도 키오스의 백성도 아닌 이민족 나부랭이를 이 나라에 끌어들인 것부터가 타국의 병마를 제국에 가져온 것과 진배없지 않소.]
약혼자 문제로 엘킨을 내쫓았던 공작은, 키오스의 대장군으로 발탁 된 후 칼미온의 수장 자리에는 자신의 동생을 앉혔다. 그 동생은 우수한 무인이었지만 공작과 달리 거만하고 탐욕스러운 남자였다. 레시온이 편벽된 면이 있긴 하나 대쪽 같았던 반면 그의 동생은 영 아니었던 것이다. 칼미온의 구성원들은 그를 좋아하지 않았고 오히려 미실랭을 따랐다.
그가 탄핵된 결정적인 계기는 엘킨과 셀리안이 처음 만났던 용병들의 마을 습격 사건이었다. 그 쪽 영주의 비리가 밝혀질 때 관련자였던 레시온의 동생도 문제가 되었다. 이 일련의 탄핵과정은 레시온도 수긍한 일이었지만, 그후 칼미온의 수장이 된 엘킨과는 앙금이 깊어져 버렸다.
추락사건의 범인이 엘킨이 구한 남자라는 것은, 레시온 공작에게는 좋은 구실이 되었다.
그러나 엘킨은-
허무할 정도로 쉽게 칼미온을 떠나기로 했다. 책임을 지고 변경의 전쟁터로 가겠다는 엘킨에게 히아신스와 다른 기사들은 몇번이나 설득했다.
셀리안 역시 이야기했다.
[칼미온의 수장은 그만 둬도 좋겠지. 그래, 원한다면 근신을 명하마. 내 곁에서 내 호위기사가 되어도 되겠지. 꼭 변경일 필요가 있을까. 엘킨-, 내 말을 듣고 있느냐, 엘킨- 꼭 변경으로 가야겠느냐.]
언제나와 별반 다르지 않은, 여유로운 얼굴로 여유롭지 않은 애원을 하는 셀리안 크레이누.
엘킨은 그런 자신의 황제에 드물게 완강했다.
아마 엘킨은 직감적으로, 셀리안이 점점 그에게 집착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성군이었던 그가, 행동이 변하진 않았지만 묘하게 방향성이 달라져 있다는 걸. 가는 길은 같지만 흔들리고 있다는 걸..
[폐하, 아니 리안- 나는 어디에 있어도, ‘셀리안 크레이누’가 ‘셀리안 크레이누’로서 만족할 수 있는, 진정한 행복을 바랄 것입니다.]
지독하게 사랑스러운 거절의 말-
셀리안은 문득 이민족 남자가 진짜 범인이어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세계는 그의 편이었다.
“왜 그러는 거지?”
“?!”
꿈에서 깨어난 것처럼 나는 셀리안을 보았다. 젊은 왕의 눈동자에는 그따위 더러운 생각은 한 점도 없었다. 그는 사랑에 빠지지 않았다. 사랑에 빠져, 그 사람의 존재만으로 황홀한 적도 지독한 좌절감에 무너진 적도 없다. 지독한 사랑따위 모른다.
방금 떠올렸던 일련의 과정은 모두 미래의 일이다. 윤하영만이 알고 있는 미래의 일.
‘미래…’
그래, 미래였다. 지금의 그는 아카인 영애의 집착어린 사랑을 동정하지만 이해하지 못했고 자신도 그 자리까지 떨어질 걸 알지 못한다.
나는 그제야 그가 내가 아는 ‘셀리안 크레이누’와 다른 이유를 깨달았다.
36
하늘은 새파랗고 햇빛은 따사롭게 왕의 정원을 감쌌다. 완벽할 정도로 아름다워, 다른 살아있는 모든 것의 출입을 금할 것 같은 정원이었지만 그런 상상이 무색할 정도로 새들이 모여들어 낮을 즐기며 지저귄다. 셀리안은 높이 뜬 해를 한 번 보고, 시간을 가늠하는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만 더 이야기하다가는 히아신스와 엘킨을 기다리게 하고 말겠다며 농담조로 웃었다.
“아마 짐작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아카인 영애, 정확히 말하자면 아카인과 노예상은 깊은 연관이 있어.”
“…”
“나는 그 꼬리를 잡고 싶다.”
셀리안은 결벽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어, 왕권을 강화하고 싶어한다- 그런 여러가지, 내가 노예마차나 관련 사건들과 마주칠 때마다 떠올렸던 셀리안에 대해 다시 반추한다.
실제 그것은 사실이었다. 그것’도’ 사실이었다.
“순수한 의도 때문은 아니야. 아니지만, 순수한 의도가 없는 것도 아니야.”
그는 지나치게 솔직하게 나에게 이야기하고 있다. 순수한 의도가 있다면 그것만 이야기하면 된다. 마치 내가 그의 의중에 ‘순수한 의도’란 하나도 없는 것처럼 나를 세뇌시켰듯.
셀리안과 눈을 마주한다. 계속 보고, 계속 찾고 있었건만, 난 새삼스레 그 시선에 놀라고 만다. 그의 시선은 엘킨과 제법 닮아 있었다. 올곧고 청명하게..
“네가, 처음부터 ‘억울하다’고 이야기했다면, 나는 억울함을 풀어주고 너를 지켜줄 생각이었다.”
“정말로?”
그의 시선에도, 이야기에도 놀라 나는 눈을 크게 떴다. 그러자 그가 조금 웃는다.
“너는, 생각이 너무 많군. 아니. 대체 짐을 어떻게 생각하는 건가.”
장난스럽게 웃으며, 내려놨던 기록을 손가락으로 훑으며 팔락거렸다.
“물론, 내 나름대로 내 목적을 이루긴 했겠지. 아마도. 아카인 영애와 너의 관계- 산이 너를 사랑하고, 영애가 산을 사랑하는 그 기묘한 연쇄와 파생된 영애의 치부… 그런 것들을 이용했을 거다.”
“그런 건…당연한 일이에요.”
“당연하다고?”
당연한 일이다. 그는 왕이다. 동정으로만 일을 처리할 수는 없고 올바른 것만 할 수도 없다. 나라도, 노예제를 폐지하고 하루드를 잡고 싶어하는 왕이라면 ‘윤하영’이라는 아카인 영애의 치부를, 약점을 그냥 두지 않는다.
그는 나를 빤히 보더니 눈가를 찡그렸다.
“불쌍하고 억울한 아가씨-라고, 이런 조작된 기록에 상관없이 보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나도 너무 기록에 의존한 것 같군.”
그의 손에 불꽃이 일었다. 그리고 그 불꽃은 책상 위의 기록을 태워버린다. 그런 행동은 장난이다. 순간적으로 위로하는 것도 아니고, 아무 의미가 없다. 없는데도.
”나는 이 나라의 왕이지, 가장 지독한 악당이지만, 내가 지켜야 할 게 무엇인지는 알고 있지.”
“지켜야 할 것이라고요?”
셀리안 크레이누가 지키고 싶은 것도 부수고 싶은 것도 엘킨뿐이다. 뿐일 것이다. 그래, 미래에.
“일단, 백성이겠지.”
“...저는 당신의 백성이 아닙니다...”
“네가 그 노예마차에서 구원 받았을 때부터 나의 백성이지.”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내가 앉은 자리로 걸어왔다.
“윤하영, 나는 너를 이용했다. 그리고 앞으로도 너를 이용하고 싶다.”
“...”
“네가 ‘아무것도 모르는’ 아가씨였다면, 이용은 하되, 가능하면 너를 지키고 네게 보답을 할 생각이었어.”
이 아름다운 정원의 봄바람은 광장과 다르게 청량한 느낌이 든다. 새가 모여드는 이유도 그런 이유다. 셀리안이 만든 수도를 감싼 숲도 그랬다. 갖은 생물들이 모여든다. 신급의 마나를 부여받은 규격외의 왕은 세계에 사랑받고, 세계를 사랑했다.
피 같다고 생각했던 그의 눈동자가 따스한 태양빛 같이 상냥하게 나를 보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다정한 눈이라고 느끼면서도 줄곧 피빛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전생 속에서 몇 번이고 본 셀리안 크레이누는 그런 눈이었으니까.
“하지만, 너는 너무 많이 생각하고, 받아들일 필요가 없는 것까지 이해하려고 하고... 지쳐있군 ”
그때문인지는 모르지만- 이라고 가볍게 말하며 그는 무릎을 꿇었다.
“그런 너에게 이런 부탁을 하는 건 뻔뻔하겠지만- 나는 아카인 뒤의 세력을 제압하고 싶어. 그래서 산이 사랑하는 너를 이용해 그녀를 궁지에 몰고 싶다.”
“...”
“도와다오. 도와준다면, 나는 너를 지키고, 네 바람대로 너를 살리겠다. 그리고 미래에, 네게 더 바라는 게 생긴다면 네 소원을 하나 들어주지.”
셀리안 크레이누는, 12살부터 소년왕이라 불렸으며 15살 무렵부터 정치적인 부분도 하나하나 맡게 되었다. 황제가 된 건 성인식이 있던 18살이다. 다리스 크레이누가 그에게 왕위를 넘겼다.
그 시기 다리스는 거의 모든 자신감을 잃어버렸다.
동결시킨 것만으로도 엄청났던 세금을 줄일 방법을 생각해낸다.
간신히 막았던 국경 지역의 이민족을 진정시키는데 그치지 않고 오히려 잃었던 땅을 모두 찾는다.
마법왕, 소년왕- 왕이 살아 있는데도 이미 그는 사람들에게 왕이었다.
젊은 셀리안 크레이누는 생각했다.
아버지를 혐오하며, 자신을 숭배하는 주제에 진정한 자신을 부정하는 어머니도.
자신들의 입맛대로 어린 소년을 왕으로 떠받들며 나름대로 훌륭한 왕이었던 한 명의 왕을 짓밟은 세상도.
양보하는 척 도피하는 아버지도.
그런, 타인을 함부로 대하는 사람은 되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아카인과 손 잡고 있는 세력은 이 세상의 어둠이다. 더러운 세력이고 필요한 세력이지만. 필요한 더러운 일만 하지 않는다는 게 문제지- 너무 많은 게 뒤섞여 있어.”
“...”
“뒤틀려 있다. 필요악은 언제든 존재하기 마련이지만, 너무 뒤틀려 있어. 나는 그것을 근절해가고 싶다.”
그는 결벽했다. 결벽했고, 오만했다. 통제하고 싶고 마음대로 하고 싶어했다. 좋은 사람은 아니었다. 그는 ‘나’와 닮았으니까, 실제로는 관대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히아신스를 선택했다. 올곧게 타인을 대하고 악의에 악의가 아닌 마음의 강함으로 대응하는 그녀를
엘킨 다이브를 사랑했다. 부조리한 현실 속에서도 고결하고 청명하게 사람들을 구하는, 세상에 실망하지 않는 그 남자를.
그런 세계를, 그런 사람을 누구보다 동경했다.
“어떤가. 나를 도와주겠어?”
왕이다. 지킬 게 너무 많다. 상처 입힐 것도 너무 많다.
원하던 자리는 아니었다. 원하는 모습도 아니다. 그래도 최선을 다해 그 자리에서- 가능하면 폼을 잡으며 올곧게 나아가고 싶다고. 자신은 그런 사람이 아니지만, 왕이니까.
그런 생각을 했던 시절이, 그에게 있었다.
젊은 시절의 셀리안 크레이누는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 동상 주변으로 친히 마법진을 치러 나간 것이다. 직접 치러 나갔다. 이 기회에 동상을 부수고 싶다는 이기적인 생각과 동시에 그것을 억누르고 마법진을 쳤다. 더 이상 희생이 나오지 않도록.
“윤하영-”
그가 다시 한 번 내 이름을 부른다. 나는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치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릇도 안 되는 주제에, 지나치게 큰 힘을 갖고 가장 높은 자리에서, 맞지도 않는 것을 동경하며 그렇게 되기 위해 노력하는 젊은 왕이, 마지막의 셀리안 크레이누가 잃어버렸던 ‘셀리안 크레이누’가 내 앞에 있었으니까.
*
긴 이야기는 끝이 났다.
나는 셀리안 크레이누의 제안을 받아들였고 그는 미안한듯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둘이 이야기를 끝내야 할 것 같아서 말이야. 약속장소와 시간을 좀 바꿨지."
"괜찮습니다. 폐하."
"흐음...어쨌든, 정원에서도 멀지 않으니까, 곧이야."
우리는 지금 진짜 약속 장소로 가고 있었다. 붉은 융단을 따라 걸으며 티룸으로 향한다. 셀리안이 앞서 걷고 나는 세 걸음 떨어져 뒤따랐다. 다행인 건, 히아신스와 달리 그가 굳이 나를 옆에 세우지 않는다는 것이다. 조금 미적지근한 얼굴을 하고 내 행동을 보긴 했지만, 연기든 처세든 내 상황을 이해해준 것 같다.
가끔 그는 고개를 돌려 말을 걸어주었다. 덕분에 가는 내내 그의 등을 봤지만, 때때로 눈을 마주했다.
'토할 것 같아.'
그의 눈을 볼 때마다, 아니 점점 매 순간순간이 견디기 힘들어지는 것과는 별개로 참 자애로운 왕의 태도다.
폭풍처럼 조우한 추락사건이나 셀리안과의 만남이 한꺼번에 피로로 몰려오는지도 모른다.
머리가 아프다.
메스껍다.
술에 취한 것처럼. 나는, 빛나는 그를 따라 히아신스와 엘킨이 있는 곳으로 걸어간다.
"저 푸른 문이다, 약속시간에는- 안 늦은 것 같네."
"..."
문 앞에 당도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하인 한명이 문을 열고, 나는 셀리안과 한 걸음 정도 떨어진 거리에서 문이 열리는 걸 멍하니 바라보았다.
"하영! 어라?"
과거의 빛나는 시절이 그곳에 펼쳐진다-
엘킨과 히아신스. 그리고, 태양과 같은 눈동자를 한 셀리안 크레이누.
'피곤해.'
눈을 떴다 감으면 내 방 침대 위면 좋겠다고. 이제는 희미해진 원래 세계의 침대를 떠올릴 정도로 몸이 무겁다.
“하영과 리안...아니, 폐하가 같이 올 줄은 몰랐어요.”
“질투하는 건가. 그럼 기분은 좋은데.”
히아신스가 놀라며 다가오자, 셀리안이 씨익 웃으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히아신스가 얼굴을 굳힌다. 얼굴을 굳히긴 했지만 쑥스러워 하는 거다. 나도 알고, 셀리안도 아는 버릇. 실제 셀리안은 그런 그녀가 귀엽다는 얼굴을 했다.
"..."
마치 내 안의 '셀리안 크레이누'가 빛나는 과거로 나를 몰아넣는, 그런 기분이었다.
“폐하는 장난만 치고! ... 하영? 무슨 일 있어?”
“아니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나는 물끄러미 그런 둘을 바라본 뒤 고개를 저었다.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저-
나는 셀리안 크레이누를 다시 한 번 바라보았다.
"맛있는 냄새가 나네요, 히아신스님 취향의 간식이 준비된 것 같아요."
끔찍한 감각에 치를 떨며 나는 입가를 끌어올려 간신히 미소지었다.
============================ 작품 후기 ============================
내가 왜 1화를 0화로 했을까... 가끔 소제목을 까먹습니다. 데로록...
ㄱㄸ라는 과자가 있는데, 꽤 전부터 나왔으나 나름 신제품인 캬라멜맛이 왜이렇게 맛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디폴트 초코랑 화이트보다 캬라멜이 제 입맛에는 300배 취향임여.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