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루나 패러독스-41화 (41/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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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상 근처다.

석양이 지고 있다, 셀리안과 닮은 에피룬의 동상에 붉은 석양까지 보고 있자니, 무슨 악질적인 농담인가 싶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어제도 그렇고 최근 본의 아니게 일을 빠지는 시간이 많았다. 더 부지런히 일을 하고, 점심시간이나 저녁시간이 되서야 다른 일을 하는 게 맞다는 생각을 한 게 점심시간 무렵. 히아신스를 구하기로 했지만, 그것에만 오로지 몰입할 수는 없다.

없다고- 사실 그것은 핑계였고, 내가 그녀의 사건을 잊을 수 있는 일종의 도피였다.

그녀를 구하기로 마음 먹긴 했지만 한 켠에서는 여전히 내가 왜 그래야 하는지 알 수 없다는 생각이 남아 있다. 셀리안 본인에게 말할 수도 없겠지만, 말해봤자 지금의 그는 그녀를 구하겠다고 하겠지. 결국 모든 죄책감과 책임은 내 몫이고, 그것은 내가 원하는 바는 아니었다. 간사한 생각이지만 어쩔 수 없다. 윤하영은 그런 인간이었다.

황제로서 모든 걸 감수하겠다는 젊은 셀리안 크레이누처럼 이상을 꿈꾸지 못한다.

히아신스 자체를 구한다는 마음으로 가보자면 윤하영은 그녀를 좋아하는 것 같다. 좋아하지만 그녀가 날 좋아하는 이유도, 내가 그녀를 좋아하는 이유, 그마저도 결론이 나지 않았다.

어중간한 일이다.

‘여전히 마법진이 펼쳐져 있어.’

이것저것 머리를 굴리며 동상 앞으로 다가갔지만 한계가 있었다. 에피룬 크레이누의 동상에 펼쳐진 셀리안의 마법진 때문이다. 다가갈 수 있는 곳까지 다가가 에피룬의 동상을 재차 바라보았다.

셀리안은 이 동상이 싫었다. 자랄 수록 점점 자신과 닮아가는 게 싫었고, 이 얼굴을 보고 황홀하다는 듯 숭배하는 어머니의 눈도, 때때로 사랑스럽다는 듯이 바라보는 다른 사람 같은 그 눈도 전부 싫었다.

히아신스가 죽었다- 그게, 아무 영향을 끼치지 않은 건 아니다. 그는 의식하지 못했지만 이 동상을 부술 때의 감정은 죄책감에 가까웠다. 통쾌할 거라고 생각했던 순간이 괴롭게 다가온 순간부터 이미 어긋나 있던 거다. 자신의 죄를 숨기듯 허겁지겁 동상을 부수고 범인이 두 명이나 있었던, 이 수상한 사건을 접어버렸다.

직감적으로 더 이상 아무 일도 없을 거라고 생각했고, 다행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 그는 더는 생각하지 않아도 되었다.

세상은 그의 편이었고, 그에게 다정했다. 그를 정신 차리게 하지 않았다.

‘잘은 모르겠지만.’

마나라는 건 그렇다고 한다. 셀리안 정도의 마나를 가지면 세계의 흐름이 그의 의지에 따라 흐른다. 아는 사람은 거의 없지만 마나란 그랬다. 그것도 셀리안 급으로 마나를 가져야 가능한 이야기이기에 꿈같은 이야기였지만.

엘킨이 그토록 강인한 정신을 가지고, 조금도 변하지 않았던 것도, 이제 와서는 마치 세상이 셀리안의 어리광을 받아준 것처럼 느껴진다. 덕분에 셀리안은 제가 하고 싶은 대로 마음껏 엘킨에게 사랑을 퍼부었다.

그것은 이미 축복이 아니라, 저주처럼.

‘이상한 생각이네.’

너무 과하게 생각한 탓에 허무한 기분이 든 나는 동상을 빙글빙글 돈다. 추락사건을 해결해야 했다- ‘어떻게, 왜‘에 대한 답은 냉정하게 생각해서 거의 없다시피 했지만 일단 범인보다는 히아신스를 죽인 ‘남자’를 기억해내야 했다.

‘진범인까지는 됐어, 히아신스만 살리면 나는... 그리고 두 번째 남자가 진범일 수도 있잖아.’

결정적으로 히아신스가 죽지 않으면 동상은 5개월이상 서있을 거고, 두 번째 남자가 진범이 아니라면 사건도 계속 될 것이다. 하지만 이왕이면 히아신스가 죽지 않고 첫 번째 범인만 잡힌 상태에서 엘킨이 떠나주면 좋을 것이다.

뒤죽박죽에 이상한 생각, 한 술 더 떠 엘킨이 떠나는 생각까지 하자 가슴이 꽉 조이듯 아파온다.

‘어차피 나도 떠날 거고.’

마법진은 동상으로부터 반경 50m 정도로 펼쳐져 있다. 넓게도 경계를 쳐놨다. 성가시다. 첫 번째 범인이 마법진을 부순 마법도구를 떠올리긴 했는데 내가 살 수 있는 가격이 아니었다.

아마 첫 번째 범인도 자신의 돈으로는 살 수 없다. 역시 진범은 따로 있다. 진범이 두 번째 남자라면 더없이 좋을 것이다.

*

소득없이 돌아온지 이틀째, 뭔가 하는 건 없고 생각하기도 귀찮아 일단 동상만 바라보고 있는 한심함을 깨달을 무렵이었다. 점심으로 나온 빵을 씹으며 검을 닦고 있다. 깨끗한 검날에 내 얼굴이 비친다.

‘오늘도 일단 동상에 가볼까.’

소용없다, 시간 떼우기에 불과하다, 근원 없는 죄책감을 달래는 위안- 나중에 이곳을 떠나 히아신스가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나는 열심히 했어’ 정도의 변명거리.

검날에 비친 검은 눈동자가 말끄러미 나를 바라본다. 그녀는 ‘너 한심해’라고 이야기하듯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아, 어쩌지.”

이제 다음 사건까지의 유예기간은 1달이 못 된다, 곧 범인은 셀리안의 마법진을 뚫고 다시 이런 일을 벌이기 시작할 것이다.

그것까지는 좋다. 그 남자는 히아신스를 죽이지 않으니까, 다만 아카인 영애가 오는 건 일주일도 남지 않았다. 영애가 온 뒤로는 마음대로 돌아다니는데 한계가 있을 것이다. 셀리안이 조언하길 그녀는 내가 수도 어디에서 구체적으로 뭘 하는지는 확인하지 못했다고 한다. 손을 쓴 건 셀리안. 하지만, 그녀가 실제 오면 나는 그녀에게 모습을 보여야 할 테고, 그 후에는 혼자 돌아다니는 건 삼가야 할 것이라고.

[암살 당할지도 모르니까.]

셀리안은 농담같은 이야기를 진지하게 이야기했다.

‘암살이라니.’

가볍게 한숨을 쉰 나는 마지막 검을 제자리에 돌려놓고 남은 빵을 꿀꺽 삼키며 일어났다.

‘차라리... 첫 번째 범인한테 가볼까.’

시간도 걸리고, 개인적으로 나도 여자다. ‘자신을 우습게 보는 여자들이 싫었다’라고 밝힌 그런 남자에게 접근하는데 저항감도 있었지만. 당장 히아신스를 죽인 남자를 찾는 것보다, 아는 사실부터 차근차근 접근하는 게 왕도일 것이다.

‘엘킨의 지인이라는 그 남자-’

그 남자를 찾아가보자고 생각하며 자리로부터 일어나면 검의 창고 문앞에 거짓말처럼 엘킨이 서 있었다. 열린 문으로 비스듬히 서서 나를 보고 있다.

“!”

지난 번 공주님 안기 이후 직접적으로 눈을 마주 하는 건 처음이다. 가슴이 쿵쾅쿵쾅 뛰어서 나도 모르게 비틀거린다. 또 엉덩방아를 찧을 것 같으면 어느새 엘킨이 다가와 내 팔을 잡는다.

“흐헉...”

“여기 바닥은 돌바닥입니다. 제법 아파요.”

“가, 감사...감사합니다.”

왜 여기 있는 거야, 언제부터... 푸른 눈동자, 푸른 머리카락, 햇빛 속의 엘킨 다이브- 평상시라면 적당히 시선을 피해줄 텐데! 그는 계속 나와 눈을 마주하고 있다.

‘팔도 그대로 잡고 있어...’

시선을 피해주는 건, 이제는 거부라기보다는 배려였다. 그와 마주하고 있으면 내가 생각해도 안쓰러울 정도로 부들거리는 날 배려해서 시선을 피해주곤 했었는데. 오늘은 유난히 길게 나를 보고 있다.

“흐...”

또 이상한 소리, 쿵쾅거리는 가슴, 메스꺼움 그런 것들 때문에 다시 몸살이 난 것처럼 어지럽다.

“점심을 먹으면서 일을 하는 건가요?”

다행히 그는 내 손을 놓고 시선을 빗겨준다. 숨이 돌아온다. 엘킨은 내 입가에 묻은 빵부스러기를 떼어내며 불편한 듯 묻는다. 나는 가볍게 한숨을 쉬고 바보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게 너무 쉬는 날이 많았잖아요... 그, 동상에서라든가, 어제라든가...”

“그래도 점심 정도는 편히 먹을 수 있을텐데요. 어디 급하게 가셔야 하나요?”

“...그...”

기분탓일까. 추궁 당하는 것 같다. 그는 마치 내가 요 며칠 점심시간과 저녁시간에 돌아다녔던 걸 아는 것처럼 이야기했다. 그럴리 없는데, 그가 내가 식사시간에 뭘 하는지까지 관심을 가질 리가 없다.

“...그, 에...엘킨님-”

“...엘킨이라고 안 부르나요?”

“제, 제가 어찌 감히-”

깜빡, 나도 모르게 다시 제 스스로 엘킨과 눈을 마주했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다. 무슨 생각인지 모를 푸른 눈이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며 님을 왜 붙이냐고 묻는다. 속을 모르겠다. 그저 나는 울렁거린다. 죽을 것 같은 울렁거림에 침몰한다.

첫사랑을 두 번 정도 하면 정말 위를 다 버려 죽을지도 모르겠다.

“...일찍 일찍 다니세요.”

그렇게 서로의 눈만 보다가 엘킨은 나로부터 한걸음 물러나며 포기한 것처럼 이야기했다.

*

점심시간에는 정신이 없었다. 엘킨이 간 다음에도 식사시간이 끝날 때까지 돌바닥에 멍하니 앉아 뛰는 심장과 메스꺼움을 달래기도 바빴다.

기계적으로 일을 하고, 석양이 지는 저녁시간에야 간신히 정신을 차려 예전에 일하던 병원에 와 보았다.

이 병원은 수도에 있는 병원이나 보건소들을 전체적으로 관리하고 있기도 했기에 잘 하면 ‘첫번째 범인’의 기록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름은 아니까. 현재 그가 일하는 토목소라든가, 집이라든가.

나를 꺼리는 사람은 많지만, 내가 칼미온에 들어간 이후 주기적으로 만나는 사람도 있는 만큼 그런 사람들을 통해 남자가 현재 사는 곳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었다.

“!”

“...”

병원 복도를 걷고 있으면 오랜만에 리나 테일과 마주쳤다.

그녀가 얼굴을 찌푸린다. 서로 무시하고 갈 길을 가면, 그녀의 뒤를 따르고 있던 소년과 스쳐 지나간다.

검은 머리카락에 검은 눈동자를 가진 소년이었다. 나와 같은 검은 머리카락과 검은 눈동자지만 나와는 조금 다른 느낌이 든다. 칠흑같이 검다. 그 검은 눈이 스치는 순간 소년은 나를 보다가, 곧 시선을 거두었다.

*

‘짐- 성은 없고 짐. 현재, 수도 변경의 농가에 얹혀 살고 있음.’

병원에서 원하는 정보를 얻고 나오면 이미 밖은 캄캄하다. 예상외로 오래 걸려 중간에 앤에게도 연락을 하긴 했다. 그럼에도 밖은 캄캄했고 내일은 자중하는 편이 좋을까 싶었다.

‘수도 변경...’

시간도 없고, 일은 빨리 빨리 진행하는 편이 나았지만,  남자는 현재, 변경의 토목소에서 일하고 있으며, 거주지도 변경이었다. 제법 멀다. 수도는 넓고, 걸어서 못 갈 거리도 아니었지만 시간을 너무 많이 잡아 먹는다. 차라리 그가 일하는 토목소 쪽으로, 쉬는 날 아침 정도에 방문하는 게 좋겠다고 느낀다. 그 토목소 휴일은 일반 사람들의 휴일 다음날이라고 하니까.

다행히 아카인 영애가 오기 전 한 번의 휴일이 내일 모래였다.

병원의 정문을 나서서 몇 걸음 걷는다. 걷고 있으면 누군가가 뒤에서 나의 옷자락을 잡아 당겼다.

“어두운 밤에 혼자 다니면 위험해요. 누나.”

“?”

뒤돌아보면, 칠흑 같은 흑안흑발의 남자 아이가 서 있었다.

============================ 작품 후기 ============================

side story는 계획에 없던 외전이었던 만큼 설정이나 틀에는 변화가 없지만, 뒷내용에 세세한 부분이 추가되고 있어요.ㅎㅎ 그냥 넣었으면 엘킨 미쳤냐, 할 이야기가 side story 덕에 무난하게 들어갈 것 같은... 쓰게 해주셔서 감사해요.>_^ ㅎㅎ

에이리엘 님 // 어휴, 감사합니다. 리코멘을 원하시는 분은 애정합니다. ㅎㅎ 다음 외전은 또 내키면 쓸게요!>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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