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48 46 =========================================================================
“안즈 밀레나와 미론 다이브는 찾았느냐.”
셀리안은 무심한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어둠 속 심복에게 묻는다. 요정의 숲을 없앤다, 없애기로 했지만, 그들은 죽일 수 없다. 요정의 숲을 없애는 건 명분이 서지만, 그들을 죽였다가는 엘킨에게 미움 받고 만다. 이미 받았을지도 모르지만, 돌이킬 수 없는 강따위 건너고 싶지 않다.
상처 입고 싶지 않아, 그저 옆에 있어줘. 도망치지 말고.
요정의 숲을 없애기로 한 건 다름이 아니다. 미론 다이브가 아들에게 ‘엘프로 돌아오라’고 이야기했다는 걸 알았다. 아버지로서 아들이 괴로워하는 걸 알았기 때문일까. 엘킨은 여태까지 하프엘프로서 안즈 밀레나 밑에서, 인간으로서 살았지만 엘프로서의 길도 언제나 열려 있다. 엘프들은 차라리 그것을 원했다. 일족은 일족의 품으로-
안즈 밀레나는 여태까지는 그것에 거부했지만, 이번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고 했다.
‘나에게서 도망치지 마라, 엘킨-’
얼른 그 둘을 확보해 멀리, 멀리 유배를 보내자. 엘킨에게 다시는 도망칠 길 따위 주지 못하도록.
그 부부가 불의의 사고로 죽는다면 상관없지만, 셀리안이 직접 죽일 수는 없다. 아직은 죽일 생각도 없다. 히아신스는 우연히, 그래 우연히 그녀가 죽어줄 최상의 상황이 있어줬지만, 부부는 다르다. 전쟁 중 인간의 손, 셀리안 수하의 손에 의해 죽으면-
그 푸른 눈이 증오로 물드는 건 보고 싶지 않다. 사랑받고 싶다. 괘씸한 요정의 숲 사건이지만 둘만은 특별히 살린다고 이야기하자. 그럼 엘킨도 은혜를 느낄까.
어리석은 생각이지만, 첫사랑에 마음을 애태우며 안절부절 못하는 셀리안으로서는 그 모순을 깨닫지 못한다. 엘킨을 놔주기 싫고 엘킨에게 미움받기 싫고 사랑받고 싶다고.
“...찾았습니다.”
“그래.”
셀리안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다. 하지만 그림자 속 심복은 움직이지 않고 머뭇거린다. 셀리안이 그 뒤를 명하자, 심복은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아뢰옵기 송구스럽습니다만... 엘프 중 과격파들이... 전쟁 중 ‘인간’인 안즈 밀레나를 규율에 따라 죽였다고 합니다.”
“...”
“그리고, 미론 다이브는 제 손으로 종족을 죽이고, 광분하다 장로의 손에...”
“...”
아아. 정말이지.
그러니까, 그 둘이 ‘요정’의 손에 죽었단 말이지.
“하하,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구나.”
셀리안의 표정이 일그러진다. 일그러진 웃음이었다.
46
그립다?
눈앞에 앉아 솜사탕을 먹으며 아이답기도 하고 아이답지 않기도 한 표정으로 휙휙 바뀌는 검은 눈의 소년을 보고 느끼는 이 감정은 무엇이란 말인가.
무서운 상대를 무섭지 않다고 오기를 부리다보니 내가 미치기로 한 걸까.
‘이 감정은 어디서 기원하는 거지?’
영문모를 감정은 전부 셀리안과 연결된다. 진은 아니라고 했지만 역시 이 아이나 진은 셀리안과 아는 사이인 걸까. 류는 분명하게 셀리안을 증오하고 있었다. 기억 속에는 없지만, 셀리안이 이 셋을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거나 실제 만나지 못해 내 기억속에 없는 것뿐이지 어떤 식으로든 얽혀 있는 게 아닐까. 하고.
무섭다고 생각한 덕에 깊게 고민하지 않았지만 지난 밤 아이의 말 중 걸리는 게 하나 둘이 아니었다.
일단, ‘너’- 라는 호칭. 나를 가리키는 것도 있고 아닌 것도 있는 기묘한 말투.
‘검은 무언가’에 사로잡힌 기분에 지적하지 못했지만, 그는 이상한 말을 썼었다. 그건 진도 마찬가지였고. 싸잡아 이야기하긴 했지만 류는 ‘나’만을 제대로 칭했고 셀리안과 나를 명확히 구분해, 진과 엔실렌과는 많이 달랐다. 진과 엔실렌은 미묘하게 나와 ‘내가 모르고 그들만이 아는 나‘를 연결시키고 있었다.
‘물어보고 싶어.’
계속 만날 거라면, 오히려 묻고 싶다. 왜 나에게 호의를 갖는가. 네가 말하는 ‘너’라는 건 나 외에 누구를 뜻하는가. 혹시 셀리안을... 셀리안과 나의 관계를 아는 것이냐고.
눈앞의 아이가 무섭냐고 묻는다면 윤하영은 당연히 무섭다고밖에 생각되지 않는다. 가능하면 피하고 싶다. 다만, 나를 망가뜨리고 싶어하는 사람이야 이 아이뿐만이 아니다. 어째 이 세계에서는 너무 많은 것 같기도 하고. 일단 당장 며칠 후 오는 아카인 영애도 그럴 것이었고, 지금 내가 가는 곳은 연쇄 추락 살인마의 첫 번째 범인이 일하는 곳이다.
거의 오기에 가까웠지만, 마음을 바꾸니 그럭저럭 이 오기를 유지할 수 있을 것 같다.
물어볼까.
“...너-”
“후후-”
엔실렌은 그 검은 눈을 휜 채 나를 빤히 쳐다보다 곧 고개를 끄덕이며 웃는다. 무언가 말할 것처럼. 나는 말을 멈추고, 그의 말을 기다렸다. 엔실렌의 분위기가 조금 바뀐 것이다. 내 질문이 수월할 수도 있을 것 같다고 직감한다.
“응, 아쉽긴 하지만. 그런 점도 나쁘지 않아. 힘 없는 ‘너’도, 힘 있는 ‘너’도 너는 너라는 걸 깨달았어.”
또 ‘너’- 역시나 급작스럽게 말투가 바뀌어 의미심장하고 영문모를 이야기를 시작하고 있다.
“난 사실, 응. ‘네’ 영혼의 그런 꺾이지 않는 점 같은 걸 좋아하는 거니까.”
“그 ‘너’란 건 대체 뭐야?”
“응?”
“...‘너’는 뭐고, ‘너’는 뭐야? 뭔가 약하고 보잘 것 없는 게 나, 윤하영이란 건 잘 알겠지만.”
부수기 쉽고, 거역할 수 없는 건 아마 나다. 약하디 약한 윤하영. 반면 엔실렌이 묘하게 나와 비교하고 있는 다른 ‘너’는...
“...너야 너지.”
“?”
“그건 그렇고 왜 이름 안 불러줘, 누나?”
아이의 딴소리에 약간 초조해진다. 이상한 마이페이스의 질의는 류랑 하는 걸로도 벅차다. 이 아이는 제대로 대답할 수 있다.
“딴소리하지 말고. 내 질문에나 대답해, 렌.”
“...”
?
어라, 왜 렌이라고 불렀지. 이름을 불러달라는 요청에 답도 하면서 이야기를 빨리 끌어내고 싶었던 것도 있지만.
렌, 류가 부르던 애칭이다.
나는 그를 애칭으로 부를 만큼 친근하게 여기던가. 이름은 불러준다 쳐도, 애칭을 부를 이유는 없다. 그는 오히려 엔실렌이라고 전부 불러주길 원할지도 모르는데. 나를 지배하고 싶다느니 어쩌느니 했으니 ‘님’이라든가 붙여주는 게 맞았을지도 모르고.
“...”
“어?”
그런데, 그는 내 말에 뭔가 형용하기 어려운 얼굴로 나를 보고 있다. 그 검은 눈이 흔들린다. 일렁거리며 당장이라도 침몰할 것 같은 검은 파도처럼.
“너-”
“...질문에 대답할게.”
그는 살짝 고개를 돌리고 솜사탕을 입에 물고 오물거리기 시작했다. 약간 붉어진 것도 같다. 그런 주제에 아무래도 좋다는 듯 굳은 얼굴로, 하얀색 유니콘 모양 솜사탕의 얼굴을 입으로 밀어넣는다.
“약한 ‘너’는 누나야. 그리고 강한 ‘너’는-”
“...”
“이 나라의 황제지.”
“셀리안?”
“그래- 셀리안 크레이누-”
아이가 입가를 씰룩거린다. 미묘하게 눈썹을 꿈틀거리며, 검은 눈에는 진득하게 분노와 짜증, 희미하게 슬픔 비슷한 것이 장막처럼 서린다.
“셀리안 크레이누.”
그는 다시 그 이름을 반복해 부른다. 천천히. 그의 기분 변화가 심상치 않긴 하지만. 역시 그는 셀리안 크레이누와 나의 관계를 아는 게 분명하다. 조금더 용기를 내 묻기로 한다.
“...이상한 질문이지만, 나랑 그가 같다는 거야?”
“그래... 나도 진도 놀랐어. 하지만 진은 지금은 ‘류’에게만 집중하고 있고. ‘너’나 ‘너’는 이번 생애에는 ‘우리’를 원하지 않으니 신경 끄라고 했어. 나는 신경 끄라는, 진의 정신상태가 더 웃기지도 않지만... ‘너’가 둘이나 있으니 그냥 좋은 거잖아. 류도 있고, ‘너’도 둘이나 있고- 역시 좋은 거야. 응.”
“...이런 일 자주 있어?”
“뭐? 귀찮아서 생각해본 적 없는데... 있는 거야 있을만하니까 있는 거겠지.”
“...”
그는 정말 귀찮다는 듯이, 대답은 하지만 긴 이야기를 하기는 퍽 귀찮다는 표정으로 정말 심드렁해졌다.
‘왠지- 이 녀석...’
문득 머리를 스치는 생각이 있었지만 의외로 아이 쪽이 계속 말을 시작했다. 깊게 생각해본 적은 없지만, 내 말로 인해 이런 저런 것이 떠오른 것 같다.
“ 같은 시대에- 확실히 이상하긴 하네. 찢어진 영혼이 몇 개의 개체로 존재하는 일은 타의에 의해 어떻게든 가능하지만 자연스럽게는 생기지도 않고. ‘너’도 ‘너’도 그 자체로 완전한 영혼이야, 찢어진 건 아냐.”
“...”
“생각해보니 이상하네. 어째서 같은 시대인데 시간의 흐름이 다른 영혼이 있는 거지?”
침묵이 흐른다. 엔실렌이 내 앞 좌석에서 폴짝 뛰어내려 내가 앉은 의자로 올라온다. 흠칫 하는 순간 슥슥 기어오듯 다가와 내 얼굴을 미심쩍은 듯 빤히 보며 중얼거린다.
“역시 낡았어. 어째서지? 황제는 거의 옛날하고 비슷한데. 너는 너무 약해, 약하고 낡고 텅 빈 주제에...”
그는 그대로 그의 이마를 내 이마에 댄다. 그 행동을 피하지 못해, 아이의 체온과 내 체온이 섞여드는 착각이 인다.
“바닥까지 마나를 싹싹 긁어 운용하고 있어. 어디에?”
“?”
“이상한 일 투성이야... 인간은, 영혼을 볼 수 있을 리가 없어, 감지할 힘도 없지. 없는 게 당연한데, 그 황제조차 불가능한데. 어떻게 너는 스스로 황제와 네 영혼의 관계를 같다고 발상한 거야?”
“...”
이건 답할 수 있겠다. 내게 마나가 있고, 그걸 어딘가에 쓰고 있다는 건 몰랐던 거지만 이건 확실히 알겠다.
내가 그의 환생이기 때문이다. 내가 그의 환생이고 전생을 기억하고 있으니까. 이곳에 갑자기 이동되었으니까.
대답할까, 대답하면 이 아이가 혹시 내가 여기 있는 원인도, 돌아갈 방법도 알아주지 않을까.
“그건-”
문득 아이의 눈이 미심쩍음에서 기대로 반짝였다.
“혹시...기억해?”
기대로 반짝이며 흔들흔들, 다시 검은 파도처럼 일렁거리고 있다. 그리움과 슬픔 속에서.
“나를...만나러...”
“?”
“약속대로 만나러 온 거야?”
나는 그 영문모를 터무니없는 기대에 저절로 말을 멈췄다.
그 질문을 하는 순간 아이의 눈이, 그날 밤 이후 줄곧 비열하게만 느껴졌던 검은 눈이 엄마 잃은 아이처럼 생각되었다. 이상한 일이다.
당장이라도 ‘응’이라고 말해주고 싶다. 그의 이름을 렌이라고 부른 것처럼 ‘응’이라고.
응, 기억하고 있어. 나는 널 만나러 왔어.
밑바닥에서 그렇게 말하고 싶은 충동이 스멀스멀 올라왔지만-
“무, 무슨 이야기인지 모르겠어.”
*
“무, 무슨 이야기인지 모르겠어.”
정말 모르니까.
내 말에 아이의 눈에 실망감이 가득 찬 건 순식간의 일이었다. 그 실망감에 어쩐지 가슴이 아파지는 동시에- 이게 혹시 셀리안의 감정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자 아득해진다.
더 이상 새로운 전생의 기억, 가슴 아픈 추억이나 죄책감은 떠올리고 싶지 않다.
엘킨이나 히아신스로도 벅차, 더이상은 윤하영은 감당하고 싶지 않다, 그렇게, 이기적인 생각을 시작하자 윤하영의 욕심이 불쑥 고개를 내민다.
“그- 그보다 말이야.”
아이의 눈이 다시 나를 향했다. 실망감을 품었던 눈에 기대가 조금 돌아온다. 그 눈에 지금은 시기가 아니란 걸 깨닫는다. 깨닫지만 말은 봇물 터지듯 멈추질 않는다.
“네가 셀리안과 무슨 관계인지는 모르겠지만. 아 이것도 이상한 이야기지만 사실 나... 다른 세계에서 온 셀리안 크레이누의 환생이거든.”
“뭐?”
“네 말대로 이상한 일인거지. 그런데, 그래. 나는 셀리안 크레이누의 환생이고 아마 그래서 영혼이 같은 걸 거야. 그리고, 그걸 내가 아는 것도... 그게, 어쩐지 전생을 기억하고 있어서...”
“...”
“네 의문에 대한 답이 될지 모르겠는데... 그, 이런 일도 있을 수 있니? 있다면, 혹시 내가 원래 세계로 돌아가는 방법도, 있을까?”
횡성수설한다. 갑작스런 충동에 당혹해 ‘윤하영’이 기대하는 바를 두서없이 쏟아낸다. 아이의 눈이 새까맣게 무심해지는 걸 절망적이라고 느끼면서도 멈추지 못한다.
돌아가고 싶어.
사실 히아신스도, 너도, 셀리안도, 엘킨도 됐어- 돌아가고 싶어. 이따위 세상에서 달아나고 싶어. 라고.
“...”
“...”
무심한 검은 눈동자가 가늠하듯 나를 보길 수분.
“무슨 이야기인지 모르겠어요.”
장난치는 것처럼, 방금 전 내가 했던 말을 엔실렌는 똑같이 읊었다.
“어?”
“뭔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건 모르기도 하고, 누나를 원래 세계로 돌려보내다니 있어도 가르쳐줄 것 같아요?”
“있, 있다는 거야?”
“하하, 흉한 얼굴-”
그가 이죽이며 나로부터 멀어져 반대편에 다시 앉는다.
“황제는 너무 강해서 어차피 당장은 다가갈 수도 없었으니까, 물론 한 방 먹여주긴 할 테지만.”
그가 불온하게 웃는다. 지난밤과 같은 불온한 미소가 입가에 새겨졌다가 사라지고 발랄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왜 이 세계에 누나가 있냐고요? 그야 이건 나에 대한 보상이 아닐까요. 이 세계의... 이상한 이야기네. 후후. 이 세계의 누나가 나를 거부했으니, 이렇게 나를 거부할 수 없는 누나도 있어야 내가 침착하게 있을 수 있죠. 응.”
*
엔실렌의 눈에 순간적으로 악의적인 기운이 스쳤지만, 그 후로 그는 일절 그 화제나 내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누나는 뭘 좋아해?
어디 가는 거야?
누나는 검에 소질이 없는 것 같다고 했지만 내가 가르쳐줘도 좋아?
엘킨 다이브가 정말 좋아?
솜사탕 정말 안 먹어?
바람이 좋네.
취미가 뭐야?
같은. 그런 시덥잖은 질문이 이어지며 마차는 쏜살같이 달려 목적지에 도착했다.
============================ 작품 후기 ============================
예약템의 축복 없이 12시 땡에 올리려고 했는데 자다보니 새벽 2시넹. 또르르..ㅠㅠ
이건 아마 초기 설정도 어느 정도 갈 것 같아요. 다만 과거형인 이유는 그런 질척한 로맨스가 언제 나올지 저도 모르겠다는 거...헤헷★
...선추코 감사합니다.ㅠㅠ 사랑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