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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해가 지고 있다. 수상한 일만 가득, 별 소득없이 마법마차에 올라섰고, 밤이 깊을 무렵 왕궁에 복귀할 수 있었다. 하루는 짧고, 내일부터는 다시 일이기에 돌아와야만 했다.
왕궁의 익숙한 복도를 걷는다. 칼미온으로 가는 붉은 융단의 복도다.
‘소득이라면 있는 건가.’
누군가 진범이 있다. 짐이란 남자는 이용당했을 뿐이다- 그의 행동을 종합하면, 그는 자신이 수도로 와 누군가를 떨어뜨렸다는 자각이 없다. 자각은 없지만, 알고는 있다. 알고 있는 것 같았고, 부정하고 있었다.
‘그게 가능할까.’
마법- 마법이라면 이치에 맞긴 하지만, 누가 어째서 무슨 목적으로?
[미안해, 원래 굉장히 성실한 청년인데. 최근 불면증에 시달리고 있어서 말이야.]
남자가 일어나는 것까지는 보고 싶었는데... 짐은 그렇게 기절한 후 죽은 것처럼 잠을 자기 시작했다. 최근 불면증에 시달리고 있다고 한 동료들의 말대로 오랫동안 자지 못한 듯 그는 내가 떠날 때까지 깨어나지 않았다.
알 수 없는 일 투성이다. 하루는 짧고 해야 할 일은 감도 잡히지 않는다. 사소한 대화조차 애매한 일 투성이었다.
왕실의 복도를 걸으며 별 대수롭지 않았던 대화를 떠올렸다.
[저, 그런데 어떻게 여기에...]
내가 짐과 그렇게 소란스럽게 대화를 했나 싶어 물어보았다. 주변사람도 무시하고 가는데 멀리서 인부들이 달려와줬으니까. 짐도 조용한 스타일이고, 나도 그렇게 크게 비명을 지르지는 않았다. 내 말에 인부들이 고개를 갸웃한다.
[그러고보니, 어이! 감독장, 왜 우리보고 짐을 찾아오라고 한 거야?]
[응? 나도 그냥 높으신 분이 짐을 찾는다는 이야기를 들어서]
[높으신 분?]
[결국 장난이었나봐. 아무도 없었고... 뭐, 좋잖아. 마침 짐이 쓰러졌으니까.]
[그건 그렇지]
높은신 분? 고개를 갸웃해보았지만 더 이상의 답은 얻을 수 없었다. 복잡한 공사장인 만큼 가끔 그런 착오가 있다며 인부들은 대수롭지 않은 듯 웃었다.
“...잘 모르겠는데.”
“귀가가 늦군.”
“에?”
걸음을 멈추고 정면을 보면, 복도에 셀리안 크레이누가 서 있다. 칼미온으로 가는 외부 복도에 달빛을 받으며 셀리안 크레이누가 서 있었다.
*
황금빛 머리카락을 묶고 안경을 쓰고 있는 게, 일하다가 방금 나온 모습이다. 눈이 마주치자 빙긋 웃는다.
산책이라도 나온 것 같이 가벼운 차림이지만, 일부러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젊은 나이도 아닌데 그렇게 미간에 주름 잡고 있으면 빨리 늙는다고.”
“...”
그와 만나는 건 굉장히 오랜만인 것처럼 느껴졌고 약간 성가신 느낌도 들었다. 하루 후면 아카인 영애가 수도에 돌아올 거고, 그러면 본의 아니게 만나야 할 일도 생길 것이다. 오늘처럼 복잡한 날 굳이 이 왕님을 밤늦게 우연히 마주쳐야 하나 생각하니 성가시기 그지없다.
여전히 사람 좋은 얼굴로 나를 보는, 가장 왕다운 왕, 젊은 셀리안 크레이누. 역시 껄끄럽다. 이 사람은 내 안의 ‘셀리안 크레이누’가 아니라고. 다시 그를 보니 확실해진다. 여유로운 눈동자, 한 점의 죄도 없는 눈동자의, 자신이 올곧고 타인에게 당당하고 뒤틀리지 않은 성군-
‘생각할 것도 많은데...’
불쾌하다. 그리고 이 불쾌함이 괜한 남탓밖에 되지 않는 게 더 불쾌하다.
“젊은 나이는 아니지만, 젊은 나이처럼 보이니까 이런 늦은 밤외출은 삼가는 편이 좋지 않을까.”
“걱정에 감사 드립니다만, 젊은 것도 젊지 않은 것도 아닌 애매한 나이라서, 괜찮을 거라고 생각됩니다.”
“뭐, 크큭-”
편하게 대하라고 이야기를 듣긴 했지만 조금 건방졌을지도 모른다. 나도 모르게 약간 비틀린 말이 나갔지만 그는 개의치 않고 웃는다.
“지켜준다고 했잖아. 곧 아카인 영애도 올 거고, 멀리 수도 변경까지 혼자 나가는 건 감탄하지 못하겠는데.”
“...감시하시는 건가요?”
“지키겠다고 했잖아?”
또 비꼬고 말았다. 비꼬았지만, 그는 태연하다. 정말 싫은 남자다. 셀리안은 어깨를 으쓱하며 덧붙였다.
“너의 개인적인 삶에까지 간섭할 생각은 물론 없어. 하지만. 너는 살고 싶다고 이야기했으니까.”
“...”
알고 있다. 아카인 영애가 아직 날 찾지 못했다. 그것은 셀리안 덕분이다. 그가 나를 생각보다 세심히 보호하는 건 알고 있다. 그것이 또 불쾌하다. 도움을 받고 싶다고, 살고 싶다고 이야기한 건 난데 엉망진창이다. 아니, 애초에 이 남자가, 내 안의 그가 잃은 남자가 있는 세계에 내가 있다는 것부터가 엉망이었다.
“알아요.”
“알아주니, 고맙군. 하지만 말이야. 사실-”
“?”
“일단, 내 것 둘이나 함께 다니면 절로 눈이 가게 되잖아?”
“그게 무슨 소리인가요?”
“응? 그대가 내거라는 이야기지. 나는 내거에게는 흥미가 지대하거든.”
“...”
“표정 한 번- 이러면 좋아들 하는데 말이야.‘
그가 키들키들 웃으며 나른하게 눈가를 접는다. 셀리안에게 엘킨은 첫사랑이고 마지막 사랑이었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그는 여자에게 익숙했다. 오히려 히아신스와 약혼하기 전까지 그는 적당히 유혹해오는 여자들을 취했고 스스로 유혹하기도 했다.
히아신스와 그 사이에, 기억상 ‘연애감정’은 없었다. 그러니 그 후 행동을 자제한 건 그녀의 명예를 지켜주기 위해서였다. 히아신스가 바랐던 대로 공공연하게는 밝히지 않은 약혼 관계- 거기서 황제가 추문까지 일으키면 히아신스의 명예에 누가 된다. 그녀의 의견을 존중한 게 도리어 그녀를 허수아비 황비로 만들어버릴 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는 히아신스와 약혼 후 여자관계를 다 끊어냈다. 나름대로 히아신스를 존중했고 소중히 여겼던 반증이다.
“그래서- 그대는 알고 있어? 그대의 긴 외출 때문에 휴일이 아닌 사람까지도 휴일이 되어 버린 걸.”
셀리안이 내게 좀더 가까워져 비밀이야기를 하듯 속삭였다.
“무슨 소리예요?”
“글쎄, 나도 이런 경우는 처음이라. 거긴 왜 간 거야? 그다지 휴양지로 어울리는 곳은 아닌데.”
“휴양 맞아요. 요즈음 가장 뜨는 개발지역이잖아요... 아카인 영애가 오면 마음대로 나가기도 그래서...”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하지, 추락사건의 범인을 쫓고 있었다고, 그런 이야기를 하기는 망설여진다. 대충 얼버무렸지만 셀리안은 어깨를 으쓱하며 웃는다.
“후후, 맞는 이야기야. 아카인 영애가 올 때까지는, 네 자유지.”
“...”
“넘어가줘서 다행이지?”
이 남자는...
넘어가준다. 하지만 이상하다. 그가 여기 있던 건 일부러 나를 기다렸던 것 같은데, 외출에 대해 추궁하려는 게 아니었던 걸까.
“너도 어른이잖아. 그 나이의 여자한테 계속 참견하는 것도 멋 없으니까, 다만- 세류 키스톤의 꼬마도 그렇고, 그날 붙잡은 멍청이도 그렇고. 네 외출 뒤에 위험한 일이 있던 바로 다음 다음날 또 움직이다니, 걱정되는 것도 이해는 가.”
“멍청이?”
“그제, 너에게 있던 위험은 세류 키스톤의 꼬마만이 아니었어. 너를 따라다니던 게 ‘둘’ 있었지. 그 한 명이 아카인 영애의 끄나풀이었다.”
“!”
몰랐던 이야기다.
“금시초문이네요.”
“걱정할까봐, 엘킨은 이야기하지 않은 거겠지. 그가 잡았거든.”
“...”
엔실렌 건도 그렇고 정말 그날 도움을 많이 받았구나. 우연이었겠지만, 다행인 우연이다.
“그러니까,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너무 늦게 다니지 말라는, 조언도 하고 싶었고-”
그가 빙그레 웃는다.
“...알겠어요. 어차피 이제 곧 아카인 영애가 오니까요. 내일 이후에는 멋대로 외출하지 않을 거예요.”
“고집은. 내일도 나가는 거야?”
성과가 있는 듯, 없었던 오늘. 정리를 해야 했고, 그러기 위해서는 움직여야 했다. 셀리안이 가볍게 한숨을 쉬며 웃는다.
“...”
침묵이 흐르고, 약간 뻘쭘해진다. 인사를 하고 돌아갈까 하고 생각하다가
[너를 따라다니던 게 ‘둘’ 있었지.]
그의 말이 걸려 묻기로 한다. 또 무슨 위험한 게 있었던 걸까. 내 주변도 모르고 있었다니 진범을 찾느니 마느니 하기도 뭐해진다.
“근데 저를 따라다니던 게 둘, 이라니...?”
한 명은 아카인 영애의 끄나풀. 다른 한 명은? 그러고보니 그날 엔실렌도 나를 따라다니는 게 둘이라고 했다. 그날은 반딧불이라고 생각했지만.
“으음?”
“폐하?”
내 말에 눈을 깜빡이던 셀리안의 입가에 조금 장난스러운 미소가 걸린다. 그렇게 곧 내 쪽으로 고개를 숙였다.
“우리, 장난 좀 쳐볼까, 하영.”
“?”
“-”
“히익!”
가볍게 그가 내 귓가에 숨을 불어넣는다. 순간적이다. 깜짝 놀라 귀를 손으로 막으며 주춤 물러나면 그가 느물느물 웃는다. 소름이 오소소 돋고, 뭔가-
“?”
몸이 흔들리는 느낌이 들더니 가라앉는다. 셀리안이 나로부터 숙였던 몸을 세우며 떨어진 나를 보고 킥킥 웃는다. 짜증나는 남자일세.
“진짜~ 잘못하다가 짐에게 싸움이라도 걸 기세군.”
“그렇네요, 폐하가 허락한다면 싸움을 걸고 싶어요.”
“으응? 이쪽 이야기였는데, 괘씸하군. 벌이다. 자- 윤하영 명령에 따라라.”
“명령?”
그는 웃음을 참지 못하는 얼굴이다. 붉은 눈동자에는 흥미로움과 즐거움이 넘실거리고 있다. 킥킥거리며 내 어깨를 잡고 내가 왔던 방향으로 빙글 돌린다.
“자, 하영- 왔던 방향으로 지금부터 뛰어가기~”
“엑?”
“황제의 명령이야. 뛰어. 누군가랑 마주칠 때까지 뛰기야.”
이 새끼가 나를 제 강아지로 아나.
앞으로는 짧은 복도 끝에서 휘어진다. 휘어진 곳을 돌면 긴 복도. 긴 복도를 지나면 정원, 그리고 다시 밖으로 통하는 첫 번째 정문.
밤이긴 하나, 왕궁이니만큼 누군가와 도중에 부딪치긴 하겠는데. 대체 이게 무슨 짓인가 싶었지만, 황제가 명령까지 언급했다.
한숨을 쉬며 뛰기로 한다.
“큭큭-”
내가 영혼없이 건들건들 뛰기 시작하면 뒤에서는 큭큭 웃는 소리가 들린다.
*
모퉁이를 돌면 걸어야지. 그런 것도 셀리안이라면 알아채겠지만, 아무렴 어떠냐. 아무도 없는 복도를 뛰고 있는 내가 바보 같다.
이게 왠 바보짓이야, 투덜거리며 뒤에서 날 보고 있을 멍청이 왕을 욕해본다.
‘짜증나.’
긴 복도에는 사람이 있으려나. 건들건들 뛰긴 했지만 워낙 짧은 복도라 곧 모퉁이다. 슥 돌며 뜀박질을 슬슬 늦추면, 모퉁이의 벽에 누군가가 있다.
‘이렇게 빨리?’
걸음을 완전히 멈추고, 모퉁이의 벽으로 눈을 향한다. 이 바보같은 미션은 이렇게 끝이구나, 셀리안도 여기 누가 있던 걸 알고 있었던 걸까. 오는 길에는 없었지만, 셀리안의 호위 같은 걸지도 모르겠다. 뭔가 말이 안 되지만, 끝이다. 확인차 벽을 보며 소리친다.
“폐하, 여기 사람-”
“!”
“...”
“........”
“......히이이익!!!”
“!!”
엘킨이었다. 엘킨이 그답지 않게 정말정말 놀란 얼굴로 나를 보고 있다. 나는 나답게 매우매우 놀랐다.
얼굴이 터질 것처럼 새빨갛게 변하는 걸 느낀다. 새빨갛게 변한 채로 나는 주저앉는다. 아니 앉지 못한다. 이번에도 엘킨이 붙잡는다. 넘어지려는 순간 엘킨이 내 양 팔을 꼭 잡아 지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