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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새 나와 셀리안 사이에 말은 없어졌다. 나는 난간에 기대 셀리안이 건네준 옷을 여미며 하늘을 보았고, 셀리안은 셀리안 대로 난간에 턱을 괴고 있었다. 그가 무슨 생각인지는 알 수 없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하늘은 높디 높이 뻗어 있고, 시간은 멈춘 것 같아서. 전생의, 잃어버린 나와 함께 있는 기묘한 시간이었지만 이상하게 불편하지 않았다.
'그게 제일 불편하지만.'
그저 분할 뿐이다.
이곳에는 모두 불편한 사람뿐이다. 얼마나 같이 있어도 얼마나 그들에게 호의를 갖게 되어도 모두 불편한 사람들 뿐. 히아신스도, 엘킨도, 심지어 산도- 모두 나를 불편하게 했다. 셀리안도 마찬가지다. 마찬가지지만 그건 히아신스나 엘킨과는 다르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순간의 그가 내 안의 딜레마와 상관이 없는 유일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시간이 지나면 이 셀리안 크레이누가 내 안의 셀라인 크레이누와 같아질 텐데도 이 셀리안 크레이누만이 마치 내 전생의 기억 속에서 자유로운 것 같이.
‘태평한 생각이야.’
셀리안은 어느새 안경을 그의 하얀 옷깃에 껴놓고 눈을 감고 있다. 이런 태평한 생각을 그도 하는 걸까. 궁금해진다. 같은 생각을 하면 웃기겠다-
“제가 퍽이나 우스우신가 봐요?”
“응?”
셀리안의 눈이 깜빡 뜨인다. 붉은 눈이 깜빡, 루비 같이 아름다운 붉은 눈동자.
나는 손을 들어 그의 심장에 닿을 듯 말듯한 거리에서 멈췄다. 당신과 있을 때 그나마 자유롭다니 말도 안 된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미워서 견딜 수 없었는데.
심술궂게 웃으며 이야기한다.
“그렇게 눈을 감고 계시니까요. 방심하고 있다가, 제가 폐하를 죽이면 어떡하려고요.”
그것도 좋은 방법 같다. 여기서 그가 죽으면, 아무도 상처 입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조차 상처입지 않는다. 이런 끔찍한 마지막의 감정따위 모른 채. 올곧고 아름다운 왕으로. 다치지 않고 상처입지 않고 상처입히지 않고. 변하지 않고.
멍하니 그를 올려다보면 셀리안의 붉은 눈이 반짝인다.
“농담처럼 이야기하고 정말 죽일 것 같이 보는군.”
“농담 아니에요.”
그를 향해, 유혹하는 것처럼 미소지어본다. 미소지으며, 감히 황제의 옥체에 망설이지 않고 손가락을 돌진시킨다. 셀리안의 심장 근처에 손톱 끝이 가볍게 닿는다.
“이것 참-”
정말 죽일 것 같다고 지적한 주제에 그는 나른하게 웃는다. 웃으며 나를 보았다.
“그대가 나를 그렇게 상냥하게 보는 건 처음이군.”
“상냥하다고요?”
나는 이죽였다. 심술을 부렸다. 그가 나를 편하게 대한다고, 무슨 말을 해도 왠만해선 벌하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되면서 악의를 갖고 마음껏 이죽였다. 그를 실제 만난 건 세번째, 제대로 이야기한 건 오늘이 두번째건만.
“그래, 나를 지키겠다는 눈으로 바라보는 건 엘킨이나 히아신스 이후 처음이군.”
“지키겠다고 한 적이 없는데.”
역시 그냥 감성이 이상한 남자일지도 모른다. 전생이라도, 이런 비범하게 독특한 인간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아는 편이 이상하다.
셀리안이 기대고 있던 몸을 세운다.
“들어가지. 엘킨이 본격적으로 결계를 탐색하기 시작했어.”
그는 대수롭지 않게 이야기한 주제에 역시 고열은 싫은지 미간을 찌푸렸다. 그대로 손을 들어 결계의 인을 지워나간다.
결계니, 인이니 하는 건 마법사에게는 분명하게 보이지만 나는 보이지 않는다. 그냥 지식에 의존해 그가 허공에 대고 슥슥 뭔가를 그리는 걸 보고 결계라고 생각했던 것뿐이다.
왜 허공에 대고 저 지랄을 해대는데도 이 남자는 웃기지 않은 거야.
"후우-"
"그럼, 전 이만 들어가보겠습니다. 따로 가는 편이 낫겠죠?"
"상관없겠지. 아, 정면의 계단이 아니라, 반대편 계단을 쓰는 편이 엘킨과 안 만날 거야. 뭐, 만나도 좋겠지만."
사랑이란 예상 못한 곳에서 나타나기 마련이니까, 라고 여전히 정신 못 차리고 농담을 하는 남자에게 가볍게 치맛자락을 들어올려 인사했다.
등을 돌린다. 반대편 계단으로 향하면, 셀리안이 키킥 웃으며 손가락을 딱 친다. 눈 앞에서 새하얀 막이 부서지듯 떨어졌다. 커다란 소음이 있거나 한 건 아니지만, 눈앞에서 허공의 공간이 부서지자 나도 모르게 놀라 뒷걸음 친다.
"결계해제-"
“~~”
이 남자, 일부러 결계를 이제야 해제한 거다. 그것도 마나가 없는 내 눈에 보일 수 있는 퍼포먼스까지 곁들여서. 정말이지 싫은 남자다.
하나하나 돌아봐주는 것도 어째 좋아할 것 같아 흥 하는 느낌으로 제 갈길을 걸어가려 하면, 약간 늦은 템포로 공간이 깨끗하게 개이고 눈을 동그랗게 뜬 여자가 서 있다.
"어머나."
신을 모시는 자와 같은 간소한 새하얀 드레스를 입은 밤색 눈동자와 머리카락을 가진 황비, 두번째로 보는 셀리안 크레이누의 모친이었다.
*
"어머나."
소녀처럼 가볍게 비명을 지르며 헤르티아는 허공에서 부서지는 결계를 멍하니 바라본다. 바라보다가 나와 눈이 마주쳤다. 나를 알아본듯 ‘아’하고 중얼거린 뒤 생글 미소짓는다. 처음 만났을 때처럼 티없이 맑은 미소다. 그러다가 이내 내 뒤의 셀리안 크레이누를 발견했다.
“아아-”
“...”
"아아, 폐하- 여기 계셨군요."
그 눈동자에서 눈물이 차오르기 시작한 건 순간이었다. 당장이라도 울 것처럼 커다란 밤색 눈동자가 촉촉하게 젖는다. 그녀는 더 이상 나는 눈에 들어오지 않는 것처럼 비틀비틀 셀리안 크레이누에게로 다가갔다. 셀리안의 표정은, 어둠 때문에 보이지 않는다. 그저 그의 입매가 기계적으로 미소를 짓는 게 보인다.
"이런- 어머님-"
셀리안의 부름에 헤르티아의 어깨가 가볍게 떨린다. 표정은 볼 수 없지만 곧 말이 이어졌다.
"아아, 어찌 제가- 그저 저는 폐하께 배를 빌려드린 것 뿐인 걸요."
뒷모습이어서 동작까지는 알 수 없으나, 여자는 조심스럽게 제 배를 감싸안으며 셀리안을 향해 송구하다는 듯이 고개를 숙였다.
"...이 늦은 밤에 옥상이라니, 몸도 약하신 분이 무슨 일이십니까."
"폐하를 찾았습니다."
"저를 말입니까?"
"줄곧 폐하를 위로하고 싶었으니까요."
헤르티아가 휘청휘청 걷는다. 그녀가 걸을 때마다 새하얀 드레스가 밤바람에 나풀거리고 셀리안과 가까워지자 그녀의 작고 하얀 손이 그를 향해 뻗어진다.
뻗어지다가 그의 뺨에 닿을 듯 닿지 않고 멈췄다.
셀리안은 미동조차 하지 않는다. 잠시 내 쪽으로 시선이 향한 것 같았지만, 착각인 듯, 그의 고개는 자신보다 한참 작은 어머니를 향해 있었다.
"불충하고 사악한 무리가 폐하의 동상에 한 짓에 대해 줄곧 위로 드리고 싶었습니다."
"...이미 끝난 일입니다."
"으응, 하지만- 여자들이 떨어졌다고 들었습니다. 이는 폐하에 대한 우롱입니다."
헤르티아의 말에 분노가 스민다. 분노하고 증오하고, 그녀에게 어울리지 않는 앙칼진 목소리다.
"...희생된 백성들을 위해서도 범인을 잡아야겠죠."
"아아, 저따위는 따라갈 수 없을 만큼 다정하신 분!"
그녀의 목소리는 이제 울고 있다. 훌쩍거리며, 아이처럼 우는 그녀를 셀리안은 그저 바라본다.
나는 몸을 돌려, 그 공간을 빠져나왔다.
*
다음날 점심시간, 샌드위치를 물고 칼미온을 나서면, 문앞에는 엘킨이 서 있었다.
어제 그렇게 질린다고, 지긋지긋하다고 생각했지만 문앞에서, 확실히 나를 기다리며 서 있었을 그를 보자 비틀거린다. 비틀 쓰러지며 물고 있던 샌드위치를 떨어뜨리는 나를 엘킨이 받아들었다. 다른 손으로는 묵묵히 샌드위치까지 받았다.
나는 평상시처럼 주책없이 뛰는 심장을 가누지 못했지만, 그는 어제처럼 얼굴을 붉히거나, 나를 포옹하며 취했던 잡아먹을 듯한 시선을 -이제 생각하면 그건 분명히 잡아먹을 듯 쳐다보는 거였다- 보내거나 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 푸른 눈은 맑았다. 맑게 개인 푸른 눈으로 나를 올곧게 바라본다. '나'만을 바라보았다.
이제는 알겠다. 가슴이 술렁거리고 속이 메슥거리는 건 그에 대한 나의 이 끔찍한 착각과, 나에 대한 그의-
"하아...또인가요."
“엘킨 님...”
“...정말 어쩔 수 없네요.”
나를 지지한 채 나와 눈을 마주하고 있던 엘킨이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왠지 최근 그의 한숨이 늘어가는 것 같은데...
"아버지께 요정의 검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네?"
"요정의 검은 평범한 검과 달리 감정이, 감정과는 다르지만 쉽게 말해 감정 비슷한 게 있습니다. 검을 받은 당시 저는 어렸고, 검도 요정의 피를 반만 이은 저를 받아들이지 않으려 했습니다. 서로 우왕좌왕 했다고 할 수 있지요."
뜬금없는 추억 이야기를 시작한 엘킨의 눈동자는 올곧게, 그답지 않게 흔들리고 있었지만 혼란스러워하는 기색은 없다. 엘킨 다이브답게 어제와 달리 일렁임조차 그대로 수용하고 있었다.
"그럴 때는, 한쪽이라도 인정하는 편이 낫지요. 다른 한 쪽이 혼란하고 있다면 한쪽이라도 확실히. 그래야 결론이 나니까요."
엘킨이 나를 바로 세워주며, 구겨진 옷깃을 펴준다.
"우왕좌왕 하다가는 서로 상처를 입고 맙니다. 검이라면 날이 다치고, 사람이라면 살을 베이게 되어 있습니다. 저는 기사이기에, 살이 베이는 것 따위 상관없습니다만, 당신은-"
엘킨의 눈이 다정하게 가라앉는다.
"당신을 다치게 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저는 기사니까요."
“...에, 엘킨님?”
“어제, 폐하께 의지해 도망간 당신을 찾아 헤매며, 나름대로 내린 결론입니다.”
그는 묘하게, 후련히 웃으며 내 손에 샌드위치를 쥐어주었다. 동시에 그의 허리춤에 꽂혀 있는 푸른 검집의 검을 가볍게 어루만졌다. 미론 다이브에게서 엘킨 다이브에게로 이어진 요정의 검, 발루아가 햇빛에 반짝였다.
"그래서- 어딜 가실 생각입니까?"
멍하니 그 모습을 보고 있으면, 엘킨이 입을 열었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자연스러운 질문이었다.
그는 명백하게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요 며칠 주기적으로 나가던 걸 알고 있다. 아마, 나를 따라왔던 것 같다. 어제도 이 이야기 중간에 셀리안과 함께 사라졌던 것이다. 어쩌면 부자연스럽게 끊겼던 이야기의 계속인 것이다.
“...”
다만 분위기가 분위기였던지라 허를 찔린 기분이다.
"그, 오늘만이에요. 내일부터는 나가지 않을 생각이에요."
더듬더듬, 벽에 부딪칠 걸 각오한 말이었지만, 내가 들어도 힘이 없었다.
사실- 나는 할 수 있는 게 거의 없다. 오늘도 나가봤자 뭘 어떻게 해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는다.
슬슬 누구에게든 의지를 하는 게 맞을지도 모른다. 혼자서는 동상의 범인 따위 막을 수 없을 것이고 그저 의지하는 게, 합리적일지도 모른다. 냉정하게 생각하면 그 편이 내가 원하는 바를 성취하기 좋겠지. 좋겠지만 저항감이 있다. 도움을 요청하라고? 이야기하라고?
셀리안이든, 엘킨이든 히아신스에게든? 그들과 하하호호 힘을 합쳐 동상의 범인을 찾으라고?
“그러니까... 그냥 내버려두시면 안 될까요?”
안 되겠지.
"딱히 막을 생각은 아니었습니다."
"에?"
엘킨은 오히려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이 왜 나가는지는 모르지만, 내일부터에 대해서라면... 폐하께 들었습니다."
그의 눈이 안타깝게 변했고 나에게 좀더 가까이 다가왔다. 다시 한 번 가볍게 한숨을 쉬었지만, 답답해하거나 기가 막히다는 의미는 아니었다.
"해야 할 일을 막을 생각은 없어요. 다만, 좀더 의지해주셨음 하는 것 뿐입니다. 달리 말하자면, 언제든 당신에게는 제가 있다는 것을, 알아주셨음 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셨음 합니다."
“...저는, 딱히...”
“아카인의 영애에 대해서도-”
“!”
역시 셀리안이 엘킨에게 이야기했구나! 짐작은 했지만, 조금 수치스러운 기분에 휙 고개를 들면 그는 그저 씁쓸하게 웃었다.
“저는, 어느 쪽이든 무언가를 얻기 위해 누군가의 감정을 이용하는 건 좋아하지 않습니다만, 이왕 선택을 하셨다면 그 결정에 반대할 생각도 없습니다.”
“...”
"다만, 이 이야기는 폐하가 아니라, 당신 입으로 들었다면 좋았을 것 같습니다. 아마, 히아도 그럴 거구요."
그 말을 기점으로 내 뒤로부터 날 꼭 껴안는 체온이 느껴졌다. 분명 거친 천의 군복을 입었을 텐데도 어쩐지 말랑말랑하고 상냥한 소녀의 체온이었다. 내가 지금, 살리고 싶어하는 사람-
"하영-"
"히아신스 님?"
"몰랐어요, 나는-"
내 등에 얼굴을 파묻고 히아신스가 훌쩍인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엘킨이 입을 연다.
“오늘만, 이라고 하셨죠. 유감스럽게도- 요 며칠간 당신에게 마음을 빼앗겨 무단으로 나간 탓에, 오늘은 도저히 무리네요.”
“네, 네?”
“마음은 여전히 빼앗겨 있습니다만, 또 나가면 폐하께서도 무단외출을 하실 것 같아서 말이죠.”
“-”
메스꺼움이 맥스치를 찍었다. 혼란스러움도 맥스치다. 두근거림도 맥스치다. 이래저래 맥스치를 찍고 나는 아무 생각도 할 수 없게 되었다.
내 뒤에는 훌쩍이며 미안하다고 사과하는 히아신스가 있고, 앞에는 다시 후련하게 미소짓는 엘킨이 있다.
“왜 나가시는지는 천천히 말씀해주셔도 됩니다만, 히아가 마침 휴일이니- 부탁해요. 히아.”
히아신스가 내 등에 얼굴을 파묻은 채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나를 꼬옥 껴안는 게 느껴진다. 절대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 작품 후기 ============================
제가 이래봬도 아침 5시에 기상해 치킨과 라면을 먹고 남은 국물에 밥을 말아 먹은 뒤 케이크 한 조각을 먹고 출근할 수 있는 여자입니다. 고로 ... 어제 아침 풍경... 그제 너무너무 졸려서 좀비상태로 예약글을 올리고 쓰러져 잤는데 아침에 일찍 눈이 떠지더라구요. 냉장고에서 남은 치킨을 꺼내먹고 라면을 끓여먹은 뒤 어느새 케이크를 입에 우물거리며 가방을 챙기고 있었답니다... 내일은 안 그래야지...;
갑자기 선작이 늘었어요.;ㅁ; 정말 감사합니다.
사실, 처음 루나패러독스를 연재할 때는 가벼운 마음으로 연재해볼까, 파워 자유연재★라는 느낌이었는데 선작이 늘고,추천과 코멘이 달리면서 뭔가 정말... 아아, 정말 감사해요.ㅜㅜ
해로롱님이 쿠폰... 어흐, 정말 너무 감사해요. 후원쿠폰은 따로 창을 확인하지 않으면 알 수가 없어, 혹시 놓치고 인사 못 드릴까봐 항상 걱정되요. 해로롱님, 사랑합니다!>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