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루나 패러독스-57화 (57/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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셀리안은 자라고 했지만 실제 잠이라기보다는 명상과 비슷한 느낌 속에 있었다. 시간을 잊고, 고통을 잊고-  찔렸던 심장 부근, 붕대는 감겨 있지만 아프지 않다. 죽을 만큼의 상처였는데 왜 아프지 않을까.

‘나 이런 쪽에는 문외한이니까.’

사실 별거 아니었던 걸지도 모른다. 죽을만큼 아팠지만, 칼에 찔려본 건 처음이었다. 나름대로 이곳에 와서 파란만장하다고 생각했지만 칼에 찔려본 경험은 없었다. 날카로운 검이 심장을 뚫는 감각이, 그때는 비현실적이었는데 오히려 지금은 생생하게 느껴진다. 살을 파고드는 금속의 느낌.

‘그러니까 더 이상하네.’

두근두근, 심장은 제대로 뛰고 있고, 아프지 않았다. 별거 아닌 상처라도 이렇게 아프지 않을 수 있을까 싶다. 아카인 영애에게 맞은 뺨도 엄청 아팠었는데.

‘너무 큰 상처는 오히려 아프지 않은 걸까.’

그저- 누군가가 내 심장을 꽉 쥐고 있는 것 같은 어색한 불편함만이 느껴진다. 애매한 불편함에 마치 온 몸의 신경 하나하나가 심장 부근으로 모여드는 것 같은 감각만이 강하게... 강하게...

감긴 눈꺼풀 사이로 검은 용이 지나가는 것 같았지만, 그 역시 명확하지는 않다.

*

눈을 뜨자, 몸은 거짓말처럼 가벼웠다. 다만 일어나고 싶었지만 힘이 없다.

‘아직 셀리안의 마법이 남아 있는 걸까.’

혼자 방에 누워, 눈만 도로록 굴린다.

황금색 천장, 푹신한 황제의 침대, 그가 즐겨 읽는 책들이 꽂힌 간이한 서재, 분명 엄청 좋은 나무로 만들었던 걸로 기억하는 훌륭한 책상. 삐까뻔쩍한 인테리어지만, 전체적으로 심플한 구성의 방이었다.

새삼 내 신분에, 아무리 이래저래 특혜와 호의를 받고 있다 해도 황제의 방에 누워 있는 게 말이 되나, 싶었지만 그걸 물을 만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일어나면 각오하라고 엄포를 놨던 셀리안도, 그 누구도.

다시 눈을 굴려 나에 대해 확인한다.

완전 새하얀 이불을 덮고 있다. 적당히 가볍고 무게감 있는 고급스러운 이불이었다. 어릴 때부터 그 푹신한 감각을 꽤 좋아했던 걸로 기억한다. 물론 여기서 어릴 적의 기억은 셀리안의 기억이다. 그 이불을 들추고 내 복장을 보면-

‘...민망해라.’

하얀 바지는 입고 있었지만 상반신은 아무것도 입고 있지 않아 붕대만 감겨 있었다.

‘이러고 셀리안이랑 대화를 했단 말이지.’

셀리안은, 음, 셀리안이니까. 부끄러워할 건 없겠지만 상식적으로 셀리안은 남자고 나는 여자인지라 상식적으로 민망한 일이긴 하다. 민망해야 맞겠지.

슬금슬금 손을 움직여 가슴을 감싼 붕대를 쓸어보았다. 쓸다가 슬쩍 심장 부근의 붕대 안을 들여다본다. 심장 근처에 파여진 것 같은 하얀 자국이 남아있다. 그것은 마치 몇 년 전에 다친 것이 아문 것 같은 기묘한 흉터였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는 감이 잡히지 않지만 설마 1년이 지나있거나 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데 상처만은 오래된 것처럼 완전히 아물어 있었다. 흉터는 남았지만 그건 성형수술을 하지 않는 이상 없어지지 않을 당연한 자국일 테고.

‘설마...’

치료마법을 받아본 적은 있다. 처음 이곳에 와 병원에서. 꽤 심한 상처가 의술과 치유마법을 통해 빠르게 회복되었다.

이곳의 치료마법은 의술의 보조적인 역할을 하고 있었다. 타박상 정도는 바로 자체치유가 가능하지만-엘킨이 나에게 해준 것이나 병원에서 받은 것처럼- 거기까지다. 기본적으로 대상자에게 기를 불어넣는 거라, 완전히 치료를 한다기보다는 인간의 자기치유력을 높여준다. 잘은 몰라도 현대의 서양의학보다는 한의학에 가깝다고 하겠다. 의사가 오기까지 시간을 벌 원기를 주거나, 의사의 치료가 효과를 톡톡히 보도록 해주는 것이다.

게다가, 기본적으로 남에게 자신의 기를 넣어주는 것이기에 술사의 몸 자체가 치료 마법을 꺼렸다. 간단한 보조마법임에도 치료마법을 쓰거나, 쓸 수 있는 사람이 한정된 이유가 이것이다. 자기 몸의 소모를 막는 리미트 스위치를 조절할 수 있는 사람만이 가능했다.

그렇다고 막 수명을 깎아먹는다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헌혈 하는 것과 비슷한 개념이었다.

상처를 슬슬 쓸어본다. 앞뒤로, 하얀 흉터가 있다. 역시 그때 느낀 대로 칼에 관통당해 앞뒤로 뚫린 게 맞았다. 뚫린 부근에 손가락을 대면 심장이 쿵쿵대고 있다.

‘나, 정말 죽을 뻔한 것 같은데.’

잘은 몰라 뭐라 말은 못하겠지만, 심장에 구멍이 뚫리면 죽지 않을까. 이 정도의 치료마법이 가능한 사람이 있나. 의사가 있나.

‘이 세계의 의술이 이 정도였나?’

그때 가볍게 노크 소리가 들리고 무표정의 하녀가 방으로 들어왔다.

“실례하겠습니다.”

그녀는 사무적으로 내 상태를 묻고 곧 해산물을 잘게 빻아 섞은 영양죽과 달콤한 꿀차를 건네주었다. 무언가 물으려고 했지만, 그녀는 가볍게 고개를 저으며 물러났다.

“곧 히아신스 에이나 님이 오실 겁니다.”

라는 말만 남기고 말이다.

*

다행히 마법은 약해져 조금 몸을 일으킬 수 있었다. 일어나 앉아 꿀차만 조금 마시며 방문을 바라보고 있으면, 하녀의 말대로 곧 히아신스가 들어왔다. 그녀의 얼굴은 눈에 띄게 헬쓱해 보였다. 검은 머리카락을 위로 틀어올리고, 푸른색 군복을 입고 있었는데 푸른색과 올려진 머리 때문에 얼굴은 더 작아 보이고 하얗게 보였다.

“다행이에요. 일어난 모습을 보니 안심이네.”

눈이 마주치자 그녀가 조금 웃는다. 웃으며 내게 다가와 침대 옆 의자를 끌어 가까이 앉았다. 가까이서 보면 그녀는 평상시보다 장식이 많은 군복을 입고 있었다. 공식 행사 때 입는 군복. 사절을 맞이하거나 할 때 입는 군복이라 히아신스의 여윈 얼굴만큼이나 신경이 쓰였다. 뭘까. 이 시기, 공식 군복이 필요한 행사가 있었나.

이 즈음 무슨 행사가 있었는지 머리를 굴린다, 나는 얼마나 잔 걸까도 동시에. 내가 쓰러진 날부터 가까운 시일 안에 공식 군복을 입을 행사라면 2개월 후 있는 셀리안의 생일 정도였다.

‘...2개월 안이면 좋겠는데.’

아까 1년이 지난 건 아니겠지, 하고 농담처럼 생각했지만 히아신스가 너무 여위어 있어 설마, 몇 개월이나 자고 그랬을까봐 슬쩍 겁이 난다. 휙 5개월이 지나, 아직도 히아신스가 건강히 살아 있는 거라면 이야기가 다르지만.

“...”

“...”

그녀의 녹색 눈동자는 처음 이외에는, 드물게 나를 보지 않고 바닥을 보고 있었다. 이것저것 생각하긴 했지만, 딱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화제를 찾지 못한다. 묻고 싶은 건 많았지만, 히아신스에게 물을 수 있는 건 생각보다 한정되어 있었다. 그녀가 알고 모르고를 떠나 그녀가 상대이기 때문에 더욱.

그렇게 아무 말 없이 시간이 흐르길 수분, 먼저 입을 연 건 히아신스였다.

“말랐네요.”

“네?”

“...미안해요.”

또 사과였다. 바닥을 보던 히아신스가 고개를 들면, 나를 보는 그녀의 눈동자에는 죄책감이 가득 차 있었다. 이상하다, 왜 나는 최근 죄책감 가득한 그녀의 눈만 마주하는 걸까. 히아신스 에이나는 최근 매번 윤하영을 죄책감 가득 찬 눈으로 보곤 했다.

시선을 피하고, 마주하고, 죄책감을 가지고 사과하고.

그건 너무 이상한 것 같다.

“폐하도 엘킨 대장도 아무 말 하지 않았지만, 하영을 지키지 못한 건 전적으로 제...”

“잠깐, 잠깐- 히아신스 님.”

“네?”

“히아신스 님을 두고 멋대로 뛰어간 건 저예요.”

이상하다는 생각에 서둘러 끼어들면, 히아신스의 눈이 상냥한 빛을 띠며 가늘게 접혀진다.

“그렇게 말해줘서 고마워요. 하영은, 여전히 상냥하네요... 하지만...지키는 사람의 돌발행동을 예상하지 못한다는 건 기사로서 말도 안 되는 일이에요.”

“저는, 히아신스님의 지키는 사람이...”

지키는 사람이... 아닐 텐데. 내가 그녀를 지키는 것이었을 텐데.

“...”

“하영? 아? 아아. 제 말은- 하영이 돌발행동을 했다고 하는 게 아니에요. 누군가 아는 사람을 발견했던 거죠?”

그녀의 눈이 부드럽게 나를 바라본다. 그런 걸 돌발행동이라고 하는 거겠지만, 나는 침묵했다.

자괴감 때문이었다.

나는 결정적으로 착각한 게 아닐까. 범인을 찾아 그녀를 지켜? 그녀 옆에 붙어 그녀를 지켜? 내가, 윤하영이 히아신스를 지켜?

내가? 내가 뭔데?

나는 그냥 마법왕의 전생을 기억하는 평범한 여자일 뿐이다.

“하영, 왜 그래요? 혹시 심장이 아픈 건가요?”

그럼, 어떻게 해야 했는데? 내가, 뭘 해야 하는데. 왜 히아신스 에이나의 유령은 나에게 나타나는 건데, 나보고 뭘 어떻게 하라고?

나는 왜 여기 있는 건데.

“하영?”

“감사해요, 히아신스님.”

나는 고개를 들고 밝게 웃는다. 밝게 웃으며, 히아신스를 바라보았다.

“맞아요. 아는 사람을 발견해서 그만 뛰었던 거예요. 하지만 역시 경솔했던 것 같아요.”

“그렇지 않아요. 아는 사람이 보이면, 누구라도 그럴 거예요.”

“...정말- 상냥한 건 히아신스 님이네요. 그리고- 감사는 다른 거예요.”

“다른 거?”

“저를 왕궁으로 데려와 주신 것도 히아신스 님이신 거죠? 그, 잘은 모르지만 엄청난 상처였던 것 같은데... 이렇게 일어날 수 있는 것도 히아신스님이 저를 발견해 주신 덕분, 인 거죠?”

나는 히아신스의 입을 막듯이 속사포처럼 내뱉는다. 나한테 사과하지마, 나를 지키지 못했다고 자책하지마.

다행히 히아신스는 더 이상 사과하거나 내 말을 부정하지는 않았다. 다만, 조금 씁쓸하게 웃으며 미소 짓는다.

“하영의 상처를 봐준 건 폐하랍니다.”

“?!”

나는 다른 의미로 놀라고 말았다.

*

셀리안은, 치료마법 따위 쓰지 않는다. 아니 못한다. 그는 이상하게 치료마법을 쓸 수 없었다. 다른 마법에는 재능이 있었지만 치료마법은 불가능했다.

그게 공식적인 이야기. 아마, 히아신스도, 엘킨조차도 그렇게 알고 있을 것이다.

“폐하께서?”

“저는, 그저 의사에게 보여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하영의 상처는 의사는 고칠 수 없는 거였어요.”

“...”

“사실, 저는 폐하께서 치료마법을 쓰실 수 있는 줄도 몰랐구요.”

그렇다. 셀리안은 치료마법을 쓰지 못한다. 공식적인 이야기고 맞는 이야기였다. 다만- 그것은 본인의 기를 운용한 치료마법의 경우이고, 세계의 기를 이용하는 건 가능했다. 마나 자체가 세계의 기이긴 했지만, 셀리안이 치료마법에 쓰는 세계의 기는 경우가 달랐다.

“...정말 폐하는 대단하세요.”

셀리안은 마음만 먹으면 무엇이든 고칠 수 있다. 어쩌면 죽은 사람도 살릴지 모른다.

대신-

존재하는 무언가를 희생시켜야 했다.

그걸 알게 된 게 언제였지. 8살 무렵인가 치유마법 책을 보며 가볍게 시전했었다. 혼자 방에서 키우던 작은 새가 다쳤다. 그 작은 새에게 시험해보았다. 새는 건강하게 하늘을 날아다녔다. 그런데 옆방에 있던 시녀가 앓아 누웠다. 이상해서 몇 번을 더, 누군가가 나으면 누군가가 넘어진다. 누군가가 나으면 정원의 꽃이 시든다.

노력했지만 간신히 성공한 건, 희생되는 걸 정할 수 있게 된 정도였다.

‘그리고, 쓰지 않게 되었어.’

마구 퍼다 쓸 수 있는 다른 마법과 달리, 치료마법만은 그랬다. 그래서, 셀리안은 그냥 자기가 치료마법을 쓸 수 있다는 걸 숨겼다. 사람들은 너무 어마어마한 마나를 갖고 있어 소소한 치료마법따위로는 그 마나를 다 담을 수 없다고 생각했고, 신관들은 그가 신체의 기를 타인에게 나눠주는 걸 세계가 용납하지 않는 거라 분석했다.

신관들 쪽이 맞다면 맞는 이야기이긴 했다. 대신 용납하지 않아 세계가 다른 걸 희생시키는 거였지만.

“폐하의 치유마법은 정말 대단해서... 왜 비밀로 했는지 알 것 같았어요.”

히아신스는 고개를 끄덕인다. 그녀는 그의 치유마법이 다른 무언가를 희생시킨다는 건 모르는 것 같았다.

“죽을 사람도 살리는 치유마법, 그런 걸 함부로 쓰게 된다면- 분명 나라가 혼란해지겠죠. 폐하의 마법으로 인해 키오스의 군대가 나태해지는 경향이 있다고 하니까요.”

그녀가 생글 웃으며, 부디 비밀로 해달라고 속삭인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하영이 다치고 폐하가 치유해주신 걸 아는 건 엘킨 대장과 저, 미실랭 부대장 정도입니다.”

“...그렇군요.”

뭐라 말하기 어려운 기분으로 끄덕였다. 무얼 희생시킨 걸까, 싶은 생각에 골몰해 있으면, 히아신스가 입을 연다.

그녀는 망설이는 것처럼, 약간 얼굴을 찌푸리다가 나를 바라본다.

“하영은, 세류 키스톤님과 친구라고, 하셨던가요?”

“아, 네.”

“...사실, 세류 키스톤 님의 인외생물체도 알고 있습니다.”

“셀리안이 저를 치료, 한 걸요?”

조금 놀라 바라본다. 뜬금없이 류에 대한 이야기가 나와 떨떠름해 했다만, 엔실렌의 이야기였다.

“어떻게...?”

“부끄러운... 이야기입니다만- 사실, 그 골목에서 하영을 보고 의사에게 가려고 했던 저에게... 폐하께 가라고 해준 게...”

“...”

“그 인외생물체였습니다.”

“!”

그는 셀리안을 아는 것처럼 굴었다. 그는 셀리안에게 거절당했다고 했다. 거기다 셀리안이 치료마법이 가능한 것까지 알았다고?

하지만 셀리안의 기억 속에 엔실렌이란 인외생물체는 없었다.

무심코, 나는, 셀리안 방의 창가로 시선을 주었다. 창은 굳게 닫혀 있다. 밖에서 함부로 열 수 없는 창이다.

“...”

그것을 열었던 ‘것’이 있었다.

[맞이하러 왔어.]

셀리안이 12살, 그 생일의 새벽- 창을 열고 검은 머리카락의 검은 눈동자를 가진 청년이 들어오는 기억이 겹쳐졌다.

============================ 작품 후기 ============================

에고, 월요일이다.ㅜㅜ

해로롱님 후원 쿠폰 감사드려요. 또 제 꿈 꾸고 싶으셔서 그러셨군요. 이번에는 제가 해로롱님 꿍꾸께여>ㅁ 사랑합니다!

선추코 감사합니다. ㅎㅎ 저는 요즈음 매일 꿀 같은 코멘 읽으면서 완전 즐겁습니다. 사랑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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