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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계는 특별히 신을 모시지는 않았다. 다만 세계를 모셨다. 세계가 전해주는 마나- 그 힘을 기반으로 세계 자체를 신앙으로 숭배하고 있다. 그리고, 그 신앙의 결정체가 성국 시모갈이다. 시모갈은 작은 섬나라였는데, 이 섬나라가 애매한 ‘세계’ 자체를 신앙으로 하면서도 다른 나라에게 성국으로 수용될 수 있었던 건 그 섬 어딘가에 하얀 용이 잠들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잠든 하얀 용- 용은 대부분 세계 그 자체였지만, 잠든 하얀 용은 그 용들 중 가장 오래 되었고, 그 때문에 최초의 용이 아닌가 생각되고 있었다. 그 용이 잠든 섬이기에 시모갈은 섬 자체에 마나가 풍부했고, 태어나는 자들은 모두 세계를 모시는 신관이었다.
그들은 키오스와는 우호관계에 있었다. 키오스의 선조 에피룬 크레이누는 두 마리의 용을 수중에 뒀다고 하지만, 별도로 하얀 용의 축복을 받고 태어났다고 한다. 에피룬 크레이누가 어떻게 태어났는지는 전해지는 게 없지만, 전해오는 이야기로는 그가 태어날 때 단 한 번 하얀 용이 깨어났다고 했다.
그런 이유로, 성국에게 있어 에피룬 크레이누는 하얀 용의 대리자였고, 크레이누 왕가는 대리자의 자손이었다. 무엇보다 왕가에는 에피룬 크레이누의 유산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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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을 나오자, 왕궁의 여느 복도와 별다를 게 없는 복도가 나온다. 문제는 모르는 복도라는 것이다. 대충 창밖의 풍경으로 반추하면, 셀리안의 방과도 그닥 멀지는 않은 곳 같긴 했지만. 셀리안도 나도 기억에 없는 방이라 돌아가려면 약간 헤맬 것 같기는 하다.
감에 의지해 복도를 걷기 시작한다. 덤으로 중얼중얼- 다시 셀리안 방으로 돌아가자고 강력한 소망으로 빌어보았지만, 이번에는 바닥도 벽도 내 소원을 들어주지 않는다.
그냥 나는 마나라는 거엔 아예 기대를 안 하는 편이 좋을 것 같다. 진의 말에 의하면 그 전에는 이 세계의 보통 사람보다도 마나가 없었다는 것 같으니까.
‘빨리 돌아가야지.’
복도는 조금 서늘하다. 늦은 새벽, 확실히 실제 서늘한 것도 있겠지만 내 꼬락서니를 보면 흰색 속바지에 가슴만 붕대를 가린 모습이다. 누구랑 만나면 그야말로 말이 궁해진다.
조심스럽게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걸었다. 다행히 사람은 만나지 않았다. 점점 길을 모르게 되가곤 있긴 하지만,
‘그보다, 왠지 나 지금.’
[셀리안이... 이 근처에 있나요?]
[아아, 아마도 이 방 건너편 복도에 있지 않을까 싶은데.]
여기 건너편 복도 같은데.
“왜 졸졸 쫓아오는지 모르겠군.”
“성물을 보여달라고 이야기 드렸는데 왜 거절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
역시나-
셀리안의 목소리와 모르는 젊은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내가 돌려고 하는 모퉁이 바로 옆에서 들려와 나는 모퉁이 뒤로 얼른 몸을 감춘다.
만나고 싶다고 생각한 것 같긴 한데- 이런 식은 아니다. 차림새도 차림새고. 그 방에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셀리안이 공들여 가둬놓은 것이다. 그런데 그걸 뚫고 나와 이런 곳을 어슬렁거리는 걸 보면- 그와 단 둘이 마주치면 모를까 옆에는 제3자까지 있다. 곤란하다.
“자네의 윗사람들도 더 이상 왈가불가하지 않지 않나.”
“이상하지 않습니까. 성물을 확인하러 신전에 들어선 순간, 갑자기 환자들이 나았습니다. 대신관님들은 그게 성물의 증거이자 저희를 환영하는 기적이라고 하셨습니다만-”
젊은 남자는 아무래도 시모갈의 사절단 중 한 명인 것 같았다. 그는 조곤조곤 따지고 있다.
“흐음, 유망한 대신관 후보가 아니라, 탐정이었나 보군. 무슨 이야기인지는 알겠지만, 나는 회복 마법을 쓰지 못하네.”
“그야 모르죠. 당신은 마법왕 셀리안 크레이누이지 않습니까.”
“...성물은 바깥 공기를 타면 그만큼 낡고 마는 종류인 건 알고 있겠지.”
“압니다.”
청년은 안다고 이야기했지만, 물러설 생각은 없는 것 같다.
“알지만, 크레이누 왕조가 성물을 도둑맞았다는 정보가 들어왔기에 우린 여기에 온 겁니다. 확인하지 않으면 이야기가 안 됩니다.”
“...정보라고? 그런 이야기는 오래전부터 있었어. 왕조가 마법의 힘을 잃었을 때부터-”
“폐하께서 태어났을 때 가장 분명하게 돌았었죠.”
“...”
셀리안이 가볍게 침묵한다. 젊어서 그런가, 무례하다고 해야 하나, 겁이 없다고 해야 하나. 목소리를 들으면 10대 후반에서 많아봤자 20대 초반이다.
“그래, 그런 헛소문에 휘둘리는 건가?”
“헛소문이 아닙니다.”
“아니라고?”
“네, 이번에는 직접 확인했다는 사람이 있으니까요.”
“...그거야말로 문제군. 나의 왕궁에, 감히 신전에 침입해 성물의 상자를 열어 그것을 확인할 수 있는 첩자라니- 그런 자를 시모갈에서 심어놨다는 건가.”
“신실한 대리자- 에피룬 크레이누님의 신도는 이 세상 어디에도 있습니다. 다만, 그 사람이 의지할 곳이 시모갈이었던 것 뿐이죠. 폐하의 말대로, 감히 성물의 상자에 손을 댄 것이니까요.”
그는 지지 않고 대답했다. 그리고 곧이어 말한다.
“대리자님의 동상에서 벌어진 그 불길한 사건도 어쩌면 성물이 사라져 생긴 재앙이라고 봅니다만.”
“그거야말로 관계없는 일이군. 범인은 잡혔어.”
잡혔다고? 나는 눈을 깜빡였다.
“범인도 떨어져 죽은 거겠죠. 진짜 범인인지 알 수도 없고요.”
“역시 자네는 탐정이 더 적합한 것 같군. 유감이지만, 진짜 범인이 따로 있다 해도, 성물과는 관계가 없어.”
“그건, 갑자기 환자들이 회복한 것도 마찬가지라고 보는데요.”
셀리안이 한 번 더 침묵한다. 침묵했지만, 이번에는 가볍게 뒷걸음질 치는 소리가 들린다. 뒷걸음질치다가 다시 자세를 바로 잡는 소리도. 동시에 무미건조한 셀리안의 목소리가 떨어지듯이 울린다.
“성물이 보고 싶다면 보여주지. 일단 짐이 아니라, 자네의 윗분들을 설득해서 나에게 정식으로 요청을 넣게.”
“그런-”
“시모갈의 촉망받는 대신관 후보라고 해서 봐줬지만, 더 이상 이야기한다면, 무례죄로 다스리겠다. 요한 세르기타.”
셀리안은 더 이상 이야기를 나누지 않겠다는 강한 어조로 청년을 압도했다.
요한 세르기타- 언뜻 후에 후에~ 아주 후에. 그러니까, 셀리안이 요정의 숲을 멸망시킬 즈음 시모갈의 최고신관 이름이 그 비슷했던 것 같긴 한데.
‘별로 기억나질 않네.’
그도 그럴게, 그 남자는 지나치게 융통성이 없고 대쪽 같았다고 한다. 그래서, 최고신관이 된 후 떨어진 최고신관 후보 중 한 명에게 모함 당해 죽은 걸로 알고 있다. 화형을 당했다는 것 같다. 나중에 무고함이 밝혀지고, 모함한 쪽도 처형당했지만, 뭐 죽었으니까.
곧 천자락이 펄럭거리는 소리가 들리고, 청년이 걷기 시작했다.
‘응? 응? 응?’
어느 쪽으로?
‘내 쪽으로 오잖아?’
내가 기댄 모퉁이 쪽으로 오고 있다. 화가 난 듯 씩씩대는 걸음으로 거침없이.
"~~~"
어떡하지, 어떡하면 좋지. 싶으면서도 굳어 있다. 도망갈 길은 뻥 뚫린, 내가 걸어왔던 복도뿐이다. 여기서 이 복도를 뛰면 그야말로 수상한 여자 확정이다. 남자의 발걸음이 바로 앞까지 다가왔다.
‘어떡해-!’
순간 남자를 앞질러 더 빠른 발소리가 들린다.
“폐하?”
의아한 듯한 요한의 목소리가 들리고, 그걸 무시하고 탁탁탁 거침없이 걸어 모퉁이를 도는 소리도 들렸다.
“...”
“아.”
셀리안 크레이누다. 가볍게 신음하자 그의 미간이 찌푸려진다.
그는 방금 전 꿈-이라고 할까 엔실렌의 감옥에서 본 하얀 가운을 입고 있었다. 벌어진 가운의 안쪽은 약간 중국 사람 옷 같은 긴 하얀 상의였고 목 위로는 붉은 술이 늘어져 있다. 밑으로는 갈색 바지를 입고 있었다.
셀리안의 붉은 눈이 무기질하게 나를 바라보았다. 위아래로 나를 바라보더니 한 번 더 미간을 찌푸린다. 그리고 나에게 휙 가까워졌다.
“저-”
“한 마디로라도 하면, 처형하겠다.”
에엑?
입을 다물면, 그가 입고 있는 가운을 벌린다. 그는 그대로 하얀 가운 안으로 나를 감싸듯 끌어 안았다. 체격차이 때문인지 워낙 폼이 큰 가운이라 그런지 그에게 안기는 순간 나는 완전히 감싸여버렸다.
*
셀리안의 가슴팍에 얼굴이 파묻힌다. 어찌나 꽉 끌어안는지 숨도 못 쉬겠다. 그는 새하얀 가운으로 나를 완전히 감춰버렸다. 나는 여자로서는 간신히 평균, 이쪽은 워낙 비율이 좋아 그렇지 거인 수준이다.
꽉 끌어안기자, 탄탄한 셀리안의 근육이... 아니, 이 자식은 마법왕이 무슨 전쟁왕이여.
“무슨 일인 겁니까, 폐하.”
어느새 셀리안의 걸음을 따라잡은 청년의 목소리가 들린다. 셀리안은 그대로 나를 안고 청년 쪽을 바라보았다.
“...그, 분은-”
그는 약간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황제가 자신을 앞질러가 복도에서 왠 여자를 품안에 가두듯이 안고 있다. 당황스러울만도 하다. 다행히 내 민망한 옷차림은 셀리안에게 완전히 가려져 보이지 않는 것 같다. 셀리안의 가운은 셀리안에게도 제법 넉넉한 가운이었는데 나에게는 그냥 이불이었던 것이다. 속옷차림 여자와 황제, 복도에서 껴안다- 지금도 부끄럽지만, 정말 생각도 하기 싫다.
"아아, 나의 작은 새지."
"네?"
셀리안이 장난스럽게 입을 연다. 장난스럽지만 나나 히아신스, 엘킨에게 하던 것과는 약간 다르다.
“짐의 약혼녀다.”
셀리안이 나를 감싸 안은 한 손으로 내 머리카락을 쓸어내렸다. 그 손길이 부드럽다. 마치 애정을 듬뿍 담은 것처럼.
“...아, 전장의 에메랄드.”
남자가 중얼거렸다. 내 머리카락을 보고 어째 납득한 것 같다.
“그렇다면 정식으로 인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유감스럽지만 허락할 수 없군.”
“?”
“내가 침실에서 사라지자, 그대로 나를 찾아 나온 것 같더군. 다른 남자에게 보여줄 수야 없지.”
셀리안이 나른하게 이야기한다. 그 뉘앙스에 오싹할 정도로 색정적인 기운이 묻어난다. 방금 전까지 따박따박 셀리안을 향해 따져대던 남자가 움찔하는 게 느껴진다.
"아직 어린 면이 있어서, 가끔 남의 눈을 신경쓰지 않고 나를 찾으러 오지. 곤란하지만 귀여운 약혼녀다.“
셀리안이 고개를 숙여 내 머리카락에 얼굴을 묻는다.
“그, 그렇군요.”
요한은 당황한 듯 더듬거린다. 아무래도 신관이라... 보통사람보다 과도하게 순진하다. 그가 부들부들 떠는 게 이쪽까지 느껴진다.
그는 더듬더듬 이야기하고 누가 들어도 다급한 벌걸음으로 돌아섰다. 나는 가볍게 안도의 한숨을 쉰다. 쉬려 했다.
“긴장 풀지 마라.”
셀리안이 내 머리카락에 얼굴을 묻은 채 속삭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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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추코 감사합니다.ㅜㅜ// 되게 배고픈 밤입니다만, 여러분의 선추코로 배가 불러요!!! 오늘은 불금입니다!! 다시 밤이 오면 불타게 맥주와 치킨을 먹고 말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