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64 61 =========================================================================
키오스의 성물, 크레이누 왕조의 보물- 여러 수식을 붙이고 모두 최면이라도 된 것처럼 칭송하고는 했지만. 그것은 멀쩡한 정신을 가진 사람이라면 결코 기분 좋은 물건은 아니었다. 그것은, 에피룬 크레이누의 심장이었으니까.
고대, 에피룬 크레이누는 자신의 마법과 축복을 크레이누왕조에게 남기기 위해 스스로를 신전에 봉인한다. 말이 봉인이지 자살과도 같았다. 막 부흥하기 시작해, ‘에피룬’ 그 한 사람의 힘으로 지탱하는 이 나라를 유지시키기 위해 그 강대한 마법의 피를 영원히 이 땅에 묻은 것이었다.
시체는 그대로 유지되었다. 죽었지만, 마치 산 것처럼-
그리고 수백년- 그것은 갑작스레 풍화되기 시작했다. 키오스가 ‘누가’ 왕이 되어도 엄청난 암군이 들어서지 않는 이상 멸망하지 않을 정도로 지지기반을 다진 후였다고 한다. 키오스가 제국으로서 세계의 가장 점점에 올랐을 무렵 에피룬 크레이누의 시체는 풍화되기 시작해, 사라져갔다.
글로 써진 역사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왕들만이 아는 비밀의 역사 속에서는 그렇게 서술되어 있다.
그것은 에피룬의 의지가 그가 할 일을 다 했다는, 어쩌면 넘치도록 했다는 신호인지도 몰랐다. 나머지는 완전히 후대에게 맡기겠다는 의지.
하지만, 왕들은 그걸 용납할 수 없었다.
시체의 풍화를 막기 위해 노력했다. 마법을 걸고 심지어 수상한 주술까지 사용해 결계를 치고.
결국 시체가 풍화되고 에피룬의 심장만이 마지막으로 남았을 무렵, ‘상자’가 완성되었다. 드워프가 깎아, 엘프가 축복한 상자, 마탑 연구의 결정체인 결계에 둘러싸인 상자- 그 상자에 에피룬의 심장, 성물을 넣어 보관했다. 녹빛의 아름다운 상자, 밖에서는 그 안을 볼 수 없는 상자였다.
그걸로 괜찮았다. 괜찮은 것 같았다.
문제는 왕조에서 마법의 힘이 사라지기 시작했을 무렵이다. 이미 성물은 사라진 것이고, 왕들은 즉위식 날 의례적으로 상자를 열어 그 텅빈 상자에서 성물을 확인한 척 한다는 이야기가 암암리에 들리기 시작한 건.
에피룬 크레이누가 제 몸을 이 땅에 한동안 맡긴 건 이런 걸 원한 게 아니었을 텐데- 크레이누는 제 스스로 일어날 힘이 있을 때 대비하지 않았다. 그저 옛유물에 의지했다. 이생물은 가두고, 에피룬의 심장은 봉인해, 봉인 한 척- 쇼를 한다.
키오스는 정말 불안정하기 그지없는 나라였던 것이다.
그런 일련의 역사를 가슴에 품고 셀리안은 즉위식이 끝난 후 홀로 신전에 당도한다. 의례껏 왕들이 하듯이 성물이 담긴 상자를 열었다.
상자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 초록의 신전을 나와 셀리안은 ‘역시 없었구나’하고 평범하게 생각했다. 추측대로 왕들은 없는 성물을 있다고 한 것이다. 시모갈도 아마 같이 짠 거겠지. 성물이 사라져, 이 세상에 대리자의 흔적이 한 점도 남지 않았다는 건 그들에게도 곤란한 일일 테니까.
그렇게, 납득하면서도 마음 한 켠이 불편하다.
생각을 곱씹고 곱씹으며 걸으면 앞으로부터 그의 아버지, 다리스 크레이누가 걸어오고 있다. 눈이 마주친다. 아직 젊은 나이로 그는 왕위에서 물러났다. 선왕으로 불리기엔 아직 전성기의 나이, 다만, 그는 지나치게 늙어보이고 지쳐보였다.
다리스는 셀리안의 눈치를 살폈고, 거의 이야기도 걸지 않았다. 않았지만, 드물게 그날은 말을 걸었다.
“그래, 성물은 잘 있더냐.”
“네?”
그 목소리에 셀리안은 눈을 둥글게 뜬다. 눈이 마주치자, 다리스의 눈에, 셀리안 앞에서는 처음으로 생기가 돌고 있었다. 언제나와 같은 무기력한 무표정이었지만, 약간 들뜬 것 같이 변한다. 이죽이는 것도 같다.
“왜 그러느냐, 성물이 잘 있는지 묻지 않느냐.”
“그-”
셀리안은 당황해 자신의 아비를 보았다. 저게 무슨 소리인가-
자신에게 기묘한 열등감을 품은 남자, 남자 답지 못한- 그릇이 작은 남자가 하는 장난인가, 하면서도- 쉽사리 입은 떨어지지 않는다.
“잘 있었습니다.”
왜 그렇게 대답한 걸까. 왜 그렇게 대답해야 한다고 생각한 걸까.
“그렇구나.”
아버지란 자의 입꼬리가 말려 올라갔다. 알 수 없다고 생각했던 그 표정은 명백하게 셀리안 크레이누를 비웃고 있었다.
61
‘진 거짓말쟁이, 역시 류는 바보였어.’
바보가 아닌 이상 궁에 나타날리 없다고 했건만 그 류가 바로 뒤에 있다. 에피룬이란 이름을 달고 뻔뻔하게 나타났다. 저건 분명 류다. 류가 분명하다.
‘하지만 왜 셀리안은 모르는 걸까.’
모르는 척하는 걸까, 유력한 생각이긴 하지만 이치상 맞지 않다. 무슨 주술을 쓰고 있는 게 틀림없다. 셀리안은 대단한 마법왕이긴 하지만, 사람이니까. 류 역시 용을 수중에 놓을 정도의 마나를 다룰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의 허를 찌르는 것도 가능할지 모른다. 아무래도 이상하긴 했지만.
"제가 감히 이 이름을 갖고 있는 게 죄송할 정도입니다.”
그보다, 셀리안이- 그는 이제 명확히 느낄 수 있을 정도로 굳어 있었다. 이 정도로 붙어 있는 나조차도, 내가 그의 전생을 모른다면 알지 못할 만큼 능숙하게 감정을 감추고 있던 그가 명확하게 굳어-
“...”
나는 나도 모르게 마주 꽉 그를 껴안았다. 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그걸 느낀 셀리안의 팔 힘이 느슨해졌다.
“복도에서 계속 이러고 있는 것도 뭐하군. 먼저 돌아가겠다.”
“에?”
“폐하?!”
셀리안이 무심한 목소리로 이야기한다. 그리고, 곧 나는 언젠가 한 번 느꼈던 하얀 빛에 감싸여 그 안으로 휩싸이듯 침몰했다.
어쩐지- 순간적으로 에피룬 윈드아의 이름을 가지고 다시 나타난 류가, 나를 노려보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생각했지만, 셀리안에게 안긴 채라 알 수 없는 일이었다.
*
도착한 곳은 셀리안의 방이었다. 셀리안은 나를 안고 한참 그대로 있었다. 엄밀히 말하자면 그는 팔 힘을 풀었지만 여전히 나를 감싼 채고, 나도 경황이 없어 팔을 풀지 않고 있었다.
사실, 경황이 없었다,고 말하는 건 살짝 핑계였던 게, 나는 차마 그를 끌어안은 팔을 풀 수가 없었다. 무서웠다. 뭐가 무서운지 모르겠지만, 내가 이 팔을 푸는 순간 지금 내가 알고 있는 젊은 왕이 달아나기라도 할 것 같은 기묘한 두려움, 그리고 자연스럽게 그와 떨어져 바라본 왕의 얼굴에 내가 줄곧 상상했던 ‘셀리안 크레이누’가 자연스레 내려앉았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손을 놓을 수 없다. 이건 셀리안이 아니라 내 쪽이 분명 제정신이 아니었다.
엔실렌과 만나, 사제들을 마주해, 류에게 그런 이야기를 듣고 영향을 받은 건 오히려 나인 것처럼 말이다.
“바람 피는 것 같군.”
“바람이요? 폐하가요?”
그의 물음에 나는 황당해 하며 입을 열었다. 심각했던 내가 바보 같을 정도로 멍청한 질문이었다. 과연, 히아신스 입장에서는 일련의 일이 바람으로 오해할 수도 있긴 하겠지만, 지금 나올 이야기인가 싶다.
“아니, 그대가 말이야- 그보다.”
방금의 농담을 핑계로 고개를 슬쩍 든다. 한순간의 행동이지만 가슴이 술렁거리고 조마조마한 기분이다.
‘아.’
셀리안의 표정은 무표정했다. 평상시처럼 장난스럽지도 않고, 두려워했던 ‘셀리안 크레이누’도 아니었다. 장난 같은 말을 하면서 무감한 눈동자로 나를 보고 있었다. 감정이란 한 점도 섞여 들지 않는, 일부러 섞여들게 하지 않은 것 같은 그런 눈동자.
“한 마디라도 하면, 처형하겠다고 한 것 같은데.”
“폐하가 이상한 말을 해놓고... 그래서, 처형하게요?”
“생각 중이야.”
그는 물끄러미 나를 보며 이야기했다. 이야기하다가 지어낸 것처럼 웃었다.
“언젠가 이야기했던 것 같은데.”
“?”
“뜬금없이 기다렸다며 다가오는 이종족이나 지나치게 오래 산 인간은 질색이라고.”
꿰뚫어보는 것처럼 바라보는 눈동자였다. 그가 무슨 생각으로 그런 말을 하는지는 알 것 같았다. 용인 엔실렌이 치료하고 싶어하는 여자-가 혹시나 셀리안 크레이누를 셀리안 크레이누로 보지 않는 또다른 무언가라고 의심하는 게 첫 번째겠지. 두 번째는 저런 말을 이용해 나를 떠보는 것이다. 첫 번째의 해답을 알기 위해 부러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물론 나는- 아니었지만. 적어도, 나는 셀리안 크레이누밖에 모른다. 그를 볼 때 겹쳐지는 건 오로지 과거와 미래의 셀리안 크레이누로부터 밀려오는 짜증뿐이었다. 짜증과 알 수 없는 불안감과 두려움- 그 기묘한 감정이 일종의 연민에 기인한다는 게 또 짜증스럽다. 결국 그는 나에게 짜증스러운 남자였다.
*
시선을 마주하길 어느 정도, 침묵이 길다. 지루하고 지리한 시간이다. 차라리 대놓고 묻는다면 다 대답해줄 수 있을 것 같을 정도로 긴 시간. 나를 살피듯이 가늠하던 셀리안이 느릿느릿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 그대도 동상을 조사하고 있었던 것 같더군.”
“...아.”
그것은 그가 나를 추궁한다면 가장 먼저 이야기할 거라 생각했던 화제 중 하나였다. 변경으로 가는 마차를 탄 기록도 있고, 말마따나 엘킨이 나를 계속 쫓아다닌 것도 있다. 오히려 이제와서라는 느낌이 들 정도이다. 나로서도, 동상과 추락사건에 대해서는, 짚고 넘어가야 했다. 추락사건이 해결되었다. 범인이 떨어졌다- 지금까지의 이야기에서 유추할 수 있는 몇 가지. 나는 모르는, 과거에는 없던 이야기들. 당겨진 시기-
“그렇게 그 동상에 관심이 많다니-”
다만, 지금이 내가 궁금해하던 것을 알아낼 타이밍은 아니었다. 질문의 의도는 동상의 추락사건 자체를 위해서라기보다는 명백하게 ‘나’란 인간의 정체-랄 것도 사실 없지만-를 알기 위해 떠보는 것이었다. 그것은 그 다음 이어지는 셀리안의 말로 명확해졌고, 나는 한없이 기분이 나빠져버렸다.
“확실히- 그 동상이 제법 잘생기긴 했지. 관심을 가질만도 해. 신관도 짐의 동상이라고 착각할 정도가 아닌가.”
“...이.”
“뭐?”
“...”
멍청이, 멍청이... 나는 입을 다물고, 내가 무슨 수상한 말이라도 했는지 잡아내려는 셀리안을 노려본다.
이 멍청한 남자는 방금 전까지 가면처럼 무표정했던 얼굴을 장난스럽게 꾸미며, 연기하며, 순수하게 궁금한 것 같기도 하고, 그저 농을 거는 것 같기도 한 가벼운 태도로 자학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다.
‘바보-’
나의 얼굴이 눈에 띄게 일그러지면, 그 일그러짐에 셀리안의 눈동자에 슬몃 의아함이 스민다. 그가 동상을 빌미로 내 반응을 보려고 한 건 알겠다. 가볍게 방금 전 신관이 했던 이야기를 섞고 있다. 있지만.
내 눈에는 지독한 자학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가학적이라 해도 좋다. 자학적이고 가학적이고, 다른 방법이 있는데도 굳이 그런 말로 나를 떠본다. 마치, 자신에게 이딴 이야기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허세를 부리듯이. 어린애처럼.
나에게도 다른 많은 고민이 있었는데, 심지어 방금 전 그 남자가 정말 류였는지 걸리는데도. 그저 나는 내 앞에서 이런 발언을 하는 셀리안 크레이누가 견딜 수 없어진다.
“...짐이 잘못 듣지 않았다면... 방금 멍ㅊ...”
“...하나도 안 닮았어요.”
“응?”
“자기 외모가 조각같이 잘 생겼다고 생각하는 건가요? 빈말도 구분 못 하나 보죠?”
셀리안이 눈을 깜빡인다. 새빨간 눈동자가 나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멍청한 얼굴, 역시 멍청한 남자.
실상 나는 핀트가 어긋난 이야기를 하고 있었지만, 멈출 수 없다.
“거울이나 보고 오세요.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해요? 폐하는 ‘당신의 자다 깬 얼굴도 예뻐’라는 말에 넘어가는 소녀랑 동급이에요.”
“비유가 이상하군.”
셀리안은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다. 바보, 멍청이-
“...닮지 않았나?”
“진짜- 언제까지 말하게 할 거예요. 폐하는 폐하가 조각 같은 미남이라고 생각하시나 보죠?”
“...내가 더 잘생겼지- 음... 그래도 언뜻 닮긴 했지?”
이런 엉뚱한 말대답에도, 멍청이라고 했는데도 멍하니 내 말에 끌려오고 있다. 바보바보바보, 그딴 거에 이렇게 흐트러지니까 류가 신난 듯이 그런 이야기를 한 거잖아. 얼마나 멍청한 표정을 지었으면- 이 멍청이!
당신이 아닌 척하면서도, 이런 이야기에 그 나이 되도록 휘둘리고 있으니까 엘킨의 사소한- 긍정에 넘어가는 거잖아. 반하고 마는 거잖아. 쉽게 마음을 빼앗긴 거잖아.
“아니요.”
“...”
“아닙니다. 전혀 닮지 않았어요. 폐하, 못생긴 걸요.”
어째서, 그는 나에게 이런 이야기를 듣고 있는 걸까.
어째서, 나는 이런 이야기를 하는 걸까.
의문이 들면서도 사무치게- 자학적인 이야기를 하는 와중 그의 붉은 눈에 깃든 분노와 짜증, 냉정함 속에 희미한 절망과 실망이 느껴져 나는 몇 번이고 이야기한다.
터무니없는 대응이다. 그저, 나이기에 말할 수밖에 없고 셀리안 크레이누이기에 이토록 바보 같은 표정으로 그저 들을 수 밖에 없는 헛소리.
“...하하”
셀리안이 약간 웃는다.
“그래, 짐이 더 낫지.”
“못생기셨다니까요.”
“강한 부정은 긍정으로 알겠어.”
셀리안의 목소리가 장난스럽게 풀어진다. 이번에는 정말로 풀어졌다. 풀어진 목소리로 그는 나를 내려다보았다. 그의 품에 안긴 채 붉은 눈과 마주쳤다. 내 안의 그가 잊은 셀리안 크레이누, 이곳에서는 너무 익숙한 내가 아는, 셀리안 크레이누의 그 시선, 나는 비로소 안도와도 비슷한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 작품 후기 ============================
주중에는 야근하고 들어와 힘들어서 빠지고, 주말에는 놀고 놀다 빠지고, 글은 대체 언제 올릴 거니, 하고 누군가가 물었지만 항상 잠이 승리하고 마는 이 기묘함... 또르르
선추코 주셔서 항상 감사합니다.>ㅁ/ 지하철이나 버스에서 1시간 서 있어도 코멘트 읽다 보면, 시간이 금방 가요. 반복해서 읽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