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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
처음으로 느낀 이 세상에 대한 사랑스러움을 곱씹으며 머리 끝까지 이불을 덮었다. 이불을 덮으며 눈을 감았다. 정신이 없어 깨닫지 못했지만 몸도 마음도 피곤한 하루였다. 곧 안온하게 잠으로 잠겨들어갔다.
깊게 깊게, 의식이 떨어져 새까맣게- 수마라고 생각했지만 그것이 그저 거대하고 깊은 어둠, 아니 검고 검은 무언가라는 걸 인식했다. 그것은 나를 삼켜 밀어떨어뜨린다. 아니 끌어들였다. 밑으로 밑으로- 저 밑으로-
'아-'
의식이 돌아오면 검은 공간이었다. 그저 검고 검은, 악의와 적의로 공들여 만든 감옥- 그곳이 어디인지 안다. 이곳이 어디인지 안다. 텅빈 채 마치 상자 같기도 하고 그 자체가 동그란 구같기도 하고 뭐라 설명할 수 없는 새까만 공간,
엔실렌의 감옥이었다.
“와줬구나.”
검은 공간에 엔실렌이 묶인 채 웃고 있다.
와주긴 뭘-
그가 쇠사슬에 감긴 팔을 들어올린다. 그 순간 내 몸이 휙 끌려가듯이 당겨진다. 분명 착각이다. 몸 따위는 없다.
“정말, ‘너’는 지독해.”
엔실렌은 칭얼거렸다. 말은 태연하지만 그는 어젯밤보다 좀더 지쳐보였다. 이 공간 자체가 힘 있는 이생물을 가두는 공간이었다. 그들을 압박하고 속박하기 위해 만들어진 공간, 아마도 이 공간은 용에게는 더없이 비좁고- 엔실렌을 보던 셀리안의 눈동자를 기억하기에.
"하하, 영혼이 흔들리네. 나를, 동정하는 거야?"
엔실렌의 입가가 휘어졌다. 줄곧 고통을 견디면서도 여유있는 척 하는 웃음이었다면 지금은 그의 얼굴에 맞게 어린애다운 웃음이다. 그는 이상하게 기뻐보였다. 이상하기도 하지.
“같은 ‘너’인데도 ...‘너’는 무르군, 몸도 마음도 약하기 그지없어.”
끝없는 검은 공간, 있는 건 엔실렌 뿐. '나'는 없다. 여기는 그 혼자만이 갇힌 공간이다. 그럴 터였다.
그가 쇠사슬에 감긴 팔을 움직일 때마다 마치 나를 쓰다듬는 것 같은 느낌도, 모두 착각이겠지.
'이상해.'
마치 나와 그가 가까운 자리에서 마주보고 있는 것 같은 감각이다. 사랑스럽다는 손길이었다. 그게 소름끼친다고 생각하면서도 나는 물러설 수 없었다. 물러날 몸 자체가 없기도 했지만-
지쳐보이는 어린 아이, 나를 사랑스럽다는 듯이 그립다는 듯이 보는 상처 입은 눈동자-
“역시 류가 쓸데없는 짓을 했어. 내 것으로 만들었다면, ‘너’의 영혼은 이 내가 스러질 때까지 유지될 수 있을 텐데.”
그의 몸이 기묘하게 뒤틀린다. 검게 녹아내린 그 틈으로 그의 검은 눈동자가 이채를 띤다. 모습은 어린 아이, 아니 어린 아이의 모습은 금시에 노인의 모습으로 변했다.
“'널' 위해 무얼 할 수 있을까 생각해봤어. 노린 거긴 했지만, 겁만 주고 말았잖아. '넌' 약한데."
자상한 할아버지처럼, 노인은 조곤조곤 내게 속삭여왔다.
"약한 ‘너’를 위해, ‘너’를 괴롭히려 했던, 그 여자도 함께 처리해봤어."
무슨 소리일까.
"생각해보면 너무 얽매였던 것 같아. 그 시절과 똑같은 상황을 재현하면 ‘네’가 조금은 관심을 가져줄까 했지만, 저 ‘너’는 꽤 완고하고, 고집도 세고. 봐주지 않을 거라면, 슬슬 이런 일을 하는 것도 질리고. 의외로 관심을 가지는 게 연약한 ‘너’였으니까... 네가 죽는 건 싫은 걸. 나."
'너'는 죽으면 정말로 끝이니까, 라고 이어 중얼거린다. 죽으면 끝이다. 그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건지, 점점 모르게 된다.
"다 정리했어. 정리했지만- 그 여자는 외양도 내 취향이고, ‘너’를 괴롭히려고 했으니까- 마지막으로 ‘널’ 위해 처리해봤는데.”
잘 했지, 하고, 알 수 없는 이야기를 중얼거리며 그는 나를 끌어안았다.
"혹시 아직 몰라?"
애초에 가까웠지만 더 가까이 끌어안겨진다. 나는 여기에 없건만, 완전히 노인에게 끌어안겨-
"내가 처리했어, 그 여자- ㄹ-"
영혼 채로 끌어안기는 것 같다고 생각하면-
“그대 안에 남아 있는 건 나만이 아닌가 보군.”
셀리안의 목소리가 울렸다.
*
눈을 떴다. 눈을 뜨면 저녁 무렵이었다.
다시 잠든 게 새벽이었으니 저녁까지 잔 것이다.
'엄청 잤네.'
엄청 잔 것 같은데, 문제는 몸이 노곤하고 피로는 가시지 않았다는 것이다. 눈이 가물거린다. 이상한 꿈인지, 현실인지 방금 전 봤던 엔실렌을 생각하며, 자야 할지 자지 말아야 하는 건지 고민한다. 눈을 깜빡였다.
"또 자봤자, 끌어들여질 걸?"
"!"
“그대는, 눈을 감아도 떠도 바쁘군. 쉬라고 자리를 피해준 건데 말이야.”
셀리안 크레이누다. 꿈 속에서 그의 목소리를 들었는데 현실에 그가 있다. 그는 빙그레 웃는다.
“왜 여기에...”
“내 방인데 있을 수도 있지.”
“치한.”
“내 방에 들어오는 게 치한인가.”
아니, 치한 맞다. 그의 방인 건 둘째치고 지금 그는 내가 자는 침대 위에 냉큼 올라와 비스듬히 옆으로 누워 있었다. 내가 덮은 이불 위에 나른하게 누워 팔을 괴고 나를 보고 있었다. 그는 뭐가 좋은지 킥킥 웃으며 내 머리를 쓸어넘겨 준다.
“그 용은 그대가 퍽이나 좋은가 보군.”
“...”
“이것도 안 놀라나, 그게 용인 거, 알고 있나 보지. 네 꿈은 정말 대단하군. 얼마나 알고 있는 걸까.”
아.
정말, 이 남자는 얼마나 나를 떠볼 생각인지 모르겠다.
“그러지 좀 마요. 생각하기 귀찮단 말이에요.”
자꾸 이렇게 떠보시면 머리가 아프다. 내 성격상 그냥 넘어갈 수도 없고. 부루퉁하게 대답하면 그는 어깨를 으쓱한다.
“오히려 고맙다는 인사를 받을 판인데- 그 용한테 영혼이 희롱당할 뻔했잖아.”
“희롱...”
“뭐, 그냥 끌어안기만 하고, 별걸 할 힘은 없는 것 같지만.”
"...그,...? 뭐하는 거예요?"
뭔가 물어야 하나, 말해야 하나 헤매며 입을 열려고 하면 셀리안은 비스듬히 누운 채로 오른쪽 검지 손가락을 빙글빙글 돌리고 있었다. 그 손가락을 따라 희미한 빛의 가루가 별처럼 빙글빙글 돌며 내가 덮은 이불 위로 툭툭 떨어지고 있었다.
“예쁘지?”
“...”
예쁘냐니, 뭘 하고 있나 잠시 관찰했지만 그냥 마나 낭비인 것 같다. 의미없는 손장난이다. 누구는 감옥에 가둬놓고 노골노골 녹아갈 때까지 괴롭히면서, 참 속편하시다.
‘나도 모르게 엔실렌 편을 들고 말았네.’
전과 같이, 만나봤자 기분 나쁜 꼬마, 아니 생물이었지만 지독하게 약해져 기대듯 나를 끌어안는 모습은 마음에 걸린다.
“표정하고는- 여자들은 좋아하던데, 까탈스럽긴.”
셀리안은 내 표정을 어떻게 해석했는지 혀를 차며 내 이마 위로 손가락을 옮긴다. 장난을 치듯 이마 위로 빛가루를 뿌려댄다. 이불 위에는 툭툭 떨어지던 빛가루지만 내 이마 위에서는 피부에 닿기 전에 부서져 사라진다.
기억속 그는 종종 이런 마나 낭비를 하곤 했는데 이게 또 여자들이 낭만적이다느니 난리를 쳐서- 이 몹쓸 황제님은 약간 오만해진 게 틀림없다.
그는 내게 무언가 바라는 눈으로 계속해서 손가락을 돌린다.
확실히 아름답긴 하다, 아름답고 쓸데없고-
'진짜 허세만 쩐다니까.'
손으로부터 뻗어나온 빛가루는 내 이마 위에서부터 부서지더니 곧 침대에서 반짝이던 빛가루도 순서대로 사라져갔다.
마지막 빛가루가 사라지자 셀리안은 일부러인 것처럼 크게 한숨을 쉬었다.
“여전히 건방진 눈으로 보는군, 짐이 좋은 마음에서 온 건데.”
"좋은 마음?"
"그 용에게서 구해줬다니까. 그대는- 멍청이에다가 귀까지 안 좋군. 아니, 이 경우 기억력인가."
"...누가 멍청인데요."
"?"
그가 보기에는 내가 멍청이에, 엘킨이 보기에도 참 위태로운 아가씨인 것 같지만 굳이 말하자면 나는 셀리안이 더 위태로웠다. 렌에 대한 그의 대우는 부조리하다. 부조리하고 광기에 차 있다. 그렇게밖에 생각할 수 없다. 그가 이러니까 내가 그 생물을 쓸데없이 동정하게 되는 것이 아닌가. 당신이 신경쓰여, 당신의 눈에 서릴 광기가 신경 쓰여 당신을 만나고 싶다고, 바라버린 게 아닌가. 이 방이 눈치 챌 정도로-
'봤으니까 됐어.'
딱히 해줄 것도 없고. 나는 얼른 감사를 전하고 이 남자를 내쫓기로 했다.
“아, 네- 감사합니다. 저 다시 자도 될까요.”
“미인도 아닌데 잠꾸러기군.”
“...”
“후후, 더 놀리고 싶긴 하지만- 조만간 엘킨도 올 것 같으니 얼른 끝내지.”
"!"
심드렁했던 마음이 알람소리라도 들은 것처럼 거세게 뛰기 시작했다.
*
“에, 엘킨이요?”
엘킨이 왜? 라는 의문과 함께 심장의 고동소리가 빨라진다. 그가 올지도 모른다는 그 이야기만으로도 얼굴이 붉어지기 시작했다. 내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말을 더듬자 셀리안의 여유작작했던 얼굴이 약간 미묘해진다.
미묘해져, 그 감정을 알기 어렵다. 아니, 언뜻 화가 난 것 같기도 하다. 왜?
“설레는 건 좋은데, 끝낼 건 끝내고 설레도록 하지. 어차피 엘킨이 오면 많이 할 수 있잖아.”
“왜 기분이 나빠진 건데요?”
“글쎄.”
짐도 고민 중이야, 라고 짧게 일갈한 그는 분위기를 바꾸고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추락사건은-”
셀리안이 입을 연다. 그는 무감한 표정이다. 나는 생각도 못한 단어 선택에 긴장했다. 엘킨에 대한 마음은 여전히 나를 혼란스럽게 했지만, 실제 눈앞에 있는 것도 아니다. 지금은 셀리안이 문득 내뱉은 단어 집중할 수밖에 없다. 집중하게 된다.
“더이상 일어나지 않아.”
“네?”
단호한 그 말에 눈을 동그랗게 뜨자 그가 어깨를 으쓱였다.
“아니, 그냥 지켜준다느니 약속한다느니로는 그대가 안심하지 않을 것 같아서 말이야.”
“...”
"그대는 의심이 많으니까"
의심, 이라고 할 건 없지만. 맞는 이야기기도 했다. 엘킨과 셀리안이 히아신스를 죽게 하지 않겠다고 해줘서, 진범을 찾겠다고, 안심하라고 말해줘 기뻤다. 든든했다. 하지만 불안했다. 아직 셀리안은 엘킨을 사랑하게 되지 않았으며 진범은 잡히지 않았으니까.
“어떻게 확신하시나요. 한 번 말했지만, 지금 범인인 남자는-”
“진범이 아니란 말이지.”
고개를 끄덕인다. 셀리안은 어떻게 확신하는 걸까. 진범을 잡은 걸까. 고민하고 있으면 그의 시선이 이불에 덮인 내 가슴께에 닿았다.
“...어딜 보는 건데요?”
“이불을 투시하고 있지. 작구만.”
“!”
“농담이야. 그런 쓸데없는 데 마력을 쓰진 않아.”
빛가루 뿌리며 마나 낭비하는 건 괜찮고?
“일단, 동상 주변으로 좀더 강력한 마법진을 펼쳐놨어.”
“...”
“마법진이라 하면- 평상시와 동일하게 오고 갈 수 있지만, 사람이 동상에서 떨어져도 죽지 않는 그런 마법진이지.”
"..."
나는 그의 이어지는 말에 실망했다.
이건 역사에 있다. 그렇기에 나는 안심할 수 없다. 이 마법진은 뚫리니까. 첫마법진이 한달 걸렸다면, 두 번째는 일주일만에 뚫린다. 게다가 이번에는 첫마법진이 일주일만에 뚫리고 말았다. 달라진 역사가 더 최악이기에 더욱.
“흐음, 감히 짐에게 그런 표정을 짓는단 말이지.”
그가 내 눈을 보더니, 머리를 벅벅 긁는다. 그의 황금색 머리카락이 흐트러진다.
“짐의 마법을 의심하다니, 건방져서 신선하긴 한데, 좋아. 좋아. 좀더 확실한 답을 주지.”
“확실한 답?”
“그래.”
셀리안의 붉은 눈동자가 비스듬히 침대를 빗겨 바닥을 향했다. 나도 그 시선을 따라 눈을 내린다. 바닥 아래, 바닥 아래에 있는 것에 생각이 닿는다.
“진범은 잡혔다.”
“잡혔다...고요?”
“그리고, 그 진범은 현재, 짐에게 잡혀 제가 죽였던 사람들보다 더 많은 사람을 돕는데 힘 쓰고 있지.”
"?"
"바로 이 아래에서, 그대를 구하고 사람들을 구했지."
"!!"
가벼운 목소리로 말했지만, 셀리안의 눈은 다행히 탁하지 않았다. 어제까지만 해도 나를 불안하게 했던 광기는 어느새 자취를 감췄다. 본성이 올곧은지 올곧지 않은지는 모른다. 나도 인정하는 바지만, 나는 그에 대해 지나치게 편견이 많았다. 다만, 올곧음을 추구한다는 건 알고 있다.
셀리안의 시선이 닿은 바닥은 엔실렌의 감옥, 그리고 구도상으로 그가 묶여 있는 자리에 가까운 바닥이었다.
바닥 밑에는 아마 그냥 객실과 서재들이 있다. 하지만 더, 더 밑으로는 이생물체를 가두는 감옥, 감옥 속에는 그가 갇혀 있다. 녹아내리는 피부, 콜타르처럼 끈적하게 검게 녹아내렸다. 뭔지 모르지만, 단지 가둬둔 게 아니었다. 이용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다.
‘그냥 화풀이라고 생각했는데.’
역시 난 그에 대해 너무 나쁘게 보는 건지도 모르겠다.
실제로도 그저 지긋지긋한 용에 대한 화풀이일지도 모르지만, 셀리안 크레이누는 오직 부조리만으로 가득찬 짓은 하지 않는다.
죄에 대한 대가, 사람을 추락시켜 죽이고 죄없는 이민족 청년을 범인으로 몰아 죽게 한 죄, 그 대가로 누군가를 치료한다고.
그리고, 그의 말은 곧-
“진범이... 렌-”
나는 나도 모르게 그 이름을 입에 냈다.
“...”
셀리안의 시선이 느껴져, 핫, 하고 입을 다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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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명 출근할 때는 이~~만큼 올려야지 했는데 퇴근하니 요만큼 올리게 되네요.ㅜㅜ 졸려서... 사실 별로 끊을 만한 타이밍은 아닌데 뒤에는 좀더 손봐야 해서...ㅜㅜ 에고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