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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료가 끝난 후, 셀리안의 방에서 나와 처음으로 한 일은 칼미온에 이별인사를 하는 일이었다.
내 거부감과는 별개로 셀리안은 노선을 정했고, 나도 '말도 안돼'라는 감상 외에는 셀리안의 대안을 거부할 다른 근거가 없었던 것이다.
의외로 모두 돌아온 나를 환영했고, 작게나마 귀족으로 복귀된-복귀될 것도 없지만 표면상으로는- 축하해주었다. 심지어 아카인 가에 대한 적의를 불태우며, 꼭 도망친 아카인 영애를 찾아내 한 방 먹여주겠다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 후 옮겨진 곳이 왕궁의 귀빈실이었다. 귀빈실!!
엘킨도 셀리안도 히아신스도 연회준비로 바빴고 류와 아카인 영애의 행방을 찾느라 나를 찾아오지 못해, 그간 나는 깐깐한 느낌의 여자선생과 그곳에서 함께 지냈다. 왕궁은 시모갈을 주연으로 한 연회를 열 예정이었고 나는 그곳에 참석해야 했기에 본격적인 일상이랄 것도 없었지만, 하여튼 며칠은 앞으로의 일상이 이런 거다의 예고편 같은 하루하루가 이어졌다.
함께 지낸 여선생은 하녀의 예절이 아닌, 귀족 영애의 예절을 가르치기 위해 방문했는데 대접이 사뭇 달랐다. 예전, 변태 로랑이 남자인 것도 있겠지만, 내 입장이 달라진 이유가 가장 컸으리라.
하루드와 결탁한 매국노 귀족 아카인에게 몰려, 결국 아비와 헤어지고 치욕스러운 기록까지 덮어쓴 소녀. 하녀로 자라고 일한 불쌍한 귀족 아가씨- 였으니까.
그녀는 깐깐한 사람이었지만, 나에게 연민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내가 갖고 있는 셀리안의 기억에 근거한 예절도 타고난 귀족 아가씨의 자질로 여겨줬다. 타고난 게 어디 있겠냐만은, 그녀는 귀족이란 날 때부터 그 자질과 재능을 타고 난다는, 조금 심한 태생 신봉자였다. 그런 사람의 사고방식이 내게 도움이 되다니, 예전이라면 가장 큰 경멸자가 될 스타일이 나쁘지 않은 조력자가 된 건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게다가 나는 엘킨의 고백을 곱씹지 않기 위해 더 열심히 예절 및 전반에 대한 수업에 몰입하려 했다. 그것도 인상이 좋아지는데 한 몫을 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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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회가 다가오고, 나는 조금 수수하면서도 어린아이 같지 않은 드레스를 선택했다. 적당히 예법에 벗어나지 않으면서도 나를 돋보이게 할 수 있는 드레스- 배정된 하녀, 라는 분에 넘치는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꾸민 뒤 거울을 보면, 제법 예쁘장한 동안의 귀족 아가씨가 있었다.
아팠기 때문인지 허리가 더 잘록해졌는데 나는 오히려 그 점을 부각시키기로 했다. 누누이 이야기하지만, 나는 몸매가 나쁘지 않다.
‘아니 좋아.’
셀리안 그 자식이 없다고 연호해서 숨겨왔던 콤플렉스가 슬그머니 올라왔지만- 나는 가슴이, 그래 꽤 없지만. 어느정도 있다면 있는 터라 몸매 비율과 옷을 입으면 가슴도 예쁘게 보이는 스타일이었다.
'착시군'이라고, 느물느물 웃을 셀리안이 머릿속에 떠오르는 건 별개로 말이다.
‘파렴치한 왕이야.’
옷도 없이 붕대로 둘둘 감아 지나치게 작아보인 것이다. 그쪽이 착시라고.
누구에게 화내는 건지, 조금 스스로가 한심하다고 생각하고 있으면 노크 소리가 들렸다.
히아신스로부터 강력 추천한다는, 배는 비싸보이지만 결코 굿 초이스가 될 수 없는 선물이 배달된 건 치장이 끝날 무렵이었다.
*
테라스 문의 창에는 딱 봐도 예쁘고 귀엽고- 한층 어린애같이 보이는 벚꽃색 드레스를 입은 귀족 아가씨가 얼굴이 벌개진 채 우왕좌왕 하는 모습이 비춰져 있다. 그리고 그 바로 뒤로는 푸른 기사, 엘킨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
나는 정작 본인과는 눈도 마주치지 못하면서 창에 비친 엘킨의 푸른 눈과 계속 아이컨텍을 하고 있다. 하고 싶어서 하는 건 아니고- 엘킨이 내 눈을 빤히 바라봐서 도저히 피할 수가 없던 거지만.
창에 비친 엘킨, 엘킨의 푸른 눈에 비친 윤하영, 아마 내 눈에 다시 반사될 유리 속 엘킨.
“보고 싶었습니다.”
한 번 더 엘킨이 낮게 속삭인다. 나는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자연스레 몸을 떨었다. 피부가 곤두선다.
그는 기어이 내 입에서 그 말을 듣고 싶어하는 것 같았다. 아니 보고 싶지 않았다니까.
‘보고 싶었을지도 모르지만.’
이라고, 자그마하게- 엘킨에게 푹 빠진 내가 내 안에서 속삭였지만 나는 입만 달싹였다.
그는 끈기 있게 기다린다. 나를 사랑스럽다는 듯이 내려다보는 숨기지 않는 시선. 누가 그랬지. 그는 노선을 정하면 일직선이라고.
"하영-"
다시 한 번, 낮게, 심지어 나를 부르는 그 목소리-
"...저, 저도-"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 거야!!
비명처럼 스스로를 만류했지만 스스로는 막을 수 없다. 엘킨 다이브는 그 자체가 나에게는 그 어떤 조종마법보다 정신을 혼미하게 만드는 요소였다.
다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엘킨이 비친 창문으로 사제복을 입은 한 남자가 드리워진다.
"!"
"..."
내 눈이 놀란 듯 커지고, 엘킨의 눈이 의아한듯 나를 보다가 의례적으로 남자에게 시선을 주었다.
“윈드아 사제-”
엘킨은 그의 성을 발음한다. 부러, 이름은 빼고 있다.
키오스의 선조인 에피룬을 사제 이름을 부르기 위해 연호하는 것도 미묘하니 아마 에피룬 윈드아는 주로 그렇게 불리고 있을 것이다. 윈드아 사제는 어린 제자 에피룬 윈드아, 윈드아 대신관은 아누휀 윈드아.
금빛 눈이 엘킨을 물끄러미 보다가 나를 향해 휘어진다.
‘류야.’
아무리 생각해도 류다. 류는 신관처럼 우아한 손짓으로 테라스의 문을 잡아 당겼다. 엘킨이 문을 놓을 수 있는 시간을 두고 천천히.
“...”
엘킨이 무감하게 손을 테라스 창문으로부터 떼면, 류가 마나로 성호를 그어 엘킨에게 인사하고 나에게 인사했다. 엘킨은 같은 느낌으로 인사를 했지만, 나는 마나가 없어 그저 성호만 그어 그에게 인사만 했다.
“...”
내 인사에 류의 금빛 눈이 순간적으로 날카로워졌다.
“윈드아 사제가 아니십니까.”
“엘킨 다이브님, 고결한 키오스의 기사님께 정식으로 인사를 드리게 되어 영광입니다.”
“저야말로.”
“처음 방문했을 때는 경황이 없어, 정식으로 인사는 드리지 못했습니다만 참 연회라는 게 좋네요.”
그는 이런 화려한 연회는 처음 보는 사제처럼 연회장 쪽으로 시선을 주다가 나를 보았다.
“이 분은...”
“하영 세르미아 영애십니다.”
“하영, 세르미아.”
세르미아가 바로 그 소귀족의 성이었다. 참, 한국이름에 영어이름 비스무리한 저런 게 붙으니 이상하다. 이상하고 자시고 나를 아는 사람들이 발음하니 민망했다. 그것도 류가.
“처음 뵙겠습니다. 에피룬 윈드아라고 합니다. 아름다운 영애.”
그는 빙글 미소지으며, 나를 보았고, 절묘한 타이밍으로 그 순간 누군가가 급하게 달려와 엘킨을 찾았다.
*
광장 쪽에서 ‘그 남자’를 발견했다는 급한 보고였다. 보고자는 이름은 말하지 않았지만 그것이 얼핏 류를 가리킨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슬쩍 류를 보면 그는 태연하게 무슨 일일까 하는 의문의 시선을 하고 있었다.
‘...연기왕.’
진짜, 연기왕이다. 엘킨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고.
“!!”
보고자와 류가 있는 앞에서 내게 손을 내밀었다. 나는 깜짝놀라 당황했지만 그는 내 손이 그의 손에 놓이지 않으면 떠나지 않을 것처럼 나를 보았다. 나는 감전된 것처럼 얼른 그의 손에 내 손을 올려놓았고 엘킨은 지난 번 침대에서처럼 가볍게 내 손에 입을 맞추고 고개를 숙였다.
보고자의 눈이 흥미진진해진다. 그도 칼미온 기사단이라 나의 엘킨에 대한 짝사랑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드디어 사랑을 이뤘구나, 하는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그럼, 나중에.”
엘킨이 사라지고, 나는 얼굴이 새빨개진 채 굳어버렸다.
*
엘킨도 없고 본격적으로 휘청거리면 나를 지지하는 건 류였다. 류가 나를 지지하고 빙글 웃는다. 빙글 웃으며 나의 자세를 바로잡아 준 뒤 손을 뗐다.
세류 키스톤이 광장에 나타나다니, 세류 키스톤은 바로 내 앞에 있다.
“엘킨 다이브님과 친밀하신 것 같더군요. 영애는-”
그는 나에게도 연기를 했다. 내가 자신을 알아본 걸 모르는 걸까. 그렇게 광범위한 마법인 걸까. 나에게만 안 통하는?
‘셀리안도 엘킨도 히아신스도 넘어가는데 나에게만 안 통한다고?’
그런 게 가능한가, 의아함에 그를 보며 동시에 고민한다. 나도 연기를 해야 하나, 하고.
"과연, 성공하신건가요. 엘킨 다이브를 꼬시는데- 렌은 제법 선견지명이 있네요."
"..."
역시 류다. 이상해도 나만이 그를 알아보고 있다. 헛소리를 하며, 천박한 이야기는 전부 엔실렌으로부터 나온 것을 앵무새처럼 따라하는 남자. 덕분에 그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에 대한 고민은 그렇게 오래 시간을 끌지는 않았다.
“윈드아 사제님은, 그건- 진짜 이름이 맞으시죠?”
뾰로통하게 따지면 류가 조금 웃는다.
상대는 류다. 무엇보다 내가 뭘 더 연기하겠냐. 가뜩이나 생각하고 꾸밀 것도 많은데 얘한테까지 그래야 되겠냐.
“네, 일단은 에피룬 윈드아라는 다른 이름을 가진 사람은 없습니다.”
"..."
언뜻 진짜 세류 키스톤은 정신병원에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게 기억난다. 그것도 그를 담당한 게 리나 테일이었다는 것을, 칼미온 기사단에 인사를 하러 갔던 날 들었던 것 같다.
류는 세류 키스톤이 아니고, 엔실렌은 용이며 류 밑에 있다. 추락사건의 진범은 엔실렌이고- 아마 류는 하루드의 수장.
거기까지 생각하자 오싹할 정도로 주도면밀한 남자라는 생각이 든다. 맹한데, 맹한 싸이코패스였는데.
“설마, 죽어서 없다는 건 아니겠죠?”
“영애처럼 의외로 대담한 하녀를 한 명 알고 있답니다. 그 하녀 이름이 윤하영이었는데. 이름도 같네요.”
"...장난은.
내 말에 류가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뜨다가 웃는다. 하지만 충분히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진짜 에피룬 윈드아는 죽고, 그의 자리를 그가 차지하고 있다는 이야기라든가.
“아닙니다. 이 거지 같은 이름은 오직 저에게 아버님인 주신 이름이랍니다.”
“...거지 같은.”
“거지 같죠?”
그는 생글 미소지으며 테라스의 문을 닫았다.
“거지 같은 자의 기가 당신에게 듬뿍 묻어 있네요. 제 기는 한 톨까지 긁어낸 게 아주 그 남자답습니다.”
“...”
그는 함부로 내게 손을 대진 않았지만 문을 닫자 강한 어조로 이야기한다. 경어도 유지하고 에피룬 윈드아의 말투도 그대로였지만 그의 금색 눈이 형형하게 빛난다.
내가 성호를 그어 시모갈의 인사를 했을 때 한순간 보였던 그 눈빛이었다.
“마나로 인사를 하는 순간 토악질이 나올 뻔 했습니다.”
“저는 마나가 없는데.”
그건 흉내다. 성호를 그은 것 뿐이다. 류는 손을 들어올려 그의 베이지색 머리카락을 쓸어넘긴 뒤 입꼬리를 휘었다.
“아니요. 그 거지 같은 자식은 알게 모르게 당신에게 자신의 마나를 덧칠했습니다. 누군가가 또다시 당신에게 해를 끼칠까봐 잔뜩 초조해하는 게 눈에 보이네요.”
그가 내 앞으로 한 발 내딛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한 발 뒤로 물러섰다.
“어느새 엘킨 다이브 뿐만 아니라, 마법왕에게도 사랑받게 되셨군요.”
“좀 다른 것 같은데.”
사랑이라니, 그것도 엘킨이랑 묶어 이야기하니 뉘앙스가 미묘하다. 주춤주춤 말하자 류는 홍소할 것처럼 입을 벌렸고, 다시 싸늘하게 다물었다.
“게다가 너로 뭔가 할 생각이군. 하영 세르미아라니, 완전 안 어울려.”
"...그건 동감."
류가 과감하게 손을 뻗었다. 경어가 무너진다. 테라스 끝까지 밀려나, 이제 연회장 안에서는 여기가 보이지 않는다. 그는 내 볼을 쓰다듬었다. 류의 손은-
체온이 느껴지지 않는다. 분명 전에는 느껴졌었는데.
“이 순간 널 죽이면 마법왕은 꽤 분해 하겠지.”
“죽지 않아.”
“셀리안 크레이누가 지켜줘서?”
류의 눈이 가늘어진다.
“내가, 살고... 싶으니까.”
눈을 마주치고 바람이 불 때까지의 짧은 시간, 류의 가면처럼 서늘했던 얼굴이 느물거리며 풀어진다. 그는 셀리안과는 다른 느낌의, 나른한 웃음을 지었다.
“거짓말쟁이, 칼에 찔리기나 하면서.”
“...그래도, 살았잖아.”
“그래.”
류가 끄덕인다. 끄덕이고 손을 뗐다. 그 뒤 엘킨이 했던 것처럼 내 손을 잡아채 입을 맞춘다. 엘킨과 다른 점은 허락을 구하지 않는다는 점이고 어떤 연애감정 비슷한 게 한 톨도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역시 난 네가 죽는 건 싫은 것 같아.”
“...”
“그리고-”
류의 눈이 반짝인다.
“괜찮아. 셀리안 크레이누가 하루드를 부수든 아카인을 씹어먹든, 난 더더 재미있는 걸 준비했으니까. 박 터지게 싸우라고 해.”
킥킥 웃었다.
“...류는 하루드의 수장이지?”
그의 말에는 하루드에 대한 걱정이나 애정은 한 톨도 보이지 않았다. 아카인 영애를 데리고 피신한 것치고는 하루드가 어떻게 되어도 전혀 상관없다는 표정이었다.
“응, 그 조직은 나에게 있어서는 셀리안 크레이누를 엿먹이고 싶어서 있는 거니까.”
“...거짓말.”
하루드는 류의 나이보다 훨씬 예전부터 있었고 그렇게 개인이 누군가를 엿먹이고 싶다고 수장이 되기엔 지나치게 컸다.
그런데 거짓말이라고 이야기하면서도 그게 진짜인 것 같다. 류는 나로부터 물러서 테라스를 붙잡고 넘어간다. 1층에 있는 연회장이라 그리 무리한 높이는 아니다.
“류-”
나는 그를 붙잡듯 의미없는 말을 중얼거린다.
“류는, 왜 그렇게...”
셀리안을 싫어하는 거야? 라고.
“나보다 강하니까.”
거짓말- 이번에야말로 나는 정말로 그렇게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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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이당, 끄앙... 끄...앙... 털썩.
선추코 감사 드립니다!>ㅁ<♥
vaisura 님 후원쿠폰 감사드립니다! 직장인에게도 학생들에게도 참 힘든 월요일, 힘내서 즐겁게 보내시라고 제가 에너지를 전해드립니다. 에잇!!...죄송합니다. 사랑해요.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