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루나 패러독스-76화 (76/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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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은 셀리안에게 제대로 인사조차 못하고 비틀비틀 걸어 시야에서 사라졌다. 이제 정원에는 나와 셀리안 크레이누 뿐이다.

내 뒤에는 셀리안 크레이누가 서 있고, 나는 머리가 텅 빈 것 같다. 조금 참담한 기분이다.

“그것참... 남녀 관계란 참 묘하군.”

“...”

“음?”

나는 셀리안을 뒤에 두고 걷기 시작했다. 산이 사라진 길과는 다른, 연회장으로 돌아가는 길이다.

‘산은 어디로 간 걸까.’

연회장은 아니었다. 그걸, 내가 신경쓰는 것조차 주제 넘은 거겠지. 이제는.

“하영?”

장난스럽게 이야기하던 셀리안이 조심스럽게 내 이름을 불렀지만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셀리안은 왕인데, 너무 기어오르는 것 같다고 가볍게 생각했지만 입은 굳게 닫혀 열리지 않는다.

나는 산이 마지막으로 보였던 표정을 반추하며, 차례로 내 손, 엘킨이 입맞췄던 내 손으로 시선을 주며 걷는다.

[보고 싶었습니다.]

나도 보고 싶어, 엘킨. 지금 당장.

침묵 속에서 연회장으로 비틀비틀 들어설 때까지, 셀리안은 말없이 나를 따라왔다. 왕을 등 뒤에 거느린 소귀족 영애라니, 이게 뭔지 모르겠다. 나는 연회장을 휘 둘러본다.

엘킨은 없다. 없는 게 맞다. 그는 아직 복귀하지 않은 것이다.

순간 눈이 마주친 히아신스가 반가운 듯 손을 들었지만 나는 반응하지 못했다. 다만 의아한 듯 눈을 깜빡이는 히아신스를 스치듯 보았을 뿐이다.

‘그래, 엘킨은 지금 아직도 광장 쪽에.’

그는 광장에 있을 것이다. 세류 키스톤을 찾아- 나는 다시 발걸음을 옮겨 연회장을 빠져나왔다.

*

비틀비틀 걷고 걸어 광장으로 향하는 왕성의 문앞에 도달했을 무렵 뒤에서부터 나를 잡는 손이 있었다. 셀리안이었다. 잡아채긴 했지만 그의 손길은 조심스럽고 부드러웠다. 걱정하는 다정한 눈이 나를 보았다.

그는 계속 따라왔던 것 같다.

“어딜 가는 건가. 가능하면 그냥 두고 보려고 했지만... 여긴 밖이 아닌가. 위험하다고.”

“엘킨을... 만나고 싶어서.”

“엘킨을?”

내 말에 그가 눈을 동그랗게 뜬다. 그리고, 정문 앞으로 마침 엘킨이 들어오고 있었다. 나는 셀리안의 손으로부터 벗어나 엘킨 쪽으로 다가갔다.

“하영-? 폐하도...”

“엘킨-”

나는, 드물게 떨지 않고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것도 님을 빼고, 그를 부른다. 물론 자연스럽게 심장이 뛰고, 얼굴이 달아올랐지만, 이상하게 머릿속은 그렇게 복잡하지 않았다.

“하영, 지금-”

“엘킨- 나 할 말이 있어요.”

“저에게?”

하늘처럼 푸르고 폭포수처럼 곧으며, 다정하고 아름다운 나의 기사. 어린 시절 꿈 속에서 먼 기억처럼 왕의 사랑을 훔쳐보고 어느새 윤하영도 그 사랑을 내 것이라 착각하게 되고, 결국 진짜 사랑하게 되어버린 기사님.

‘그렇구나.’

산을 거절하는 순간 나는 내가 그를 정말로 사랑하게 되었다는 걸 깨달았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전까지 나는 그에 대한 내 마음은 착각이라고 내심 생각했으며, 그가 날 사랑하게 된 것도 거의 부정하고 있었다. 소극적으로 언젠가 그냥 말없이 떠나면 된다고.

‘나는 그를 사랑해. 왠지 모르지만 그도 나를-’

그러니까, 이렇게 그가 보고 싶었던 거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러니까, 그에게도 확실히 해야 했다. 산에게처럼- 늦을수록 감당이 되지 않는다. 내가 그를 사랑하기에 더욱.

“나-”

입을 연다. 여는 순간, 셀리안이 거칠게 나를 잡고, 공간이 휘어졌다. 이번에 나를 잡는 손은 배려없이 강했다. 그의 붉은 눈이 알 수 없는 빛을 띠고, 셀리안이 펼친 마법의 새하얀 빛이 나를 삼켰다.

*

도착한 곳은 복도였다. 왕궁의 어딘가였는데, 셀리안도 딱히 목적을 정하고 온 건 아닌지 나를 붙잡은 채 주변을 둘러보고 있었다.

“무슨 짓, 이에요.”

“글쎄, 나야말로 묻고 싶군.”

주변에 시선을 준 채, 그는 나를 보지 않았다. 보고 싶지 않아 하는 것처럼, 마음을 다스리는 것처럼도 보인다.

보지 않은 채로 묻는다.

“대체, 엘킨에게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한 거지?”

“...글쎄요.”

“고백은 아닌 것 같더군.”

내 대답에 셀리안이 문득 으르렁 거리며, 나에게 시선을 향했다.

무시무시한 눈빛이다. 왜 그런 눈을 하는지 알 수 없다.

“쯧-”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 그가 가볍게 혀를 차며 눈을 감았다가 뜬다. 그의 붉은 눈은 안정된 것처럼 가라앉고, 그는 나로부터 손을 뗐다.

‘엘킨에게... 뭘 이야기하려고 했냐고.’

굳이 이야기하면, 이별일까. 제대로, 선을 긋고 싶었다. 아마 엘킨이라면 진심을 다해 이야기한다면 알아줄 것이다. 그이기에, 엘킨 다이브이기에 내가 제대로 이야기한다면 분명히. 나에게 더 이상, 다가오지 않아주겠지.

“후우- 그래.”

“...”

“하영- 으음. 물론, 산은 좋은 청년이고, 그런 결말이 나서, 그대가 괴로워하는 건 알지만...”

“...”

“...그대가, 엘킨에게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지는 모르겠지만... 산 때문이라든가, 죄책감 때문에 그러는 건 별로 좋은 것 같지 않군.”

“그런 게 아니에요.”

“그런 것 같던데. 그대의 눈은 죄책감에 휩싸인 눈이야. 내막은 몰라도 그건 확실해. 그대는 산을 사랑하지 않았던 것 같더군. 하지만, 소중히 여기지 않은 건 아냐. 방금만 봐도 확실히 알겠어.”

그러니까, 너무 충동적으로 굴지 마, 마음을 가라앉혀 라고. 셀리안은 위로하듯 말을 건넨다. 그는 다정하고 현명해, 대충 내가 산에게 갖는 감정을 알아주고 있다. 알아주고 있지만, 근원적인 고민에는 다가설 수 없다. 그야 그렇겠지. 내 고민에는 결정적인 실물이 없었다.

셀리안 탓도 하기 뭐해진다. 점점- 이곳에 와, 더욱 근원은 없어진 채 텅 빈 번뇌만 남게 되었다.

이곳에 있을수록.

“...돌아가고 싶어요.”

“응?”

그 말은 무심코 나왔다. 밑도 끝도 없이 문득 입에서 흘러나왔다. 계속 생각하고 있던 것-

이 세계가 그렇게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이곳에 안주하겠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이곳에서 나는 행복해질 수 없다.

‘행복해져서는 안 된다.’

이상한 일이다. 나는 자기애가 강한 이기적인 인간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곳에서 나는 셀리안 크레이누가 상처 입거나 불행해지는 건 두려운 반면, 나에 대해서는 점점 에고가 옅어지는 기분이 든다. 그러니까, 윤하영을 위해서도, 내가 윤하영으로 있기 위해서도-

돌아가고 싶다고, 그런 생각을 한다.

나는 고개를 숙인 채 대리석 바닥을 보고만 있었다. 엘킨과 함께 있을 때 그는 곧잘 그를 보지 않는 걸 지적했다. 사실, 나는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건방질 정도로 시선을 마주치길 주저하지 않곤 했는데.

“하영, 이쪽을 보거라.”

셀리안의 목소리가, 낮게 일변해있다. 조금 쉰 것 같은, 억누르는 것 같기도 하고, 당황해하는 것 같기도 한 기묘한 목소리였다. 화가 난 것도, 감정이 상한 것도 알겠지만, 그가 왜 당황했는지 모르겠다.

“하영- 고개를 들어보거라.”

고개를 들라고 해놓고, 그는 나를 기다리지 않고 손을 뻗어 내 턱을 부드럽게 들어올렸다. 눈이 맞는다.

‘역시 당황하고 있어.’

태연하게 명령하고, 오만하게 들어올려, 다정하게 위로하지만 셀리안 크레이누는 당황하고 있다.

그게 뭔지 궁금해, 피하지 않고 오랫동안 눈을 마주하고 있으면 셀리안이 문득 얼굴을 와락 구겼다.

“...왜지? 왜, 그대는 항상 그런 표정을... 그래. 그대가 사랑하지 않는 산에게나, 그대가 사랑하는 엘킨에게나 같은 얼굴을 하고...”

같은 얼굴이라, 엄밀히 말하면 그렇지 않다. 셀리안에게는 그렇게 보일지 모르겠지만 달랐다. 엘킨과 산은 나에게 확실하게 달랐다. 그게 또 괴롭다. 똑같이 메스껍고 똑같이 속이 뒤집어질 것처럼 역겨워도, 엘킨의 감정이 내게 향하면 황홀해진다. 황홀함에 정신이 나가버릴 것 같고, 그게 또 혐오스러워서.

“...바보 같은.”

“...”

“바보 같은 얼굴이나 항상 하고-”

셀리안이 혀를 차며 나를 껴안았다. 순간적인 일이었다.

“울지 마라.”

“운 적 없습니다. 폐하.”

“아니, 그렇다면 말을 바꾸마. 차라리 울어라.”

“...”

“괜찮다, 믿어도 된다. 그대가 뭘 불안해하고 힘들어하는지는 모르지만. 짐이 보장하마. 엘킨은 좋은 남자다. 그런 좋은 남자를, 뭐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서로 좋아하면서 놓칠 셈이냐.”

알고 있어. 그가 얼마나 좋은 남자, 아니 좋은 사람인지. 윤하영이 보기에도 그렇고, 내 안의 셀리안 크레이누도 그렇게 이야기한다. 그리고 눈앞의 당신도 보장하는 너무나 좋은 사람.

“그대를 행복하게 해줄 거야. 마음에 걸리는 것 따윈 전부 없애줄 만큼 사랑해줄 거다.”

그게 문제인데. 그가 너무 좋은 남자라, 사랑에도 올곧기 그지없는 엘킨 다이브가 그의 사랑으로 전력을 다해 나를 행복하게 해줄까봐 무섭다. 윤하영이, 셀리안 크레이누의 시대에서 엘킨 다이브에게 지극한 사랑을 받고 행복해지다니 그게 무슨 코미디란 말인감.

아님, 그게 모두가 행복해지는 방법이야? 더군다나 지금 눈앞의 셀리안 크레이누가 그 사랑을 응원하고 있지 않은가. 최고라고 말하지 못할 것도 없다.

“그대가 말했지? 원래 세계에서 어떻게 살았는지.”

셀리안은 매끄럽게 이야기했지만, 이상하게도 말을 고르는 것 같다. 말을 고르고 헤매고 있다. 나를 설득하고 있다.

왜?

“열심히 일을 했고- 사랑을 하고 결혼하고 싶었다고.”

“...”

“짐이 이루어주마. 이 세계에서, 그대의 세계 못지 않게 만들어주마.”

꽉꽉 끌어안긴다. 그는 마치 제가 프로포즈를 하듯이 나에게 속삭였다.

“세르미아는 큰 귀족은 아니지. 하지만 그만큼 자유로울 수 있어. 그래. 그대는 뭔가를 기획하는 일을 했다고 했지? 짐이 하루드를 제압하자마자 그대에게 일자리를 주지. 왕궁으로 출근을 해 이것저것 기획도 해보거라.”

“...무슨 소리예요. 대체.”

그의 말에 조금 웃는다. 이상한 일이지, 방금까지 그냥 우울했는데, 돌아가고 싶었는데. 지금도 돌아가고 싶은 마음은 변함없지만, 그가 뭘 이렇게 필사적인지 모르겠기에. 그는 내가 웃자 더 신난 듯 이야기했다.

“그래, 죽죽 승진해 그대가 세르미아를 더 크게 부흥시켜보는 야망을 꿈꾸는 것은 어떤가. 그대는 꽤 야심가였던 것 같은데... 무엇보다, 엘킨은 매우 좋은 남자니까. 그러니까, 그대에게 분명 행복한 사랑을 줄 거야. 최고군. 일에서도 성공해,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평범한 여자로서의 삶에 그대다운 야심까지 이루고.”

짐이 보장하마, 라고 다시.

그 순간, 셀리안이 이야기한 미래가 머리에 그려졌다. 그는 마법왕이니까, 의도한 대로 될 거라고도 생각한다.

나는 세르미아의 영애로서, 원래 세계와 비슷한 중산층 이상의 지위에서 여자로서는 드물게 왕궁에서 기획일을 맡게 될지도 모르지. 그리고 엘킨과 이어져 그와 혼인을 해 사랑을 손에 넣어 행복하게.

“그렇게 말씀해주셔서, 감사해요. 폐하.”

조용히 대답한다. 그런 삶을 생각해줘서 고맙다고. 아마 그 전에 나는 도망치겠지만.

“만약 이 세계에 있게 된다면, 그것도 좋겠네요.”

“...”

“하지만, 저는... 돌아가고 싶어요.”

라고, 이 세계에 남게 된다 해도 이곳으로부터 아주 멀리 떠나고 싶다고. 셀리안도 엘킨도 히아신스도 유명인사니, 매우 잘 살고 있다는 소식이나 훗날 들으면 참 좋겠다고 그런 생각을 했다.

그러니까, 셀리안의 이야기는 정말 꿈같은 이야기라고, 그런 나를, 셀리안은 좀더 꽉 끌어안았다.

마치 그 자신이 나를 놓치지 않겠다고 이야기하는 것 같은, 그런 착각이 이는 포옹이었다.

============================ 작품 후기 ============================

왠 연참이냐 하면...

내일부터 제가, 여름휴가입니다~ 그래서...; 개인 사정상, 인터넷을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나무바라기는 친구들과 여행을 가 술독에 빠질 예정이기 때문입니다.(<<)

74화는 일요일 00시 즈음에 올라올 예정입니다.; 컴퓨터는 할 수 있으니 열심히 써서 일요일에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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