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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란 게 참 그렇다. 죽을 것 같이 힘든 감정에 휩싸여도, 시간이 지나면 회복된다. 회복 된 척이라도 하게 된다. 계속 고민하고 우울해하며 살 수는 없으니까. 우울해도 먹어야 하고, 슬퍼도 자야 하고, 죽을 것 같이 괴로워도 다른 사람을 만나 하하호호 웃게 된다.
연회가 끝나고, 일상이 시작되자, 나 역시 자연스레 그 흐름을 따라 먹었고, 잤고, 다른 사람과 떠들었다. 아카인 후작을 탄핵하고 추궁하는 청문회가 2주 앞으로 다가오며 수업이 늘었고 만나야 할 사람도 많아졌던 것이다. 일상은 계속 우울해할수 없도록 바쁘게 흘러갔다.
지금은 내 방에서, 히아신스와 그녀가 가져온 치즈케이크를 우물우물 먹고 있다. 정신없이 돌아가는 일과 중 일상이 된 휴식시간이었다.
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일상은 어떻게 보면 병원에서와 비슷했다. 수업을 받고, 히아신스와 간간히 티타임을 갖고. 다른 점이라면 양파나 감자를 깎는 대신 청문회와 관련된 이 사람 저 사람을 만나야 한다는 점과, 류가 찾아오지 않는다는 거였지만 어쨌든 그랬다.
"으음~~ 하영과 이렇게 느긋하게 차를 마시는 언제나 좋네요. 오늘 간식은 어떤가요?"
"정말 맛있습니다."
치즈케이크는, 적당한 단 맛이 매력적인, 홍차와 제법 잘 어울리는 스위트였다.
"그렇죠? 굉장히 유명한 치즈케이크인데... 사실 저는 좀 단 맛이 부족하다고 느끼긴 하지만. 굉장히 맛있네요."
다만 문제이며 다행인 점은 내가 순전히 일상에 적응하는 '척'하고 있지는 않다는 점이다. 지금도 히아신스와 함께 하는 자리가 전만큼 괴롭지 않았다. 셀리안과 엘킨이 나에게 약속한 것은 한결 나를 가볍게 해주었고, 근원적인 괴로움도 지난 연회의 밤 이후로 조금 나아졌다. 내가 산에게 심한 짓을 하지 않은 것도, 이곳을 떠나야겠다는 마음이 변한 것도, 히아신스의 안전이 완전히 보장된 것도 아닌데-
어쩌면 너무 큰 충격타에 멍함이 안 가시는 건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치즈케이크를 크게 잘라 입으로 밀어넣으며 도리질친다.
'엘킨...'
사실- 셀리안이 기껏 이동을 시켜 위로하고 설득했지만, 나는 바로 내 고집을 꺾지는 않았다. 셀리안의 이야기는 듣기는 좋았지만 곧이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그의 설득이 무관하게 그 후 나는 나를 찾아온 엘킨에게 하고자 했던 이야기를 결국 했다.
했고, 윤하영은 엘킨에게 한 방 먹고 말았다.
*
“만약 이 세계에 있게 된다면, 그것도 좋겠네요.”
셀리안의 말은 위로가 되었다.
울지는 않았지만, 그의 위로에 마치 실컷 운 것 같은 기분이 들지 않았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마음은 여전히 무겁고 바뀐 것도 아니지만, 셀리안의 말을 들은 뒤는 확실히 감정의 농도가 달랐다. 다정한 왕은, 필사적으로 나를 위로했고 그의 위로를 받았기에 엘킨을 무작정 찾아 비틀거렸던 충동은 완화되었다.
“하지만, 저는... 돌아가고 싶어요.”
좀더 담담하게 엘킨에게 이야기할 수 있다. 내 말을 할 수 있다. 그건 셀리안이 원하던 방향은 아니겠지만.
내 말에 셀리안은 더이상 답하지 않고 조용히 나를 안고 있었다. 복도는 조용하고 시간은 영원 같다. 멀지 않은 장소에서는 아직 연회가 한창이겠지만, 그럴 거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적막이었다.
"고집도 세군."
셀리안이 한숨을 쉬고 나로부터 몸을 뗀 건 그 고요한 복도를 가르는 발소리가 들린 후다. 올려다본 그의 시선은 방금 전까지 나를 위로하던 필사적임은 조금 사라져 있었다.
"뭐, 그 부분은 엘킨을 믿고 있으니까"
엘킨 다이브의 걸음은 조금 특이한 면이 있었다. 돌을 밟는 발소리조차 절도가 있고, 어긋나지 않아 그는 마치 그의 존재 자체가 기둥같고 축 같다. 셀리안이 눈을 찡긋하면 점점 조금 다급한 엘킨의 숨소리가 들려왔지만, 그의 발걸음소리만은 허둥지둥하는 느낌이 없었다. 허둥지둥이야 했겠지만,엘킨 특유의 깨끗함이랄까.
'모르는 소리.'
나는 셀리안의 말에 반발한다.
그는 변하지 않고 언제나 올곧다. 무슨 일이 있어도. 변하지 않는 그이기에 나는 솔직하게 내 마음을 토로하고 호소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이치에 닿지 않는, 시기상조 같은 이별선언을 그가 받아줄거라는 확신은 상대가 엘킨 다이브이기 때문이다.
확연히 자신을 좋아하는 여자가 영문 모를 이유로 자신을 거절할 때 그 이유나 의아함보다 상대의 의사를 중시해줄 테니까.
"저는 엘킨 님이 오시면, 하려고 했던 이야기를 할 생각입니다."
고해둔다.
그를 비틀비틀 찾아 헤맸던 충동은 사라졌지만, 이 역시 산과의 이별만큼 마무리 지어야 할 일이었다.
"흐음, 어쩔 수 없지. 이만큼 설득한 짐이 허무해지긴 하지만, 그렇다고 그대를 내 맘대로 감금하거나 입을 막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
"그럼 범죄죠."
"짐은 왕이다? 하지만, 하나 충고하자면- 그대는... 짐의 기사를 너무 우습게 보는 것 같군."
셀리안이 웃는다.
"그는 좋은 남자지만, 멍청이는 아니니까."
"그게 무슨?"
엘킨이 내 뒤에 섰고, 나는 말을 멈추고 뒤돌아 엘킨 다이브를 확인한다. 청명한 푸른 눈의, 내가 아는 엘킨 다이브.
"폐하, 하나 감히 부탁 드리자면... 앞으로는 제 앞에서... 그녀를 마법으로 데려가지 말아주십시오."
"시작은 그대가 먼저였던 것 같은데... 그러지 뭐."
"감사합니다."
엘킨은 척척 다가와 내 앞에 섰다. 나는 마음을 다잡고 그를 맞이한다. 다가오는 그로부터 뒷걸음질 치지 않도록. 이런 식의 접근은 오늘이 마지막이 될 테니까.
"해야 할 말이 있어요. 들어, 주시겠어요?"
"물론입니다."
윤하영이 해야 할 일이었다고, 고개를 내미는 망설임에 종지부를 찍는다.
*
나는,
일단 엘킨에 대한 감정을 인정했다.
그리고 그와 함께 할 수 없다고 고했다.
이유는 그와 함께라면 내가 견딜 수 없다고, 내가 불행해지기 때문이라고, 불행해지기 싫다는 조금 얼토당토 않은 이야기였지만, 솔직한 감정이기도 했다.
그에게는 꾸미는 게 통하지 않는다. 나는 셀리안과 얽힌 전생을 제외하고는 솔직하게 나에 대해 이야기했다. 전생 이야기를 빼니 이야기는 전혀 앞뒤가 맞지 않았고 그저 묘한 트라우마를 가진 여자의 억지였지만 내게는 절실했다.
그리고 엘킨은 그 순간까지는 내 생각대로였다. 그의 푸른 눈은 흔들림이 없이, 상처 입지도, 화를 내지도, 분노하지도, 어이없어 하지도 않는다. 강요하지 않고 그저 내 말을 듣고 있다. 그게 아쉽다는 모순된 감정이 들었지만, 역시 엘킨 다이브는 엘킨 다이브였다는 점에 기대 나는 안도하며 말을 마무리하기로 결심했던 것이다.
나는 실제로 그에 대한 마음이 고통스러웠다. 그것은 일반적인 사랑의 고통과는 다르다. 전부 이야기할 수 없지만 나는 그렇다. 엘킨에 대한 고통은 나를 좀먹는다, 그는 이 정도로 괴로워하는 자에게 자신의 사랑을 강요하진 않으리라. 게다가 나는 돌아가고 싶어하는 자, 이 세계에 사랑하는 자를 만들기 거북스러워한다는 건 일반적으로도 이해할 수 이유니까.
그라면 그런 사람을 사랑이란 감정 때문에 붙잡지 않고, 강요하지 않을 거라고.
그러니까- 그때 나는 마지막에 마지막까지도 그를 우습게 본다는 셀리안의 이야기가 갖는 의미도, 엘킨의 행동도 전혀 예측할 수 없었다.
마지막 이별을 고하려는 순간, 엘킨이 나를 껴안은 것이다.
*
"그러니까-"
나는 혼자 떠드는 마지막 고백을 마무리해간다. 후련하기도 하고 지독하게 슬프기도 하고 여전히 모순된 이상한 감정이 솟아오른다.
어쨌든 이제 끝이다-
"저는 엘킨 님과는 함께 할 수 없...!! 에, 엘킨 님?!"
그 전까지 조용히 내 말을 듣고 있던 그가 다짜고짜 나를 껴안았다. 이어지던 말은 멈추고, 나는 꼭 껴안긴다. 갑작스럽게 나를 껴안으면도 엘킨의 눈동자는 흔들림이 없다.
'흔들림이 없다고?'
그 전까지는 그의 눈동자에 어떤 부적인 감정도 없어 흔들림이 없다고 생각했건만, 잘 보면 드물게 그의 눈은 기뻐보였다.
나는 내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기뻐보인다니-
"기쁘네요."
"네?"
확인사살에,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뜬다. 그가 나를 정말 좋아한다면 이 국면이 기쁠 일인가. 나는 그 돌발발언에 차마 반항도 못한 채 그에게 꼭 껴안겨 있다.
"그러니까 인정하신거죠?"
"그게 무슨..."
"저를 좋아한다는 거 말입니다."
"!"
"당신 입으로 명확하게 이야기해주신 건 처음이라, 참을 수 없었던 게 반입니다."
그는 나를 껴안은 채 고개를 숙인다.
"반?"
"당신을 멋대로 껴안은 변명입니다. 나머지 반은- 그런 결론은 듣지 않을 생각이라서요."
고개를 숙인 그가 당장이라도 입을 맞출 것 같은 거리에서 멈춘다. 심장이 덜컹거린다.
"에-"
"사실, 이별을 위해서 인정을 하신 당신의 입을 막고 싶었습니다만."
"!!"
"이 방법은 폐하가 계시니까 껴안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나는, 상관없는데, 이상한 논리군."
셀리안이 어이없다는 것처럼 끼어들었지만 엘킨은 무시하고 말을 잇는다. 나도 어이없다. 그 엘킨 다이브가 멋대로 껴안은 이유 중 하나가 셀리안 앞에서 키스할 수 없기 때문이라니.
"에, 엘킨?"
"좋은 현상이네요. 엘킨...이라니. 앞으로도 님은 붙이지 말아주세요."
그대로 그는 나를 껴안은 채 미소 짓는다. 입을 벌리고, 활짝, 정말로 활짝 웃었다. 남자에게 꽃 같다는 말은 영 어울리지 않는 것 같지만, 순간 그의 주변에서 휘광이 비치는 것처럼 그 미소는 내 입을 다물게 했다.
"이렇게 껴안는 것만으로 심장이 뛰고 계십니다. 그리고 저도 그렇습니다."
심장소리는 두 개다. 엘킨의 심장소리, 나의 심장소리. 나는 그의 푸른 눈동자에 빨려들어갈 것처럼 매료된다. 눈을 깜빡이면 엘킨이 웃었다.
"솔직히, 그렇게까지 이야기하시면, 물러나는 게 맞겠지요. 사랑이 강요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줄곧 생각해온 건 저니까요."
하지만, 이라고 덧붙이는 엘킨의 심장은 나에게 지지 않을정도로 뛰고 있다. 나와 똑같이, 나도 똑같이.
"하지만, 요구하는 게 강요가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드네요. 그냥 제 욕심일지도 모릅니다만-"
사랑에 의한 더럽고 이기적인 욕심을 입에 내면서도 엘킨 다이브는 올곧게 미소짓는다.
"나도, 당신도 변하고 있어요. 당신은 처음에 저를 보면 도망가셨습니다. 넘어지고 도망가고 바닥만 보시고... 후후. 하지만, 이제는 그러시지 않지요. 이야기도 하고, 엘킨이라고도 불러주시고."
"...그건"
그건, 너무 형편좋은 생각이 아닌가.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 건.
"지금도, 저를 분명히 마주하고 거절하셨습니다. 차여보는 것도 처음이네요."
"우와, 재수없다. 엘킨."
셀리안이 야유한다. 나는 마치 내 앞에 있는 기사님이 다른 사람처럼 느껴진다. 그것은, 기묘한 기분이다. 올곧은 사랑은 너무도 당혹스러워, 나는 메스꺼움도 잊고 그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처음의 당신이라면 그저 도망만 치셨을 텐데... 저도, 이런 이야기까지 들으면 물러설 텐데- 전혀 그러고 싶지 않다니, 우리는 아마 점점 더 변해갈 겁니다."
"..."
"일단 제가 힘낼 생각입니다."
다정하고 상냥한 기사님은, 비틀린 내 거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는 윤하영이 제 사정대로 거절하고 차단하고 마음대로 끝맺음질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변하지 않는 엘킨 다이브, 언제나 올곧은 엘킨 다이브.
하지만 그도 변한다. 그답게 변해간다.
윤하영이 알 수 없는, 짐작도 할 수 없는 방향으로 사랑을 속삭여왔다.
*
"하영, 볼이 빵빵해서 귀여워요. 게다가 조금, 발그레해졌네요."
후후, 귀여워. 라고 새가 지저귀듯 웃은 히아신스가 빵빵하다면서도 치즈케이크를 더 잘라 내 입에 돌진시켰다. 나는 앙 하고 받아먹는다. 부끄럽고 당혹스러워서 그냥 먹을 수밖에 없다.
지금도 그날을 새삼 다시 떠올리며 치즈케이크를 퍽퍽 퍼먹다보니, 어느새 볼이 터지도록 치즈케이크만 꾸역꾸역 밀어넣고 있었던 것이다.
셀리안의 말대로였다. 엘킨은 내가 이리저리 재단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상황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고, 나는 그저 언젠가를 기약할 뿐이다.
'역시 아직 충격이 가시지 않은 거야.'
무엇 하나 변하지 않았는데 이리도 태평하다니.
'게다가 당장 탄핵재판이 다가오고 있으니까.'
나는 당장 풀리지 않은 고민도, 엘킨에 대한 감정도, 당면한 탄핵재판을 무사히 마무리 지은 뒤로 돌리자고 스스로에게 암시한다. 엘킨의 그런 말을 들은 후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기도 했고, 어째 도피 같았지만 탄핵재판은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이기도 하니까 말이다.
덧붙여 류 문제도 있다.
왕궁은 넓고, 소귀족 영애인 하영 세르미아가 우연히 신관과 만날 일은 그렇게 많지 않았다. 애초에, 류와의 관계는 그가 찾아오지 않으면 성립되지 않았다는 걸 간신히 깨달은 요즈음, 나는 그에 대해 셀리안에게 어떻게 말해야할지 고민하고 있었다.
다행인 건, 내가 최근 자주 방문하는 도서관이 요한 세르기타의 동선에 포함된다는 점이었다. 안면을 튼 나는 어제 드디어, 류가 자주 시내에 나간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요한의 말로는 에피룬 윈드아는 왕궁에 머물기보다는 키오스를 배우기 위해 민가나 시내에 나가는 일이 많다고 했다.
"이 치즈케이크 어디서 판다고 하셨죠?"
"아, 시내의 안티에라는 베이커리인데요?"
"그, 다음엔 제가 사와도 될까요? 칼미온에 오랜만에 들릴까 하는데... 이 치즈케이크를 사가고 싶어서요."
류를 어떻게 해야 할지 방향을 정하기 전, 류를 다시 만나고 싶었다.
셀리안에게 지독한 적의를 품은 류, 지하에서 녹아가는 엔실렌. 나는 유난히 엔실렌과 관련 사람들에 대해 단호한 셀리안도, 그를 싫어하는 류도 만나게 하고 싶지 않았다. 두 사람의 만남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어떻게 할 수 없다는 건 알지만, 적어도 한 번 정도는 다시 류를 만나고 행동을 정하고 싶다.
어리석더라도 말이다.
"안 됩니다."
나름 융통성 있는 변명이라고 생각했지만 히아신스는 드물게 단호히 선언 했다.
"탄핵재판 때문에 무슨일이 생길지 몰라요."
히아신스가 덧붙이며 씁쓸하게 고개를 숙인다. 나는 아카인의 탄핵 재판에서 가장 결정적인 증인이었다. 역할은 그를 몰아세우는 것이었는데, 히아신스는 이에 대해 셀리안에게 불만을 표했었다.
"왕궁 내에서 하영에게 위해를 가할 수 있는 사람은 없지만, 시내는 다르니까요.”
그야 그렇겠지. 셀리안이 지키겠다고 마음 먹은 사람에게 왕궁 내에서 해를 끼친다는 것은 한 소대가 와도 불가능할 것이다.
"..."
그럼 어떡하면 좋지, 히아신스와 같이 나가자고 하기는 아무래도 그렇다. 그녀를 류와 만나게 하고 싶지 않다. 추락사건의 진범이 엔실렌이고 엔실렌이 류의 계약자이기에 더욱.
"...그, 탄핵재판 전에 하영의 호위로 믿음직한 분이 오늘 배정될 예정이라서요, 그때 생각해보는 건 어떨까요?"
"네?"
그녀는 고민하는 나를 보더니 마음이 약해진 것처럼 이야기한다.
"제가 하고 싶었지만, 저보다 더 유능한 분이시라..."
"유능한 분?"
나의 호위에 히아신스가 인정할 정도로 유능한 사람이 붙었다는 말에 놀란다. 인사치레일지도 모르지만, 그녀의 눈은 진지하고 그녀는 인사치레를 할 성격이 아니었다. 소귀족이라고는 해도, 거의 세력을 잃은 소귀족인 나를 일반적인 호위도 아니고 유능한 개인 호위가 지원한다고?
"그 분이 하영을 호위하고 싶다고 직접 이야기 하셔서, 아마 부탁하면 들어주실 거예요."
"지원 했다고요?"
이건 더더욱 놀랄 일이다. 셀리안이나 히아신스, 엘킨의 과보호로 인한 인선도 아니고 지원이라니.
아니, 잠깐. 셀리안도 아니고 히아신스도 아니고 내 호위를 지원할, 히아신스가 유능하다고 인정할 사람이라면... 혹시-
"네, 지원하셨어요. 오늘 저녁에 미실랭 부대장과 인사하러 오신다고 했는데... 그 분이 오면 잠시 시내에 가는 것도 폐하가 허락하실 거예요. 그만큼 믿을만한 분이라서요.”
"그, 그분은?"
"아."
아쉬운 듯 이야기하던 히아신스가 내 물음에 의미 있게 웃는다.
“후후, 엘킨 대장은 아니에요.”
“...그, 그런 생각 안 했어요.”
"정말요? 후후, 대장도 하고 싶어 하시긴 했어요. 그러니까! 호위가 오실 때까지 멋대로 나가지 마세요."
*
히아신스의 말대로 새로운 호위는 저녁 시간에 나를 방문했다.
그 사람, 아니 그 분이라고 해야 하나. 어쨌든 상대는 정말 의외의 존재였고, 히아신스 말대로 어마무지하게 유능해서 나는 놀라 눈만 깜빡였다.
“...”
“처음 뵙겠습니다. 제 이름은 ...입니다.”
상대는 깔보는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다. 녹색 머리카락과 호박색 눈동자. 내가 이 세상에서 미형의 사람을 참 많이 봤지만, 지금 자신을 ...이라고 밝힌 여자도 매우 아름다웠다. 진을 보지 않았다면 아마 그 미모에 놀라 넋을 잃었을지도 모른다.
“...저, 이름이 안 들리는데.”
마음을 가다듬고 묻는다. 소개를 하면서 전혀 자신의 이름이 들리게 하지 않는 건 무슨 심뽀인지. 이름을 알려주는 것 정도는 마음만 허락하면 편안하게 할 수 있는 건데, 상대는 허락조차 하지 않고 나를 내려다만 본다.
지원을 했다고 하는데 거짓말인 건가.
'키도 참 크네.'
조심스럽게 이야기하며 답을 기다렸지만 상대는 고운 하얀 눈썹만 살짝 찡그렸다. 녹색머리카락에 하얀 눈썹이라니 특이한 조합이지만 미인에게는 그조차 잘 어울리는 것 같다.
“...성함이 안 들리는데...요.”
“...”
혹시 몰라 정중하게 다시 이야기했지만 그녀는 반대쪽 눈썹만 꿈틀거린다. 나 같은 존재에게 자신의 이름따윈 알려주고 싶지도 않다는 표정이었다. 다만, 그 시선은 하영 세르미아가 되기 전 사람들이 내게 보내던 시선과는 달랐기에 기분이 크게 나쁘진 않다.
그냥 인간이란 존재 자체가 싫어 죽겠다는 얼굴이었으니까. 아마 다른 모든 인간에게 그녀는 무례할 것이다. 지금 내 옆에서 곤란한 듯 웃는 히아신스에게도 같은 표정을 짓고 있다.
아, 정정하자면 딱 한 사람에게만 달랐다.
“어이~ ...! 그렇게 까칠하면 지원한 의미가 없지. 나는 네가 하영에게 관심이 있는 줄 알았는데...”
“관심 없습니다.”
“...관심 없어? 근데 왜...”
미실랭한테만 다르다. 그녀는 미실랭한테만은 툴툴대면서도 다정한 표정을 짓고 있다. 그녀는 못마땅한 것처럼 입을 꾹 다물고 미실랭을 보다가 나에겐 시선도 주지 않고 입을 열었다.
“저는 뱀일족의 에드나라고 합니다.”
“에드나...”
드디어 이름을 들었다. 그 이름을 발음하듯 입안에서 굴리면 그녀의 눈썹이 휙 치켜올라간다.
“알아두십시오. 호위는 순전히 키도스 도련님 때문에 자청한 겁니다. 저는, 미실랭 가문의 계약자이며, 현재 주인은 키도스 도련님이니까요. 오늘부터 아카인 후작의 청문회 날까지- 도련님이 당신을 무사히 인도할 때까지 당신의 호위를 맡을 뿐입니다.”
청문회날, 청문회장까지 나를 데려가는 역할이 미실랭 부대장이었다.
“어이어이, 에드나. 나는 네 주인은 아니지. 나 계약은 필요없는 걸.”
“...쟁이.”
“에드나?”
그녀는 입을 꾹 다물고 미실랭을 외면한다. 아니 굳이 이야기하자면 몽땅. 나도, 히아신스도 누구에게도 시선을 주지 않고 벽만 보고 있었다.
============================ 작품 후기 ============================
00시라더니 1시가 넘었네요.ㅜㅜ; 돌아오니, 왠지 선물을 많이 받았는데 늦어서 정말 죄송합니다.
후원쿠폰 주신 스즈카님과 화니환이님은 오늘 꿈속으로 제가 찾아갑니다. 반품은 받지 않습니다. 저를 가지세용!
Lucyte님께 첫 팬앝을 받았습니다. 우왕, 뜰에 저 이외에 첫 글이다, 첫 팬앝이다. 류당!! 너무 기쁘고 행복하고 셀리안도 못 받은 팬앝을 1타로 받다니!! 참 이상한 캐릭터인데 사랑받네요. 류가 기쁘다고 합니다. 대신 오늘 꿈속에 침투한 나무바라기가 Lucyte님께 무슨 짓을 해도 방관하며 따뜻한 눈으로 지켜봐 드린다고 하네요.ㅎㅎ
아래는 리코멘
lokoko 님 // 으아아 저야말로 또 리코멘을 받다니..! 마치 주인님께 칭찬받은 기분. 독자님은 다 제 주인님. 저를 조련하시네용. ㅋㅋ 산은 착하다기보다는 지극히 순하고 우유부단한 평범한 남자로 만들고 싶었어요. 우직하고 열심히 하는데 기본적으로는 너무 평범한...ㅎ 산에 대해서는 여러가지로 앞으로의 행보를 생각해두었는데 어떻게 풀릴지는 기대해주세요!!
에이리엘 님 // 산은 하영이 마성의 첫 희생타니까여!! ㅜㅜ
푸푸 님 // 저를 매우 좋아하시는군요. 저도 푸푸 님을 매우 좋아합니다.(고백) 연참하고 숨은 저를 용서해주세요. 앞으로도 칼연재를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사랑합니다>ㅁ<
우후육 님 // 첫사랑은 이루어지지 않는대...라고 하는데 과연 하영의 첫사랑은 이루어질 것인가, 아닐 것인가... 끝까지 열심히 쓰면 하영이 엘킨만 사랑하게 될지, 다른 누군가를 사랑하게 될지 저도 결론이 보일 것 같습니다.+ㅁ+ 루트는 점점 명확하게 마음이 기울기는 하는데 아직도 왔다갔다 하네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