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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외생명체는 인간의 마나를 우선적으로 본다. 사람이 상대가 좋은 사람인지 나쁜 사람인지를 파악하기 전 이것저것 스펙을 따지듯 인외생명체가 처음 보는 것이 마나였다. 마나는 그들에게 있어 지위이며 스펙이니까.
인간의 경우 외적인 지위라든가 권력에 마음을 빼앗겨 마나 자체를 소홀히 하기도 하지만 인간도 인외생명체도 공통적으로 가늠할 수 있는 영역 중 하나가 마나라는 건 확실하다. 전혀 다른 두 개체의 소통창구-
반면, 영혼은 다르다. 인외생명체가 그 자신의 힘이 강대할수록 마나보다 중시하는 게 영혼이며, 힘이 약한 인외생명체도 갈구하고 갈구하는 게 영혼이었지만, 정작 인간은 영혼을 보지 못했다. 그들이 보는 것은 현생의 육체와 그 육체에 반사되는 영혼의 그림자뿐. 눈동자에, 손길에, 말에, 분위기에 투영되는 영혼의 그림자를 쫓지만 영혼 그 자체는 볼 수 없는 생명체. 영혼을 볼 수 없지만, 그 영혼이 완전 다른 존재로 변하는 게 가능한 유일한 존재-
기본적으로 고정된 영혼을 가진 인외생명체가 그런 인간의 영혼을 알아보고 끌리는 건 어떻게 보면 자연스런 섭리였다. 강한 힘을 가진 인외생명체일수록 자신의 힘을 이용해 인간 영혼의 전생과 환생을 짐작하기도 했으며, 계약자의 환생을 계속해서 쫓는 인외생명체도 드물지 않았다.
그 중 용은, 인간의 영혼을 파악하는 걸 넘어 그 영혼을 조종하는 게 가능한 유일한 생물이었다. 강한 마나나 정신력이 있다면 회피하는 것도 가능하다고 하지만, 왠만한 마나와 정신력으로는 그들을 거스르는 게 불가능하다고 전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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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대에서 일어나 인사를 하기 위해 자세를 취하자 셀리안이 손을 든다. 나는 냉큼 다시 침대에 앉았다.
"사양이란 걸 모르는 아가씨군."
"자주 만나는 사이에 사양하는 것도 미덕이 아닌 것 같아, 그만. 다시 해드릴까요. 인사?"
"그것도 재미있겠지, 얼마나 잘 배웠는지 한 번 볼까."
치사하게... 꼭 인사를 받아야겠냐.
그는 느긋하게 웃으며, 손을 휘두른다. 구석에 놓여있던 간이의자가 내가 앉은 침대 앞에 나타난다.
"흐음-"
"?"
"조금 불편한데."
그가 손을 딱 치자, 간이의자가 사라지고 어디서 소환해왔는지 기다란 소파가 침대 앞으로 나타난다. 그의 눈동자를 닮은 붉은색의, 고급스러운 실크로 감싸인 소파였다. 그는 소파에 느긋하게 몸을 파묻는다.
"..."
저 소파가 왠지 내 침대보다 큰 느낌인데.
"자,인사 해야지?"
"호호호, 분부대로."
나는 훌쩍 일어나 남자답게 인사 했다. 기억 속에서 남자귀족들이 셀리안에게 했던 인사를 흉내낸다. 즉, 남자의 인사법이다.
“...입에 초코렛 묻힌 사내가 참 귀엽게도 인사를 하는군."
“폐하는 영애처럼 섬세하네요. 이런 걸 다 발견하시고.”
초코렛을 닦지 않고 생글 미소 짓자 그는 어깨를 으쓱하며 테이블에 놓인 초코렛 더미를 본다.
"보기만 해도 달군-"
“폐하도 초코렛은 그럭저럭 좋아하시지 않나요?”
셀리안은 단 걸 좋아하지 않았지만 초코렛은 그럭저럭 즐겼다. 이전 밤에 초코쿠키를 가져오기도 했고, 카카오 비율이 높은 초코렛을 특히 즐겨먹고는 했다. 일이 안 풀리거나 피곤하거나.
“아아, 그럭저럭이지. 하지만 이 정도나 먹으면 질릴 것 같은데. 취향에 맞는 간식을 요청하는 게 낫지 않을까.”
그는 내가 그만큼은 아니지만, 단 걸 그다지 좋아하지는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다. 확실히, 최근 히아신스 덕에 간식이 죄다 스위트이긴 하다. 뭐가 먹고 싶다고 하녀를 부릴 만큼 명령하는 데 익숙하지 않은 점도 있다. 그러다보니 히아신스가 두고 간 초코렛이나 스위트에 손이 갔고 이게 묘하게 중독성이 있었다.
"이게, 또 먹다보니 괜찮더라구요."
"히아가 성공했군."
나는 아예 그가 소환한 붉은 소파, 셀리안의 옆에 앉아버렸다. 왠지, 푹신함도 소파 따위가 내 침대보다 더 고급질 것 같은 느낌이다. 쿡쿡 웃은 셀리안은 품에서 수건을 꺼내 옆에 앉은 내 입가를 닦아주었다.
“다정도 하시네요.”
“상대가 애라서, 참... 나보다 나이 많은 애라니... 뱀족의 공주도 애보기가 싫어서 나갔나 보지?”
“호호, 무서운 폐하를 보기 싫다고 하던데요.”
“그래, 짐은 무섭지. 그대 빼고는 제대로 다 아는데 말이야.”
그의 수건이 초코렛을 닦고 내 코를 꾹 누른다.
"~~~"
좀더 반박해보고 싶었지만 삼킨다. 말장난을 하면 끝이 없고, 이길 자신도 없다. 전생의 나는 아무래도 나보다 여러면에서 페라미타가 좋은 것 같다. 말장난을 하다 보면 결국 밀리고 밀린다. 나는 마음을 접고, 품안에서 종이를 꺼내 그에게 내밀었다.
"흐음-"
아카인 후작의 탄핵 시 내가 이야기할 것을 적은 것이었다. 물론 나를 방문하는 여러 사람에게 확인을 받아야겠지만, 일단은 셀리안에게 확인을 받고 싶다. 내가 좀 어설픈 면이 있어도 셀리안에게 지적받는 건 다른 사람에게 뭐라고 듣는 것보다 한결 나은 기분이 들었다.
*
“어떤가요?”
종이를 유심히 보던 셀리안이 나에게 종이를 돌려준다.
“...청문회가 이제 이주 정도 남았나."
"이주도 안 남았어요."
"마음의 준비는?"
"준비랄 것도 있나요. 폐하가 그걸로 됐다고 이야기 주시면 다른 분들도 그럭저럭 통과인 글이겠고, 그걸 외우면 되는 걸요."
"정말로 이걸로 만족하나."
그는 내게 돌려준 문서를 도로 빼앗아 팔랑거렸다. 뭐가 문제가 있나 싶어 조마조마하게 쳐다보자 그가 어깨를 으쓱한다.
"문제는 없어. 문관들이 마음에 들어할 것 같군. 적당히 눈물도 짜내고 적당히 품위도 지키는 글이니까.“
“그럼 됐잖아요?”
”...지나치게 건조한데- 짐의 사감이긴 하지만. 그대는 아카인 영애에게 좀더 원한이 있지 않나?"
"전 이걸로 충분해요."
"음... 좀 과장해도 좋다고 보는데. 아니 그대가 당한 일은 과장을 보태지 않아도 엄청나다고 생각하는데 말이야. 여기서 제일 달지 않은 게 어떤 거지?"
“이거요.”
셀리안은 초코렛 더미 중 내가 추천한 초코렛을 골라 입에 넣는다. 달지 않은 건 하트 모양이 양각되어 있다. 가장 달지 않은 초코렛이 부담스러울 정도로 앙증맞은 하트 모양을 달고 있다는 게 묘하다.
"그대는 감정에 둔감하군."
"예민한 편이라고 보는데요."
특히 최근에는 더.
"아냐, 둔감해."
셀리안은 집었던 하트 모양 초코렛을 내 입에 갖다 댄다. 내가 말똥말똥 쳐다보자 오만하게 명령했다.
"둔감한 그대에게 감정을 선물하지.“
“초코겠죠. 그것도 제 초코.”
”입 열지? 명령인데..."
"명령 남발 좀 하지 마세요. 위신 떨어지게."
"걱정마라. 짐은 남발해도 되는 위치니까. 자, 입-"
불만스럽게 그를 보다가 앙, 하고 벌리면 그가 하트 초코렛을 내 혀 위에 올려 놓는다.
"자, 그럼 닫고 , 씹도록."
그것까진 명령할 필요없거든- 반발심이 나지만, 혀에 초코를 올려 둔 채 입 벌리고 있는 것도 흉하니 닫고 우물우물 씹는다.
덜 단 초코인 만큼 달콤함보다는 씁쓸한 맛이 입에 퍼졌다.
"요즈음 완전히 엘킨에게 님을 뺏다지."
"우으."
갑자기 초코렛이 더 써진 것 같다.
"그리고 히아한테도 말이야."
“우으으.”
엘킨을 엘킨이라고 부르게 된 직후, 히아신스에 들킨 게 어제 아침이었다. 나도 모르게 그녀 앞에서 엘킨을 엘킨이라 불렀다. 히아신스는 눈을 도끼눈처럼 뜨고, 자신도 히아라고 부르라고 강요했다. 그 강요에는 그녀가 내 실제 나이를 알게 된 것도 있었다. 배신감을 느끼거나 어색해할 줄 알았건만 순식간에 그녀는 나에게 좀더 어리광을 부리게 되었다. 적응이 빠른 전장의 에메랄드는 여동생 포지션에 완전 정착해, 요구하는 게 좀더 능숙해졌다.
본인이 언니라고 부르겠다고 말하는 것도 간신히 막았는데, 히아라고 부르지 않겠다고 하자마자 대놓고 언니 언니 불러대서- 결국 승낙했고 서로 애칭을 부르기로 했다. 나는 히아라고, 그녀는...
"히아와 영이라."
"..."
그렇다. 그녀는 나를 어제부터 영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다행이라면 히아신스가 다른 사람 앞에서는 자제하는데 동의해준 정도일까. 그랬는데-
“어떻게 아는 건가요.”
“이 왕궁에서 짐이 모르는 일은 없지.”
“...큭... 범죄자.”
"짐도 영이라고 불러줄까."
"싫어요..."
그럼 진짜 가출이다. 더 뒤도 보지 않고 가출해버릴테다. 단호하게 고개를 저으면 셀리안은 아쉬운 듯 히죽히죽 웃더니 대신, 이라고 이야기했다.
참 최근에는 말도 안 되는 걸로 대신 뭘 하자는 사람도 늘어났다.
"짐을 리안이라고 불러다오."
"...싫..."
"명령이다."
또 명령.
"어떻게 그렇게 불러요. 다른 사람에게 욕 먹는다구요. 황제를 리안으로 부르다니. 히아나 엘킨은 어떻게 생각하겠어요."
"히아나 엘킨은 상관없다고 할 텐데... 그럼 나도 둘이 있을 때만 꼭 리안이라고 부르면 되지 않겠느냐."
"귀찮..."
"안 하면 처형이라니까."
셀리안은 히죽 웃으며, 반발하려는 내 입에 하트 초코렛을 하나 더 넣어주었다.
*
몇가지 양식지를 받아 복도를 거닌다. 뒤에는 지나가기만 해도 시선을 끄는 아름다운 뱀족의 공주가 따라오고 있었다. 에드나와 함께 걷고 있기 때문일까, 안면이 없는 몇몇 하녀들도 고개를 숙인다. 나를 신수와 마수를 부리는 게 가능한, 대단히 높은 귀족이나 마법사라고 생각한 것 같았다. 그밖에도 나에 대해 아는 하녀들조차 가볍게 고개 정도는 숙이게 되었다. 어느 쪽이든 송구스럽지만 이것도 계속 되자 익숙해졌다.
다만, 나를 소닭 보듯 하는 하녀들은 여전히 존재한다. 그 전부터 나에게 심하게 대했던 사람들 중 고집 센 몇 명. 나야 뭐 사실 귀족도 아니고, 그렇게 품위 유지를 하며 기선을 잡아야 할 이유도 없어 넘어가지만, 그런 사람들도 무시를 하면 했지 뻣뻣하게 고개를 들고 나를 노려보진 않았다.
지위가 달라진 거다. 그런데-
‘누구지?’
그녀들은 왕궁의 하녀들답게 제법 예쁘고, 제법 오만해보였다. 최근엔 히아신스와 에드나를 번갈아 보고 있어서 감각이 둔해지긴 했어도 객관적으로 보자면 그랬다.
궁금하긴 했지만 그뿐이라, 대수롭지 않게 휙 지나가려 하면, 하녀들 중 한 명이 내게 다가온다. 다가오는 하녀를 에드나가 기민하게 막았다.
"읏-"
"무슨 볼 일인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나에게는 오만한 시선을 향하고 있던 하녀가 뱀공주의 기백에 움찔했다. 움찔했지만 고집을 부려 허리를 세운다. 에드나가 비웃듯이 흥하고 입가를 끌어올린다. 그 모습이 지독하게 잘 어울린다.
"...3왕녀께서 세르미아...영애를 부르십니다."
기억났다. 내 빨래감을 엎었던 3왕녀의 하녀들이었다.
*
하녀들은 에드나가 따라오는 걸 거북하게 여겼지만, 에드나는 강고했다. 강고하게 잘라 말했다. 죽이지만 않는다면 끼어들지 않을테니 그냥 따라가겠다고- 심드렁하게 이야기했다.
‘죽이지만 않는다면... 이라.’
[그야 뭐... 죽는 것도 아니잖아?]
라고 말했던 금안의 남자- 3왕녀를 알현한 뒤에는 류에 대해 에드나에게 본격적으로 상의해야겠다고 생각한다. 타이밍이 영 잡히지 않았지만 그녀도 류를 찾고 있고 주저하다가는 아무것도 못하고 청문회를 맞이할 것 같다.
"예의를 갖춰주시길."
3왕녀의 방에 도달하자, 하녀는 약간 무시하는 투로 나에게 이야기하며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3왕녀의 방은, 금지옥엽처럼 사랑을 받는 공주답게 화려하고 예뻤다. 이미 물러난 선왕이 가장 귀히 여기고, 공주들 중 누구보다 귀여움을 받는, 셀리안을 정말정말 좋아하는 공주님.
‘이름이...’
생각나지 않는다. 기억을 더듬어보아도 이름보다는 인상만 떠오를 뿐이다. 다행히 애칭은 기억나는데 애리였다. 셀리안은 주로 애리라고 불렀고, 그녀는 정말 셀리안을 좋아했다.
아버지인 선왕이 꺼리는 것도 있고, 정비이면서도 헤르티아는 왕비들에게 약간 멸시당하는 면이 있었기 때문에 다른 공주들은 셀리안에게 데면데면했다. 그렇다고 무시한 건 결코 아니고, 서먹한 상대가 지나치게 위대하고 대단해 완전히 서먹해진 것에 가까웠다.
하지만, 이 3왕녀만은 셀리안을 매우 잘 따랐고, 셀리안 근처에 있는 여자들은 기본적으로 다 싫어했다. 일단 히아신스를 무지하게 싫어했던 것 같다.
나에겐 어떨까.
"..."
셀리안보다 따뜻한 색조의 주홍색 눈동자와, 그녀의 어머니인 마놀공주의 화려한 금발을 가진 소녀. 셀리안도 금발이긴 했지만 왕족은 이상하게 금발이 많았다. 느낌은 달라도, 고위귀족 중에는 금발이 많아, 흑발이 멸시당한다면 금발은 부러움을 샀다.
"제3왕녀 전하에게 인사 올립니다. 하영 세르미아라고 합니다. 제국의 꽃을 뵙게 되어 더없는 영광입니다."
물론 이건 순전히 셀리안 기억에 의존한 모습이다. 언뜻 보긴 했지만 상대가 공주이니만큼 함부로 고개도 들 수 없다. 상대가 황제일 때도 마찬가지인데 그런 황제 앞에서 눕고 초코렛 먹고. 우와, 나 죽어도 할 말 없겠는데.
"이거야?"
"네."
여자라기보다는 아이 같은 느낌이 강하게 드는 귀여운 목소리가 울리고, 하녀들이 대답했다. 동시에, 나를 위아래로 살펴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 작품 후기 ============================
화니환이님 후원쿠폰 감사합니다. 히힛->ㅁ/ 저의 감사하는 마음과 기쁨을 몸동작으로 표현해보겠습니다! 이 몸동작은 오늘 화니환이 님 꿈으로 액자 처리해 사진 전송 될 거니 잘 부탁 드려요>ㅁ<
MS1007 님 // 셀리안이랑 엘킨이 드래곤볼의 퓨전 하는 모습이 떠올랐습니다.=ㅁ=// 두 사람 다 좋게 봐주셔서 감사해여!
pen1107 님 // 이 부분에 대해서는 세계관을 위해 짚고 넘어가야 할 것 같아 오늘 들어가는 글에서 열심히 마나, 영혼, 인외생명체의 관계를 써봤습니다. 히힛. 그런데 엘프 쪽은 설명할 타이밍이 안 맞아 리코멘으로 달겠습니다!>ㅁ< 엘킨이 모르는 건 하프엘프이기 때문이 맞습니다. 인간이 조금이라도 섞이는 순간 본인이 의도하든 안 하든 육체와 외관에 마음이 빼앗기게 되니까요. ...라는 설정입니다!
옆집바나나 님// 소갈비와 스테이크... 지금 딱 배고픈 시간, 배고픈 타이밍이었는데 코멘 내용과 별개로 소갈비와 스테이크에 마음을 빼앗기고 말았습니다.ㅜㅜ 크흡. 그래서 엘킨이 소갈비인건가요?+_+ 대쪽 같은 엘킨은 뼈가 있당...이라든가.(<<)
lokoko 님 // 에공, 센스가... 저는 한물 간 코멘으로 답하겠습니다. lokoko님은 별로, 제 마음의 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