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루나 패러독스-82화 (82/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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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옛날.

에피룬 크레이누라는 소년이 있었다. 그는 그의 부모에게, 친구들에게, 이생물에게, 그리고 세계에 사랑받았다. 세계의 사랑을 받은, 사랑 받으면서 태어나 줄곧 사랑 속에서 자란 남자는 누구에게나 애정을 줄 수 있는 사람이었다.

안나라는 소녀가 있었다. 소녀는 그녀의 부모에게, 주위 사람들에게 버림받는 인생을 걸어왔다. 가장 천한 자리에서 사랑을 받지 못하고 살았다. 그녀는 세계의 사랑을 받았지만, 세계는 그녀에게 사랑을 표현하지 못했다. 말 할 줄 아는 모든 것에게 거부당한 소녀는 자신이 사랑받음을 몰랐다. 결국 그녀에게 눈에 보이는 사랑을 알려준 것은 소년뿐이었다.

소년은 소녀를, 소녀는 소년을 사랑하게 되었다.

이 사랑 이야기는 남자가 된 소년이 세상을 위해 죽고, 여자가 된 소녀가 남자의 부활을 기다리며 끝이 난다.

여자는 기다린다. 사랑하는 사람을, 끝없이, 끝없이.

많은 사랑을 받았던 소년은 자신의 사랑을 더 큰 세상과 사람들에게 줘야 한다고 생각했고, 단 하나의 사랑만을 알았던 소녀는 자신의 사랑을 오롯이 소년에게 바쳤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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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까지가 우리 대장로가, 내가 어렸을 적 질리도록 해줬던 이야기지.”

“...”

동화 같은 이야기였다. 언뜻 아름답고 애틋하게도 느껴진다. 에드나는, 눈을 내리깔고 몽롱하게 이야기를 마쳤다. 그 이야기는, 물뱀의 대장로가 어린 그녀에게 해줬던 이야기라고 덧붙인다.

“하지만-”

몽롱한 눈빛이 또렷하게 돌아오고, 그녀는 바로 그 뒤의 이야기를 이어갔다.

“이 이야기에는 뒤가 있지. 안나는 에피룬을 끝없이 기다렸지만, 어차피 그녀도 인간이잖아. 결국 안나는 수명이 다해 죽었어. 시체가 되어도 몸을 움직이는 방법이라든지 자신의 신체를 에피룬의 성물처럼 오래 유지하려고 해도, 그녀의 영혼 자체는 결국은 세계의 품으로 돌아가 환생의 고리에 포함되었지. 그래서- 그녀는 바로 직전 다시 한 번 뱀일족에 찾아와 물었다. 자신이 어떡하면 좋겠냐고. 어떻게, 그를 계속 기다리면 좋겠냐고.”

그리고, 뱀일족의 자랑스러운 호수께서는 답을 낸다. ‘자손’을 통해 유지를 잇는 일만이 인간이 할 수 있는, 영원히 사는 방법의 전부라고 말이다.

“성의 안나도 그렇고, 그 외 단 하나의 소망을 위해 움직였던 이 세상 모든 안나들은 그 여자의 후손이야. 그 후손들은 그녀 자체가 되어 긴 시간 노력했다. 최초의 시체를 후손 대대로 이어, 흑마법으로 결정화시킨 시체를 자손에게 떠받들게 하고, 때로는 먹이기도 하며 ‘안나’라는 일종의 소망이 된 원념을 이어갔다. 에피룬 크레이누의 부활을 꿈꿨다. 부질없는 약속에 기대. 그를 기다렸다-”

“...시체를 먹는 건 의미가 있어?”

“육체란 건 그 시기 영혼의 결정체기도 하니까. 물론, 거의 암시적인 의미긴 하지만. 흑마법이 더해졌으니 실제적인 의미도 있지 않았을까.”

파이 가게 앞으로는 많은 사람들이 지나가고 있었다. 에드나의 괴기스러 이야기와는 관계없이, 이 판타지한 세계에서도 사람들은 분주하고 현실감이 넘쳤다. 그들 중에는 가족무리도 있었고 친구도 있었으며 연인이나,  때때로 홀로 걷는 사람도 있었지만, 그 누구도 이상한 이야기와는 관계가 없어보였다. 일상을 살아간다.

간간히 눈에 띄는 에드나의 모습에 사람들은 우리를 힐끔거렸지만, 딱히 우리 이야기에 관심을 갖는 사람은 없다. 그저 나만이 정신없이, 이 비정상적인 이야기에 몰입하고 있다.

“죽은 자를 부활시키는 흑마법도 기본적으로는 영혼이 아직 늘러붙어 있는 시체를 이용하는 거니까.”

“...부활...”

“정말 인간이란 지독하지. 자신은 유지도 못하던 것이, 결국은 후손들을 통해 세계의 흐름을 어그러뜨려. 죽은 자를 두 번이나 부활시키고.”

“...부활...시켰다고?”

“그래- 결국 안나는 소망을 이루었지.”

그녀는 무감하게 나를 바라보았지만,  나는 내가 절망하고 있음을 깨닫는다.

이 이야기는 안나라는 하녀의 비정상성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이것은- 셀리안이 줄곧 부정했던 어떤 사실로 향하는 이야기였다.

물어볼 건 산더미 같은데, 소망은 어떻게 이루어졌냐부터, 어떤 방법으로 이루는지까지.

하지만, 나는 더 이상 듣고 싶지 않다. 그만두고 싶었다.

이건 셀리안 크레이누의 감정이다.

나는 더 이상 묻지 않고 입을 다물었지만, 뱀공주는 다시 입을 열었다.

“에피룬 크레이누를, 부활시킨 거야.”

라고- 부활시켰다고, 지금의 셀리안도 모르고, 인간들은 모르는, 다른 신수나 마수들도 모를, 진실을 아는 뱀의 공주가 선고한다.

“에드나-”

그 입을 막으려 했지만 뱀의 공주는 말을 마무리지었다.

“셀리안 크레이누- 에피룬 크레이누의 강대한 마나가 외부에서 끄집어내져 뒤틀려 망가진 고대왕의 영혼- 인간들 빼고는 모두 알지. 물론 그게 망가진 거라는 건, 내막을 아는 우리 뱀일족만이 아는 이야기지만.”

“...”

“아, 정정. 너도 알겠군... 왜 그런 표정을 짓는 거지?”

그녀는 묘한 표정으로 나를 보며 묻는다. 나는 숨을 고른다. 진실이란, 참 허망하고 지독하게 간단하고, 반전따위는 없었다. 아니라고, 그렇게 부정했지만.

이미 그녀와 나 사이에서 내가 셀리안이란 것도, 셀리안이 에피룬이란 것도 기정사실이 되어버렸다.

물론, 다르다는 것도 기정사실이다.

그녀는 나와 셀리안이 다르다고, 다르다고 생각하는 내가 좋다고 했으니까.

‘다르기에 좋은 거야.’

셀리안 크레이누는 좋은 사람이다. 그는 올곧기 위해 노력하고 나는 그가 상처입거나 부서지지 않길 원한다.

그건 그가 나와 다른 사람임을 인식했기 때문이다. 윤하영과 너무도 다른 셀리안 크레이누. 그가 ‘나’일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을 때는, 혐오스러워 견딜 수 없었다. 자기혐오에서 에드나의 말마따나 자아도취가 된 것은 그가 나와는 너무도 다른 멋진 왕이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이야기하면 너무나 이기적이고 가증스러울지 모르지만.

“...셀리안에게는 그런 말 하지 마.”

나는 그녀를 똑바로 바라보며, 이야기한다. 뱀공주는 눈을 깜빡인다.

“나한테 명령하는 거야? 건방지긴.”

“부탁해.”

제발, 이라고 호소하면 뱀공주는 탐탁치 않은 것처럼 덧붙인다.

“마법왕과는 이야기도 섞고 싶지 않다니까.”

라고. 조금 누그러진 다정한 목소리였다.

*

파이를 전부 헤치우고 성으로 돌아간다. 류에 대해서는 아무 소득이 없었다. 에피룬과 안나에 대한 이야기는, 소득인지 소득이 아닌지 말하기 어렵다.

“하나 더 물어도 돼?”

“내가 니 선생이냐.”

“물어도 돼요?”

“너 존대 좀 섞어 쓰지마.”

툴툴 거리면서도, 파이를 잔뜩 먹은 그녀는 기분이 좋아보였다. 티는 안 나지만 마음이 너그러워진 것 같다.

사실, 초반에 대놓고 성질을 낸 게 부끄러워진 것처럼도 보였다. 그녀 말마따나 안나와 물뱀 일족, 대장로의 관계는 그녀를 답답하게 했던 원인 중 하나지만, 그걸 남에게 드러낸 게 쑥스러운 것 같았다.

“에드나는, 나랑 셀리안이 왜 같다고 생각한 거야? 이종족은 다 아는 거야?”

셀리안과 에피룬의 관계를 모든 이종족이 안다고 그녀는 이야기했다. 그걸 어렴풋이 느꼈기에, 셀리안은 이종족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나와 셀리안은 어떨까. 내가 만난 이종족은 진와 렌, 에드나가 다인데 그들은 모두 알아보았다.

“그야, 일반적으로는 알기 어렵지. 그와 너는 마나의 양부터가 극과 극이라, 그 심연까지 들여다보는 건 쉽지 않을 테니까. 내가 안 건 그냥 우연이야.”

“우연이라니.”

“물론 내가 내막을 안다는 거라든가, 이 몸이 워낙 대단하다든가 하는 이유가 있겠지만. 정말 우연이었으니까.”

납득이 가지 않아 물끄러미 쳐다보자 그녀는 드물게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곤란한 표정을 짓고 한숨을 쉰다.

“그래-사실, 검은 용이 너를 마음에 들어한다는 도련님의 이야기에 뭔가 하고 탐색한 것도 있어.”

내게 손을 마주 댔을 때 단지 셀리안에 들키지 않으려고 그런 건 아니었다고 에드나는 실토했다.

“그러니까, 네가 너무 태평한 거야. 펴란다고 펴니까.”

“...”

“미안하다.”

“미안하면 하나만 ”

“기어오르네.”

“그, 하나만 더... 부활한 게 둘이라고 했잖아. 한 사람은 또 누구야?”

셀리안과 관계가 있는건지, 없는건지, 조금 궁금해진다. 문득 떠오른 건 앤 선배의 고향 이야기였다. 죽은 아내를 살리기 위해 마을 처녀를 이용한 남자의 이야기, 엘킨이 말한 마탑이 주시한 사건들- 죽은 사람을 살리기 위한 실험, 그런 건 성공한 적이 없다고, 단 한 사람 이외에는 없다고 류조차 이야기했지만, 에드나 말로는 한 명 더 있는 것 같았다.

“몰라.”

“응?”

“대장로가 셀리안 크레이누가 태어나고 몇 년 후, ‘누군가가 또다시 돌아왔다’고 중얼거렸을 뿐이야.”

*

"하영?"

"!"

"하영이 맞군요."

"하프엘프군이네."

왕궁에 들어서 비틀비틀 복도를 걸으면 엎친데 덮친 격으로 복도에서 엘킨을 만났다. 그는 부드럽게 웃으며 내 이름을 불렀고, 나는 에드나가 옆에 있다는 것도 잊어버리고 후들후들거리고 있다.

방금 전까지 굉장히 피곤하다고 생각했다. 육체적으로야 거의 파이집에 앉아 사람들을 훑어보는 수준이었으니까 그렇다 쳐도, 정신적으로 피로했던 것이다. 몰랐던 기이한 이야기, 여전히 믿기지 않고 동시에 믿을 수 밖에 없는 당혹감, 거기서 파생되는 셀리안에 대한 걱정- 내가 그를 걱정할 주제인가 싶지만, 결국 여러 가지로 머리가 아팠는데.

이제는 엘킨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는 가볍게 에드나에게 목례를 하고 다시 나를 본다. 나는 그저 덜덜 떨 뿐이다. 그런 나를 에드나가 기가 막히다는 듯이 보는 게 느껴진다.

“외출 하셨나보군요.”

“네, 네.”

야단을 칠 거라고 생각했지만, 에드나가 옆에 있어서 그런지 그는 그저 부럽다며 웃는다. 동시에 자신이 호위를 하고 싶었는데 빼앗겼다며 에드나에게 농을 걸기도 했다.

그러다가, 물끄러미 나를 보았다. 그는 복도에서 만나고 계속 나를 보았지만 더 깊은 눈이었다. 그의 푸른 눈은 청명하지만, 그 안으로 새파란 색조가 깊게 침잠한 것처럼 흔들리고 있다.

'...위험해.'

뭐가 위험하냐면- 그가 이렇게 나를 볼 때는 꼭 심장에 안 좋은 일이 생기곤 했다. 공주님 안기를 한다든가, 고백을 한다든가, 거절을 거절한다든가.

불안하게 그를 마주보면 엘킨이 살풋 미소지었다.

"당신에게서- 맛있는 냄새가 나네요.”

"에에?"

그 말이 갖는 기묘한 느낌에 굳는다. 굳었고 엘킨이 내 곁으로 얼굴을 댄 건 순간이었다. 귓가라고 해야 할까, 목덜미라고 해야 할까 마치 냄새를 맡으려는 것처럼 가까이 멈췄다.

'맛있는 냄새라고?'

짐작가는 건 파이다. 둔해지긴 했지만 나도 나한테서 파이 냄새가 나는 건 알겠다. 파이를 많이 먹기도 했고.

"흐음-"

"에, 엘킨 님!!"

"님은 뺀다고 했으면서."

"...으읏- 엘킨, 이건 빠, 빵 냄새입니다!!"

가슴은 쿵쾅거리고, 그의 숨결이 너무 가까이 느껴져 죽을 것 같았다. 거의 비명처럼 대답하면 그가 웃는다. 웃으며 나로부터 살짝 떨어져주었다. 다정한 건지 묘하게 짓궂은 건지.

예의 깊고 깊은 푸른 눈이 예쁘게 접혔다.

“아뇨, 하영의 냄새 같습니다. 빵냄새는 뱀공주님께도 나니까요.”

“!!”

졌다.

“...하프엘프 군이 원래 이런 성격이었나.”

에드나가 속삭였지만 대답할 수 없었다.

============================ 작품 후기 ============================

오늘의 연참입니다. 내일분은 내일분 대로 올라와요. 00시 즈음은 아닙니다만, 그 후 올라올 예정입니다.^^

화니환이님 후원쿠폰 감사합니다.ㅜㅜ// 기쁨의 트위스트를 선물 드립니다.

500피스 님 // 재미있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ㅁ// 아 500피스님의 덧글에 정말 기쁩니다. 완결은... 음, 처음엔 본편 150화(+-10) 전후로 생각했습니다만... 과연 어찌 될지.ㅜㅜ 그 즈음이 아닐까 지금도 생각은 하고 있어요!

lokoko 님 // 그쵸, 악마죠.ㅜㅜ 흑흑. 코멘에 명언이 있더라구요. 평생 하는 건 다이어트가 아니라 건강관리! 넵, 건강 괸리해요. 우링...ㅜㅜ//

옆집바나나 님// 아...ㅎㅎ 다이어트는 아니고 그냥 휴가 때 3kg이 올라서 3kg 복귀를위해 노력중. 오늘까지 2kg 정도 복구했는데 주말이 다가오네요.ㅜㅜ 복구해도 주말에 다시 찔 것 같은 이 불안감... 걱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이어트 때 물 많이 먹으라는 이야기는 저도 신경 쓰고 있어서. ㅎㅎ 감사합니다. 이제 괜찮으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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