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83 80 =========================================================================
80
어느 정도 시간이 흘렀을까, 문득 복도 밖의 하늘을 본 엘킨이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이야기를 좀더 나누고 싶습니다만..."
그리고, 정말로 아쉽다는 듯이 오래도록 나를 보았다.
"저는 일이 있어서, 이만."
"일..."
"네, 야근이네요."
그는 대수롭지 않은 듯 웃었지만, 나는 간신히 그에게 헤롱거리고 있던 정신을 다잡을 수 있었다. 물론, 여전히 두근거리지만 그가 이 시간에 왕궁 밖으로 나가는 것에 짐작가는 마디가 있었다.
최근 하루드의 움직임이 흉흉하다는 이야기를 기억해냈다. 파이가게에 앉아 있을 때 언뜻 들은 것이다. 에드나의 이야기에 몰입하면서도 그 이야기는 가시처럼 걸렸었다. 류는 찾지 못했고 다른 이야기만 잔뜩 한 날이었지만 확실히 시내에 있으니 여러가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아카인 후작의 청문회가 다가올수록 이상한 사건사고가 끊이지 않고 그 뒤에 하루드가 있을 거라는 추측들, 괴담들.
"...몸 조심하세요."
"걱정해 주시니, 기쁩니다."
엘킨이 기쁜 듯, 아쉽다는 듯이 돌아선다. 나는 그걸 새삼 착잡한 마음으로 바라보았다.
'내일은 좀더 제대로 류를 찾아봐야겠어.'
그를 만나, 묻고 싶다. 무얼 하려는지. 아무 의미가 없을지 모르지만 묻고, 마음을 정해 셀리안에게 이야기하자고.
"에드나, 이제 가죠."
"또 존대... 그건 그렇고 돌아왔는데?"
"네?"
돌아섰던 엘킨이 다시 돌아온 걸 깨닫는다. 류에 대해 생각하고 있으면 돌아섰던 그가 다시 내 앞에 서서 나를 보고 있었다.
"엘킨?"
돌아와 나를 마주한다. 무언가 찾는 것처럼. 방금전과는 다르다. 그의 눈은 의아함이 서렸다가 곧 엄하게 굳어졌다. 마치 멋대로 추락사건을 추적했던 걸 셀리안과 함께 야단치던 때와 같은 눈빛이다.
“...”
“엘킨?”
“뺨이...”
그가 손을 뻗어 내 뺨을 어루만졌다. 나는 역시나 피하지 못했다.
"에...엘킨..."
이것도 데자뷰가 있었다. 내 빨래감이 엎어지고, 여자들에게 맞고, 엘킨에게 구해져, 그가 치유해줬다. 그때랑 같다. 다른 점은 그때 그는 내게 손을 대지 않았지만 지금은 뺨을 직접 어루만진다는 점이다.
“부었습니다.”
자국 안 남는다며, 라는 눈으로 원망스럽게 에드나를 바라본다. 하지만, 사실 그녀를 원망할 게 못 되었다.
이전 나도 슬쩍 거울로 확인했으나 눈에 띄는 붓기는 없었다. 3왕녀가 이상한 재능이 있다고 느끼며 분명 아픔이 있는데도 붓기가 없어 신기했다고 생각했다.
에드나가 잽싸게 입을 연다.
“그런 붓기가 보이나요? 엘킨 다이브?”
에드나의 말에 엘킨은 미간을 찌푸렸다. 왜 당신이 있으면서 이런 일이 생긴거냐고 힐난하는 눈빛 같기도 했다. 에드나의 눈썹이 찌푸려진다.
엘킨은 그녀의 불쾌함을 무시하고 말을 이었다. 화가 난 것 같다.
“고문도 아니고, 육안으로 알아보기 힘든 붓기라니 질이 안 좋네요.”
“...”
“...”
"..."
"..."
침묵이 흐르고, 나와 엘킨 사이에 기묘한 눈싸움이 시작되었다.
엘킨은 눈으로 묻고 있다. 누가 그랬냐고. 마치 제 동생이, 아니 식구가 어느쪽이든 누군가에게 맞고 왔을 때 화를 내는 가족처럼 말이다.
나는 입을 꾹 다물었다. 애리의 괴롭힘이 더 심해지면 어떨지 모르지만 오늘은 그저 뺨을 세 대 맞은 것 뿐이다. 약간 감각이 이상해지는 것 같은데 그걸로 뭐라고 말하기도 뭐하다. 동공이 마구마구 흔들렸지만, 버티고 있으면 그는 무겁게 한숨을 쉬고 손을 뗐다.
순간, 뺨의 아픔이 사라진다.
“이야기 하기 싫으시면 됐습니다.”
이번에는 내가 이긴 것 같다.
“하지만..."
내가 이긴 걸까. 이것도 아는 눈이다. 이런 눈을 하고 엘킨은, 다치지 말아달라고 언젠가 내게 이야기했다. 셀리안의 방, 아카인 영애에게 찔리고 일어난 직후였다.
"다치지 말아주세요.”
그래. 이렇게.
그는 뗀 손으로 그대로 내 손을 쥐었다. 나는 이제 시선을 피했다.
“견딜 수 없으니까요.”
약속해주세요, 라고. 나는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수밖에 없었다.
*
그걸로 끝인 줄 알았는데 내 방에 도착하면 이번엔 셀리안이 기다리고 있다. 내 방 문앞에 나른하게 기대서 새파랗게 녹아든 한밤의 달을 보고 있었다.
에드나는 꼼짝없이 그와 조우해 딱딱하게 굳어버린다. 도망갈 타이밍을 놓쳤다. 셀리안의 붉은 눈이 우리 둘 모두를 발견한 것이다. 전생의 셀리안은 몰랐었지만, 에드나는 사무적인 게 아니라 딱딱하게 굳어 있던 것 같다. 이제 알겠다.
“물뱀의 공주를 만나 영광이군요.”
"아, 아뇨-"
에드나는 그녀답지 않게 완전히 셀리안에게 압도된 것 같았다. 그녀는 셀리안도 모르는 이야기를 통해 이리저리 그를 재단하며 판단했었다. 하지만 그건 셀리안이 없을 때였다. 그녀는 내가 그녀와 지내는 요 며칠 동안 단 한 번도 인간에게 취하지 않았던 최상의 예를 셀리안에게 표했다.
“저야말로 마법왕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고개를 드시죠."
"가, 감사합니다."
셀리안은 에드나의 인사를 받은 뒤, 빠르게 나에게 다가온다.
다가오거나, 말거나. 그가 왜 다가오는지 궁금하긴 하지만, 지금은 셀리안에게 몰입하기가 쉽지 않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여전히 엘킨과의 만남 때문에 조금 정신이 없었다. 치유 마법을 받긴 했지만 볼은 그 전보다도 화끈 거린다.
“...흐음.”
엘킨의 말, 표정, 행동- 그 때문에 달아오르는 걸, 여전히 안절부절 못하는 걸 간신히 숨기고 있으면 셀리안이 고개를 갸웃했다.
“없군.”
“?”
“느껴지는 건 ...의 마나뿐이야. ...한 건가.”
“네?”
들리지 않게 중얼거린다. 이렇게 가까운데 들리지 않다니- 셀리안 답지도 않고 일부러인 것 같기도 해서- 엘킨으로 가득찼던 머리가 부러 개이는 것 같다.
"뭐라고요?"
대체 어느 나라 개미야, 라는 마음으로 새삼 눈을 뾰족하게 뜨면 그가 웃었다.
“아니아니, 선수를 놓친 것 같아서 말이야. 잘 자.”
그는 그대로 내 머리를 한 번 쓰다듬더니 나른한 걸음걸이로 멀어져갔다.
대체 뭐하러 온 거지?
*
이제 진짜 오늘은 끝이다!
라고- 한 일은 그저 에드나와 돌아다니며 닭고기 파이를 먹고 복도에서 엘킨을 만나고 문앞에서 셀리안을 만난 건데. 그것만으로도 정말 죽을 것 같이 피곤했다.
옷을 갈아입고 얼른 잠자리로 몸을 뉘이면- 문 두들기는 소리가 났지만- 침대가 참 벗어나기 힘들 정도로 아늑했다.
"윽-"
"하하, 온 사람 섭섭하겠네"
"셀리안이 아닌가 보죠? 안 도망가고."
"호호, 참 다행이지?"
에드나는 헤먹에 누운 채로 감았던 눈을 살풋 떴지만 일어설 생각이 없어보인다. 미실랭 부대장마냥 깐죽거리며 나에게 나가보라며 손을 흔든다. 그녀의 행동은 둘째치고 문밖의 손님은 위험인물은 아닌 듯 했다.
"에휴."
나는 마지못해 침대에서 일어나 문으로 다가갔다. 문을 열면, 검은 머리의 녹색 눈동자를 한 기사가 쓴웃음을 짓고 나를 보고 있었다.
“혹시 잤어요?”
히아신스다.
“히아? 이 늦은 밤에 왜-”
무슨 일이 있는 걸까? 그녀는 갑작스럽게 내 방을 방문하곤 했지만, 그건 예의에 벗어나지 않는 선이었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그녀는 귀족영애였고, 게다가 기사였다.
이런 밤에 방에 찾아온 이유를 모르겠다.
“그, 그게...”
그녀는 말을 흐리며 나를 빤히 본다. 빤히 보다가 의아하게 고개를 갸웃했다.
“없네?”
“뭐가?”
“아, 아니야. 음... 자는 거 방해해서 미안해요. 그, 그리고.”
그녀는 당혹한 듯 고개를 젓더니 조금 망설인다. 망설이다가 결심한 것처럼 고개를 끄덕이고 내 손에 무언가 쥐어주었다. 파란색 통이다.
“이건-”
그것은, 붓기를 빼는 크림이었다.
“필요해지면 듬뿍 발라요. 많이 바를수록 효과가 좋으니까."
"히아?"
"잘 자요!”
불러세웠지만, 문이 닫히고 달아나듯 히아신스가 시야에서 사라졌다.
*
애리, 아리나 크레이누는 나를 히아신스를 대신할 괴롭힘의 타겟으로 삼았다. 다음날도 이렇게 저렇게 불려가는 건 예상했다.
예상했지만 그녀는 그 전과 다르게 울상을 하고 나를 보고 있다. 그 전날이 도도하고 오만하고 세상물정 모르는 공주였다면, 지금은 엄마한테 혼난 어린애 같은 표정이었다.
“...?”
그 모습이 하두 이상해서, 또 맞을 걸 각오하고 물끄러미 바라보았지만, 그녀는 미동도 안 하고 나를 보고 있다.
주홍색 눈동자와 마주하길 어느 정도. 하녀들은 뭔가 불안해보였고 침울해보인다.
“치사해.”
“?”
고개를 갸웃하면 그녀는 발을 동동 구른다. 구르지만, 힘이 없다.
“치사해! 치사해!”
몇 번이고 연호하며 발을 굴렀다.
그날은 그걸로 끝이었다.
그리고, 이건 나중의 이야기지만 청문회가 시작될 때까지, 그녀는 그 후로 나를 단 한 번도 부르지 않았다.
*
“3왕녀님이 왜 그랬을까?”
“너 둔하구나.”
딱히 에드나에게 물은 건 아니었지만 고개를 갸웃하고 있으면 뱀공주는 길게 하품을 하며 헤먹에 늘어지게 누워 기지개를 켰다.
에드나는 내 방에 헤먹을 걸어 자곤 했다. 침대를 권했지만, 정말로 헤먹이 취향인지 그녀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나에게 예의차릴 성격은 아니니 예의는 아니었던 것 같고.
“아 뭔가 먹고 싶다~”
예의 안 차린다니까. 그녀는 당당하게 요구하는 눈으로 나를 보았다.
“뭘요?”
“둔하긴! 종달새 파이.”
종달새... 그런 걸 파는 데는 없을 것 같지만, 그녀는 꿈꾸는 듯한 몽롱한 표정이 되었다. 그녀의 머릿속에서는 이미 털 뽑고 노릇하게 구워진 종달새 몇 마리가 날아가는 것 같다. 어쩌면 산 채로 나는 걸지도 모르지만 그 부분은 생각하지 않기로 한다.
“좀 있다가 시내에서 닭고기 파이나 먹어요.”
“그건 그거고. 지금 배고프다고.”
"..."
"종달새 파이~"
우아하게 아름다운 뱀공주가 어린애처럼 종알거린다. 그 종알거리는 소리조차 그닥 품위없지 않으니 참 불공평하달까. 에드나가 배고프다며 투덜거렸지만, 투덜거리고 싶은 건 나다.
그때 노크소리가 들려왔다.
*
노크의 주인공은 어제와 마찬가지로 히아신스였다. 히아신스는 닭고기 파이를 바리바리 싸들고 내 방에 찾아왔다. 에드나는 어제 그렇게 먹고도 눈을 빛내며 히아신스로부터 바구니를 받아든다. 그리고 내 손에는 또 달콤한 간식이 잔뜩 들려졌다.
나는 본격적으로 그녀에게 내가 단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고 이야기해야 할지 고민하며 티테이블을 준비했다.
"아, 어제 연고 고마워요."
"아니에요. 뒷북인걸요."
설마.
"히아, 혹시-"
"네?"
아니, 히아신스가 애리공주에게 뭐라고 했다면 아마 왕녀는 왕궁을 발칵 뒤집었을 것이다. 그러면 엘킨이? 그것도 뭔가...
추측을 계속하다보면 티테이블 위로 그녀가 가져온 파이들이 올라가고 언제 들어왔는지 하녀가 잽싸게 홍차를 올려놓았다. 오늘은 드물게 에드나도 티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