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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왕녀에게 누군가 언질을 주었다. 아마도 나를, 괴롭히지 말라는 것? 괴롭히지 말라니. 29살이나 되어서 그런 말을 쓰는 것도, 누군가가 한참 어린 소녀에게 나에 대해 그런 언질을 줬다는 것도 미묘하다. 하지만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긴 했다.
덕분에 오늘은 아무런 괴롭힘도 없었으니까. 단지 치사하다고 했을 뿐.
‘치사하다...라.’
왜 치사하지? 쉽게 생각할 수 있는 건 그거다. 방금 전의 부끄러운 가정이 내가 누군가에게 고자질을 해 생긴 일이라고 애리가 추측했을 때.
어쨌든 누군가가 나를 위해 왕녀를 막았다는 것이다.
엘킨은 애리로 인해 내 뺨이 부은 걸 알고 치료해주었다. 히아신스도, 복도에서는 내색하지 않았지만 진즉에 눈치 챘던 듯 연고를 가져다 주었다.
하지만, 두 사람 모두 애리를 막을 수는 없다. 직접적으로 막아줄 수는 있지만 그녀를 원천봉쇄할 수 있는 사람은 이 성에 하나 뿐이었다.
[없군.]
이라고, 셀리안 크레이누는 이야기했다. 작은 소리로 무언가 중얼중얼, 뜬금없이 남의 방앞에 있다가 사라졌지.
나는 새삼 뺨을 스윽 문질러보았다.
엘킨의 치료는 완벽해서 이제 조금도 아프지 않다.
“하영?"
"아, 응?"
"...그, 혹시 뺨이 아직도...으음...”
히아신스는 우물쭈물 말을 잇지 못했다. 그녀는 직접적으로는 묻지 못하고 내 눈치를 본다. 내가 그녀에게 이야기하지 않은 만큼 뭐라고 말을 꺼내야 할지 헤매는 것 같았다. 그녀의 초록색 눈이 걱정스럽게 내 뺨을 보았다.
“고마워요. 히아!”
“아.”
"멀쩡해요."
나는 부러 탁탁 내 뺨을 쳐보며 그녀에게 감사인사를 전했다. 히아신스는 곧 수줍은 듯 미소지었다.
엘킨도, 히아신스도, 그리고 셀리안도.
모두 내가 뺨을 다치기 무섭게 알아채고, 위해주었다. 치료해주고 연고를 주고...
'어떻게 안 걸까, 셀리안은...'
사랑스러운 사람들, 그렇다. 사랑스러운 사람들이다.
81
티타임은 꽤 즐거웠다. 주로 대화하는 건 나와 히아신스였고, 에드나는 파이를 우물거리며 하늘을 보고 있었다. 돌출되었지만 별로 이상할 것도 없었다. 평화로운 시간이었다.
이 순간만은, 곧 다가올 청문회나 류, 어제의 그 복잡한 이야기도 머릿속에서 잠시 밀어둘 수 있었다.
“에이나양이 가져온 파이도 제법 맛있군요.”
에드나는 손에 들고 있던 닭고기 파이를 마지막으로 모두 넘기고 만족스러운 듯 중얼거린다. 하늘을 보는 시선은 그대로라, 딱히 대답을 원하고 한 말은 아닌 것 같다. 말그대로 감상이었다.
“어제 꽤 많은 닭고기 파이를 먹었지만, 이거참, 별미네.”
“그, 그런가요?!”
에드나의 중얼거림에 반응한 건 히아신스였다. 그녀는 고개를 열렬히 끄덕였고 덕분에 하늘을 향해 있던 에드나의 시선이 테이블로 돌아왔다.
“사실, 이게 안나씨가 만든 파이인데.”
“...”
“그녀는 파이를 꽤 맛있게 만든답니다.”
히아신스도 나도 슬그머니 에드나의 얼굴을 살폈다. 어제 에드나가 부러 안나를 피한 걸, 히아신스도 느끼고 있던 걸까. 긴장하고 있었지만 에드나는 별 말없이 다음 파이를 집어 입에 넣는다. 입에 넣으며 나를 힐끔 보고 중얼거렸다.
“파이에는 죄가 없잖아. 닭한테도.”
“네?”
“아니, 하영과 한 이야기랍니다. 그리고, 에이나님께는 죄송하지만 전 그 여자가 싫답니다. 파이는 좋습니다만.”
“어... 왜인지 여쭤도 되나요?”
히아신스가 조심스럽게 에드나의 눈치를 본다. 에드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인간은 다 싫어요. 인간과 티파티를 갖는 것도 지금 내가 얘를 호위하니까 어쩔 수 없는 거지, 싫어합니다.”
단호하게 이야기했지만 파이는 잘도 먹는다. 내 핑계를 댔지만 그냥 파이가 먹고 싶은 거 아닐까.
히아신스는 말을 잃고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았다. 단호하다면 단호한 말에 할 말을 잃은 히아신스는 '그렇군요', 라고 간신히 이야기하고 초코렛 파이를 오물 거린다. 기죽은 것처럼 어깨가 축 늘어진다.
“그럼, 영은?”
구원을 요청하듯 나를 보며 눈을 반짝거렸다.
안나가 껄끄러운 건 나도 마찬가지지만.
“어, 그, 그야... 어제 처음 뵈었는 걸. 좋은 분 같았지만요.”
나는 히아신스에게 너무 약한데.
"그런데, 히아는 왕비님과 꽤 친하네요. 놀랐어요."
정말로. 그녀와 스스럼없이 티타임을 가질 정도로 친분이 있을 줄은 몰랐다. 하지만, 히아신스의 대답은 내 생각과는 달랐다.
“...으음.”
“히아?”
“사실, 왕비님은 별로 나를 좋아하지 않는 것 같아.”
히아신스가 버림받은 강아지처럼 추욱 쳐져 이야기했다. 그 말에 왠지 안심하면서도 분한 마음이 있다. 그녀가 셀리안도 모르는 사이에 헤르티아와 친밀하지 않다는 것에 안심한 반면, 히아가 어디가 부족해서 좋아하지 않는 거야, 라는 모순된 생각이었다.
“그래서, 폐하 몰래 도전 중이에요.”
히아신스가 가볍게 어깨를 웅크리며 쉿 하는 포즈로 말을 했다. 말을 하고도 여전히 기죽은 것처럼 그녀는 씁쓸한 얼굴로 미소 짓는다.
"폐하는, 아마 별로 안 좋아하실 테니까....요. 그, 이건 하영에게 처음 이야기하는 거지만. 나는... 언젠가 헤르티아 님과 폐하의 관계를 풀어보고 싶어요. 욕심이고 주제 넘은 걸지 모르지만 두 분 다 서로를 아끼는 걸 알 수 있는 걸. 뭐, 아직 왕비님의 마음에도 들지 않았으면서 시기상조지만요.”
"..."
나는, 히아신스의 말을 천천히 곱씹었다.
히아신스다운 이야기였다. 좋은 이야기고 다정한 말이었다. 그녀는 셀리안이 자신의 어머니를 불편해하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전생의 셀리안이 느낀 것처럼 그녀는 그 내면까지는 잘 모르는 것 같았다. 히아신스와 헤르티아가 친해진다 해서, 셀리안이 안 좋아하는 일은 없다. 다만, 당혹해하겠지. 혹시 헤르티아가 히아신스에게 이상한 말이라도 할까 불안해 할 것이다.
'그래, 불안함.'
내가 두 사람이 친할지도 모른다는 것에 느낀 것도 불안함이었다. 히아신스는 셀리안과 헤르티아가 서로를 아낀다고 이야기했지만 그것은, 맞다면 맞고 틀리다면 틀린 이야기였다.
정말 셀리안이 에피룬의 현신이라는 걸 인정하고 추측을 해보자면 헤르티아는 자신이 에피룬을 현신시킨 것을 알고 있다. 그리고 셀리안을 에피룬으로 대하고 있었다. 그녀는 셀리안을 사랑, 하고 있다. 하지만 그게 어떤 색인지는 모르겠다.
셀리안으로 말할 것 같으면, 그녀에게 어머니의 애정을 갈구했지만 이미 오래전에 포기했다. 그것은 그녀의 감정이 절대로 그가 원하는 방향으로 돌아서지 않을 거라는 걸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결국 포기하고 실망하고 곪아서-
풀 수 없다, 냉정하지만 어쩔 수 없다. 객관적으로 봤을 때 두 사람이 서로를 아끼는 마음은 방향이 다르니까.
"그, 그래도, 기회가 있는 거잖아요."
"?"
"아니, 나중에 이 나라의 황후가 될 히아니까, 왕비님과 접점이 있는 건 당연하겠지만요. 그래도! 좋아하는 것과는 별개로 티타임 정도는 갖고 있는 거잖아요. 티타임을 가져주시는 것은, 히아한테 아주 마음이 없으신 건 아니라는 거겠죠."
내 말에 히아신스가 웃는다. 내심과는 별개로 그녀가 기죽어 있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아 발랄하게 이야기해보았다. 웃어주니 다행이었다.
그녀는 내 말에 용기를 얻은 것처럼 약간의 사이를 두고 입을 열었다.
"으음. 그게...“
“?”
”저도 혹시나 하는 마음이 있긴 해요.“
“혹시나?”
”그, 나를 폐하의 호위로 추천해주신 분이 왕비님이었으니까요. 뭐, 소통구는 안나라, 직접 만나 뵌 건 약혼식 이후였지만."
"...네?"
"어, 그러니까, 소통구는 안나..."
"히아를 추천한 게..."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것도, 몰랐던 이야기다. 정말로. 정말로 히아신스를 추천한 게 헤르티아라고?
그럴리 없다. 히아신스를 처음 약혼녀로 공표했을 때 헤르티아는 눈을 깜빡였고, 그런 호위가 있었는지도 모르는 얼굴을 했었으니까.
그녀는 실력이 있었고, 그 에이나가의 영애였다. 그녀를 추천한 건 그 전의 칼미온 단장. 지금의 장관인 레시온 공작이었는데.
"네, 왕비님이세요. 그, 왕비님은 표현이 서툴고 외로운 분이셨어요. 하지만, 폐하를 사랑하시는 건 확실해요."
*
'소통구는 안나라고?'
나는, 히아신스가 돌아간 후에도 줄곧 히아신스의 추천에 대해 생각했다. 그리고 한가지 가정을 했다. 헤르티아는 그 자신이 추천한 것조차 모르고, 안나가 뒤에 있는 건 아닐까 하고. 안나의 정체를 에드나에게 들은 이후라 지나치게 선입관이 생긴건지도 모르지만, 그렇게밖에 생각할 수 없다.
셀리안의 기억 속에서 헤르티아는 정말 히아에게 데면데면했으니까.
나는 히아신스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필사적으로 기억을 반추하기 시작했다.
안나, 그녀가 어떤 존재인지는 별개로 헤르티아가 데려온 하녀 안나에 대해. 기억나지 않는 기억을 총동원한다.
헤르티아가, 지지기반도 약하고 사교적이지 않고, 보기에 따라서는 나사가 수어개 빠진 것 같은 그 소녀 같은 왕비가 제 자리를 잡게 된 이유. 셀리안을 낳은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그녀는 물정 모르는 아가씨였다. 모국에서 핍박받았지만 그 핍박도 공주로서 새장 속의 새처럼 핍박받은 것이었다. 멸시당하고 무시당하고 하지만 밖으로 나간 일은 없는 상처 입은 새장속의 소녀.
그런 그녀를 그나마 왕궁에서 자리를 잡게 해준 사람. 그것이 안나였다. 그녀의 행보는 눈에 띄진 않았지만, 꽤 사교성도 있고 싹싹한 하녀라. 다른 하녀들이 일을 안 해도 그녀가 있었기에 헤르티아는 왕비다운 모습일 수 있었다.
이 싹싹한 하녀는, 제 주인이 주인인지라 전면에 나서는 일은 없었다. 없었지만, 가끔. 그래, 셀리안의 기억 속에서도 가끔 의외로 높은 위치의 자들과 이야기를 하는 그녀를 볼 수 있었다.
'레시온 공작에게 히아신스를 추천한 건 역시 안나일 거야.'
왜?
추측하고 가정하고 앞뒤를 맞춰보지만, 찝찝한 마음만 깊어졌다. 표면은 알되 의미는 알기 어렵다.
그것에 대해서는 에드나는 물론 추천받은 히아신스 본인도 모를 것이었다.
"으으으..."
"영애가 그런 소리를 내면 안 됩니다. 아무리 차가 써도요."
"아, 죄송합니다."
예절선생의 지적에 정신을 차렸다. 지금은 예절수업이 한창중이었다. 거의 끝나긴 했지만, 아무래도 기본적인 수업은 규칙적으로 받고 있었다. 아직도 가끔 남자 예절로 실수를 하기도 하니까.
'...그만두자.'
수업에 집중하기로 한다. 도저히 답이 안 나 포기하는 것도 최근에는 많아진 것 같았다.
물론, 그녀가 헤르티아의 추천을 받았다는 건 껄끄러운 사실이긴 하지만, 누구의 추천이라 한들 히아신스는 히아신스였다. 셀리안은 둘의 관계는 모르고 있다. 왕궁에서 일어나는 건 대부분 알고 있어, 티타임을 갖는다는 건 떠올려보면 알았던 것도 같다. 다만, 히아신스가 안나와 친하다던지, 왕비와 친해질 결심을 한 것은 몰랐다. 때문에 기껏해야 자신의 약혼녀와 어미가 갖는 티타임이란 인식이었다.
‘히아가 헤르티아의 추천을 받았다는 걸 알면...’
그는 공명정대하고 다정한 사람이지만, 어머니는 그에게 아킬레스건과도 같았다. 다른 방해가 있는 것도 아닌데, 셀리안이 히아신스를 보는 눈에 껄끄러움이 담기는 건 싫다고, 나는 이 일에 대해 더 이상은 언급하지도 생각하지도 않기로 한다.
전생에도 이 문제로는 별일이 없었다. 그러니, 아무 일도 아닐 것이다.
히아신스가 지나치게 일찍 죽었다는 걸 뒤로 하고 나는 생각을 멈추기로 했다.
*
어느새 시간은 흘러 흘러, 청문회를 딱 일주일 앞둔 날이 되었다. 그간 몇번 더 에드나와 시내에 나가곤 했지만 류와는 마주하지 못한 채 오늘에 이르렀다.
에드나와의 시내 외출은 점점 맛있는 새파이 찾기가 되어갔다. 어쩌면 류는 우리가 그를 쫓는 걸 알고 피하는지도 모른다고, 그런 생각을 하며 오늘까지도 그와 마주하지 못하면 역시 셀리안에게 이야기하는 편이 좋겠다고 결정했다.
그렇게 다짐할 무렵, 그 날은 골목의 가게에서 에드나가 무려 종달새 파이라는 괴상한 음식을 발견했다.
종달새 파이라니, 나는 가게 선반에 주렁주렁 걸려 있는 털 빠진 작은 새들을 입을 막고 바라보았고, 에드나도 입을 막는다. 그녀는 감격에 몸을 떨었고 나는 순수하게 올라온 메스꺼움에 입을 막았다.
찾던 류는 못 찾고 결국 종달새 파이에 도달하다니 헛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하영, 하영!"
"네, 네."
그녀의 이끌림에 마지못해 가게에 도달하면, 에드나는 손을 번쩍 든다.
“종달새 파이 10개 부탁합니다.”
“저는 1개만 부탁합니다.”
“!”
나는 하나도 부탁하지 않았다. 고로, 저건 내 목소리가 아니었다.
종달새 파이는 되었다고, 닭고기 파이면 충분해 새의 새로운 세계따윈 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 옆에서 대롱거리는 종달새에 입을 막고 슬금슬금 물러나던 나는 깜짝 놀라 에드나의 옆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옆에서 종달새 파이를 주문한 사람은 신관차림을 하고 있었다.
황금빛 눈동자를 한 작은 체구의 신관은 눈을 깜빡이며 종달새 파이를 보다가 곧 나를 발견하고, 발견한 척 하고 히죽 웃었다.
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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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피스 님 // ㅎㅎ 벌써 반입니다! 반밖에 안 왔어요.ㅜㅜ 으윽, 빨리 하영이가 ㅇㅇ랑 ㅇㅇ해서 ㅇㅇ하는 결말을 내고 싶습니다!
lokoko 님 // 맛있는 건 참을 수 없어! 하지만 엘킨은 참지요. M이니까? 쨌든 맛있는 건 참지 말아야죠! 저는 문득 쿠우송이... 쿠우 아시나요. 이렇게 저는 lokoko님의 나이를 파악하지요+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