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루나 패러독스-86화 (86/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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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문회는 하루드의 꼬리를 잡기 위한 결정적인 기회, 라고 했지만 바로 일주일을 남기고 많은 것이 바뀌었다.

왜인가 하면, 셀리안 크레이누가 하루드의 중추를 차지하고 있는 10인 중 3명을 처리했기 때문이다. 2명을 그 자리에서 죽였으며 한 명은 생포했다고 한다. 유감스럽게도 정작 잡으려 했던 미든의 게트룬은 명단에 없었지만 3명도 그와 동급인 자들이었다. 청문회에 발등에 불이 붙은 하루드가 재빠르게 행동을 개시했고 셀리안은 그 흔적을 따라 그들을 제압했다.

오래 전부터 하루드를 일망타진하기 위해 준비하고 있던 셀리안에게 있어 그들 중 누구든 수면위에서 움직인 건 좋은 먹이감이 되었던 것이다.

공식적으로도 제법 높은 자리에 앉아있던, 잡혀온 한명은 항의가 대단했지만, 셀리안이 무슨 일을 했는지 그의 나라에서 그를 버렸다. 덕분에 그는 고문실에서 썩어가고 있다는, 그 비명소리가 끊이지 않는다는 흉흉한 소문이 돌고 있었다.

나는 무슨 금지옥엽 영애마냥 어느 순간 흉흉한 소문으로부터 차단되어 있었지만, 에드나는 그런 이야기들을 종종 가지고 와주었다.

어쨌든 이 상황에서 청문회가 제대로 이루어지는 건 하루드의 수치였으며, 셀리안에게는 그들이 움직일수록 기회였다. 아카인 후작의 청문회는 이제, 애초의 의도보다는 전야제가 더 돋보이게 되었다. 청문회가 열리기 전 어떻게든 끝을 내려는 하루드와 그들을 잡는 셀리안의 기싸움이, 우세한 건 일방적으로 셀리안이었지만 말이다.

나와는 직접적으로 상관이 없었지만, 상황은 그랬다. 나는 나대로 남은 일주일을 바쁘게 보냈다.

물론, 일주일을 남기고는 나를 걱정한 엘킨이 제법 많이 찾아와, 나는 에드나 앞에서 얼굴을 붉히고 소녀처럼 반응했고 그녀는 싸한 눈으로 날 보곤 한다는, 소소하게 부끄러운 에피소드도 빠지지 않았고 말이다.

오늘도 그런 날인데, 청문회 전전날이라 그런지 미실랭도 함께 있었다.

*

엘킨은 바로 내 곁에 자리를 잡았고 나는 고개를 숙인 채 그의 손끝을 바라본다. 나도, 그도 왠만해선 말이 많지 않다. 나는 그냥 부끄럽고 기쁘고 곤란한 거고, 엘킨은 이제 숨기지 않고 그런 내가 사랑스럽다는 표정이었다. 아마 우리 둘과, 에드나만 있었다면 그런 상황이 계속 되었을 텐데 오늘은 달랐다. 한숨을 쉰 건 미실랭이다.

“이게 뭐하는 장난인걸까요. 대장-”

“뭐가 말입니까? 미실랭 부대장?”

미실랭은 크앜, 소리를 내며 머리를 감싸쥔다. 에드나는 내 손을 붙잡고 서늘하게 웃는다. 그녀의 표정은 명백히 비웃고 있었다. 미실랭 부대장에게 동조한 듯 기가 막힌 걸 숨기지 않았다.

‘부끄러워서 그러는 줄 알았는데, 이게 하프엘프랑 하영의 연애인 거야? 진짜 부끄러운 인간들이네.’

“윽, 그런 게...”

“하영?”

“바보.”

엘킨이 걱정스러운 것처럼 나를 보고, 에드나는 바보라고 이야기하고 얼른 나로부터 손을 뗀다. 엘킨이 내 이마에 손을 짚는다. 나는 얼굴이 펑 소리만 내지 않았지, 터진 것 같다. 정신을 못 차리겠다.

점점 공인화되고 관계가 깊어지고 있었다. 엘킨은 더 저돌적이 되었고, 나는, 마음이 바뀐 건 아니지만 엘킨의 호의가 슬슬 기분 좋게 느껴지고 있었다. 그의 말대로 이렇게 변해가다가 마음도 바뀌어버리는 걸까.

‘괜찮아, 청문회만 끝나면.’

나는 그의 손을 견디며 마음을 다잡았다.

곧 시모갈사절단도 돌아간다. 나도, 어쨌든 말이 세르미아의 양녀였지만, 세르미아의 사람이 된 이상 세르미아의 땅에 한 번 정도는 갈 수밖에 없을 것이었다.

세르미아의 주인 되는, 딸을 잃은 중년의 남성은 아카인에 짓밟혀 다리를 못 쓰게 되었고,  얼마 안 가 풍을 앓게 되어 거동도 하지 못한다고 했다. 셀리안의 제안에 그는 나를 기꺼이 받아들였고 아카인 가를 무너뜨리는 걸 직접 보지 못해 안타깝다 이야기했다 한다. 자신의 정적이 될 남자를 짓밟고 그 딸을 행방불명으로 만들고, 그런 주제에 그 딸을 대놓고 찾게도 못하게 한, 아카인 후작. 그 후작가를 그들의 함정에 제가 넘어가게 한다니, 찬성이라고 몇번이고 말했다고 했다.

그 주인 대신 왕성에 방문한 건 세르미아의 장남이었는데, 그가 증언을 하고 내가 결정적인 한 방을 먹인다는 시나리오였다.

세르미아의 장남은 30대 중반 정도의 청년귀족으로, 인상이 괜찮은 남자였다. 아버지를 대신해 아버지가 본 일, 그리고 아카인에게 짓밟힌 일과, 여동생을 잃은 일을 증언한다고 했다.

나에 대해서도, 사무적이지만 호의있게 배려해주는 사람이었다. 아마 그를 따라, 한 번 세르미아를 방문할 텐데...  세르미아를 방문하면서 아예 거기에 머무는 것도 괜찮을 것이다. 엘킨도 셀리안도 히아신스도 꽤 바쁜 사람들이다. 지속적인 관계는 뜻대로 끊어지지 않겠지만 멀어지면 안정되는 관계도 있겠지. 나도 내 구미대로만은 할 수 없다. 그들과 관계를 유지하면서 멀리 떨어지는 것도 방법일 것이다.

셀리안의 말대로, 조금 방향은 다르겠지만 세르미아의 영지에서 할 일을 찾아보자. 주제 넘게 세르미아를 일으키고 자시고는 할 게 없으니 일을 좀 받아보고. 책도 좀 읽고, 마법도 좀 배우고-  셀리안이 전생인 만큼 나도 마법에 아주 재능이 없진 않겠지.

자신은 없지만 그곳에서 원래 세계로 돌아갈 방법을 연구하는 것도 괜찮은 인생일거라고 생각된다.

그때도 엘킨이 쫓아온다면, 매우 난감하고 행복할 테지만.

그런 생각을 하는 시점에서 역시 나도 변해가는 걸까 하고- 나도 모르게 엘킨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엘킨도 마주 바라봐준다.

미실랭이 야유한다.

“얼른 둘이 결혼해라- 주위 사람 짜증나니까.”

“미실랭 도련님도 어서 좋은 분을 맞이하세요. 도련님이 아니면 그 분의 사역마라도 될 테니까.”

“엉? 왜 나한테 그래?”

“미실랭 도련님은 남자니까 상대적으로 덜하지만, 인간치고는 혼기가 제법 지난 거 아닌가요? 그런 걸, 노총각이라고...”

“...윽, 시어머니. 나 요즈음 피곤한데 더 피곤하게 할래?”

미실랭은 머리를 감싸쥐었다. 에드나는 흥하고 비웃었다. 청문회 때문일까, 확실히 전보다 그는 피곤해보이긴 했다. 워낙 행동이 껄렁껄렁 스스럼이 없어서 눈치 채지 못했고 건강체질이라 멀쩡해 뵜지만, 눈 밑이 약간 거묻하다.

“정말 피곤해보이네요? 부대장.”

“오오, 하영만이 내 아군이군. 응응. 요즈음 통 잠을 못 자.”

“그건 문제네요. 뱀족의 특수 수면제를 처방 드리겠습니다.”

“...어음, 사양할게.”

그거 15살 때 먹은 그거겠지, 트라우마야 라고 미실랭은 투덜댔다.

*

소소한 이야기와 두근거림이 오가고, 나는 포근하고 나른한 시간을 보냈다. 청문회가 이틀 남았지만 잠시간. 마치 폭풍전야의 태평함 같기도 했지만, 다 잘 될 거라는 생각이 든다.

미실랭이 섞여, 에드나는 평상시보다 들떠보였고, 나와 엘킨도 미실랭 덕분에 꽤 말을 하고 있었다. 역시 미실랭 부대장은 그 눈치없음이나 껄렁함이 성가시긴 해도, 분위기 메이커였다.

“이 녀석, 원래 종달새 완전 좋아해. 굳이 파이가 아니어도 되지.”

“파이가 아니어도 된다는 건...”

“종달새는 어떤 식으로든 다 맛있으니까요.”

에드나는 예쁘장한 얼굴로 그로테스크한 이야기를 꺼냈다. 나는 얼굴이 구겨지는 걸 간신히 참는다. 저번 종달새 파이 가게의 일렬로 늘어진 털 빠진 종달새-

‘아니지.’

사람에겐 취향이 있다. 옛날 내 친구 수지의 BL 취미랑 같다고 생각하면 못 견딜 것도 아니다.

머릿속에서 종달새들이 지저귀는 환청이 들리지만 무시한다.

“어린 시절 공부로부터 도망가면 할머니가 이 녀석을 시켜 날 찾아오곤 했는데- 그때 누이의 종달새를 훔쳐다 주곤 했어. 그러면 눈 감아 줬다니까.”

“참 맛있었죠. 저는 케롤님 종달새에 차마 손대지 못했는데... 도련님은 참 과감했다니까요.”

그녀는 행복한 추억을 반추하듯 꿈같은 표정을 짓는다.

“...으윽...”

기어이 내 표정이 구겨지자, 미실랭은 폭소했고 에드나는 의아한듯 고개를 갸웃거린다. 엘킨이 가볍게 쿡쿡 거린다.

엘킨의 그 익숙해진, 가벼운 웃음소리가 참 좋다. 좋다고 생각해버린다. 자연스럽게.

별다른 사건이 없었는데도 그저 시간이 지나고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사람은 변해가는구나 생각한다. 그게 기묘하기도 하고 역겹기도 하고 그러면서도 행복에 가깝다는 생각이 문득 들어 나는 창문에 시선을 주었다.

'이제 그렇게 많이 메슥거리진 않아.'

하늘이 참 맑다. 내 방 창문은 꽤 조망이 괜찮았는데 하늘이 넓게 펼쳐지고 바로 밑으로는 장미가 잔뜩 심어진 왕실의 정원이 보였다.

색색의 장미가 심어진 정원에는 사람들이 분주히 다니고 있다. 큰 정원이라 어느 곳에는 영애들이, 어느 곳에는 뛰어다니는 하녀들이-

이 세계가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 것도 꽤 오래 된 것 같다.

‘아.’

그 장미정원에 셀리안이 있었다. 일을 하다 잠시 나왔는지 안경을 그대로 끼고 긴 가운을 멋들어지게 입고 있었다. 그 가운은, 눈에 익다. 언젠가 나를 감싸 숨겼던 그 가운이었다.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하영?”

“아, 아니에요.”

엘킨의 물음에 고개를 돌린다. 돌리는 순간 셀리안에게 누군가가 다가가는 걸 보게 된다. 그들은 요한 세르기타와 아누휀 윈드아였던 것 같다.

*

멀리서 볼 뿐이라 이야기는 들리지 않고, 셀리안은 웃고 있다. 나는 미실랭과 에드나의 대화 속에서 창문이 신경쓰여 힐끔거리고 있었다.

셀리안에게 다가간 이들은 정말 아누휀과 요한이었다.

“그래서 말이야- 에드나 녀석, 꽃보다도 닭고기 파이를 주는 편이 좋은데. 형은 그걸 몰라서-”

셀리안은 꽤 길게 요한 세르기타와 이야기하고 있는데 그 옆에는 아누휀 윈드아도 있다. 셀리안은 그들에게 웃는 낯을 보이고 있다. 웃고 있다. 웃고 있지만.

"형은 꽃을 주면 여자는 다 좋아한다고 알아, 이 녀석은 뱀인데."

"저는 뱀이죠."

"여기서, 기분 안 나빠하는 것도 괴상해!"

"?"

“그치, 대장, 하영-! 음...? 창문에 뭐가 있어? 둘다...왜?”

“아.”

“폐하네.”

내 시선을 따라 창을 본 미실랭 부대장이 이야기한다. 언뜻 보면 엘킨도 창밖을 보고 있었다. 그도 셀리안이 요한들과 있는 걸 발견한 것 같다. 아마 엘킨도 그가 시모갈 사절단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걸 알겠지.

“왠지 즐거워 보이시네.”

“윽, 마법왕은 웃으면서도 마나 발산이 대단하네요. 폭소하면 세상 무너지겠습니다.”

“인간은 거기까지는 못 느끼지. 에드나.”

즐거워 보인다고? 나는 미실랭과 에드나의 말에 눈을 둥그렇게 뜬다. 요한 세르기타와의 지난 일화 때문에 선입관이 생긴 건지도 모르고, 확실히 셀리안은 여기서도 보일 정도로 호탕하게 웃고 있긴 하지만. 나는 의아하게 눈을 깜빡였다.

“왜 그러는 거야? 하영?”

“폐하 즐거워 보이나요?”

“응...?”

"..."

알 수 없다는 듯이 나를 보는 두 사람, 나는 동의를 구하듯 엘킨을 보았다. 엘킨은 나를 보다가 창을 보고 다시 나를 본다. 나는 엘킨을 보다가 창을 보았다. 셀리안은 웃는다. 웃지만 역시- 역시... 나도 모르게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영?"

"..."

미실랭 부대장이 나를 불러세웠고, 엘킨은 말이 없다.

기우일지 모르지만, 요한 세르기타가 또 엄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곧 청문회인데, 곧 떠날 거면서. 기적도 충분히 보여줬는데.

내가 뭘 할 수 있겠냐만은 잠시 가서 시선을 분산시키는 정도는 할 수 있을 거다.

“저, 잠시만.”

내가 일어서서 나가려고 하자, 미실랭과 에드나가 의아한 듯 주춤거린다. 그리고, 엘킨은 내 손을 붙잡았다. 나는 다시 엘킨을 보았다. 그와 눈을 마주한다. 푸른 눈이 나를 붙잡듯 바라보았다.

"...저, 엘킨-"

"..."

"저-"

“...폐하, 이동하는군요.”

“어?”

다시 창을 보면 이야기는 끝난 듯 셀리안이 웃으며 요한에게 뭔가 격려하고 자리를 뜬다. 요한도 도서관 쪽으로 걸어갔고 아누휀도 마찬가지다.

“아, 그렇네요.”

다시 털썩 자리에 앉는다. 쑥스럽다. 셀리안도 다 큰 어른인데 굳이 일어날 필요는 없겠지. 그는 왕이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다보면 상처 입기도 하고 부딪치기도 한다. 내 전생을 뒤져봐도 알게 모르게 그를 거스르는 자는 많았다. 일부러든 호의든.

에피룬과 비견되는 이야기에는 일단 다 그랬으니까.

‘역시 나 자아도취인지도. 너무 오버한 것 같아.’

생각하면서도 혹시 아누휀 쪽에서 셀리안을 다시 붙잡기라도 할까 셋이 완전히 멀어질 때까지 시선을 떼지 못했다.

“...”

“하영-”

엘킨이 조금 낮게 나를 불렀다. 차가운 손이 여전히 내 손을 감싸고 있는 걸 깨닫는다. 이제사 깨달은 그 손의 체온 때문인지 갑자기 낮아진 그의 목소리 때문인지 나는 약간 놀란다.

“네?”

"..."

"에, 엘킨?"

“찻잔이 비었네요.”

엘킨은 다른 손으로 차를 따르며 다정하게 미소짓는다. 목소리는 낮지만 상냥하다. 언제나의 엘킨이었다.

손을 잡는 것도, 요즈음 그는 종종 그러니까 별로 특별한 일도 아니다. 언제나 특별한 일처럼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과는 별개로, 놀랄 일은 아니었다.

“아, 감사해요.”

“뭘요.”

엘킨의 푸른 눈이 조금 오래 내 시선을 붙잡긴 했지만, 그 후로는 다시 소소한 이야기들이 평상시처럼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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