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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미실랭 부대장, 믿고 맡기겠습니다.”
“에이, 그냥 청문회장까지 데려다주는 건데. 완전 과보호라니까요, 대장!”
“졸립다고 그 날 늦잠 자시면 안 됩니다.”
“에드나까지.”
문 앞에서 미실랭과 엘킨을 배웅한다. 미실랭은, 농도 걸고 껄껄 웃기도 하는 게 여전히 몸도 정신도 건강한 남자였지만 그의 말마따나 잠을 못 자는 건 사실인 것 같다. 그는 확실히 피곤해 보인다. 그의 사내다운 육체도, 험악하지만 풀리면 기묘하게 부드러워지는 인상도. 모두 그대로지만 무언가 어긋나 있음을 느낀다.
“바쁘신 건 알지만, 푹 좀 자세요. 진짜 피곤해보이셔요.”
“아, 고마워. 역시 내 걱정은 하영뿐이라니까. 사실, 자긴 자는데... 이상하게 개운하지가 않아서.”
그는 자신의 붉은 스포츠 머리를 벅벅 긁는다. 역시, 그의 눈은 미묘하게 초점이 맞지 않았다.
“...역시 수면제, 준비하겠습니다.”
“됐습니다!”
미실랭의 눈에 초점이 돌아온다. 그는 비명처럼 주춤거렸지만 에드나는 수면제를 먹일 생각 만만으로 호박색 눈을 위험스레 빛냈다. 미실랭은 그 시선을 피해 슬금슬금 도망갈 테세를 취한다.
"그럼, 나는 폐하한테 보고 할 일이 있어서..."
"!"
"마법왕은 도련님이 없어도 혼자 잘 할 거예요. 뭔지는 모르지만."
"뭔지 모르지만, 지금 수면제도 없잖아. 다가오지마."
"아, 그럼 만들면 드시겠다는 말?"
"그게 어떻게 그리 되냐?!"
"미실랭 부대장! 폐하한테 안부 전해주세요!"
"안부? 하영은 아까부터 꽤 폐하를 신경 쓰네. 크읔, 나도 신경써주고 다정하기도 하지."
그의 과장된 행동에 웃음이 나온다. 의미는 없겠지만, 나 스스로는 셀리안을 만나러 갈 구실이 없는 만큼 그에게 안부나 전할수 있으면 좋겠다고. 쿡쿡 웃고 있으면, 엘킨이 내 손을 잡았다.
“윽-”
“후후.”
그는 내가 흠칫 놀라자 가볍게 미소짓는다. 이제 미소짓는 건 그다. 미소지은 엘킨은 다시 물끄러미 나를 보았다.
“엘...”
“좋아합니다.”
“네, 네?”
“좋아합니다. 하영.”
“...”
“좋아합니다.”
엘킨의 푸른 눈은 곧고, 그 말은 마치 암시처럼 이어진다. 나는 기묘하게 다른 분위기에 그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좋아합니다.”
“...어이, 대장. 우리 안 보여?”
아까 느낀 느낌과 비슷하다. 평상시와 같이 다정하고 상냥한 엘킨이지만 묘하게 목소리는 낮고, 차가운 체온은 더 차가워 나를 놀라게 한다.
왜인지 모르면서도, 그 모습에 그저 오싹오싹 소름이 돋는다.
“후후, 내일도 잠깐 들리겠습니다. 오래는 못 있겠지만.”
아쉬운 듯 손을 뗀 엘킨은 다시 완전히 평상시로 돌아가 나에게 인사를 건넸다.
*
"에드나, 뭐하는 거야?"
미실랭과 엘킨이 간 후, 이런 저런 일정을 마무리하고 자리에 누우려고 하면 에드나는 주섬주섬 무언가 책상에 펼쳐놓기 시작했다. 어디서 가져왔는지 과학실에서나 볼 법한 실험기구와 부엌에서 사용하는 식기들이다. 다 펼쳐놓은 후에는 묵직해보이는 꾸러미를 빈자리에 던져놓았다.
"너는 자. 나는 지금부터 만들어야 하니까."
그녀가 깎지를 끼고 뿌득뿌득 목을 가볍게 양옆으로 움직인다. 그리고 꾸러미를 뒤적여 무언가를 꺼냈다. 슬쩍 본 꾸러미에는 평범하게는 양파부터, 평범하지 않게는... 뭐라고 칭하기도 애매한 것들이 들어 있었다.
"...음, 혹시 뱀족의 수면제 만들게?"
그녀는 분주하게 움직인다. 자라고는 했지만 그 모습에 나는 움직이지 못하고 멍하니 바라보았다.
"호오, 인간치고는 눈썰미가 좋다니까. 그래."
미실랭 부대장이 난리가 나겠군.
나는 이해가 가는 재료들과 종달새 파이만큼 이해 되지 않는 재료들이 섞이는 걸 입을 헤 벌리고 지켜본다.
"에드나는... 진짜, 미실랭 부대장을 좋아하네."
"그럼, 좋아하지."
그녀는 당당하게 이야기한다. 왠지 웃음이 나온다. 내 웃음에 나를 물끄러미 보던 그녀가 덧붙있다.
"난 바보 같은 아이가 취향인 것 같아."
"그래?"
"응, 너도 그래서 꽤 좋아."
"..."
"그 사람은 너보다도 훨씬 바보거든. 그냥 내러버려두면 제 몸도 못 돌봐."
동시에 그녀가 동물인지 식물인지 미묘하게 생긴 무언가를 빻기 시작했다. 가볍게 신음하는 소리가 들린다. 나도, 에드나도 아니고. 그 생물이.
나는 그 생물과 눈이 마주쳤다. 갈색 몸통은 분명 나무 같은데, 새까맣게 강아지 같은 눈이 나를 애처롭게 바라보았다 동물...일까?
"그 사람, 눈에 있는 상처 있지?"
"응? 아아."
미실랭은 기본적으로 인상이 험악했지만, 한쪽 눈을 가르는 상처 때문에 더 산적이나 해적처럼 보였다.
"그 멍청이 도련님이 10살 때 다친 상처지."
"그래?"
듣지 못한 이야기다. 미실랭은 허풍이 센 편이었지만 그 상처에 대해서는 별달리 이야기하는 걸 본 적이 없다. 뭐 소문이야 도적 20명을 상대하다가 다쳤다느니, 오크랑 검으로 대적하다가 다쳤다느니 여러가지가 있었고, 승리자는 미실랭이라는 게 소문의 끝이었지만 정확히는 알려지지 않았다.
"나를 감싸다가 다쳤어."
"우와? 10살이?"
"그래. 그건 바보니까. 10살에, 그것도 사실 감쌀 필요가 없는 상황이었어. 설레발이었지."
에드나는 단호하게 이야기한다.
그녀의 녹빛 손톱이 생물을 머리를 관통한다. 몸통은 빻고, 머리는 손톱으로 찌르는 걸까. 생물은 끼이익 소리를 내더니 더이상 소리 내지 않았다.
"...이거 동물?"
"식물인데?"
"어...응."
그녀는 그 식물을 냄비에 던져넣었다. 그리고 이것저것 섞는다. 괴상한 재료들은 섞일수록 달콤한 향기를 낸다. 그게 또 되게 끔찍하다. 나는 가볍게 미실랭을 동정했다.
"상황 판단이 안돼. 자라면 달라질 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니야. 내가 계약해서 옆에서 돌봐주려고 했는데 거절이나 하고."
"..."
"진짜 바보야."
꾸러미의 재료들이 하나도 남지 않게 되자, 그녀는 냄비 뚜껑을 덮고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그때도, 설레발 친 주제에 날 지켰답시고 웃었어. 눈을 못 쓰게 되었는데. 인간은 재생도 잘 안 되는데. 진짜, 바보야."
"음..."
"문제는 아직도 그 바보 도련님은 그 때 날 지켰다고 생각하지..."
툴툴대면서도 에드나의 얼굴은 어쩐지 다정해보였다.
*
청문회가 열리는 바로 전날은 오히려 썰렁할 정도로 고요했다. 전날인지라 엘킨이나 미실랭도 꽤 바쁜 듯 했고, 엘킨의 경우 그가 이야기한 대로 잠깐 얼굴을 보이긴 했지만 길게 이야기할 시간은 없었다.
저녁무렵, 에드나만이 미묘하게 분한 얼굴로 수면제가 담긴 통을 내게 던져주었다. 잘 못 자겠으면 먹으라며, 그녀는 눈썹을 꿈틀한다. 결국 미실랭은 그녀로부터 도망치는데 성공한 것 같았다. 나는 애매하게 웃으며 통을 받았고, 일단 그 통은 내 서랍행으로 결정되었다.
결국 그 날, 왕궁 자체가 고요했고, 예절선생도 다른 선생들도 오지 않은 내 방은 더 조용했다. 나는 그렇게, 방에 머물러 내가 이야기해야 할 것을 반추하며 하루를 보냈고 어느새 스르르 잠이 들었다.
그리고, 똑똑, 하고 문 두들기는 소리에 눈이 떠진 건 밤 무렵이었다. 문 두들기는 소리는 끈질기게 울리고 있다. 조용히, 다른 사람의 시선을 신경쓰는 듯하면서도 다급하게.
"..."
청문회 전, 마지막밤이라 나는 그 방문에 긴장했다. 왜 에드나가 반응하지 않은 거지? 의문을 가지며 나는 침대에서 일어나 가운을 걸친다.
"누구세요?"
천천히 문앞으로 다가간다.
"하영."
그 목소리는 키도스 미실랭의 것이었다.
*
"미실랭...부대장?"
생각도 못한 방문이었다. 내 방을 굳이 그가 방문할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청문회장까지 데리고 가주는 사람이 미실랭이기도 하니, 아예 없을 일은 아니지만, 이 시간은 아니었다. 창을 보면 어둠이 내려앉아 있다. 새까만 어두운 하늘은 한 밤중인지 새벽인지 알 수는 없지만 늦은 시간임에는 분명하다.
그 미실랭이, 왜 이런 시간에.
나는 조금 불안한 마음으로 문고리를 잡는다.
"열까요?"
열지마, 라고 누군가가 마음 속에서 내게 속삭였다.
"아니."
"네?"
"아마 열 수 없을 거야."
미실랭은 허탈하게 중얼거린다. 아마, 그는 열려고 했던 것 같다. 평상시와 같은 쓸데없는 발랄함과 깐죽거림이 없이, 그의 목소리는 낮다. 낮고 침착하다.
"차라리 잘됐어. 역시 우리 폐하는 유능하다니까. 마지막으로 폐하를 뵙고 싶었는데... 아니, 이건 너무 사회적인 발언이다. 마지막으로 나는..."
그는 말을 흐린다.
"미실랭 부대장?"
그의 목소리는 힘이 없다. 이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지만 나도 모르게 문을 연다. 아니, 이래서 안 되지만 해야한다고 강하게 느낀다.
그러나 문은 열리지 않았다.
"폐하가 너를 보호하려는 걸 거야. 나는 이제... 불순물이니까."
"부대장?!"
"나 이제, 없어질 것 같아."
문을 붙잡아 열려고 했지만 아무리 힘을 줘도 열리지 않는다. 비명을 지르며 몇 번이고 문을 쿵쾅거린다. 내 방 문인데 이상해, 이렇게 시끄럽게 울리는데 왜 아무도 나와보지 않는 걸까.
또 셀리안이 뭔가 한 거야, 원망스럽게 문을 흔든다.
"에휴- 진짜, 나도 운이 없다니까."
문을 쾅쾅 두들기다보면, 그가 크게 한숨을 쉬고, 평소와 같은 밝은 목소리로 웃었다.
"부대장, 잠깐만요. 이제 열 거니까."
"사실, 나는 하영도 꽤 좋은 아이라고 생각하지만 우리 별로 친하진 않잖아. 이왕 만나는 건 엘킨 대장이나 폐하나, 히아군이나, 가족이나... 에드...나나... 만나고 싶은 사람도 참 많은데. 그 녀석들의 눈을 피해 만날 수 있는 사람이 하영 뿐이란 게 참 뭐라고 할까. 으윽, 어려운 말 모르는데."
"열려!!"
"히아군이랑 적당히 과자 먹고, 그러다 니들 돼지 된다. 그리고 엘킨 대장은 의외로 쑥맥이니까 그만 튕기고 좀 뽀뽀도 해주고- 폐하도, 잘 부탁해. 완전 대단한 사람이지만 아직 20대잖냐. 우리 하영 양 완전 마성의 여인이더라. 폐하가 보는 눈이 남 다르더라고."
하하핫, 웃으며 실없는 소리를 늘어놓았다. 그리고, 어느 순간 이야기가 멈춘다.
"부, 부대장?"
"...에드나가 울면 위로해줘."
그 말을 마지막으로 문 밖의 인기척이 완전히 사라졌다.
동시에, 문이 열린다. 문이 열리는 순간 내 눈앞으로 펼쳐지는 건 끝없는 어둠이다. 헉, 하고 숨을 들이키면 시야가 암전하듯 검게 변하고 나는 진흙같은 어둠 속으로 침몰했다.
*
"미실랭 부대장!!!"
침몰하는 중 힘껏 소리를 지른다. 지금 부르지 않으면, 그를 붙잡지 않으면 후회할 거라고 생각한다. 그 순간, 어둠이 가시고 눈을 뜨면, 익숙해진 방의 천장이었다.
“도련님? 도련님이 뭘 어쨌는데?”
“에, 에드나?”
깜빡깜빡 눈을 깜빡인다. 놀란 에드나의 얼굴이 천장과 내 얼굴 사이로 끼어들어 나를 보고 있다. 곤히 자는 그녀를 깨운 것인가 싶지만 창밖은 환하다.
“청문회날이라, 늦잠 좀 자게 했더니, 갑자기 도련님을 부르고...”
나는 천천히 일어나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미 날은 밝았고, 아무런 문제도 없다. 멀찍이 문은 굳게 닫혀 있고, 나는 침대에 누워 이불을 덮고 있었다. 역시 문제는 없다. 아무런...
정말?
"...방금... 무슨 일이 있었던 것 같은데...?"
무언가 꿈을 꿨다. 절박했다. 절박했지만, 바로 전까지만 해도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 지금은 잘 모르게 되었다.
“꿈꾼 거 아냐? 잠깐... 도련님 꿈이라니... 너 설마.”
“아니에요! 제가 좋아하는 건 엘...”
킨...이라고 말할 뻔했다. 이래서 세뇌교육은 무섭다. 맞긴 한데 나도 자연스럽게 내뱉을 뻔했다.
“알아, 그 하프엘프만 나타나면 제정신이 아닌 것 같으니까. 그리고 만약 네가 도련님을 좋아한다고 해도 나는 허락 못해. 너같이 여러 남자가 꼬이는 여자에게 순수한 도련님이 가당키나 하니?”
“네?”
"도련님에게 네가 가당키나..."
"아니, 그 전이요."
"순수한-?"
"우,우웩.
“정말, 인간은 가치를 모른다니까.”
이거 어디서 들은 것 같은데.
“일어난 김에 준비하자. 도련님 얼굴에 먹칠을 하면 죽일 거니까.”
오늘로 그녀의 호위도 마지막이었다. 그녀는 후련함 반, 약간 아쉬움 반으로 내게 손을 내밀었다. 나는 그녀의 손을 잡고 침대로부터 일어난다.
오늘은 청문회, 다른 걸 신경쓸 때가 아니다. 위화감이 남아 있긴 하지만, 이 위화감이 어디서 오는지 알 수 없어 나는 그저 청문회날에 느끼는 긴장감이라고 믿었다.
*
“...도련님이 덜렁거리긴 하지만, 약속을 안 지키진 않는데.”
에드나가 걱정스럽게 눈썹을 찌푸렸다. 해는 중천이었다. 하녀들의 도움을 받아 단장을 하고 준비한 시나리오를 외우며 미실랭을 기다리다 보면, 어느새 시간은 약속한 시간을 넘어가기 시작했다.
지금즈음 청문회는 한창일 거고, 내가 등장할 타이밍도 곧이었다.
"..."
"..."
이유 모를 불안함. 그냥 늦잠을 잤겠거니, 딴 데로 샜겠거니, 농담처럼 에드나가 툴툴대고 나는 동조했지만, 그럴 리 없다는 걸 알고 있다. 껄렁해보여도, 중요한 순간엔 성실한 게 키도스 미실랭이었다.
“...일단 청문회장으로 가자.”
말한 건 에드나다.
“그래도...”
마치 여기서 움직이면, 미실랭이 오지 않을 거라고 인정하는 것 같다. 별 일이야 있겠냐마는, 그걸 인정하는 데 거부감이 있었다.
“어쩔 수 없잖아. 도련님의 얼굴에 먹칠을 할 수는 없고. 너를 데려다 주고, 나는 도련님을 찾으러 갈게.”
마지못해 나는 에드나를 따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만나면 한 대 쥐어박아줘야겠다며 부러 단호하게 이야기한다.
우리는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청문회장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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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매의 눈들... 그렇습니다. 하루드입니다;ㅁ; 고쳤어요.
lokoko 님 //저도 20대입니다!!! 하영이도 20대입니다! 20대란 10대만큼 빨리 사라지는 나이대인지 즐기도록 해용~~ 갑자기 말이 많이 빠졌네요. ㅎㅎ 항상 코멘 감사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