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88 85 =========================================================================
전생, 시모갈 사절단은 추락사건의 첫번째 범인조차 잡히지 않은, 셀리안의 생일 가까이 찾아왔었다.
셀리안 크레이누의 탄생일 근처, 시모갈의 사절단이 온 뒤에도 추락사건은 계속 되었다. 신관들은 의례적인 제스처이긴 하나, 셀리안을 거세게 추궁한다. 명실공히 최강의 마법왕, 그 권위를 넘을 사람은 없고 따질 사람도 없었기에, 이 기회에 그를 조금이라도 압박해보고자 하는 얄팍한 수였다. 아누휀 윈드아가 거의 막아주긴 했지만 젊고 야심 있는 신관들의 입을 전부 막을 수는 없었다. 그들은 요한 세르기타만큼 집요하게 셀리안을 쫓지는 않았으나 공식적으로 열리는 회의석상에서는 의례적으로 추락사건과 연결해 성물의 행방에 대해 묻고는 했다.
그날은 셀리안의 생일 연회 때였다. 그 날은 선왕이 있었고 헤르티아가 있었으며 귀족들이 모여 있었고 신관들이 있었다.
선왕의 축사시간, 선왕 다리스 크레이누가 입을 연다.
"시모갈의 신관들께서 황제를 지나치게 괴롭히는 것 같아, 한 마디 하고자 하는데, 황제, 허락해주겠습니까."
항상 인사치레로 끝내던 다리스가 드물게 입을 열었다. 셀리안은 의아하게 생각하면서도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나이보다 늙어보이는 다리스 크레이누가 실실 웃는다. 실실 웃는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다.
그래도, 젊은 날, 이 키오스를 마력 없이 끌어올리려 했던 유능한 군주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비열한 미소였다.
"성물에 대해 왈가불가하는 게 참 마음이 아픕니다만, 확증해드리죠. 짐이, 왕위에 오르는 날, 성물을 확실히 보았다는 것을요. 그리고- 그대도 보았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황제."
다리스의 눈이 뱀처럼 셀리안을 옭아맨다. 셀리안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굴욕스럽다. 굴욕스럽고 치욕스럽고.
"선조 에피룬의 심장은, 마치 당장이라도 살아 있을 것처럼- 생각나지 않습니까, 황제. 그 색을..."
선왕의 말에, 신관과 사람들의 눈에 경외와 의아감이 동시에 스쳐지나간다. 웅성거리는 소리와 소리들, 선왕의 집요한 묘사와 되물음, 그 공간을 견디고 견뎌 연회의 막바지 엘킨과 함께 연회장을 벗어나면, 헤르티아가 다가와 달콤하게 황제를 위안했다.
성물은 황제의 안에 있다고.
85
왕궁의 복도는 이리 봐도, 저리 봐도 기본적으로는 다 비슷한 느낌이 있었다. 물론, 오래 생활할수록 비슷비슷한 복도도 눈에 익는다. 처음 들어서지 않는한 구별할 수 있게 된다.
그런 것과는 별개로 청문회장으로 가는 복도는 특히 익숙했다.
내 방과 가까운 것도 있지만, 이 길에는 그 녹색의 신전이 있기 때문이다. 중간에서 완전 달리 길을 걸어야 하지만, 이 근처나 청문회장에서는 녹색의 신전에서 벌어지는 미사 소리 등이 들릴 정도였다. 거리 문제라기보다는 구조의 문제일수도 있지만.
그 길을 무리 없이 걸어, 청문회장에 도착했다. 회장문에는 병사 둘이 서있고, 나와 에드나를 보자 의아하게 고개를 갸웃거린다.
그들이 내 방문을 알리자, 곧 히아신스가 나왔다.
"하영, 왜 이렇게 늦은 거예요? 내가 찾으러 가려고 했잖아요."
히아신스는 장난스럽게 투덜댔다. 역시 미실랭은 없다. 나와 에드나는 당혹스럽게 시선을 교환했다.
"...그 미실랭 부대장은 여기 계신가요?"
"미실랭 부대장이요...?"
고개를 갸웃한 그녀의 말에 나는 미실랭이 방문하지 않았다고 알렸다. 히아신스의 얼굴에 의아함이 감돈다.
미실랭이 그 답지 않게 일을 내팽겨치고 땡땡이를 쳤을 수도 있다. 그러나 나와 에드나의 기묘하게 심각한 얼굴에 히아신스의 얼굴도 무거워진다.
무언가, 중요한 걸 잊고 있는 느낌이다.
“역시, 내가 찾으러 가겠어.”
에드나가 뒤돌아서려고 하면, 히아신스가 그녀를 잡았다.
“저도 갈게요.”
“필요없는데.”
“왕궁 내에서 부대장이 갈만한 곳은 제가 더 잘 아니까.”
“흐음.”
곧 두 사람은 함께 미실랭 부대장을 찾으러 가고, 나는 병사들에게 인도되어 청문회장으로 들어섰다.
청문회장은 조용했지만 판세는 확실하게 셀리안에게 기울어 있었다. 셀리안은 나른하고 오만한 얼굴을 하고 있었으며, 엘킨은 그 옆에서 담담하지만 만족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다.
아카인 후작은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 초조하게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그의 얼굴은 본 일이 있다. 셀리안의 기억속에서는 밀려난 기억이지만, 지온에서 아이에게 말을 걸던 그 남자였다.
내가 들어서자, 셀리안이 살짝 눈을 찡긋한다.
‘이 상황에서 또 저러네.’
미실랭의 부재로 무거웠던 마음이 조금 가벼워지는 것 같다. 나는 심호흡을 하고 증인석으로 들어가 조심스럽게 앉았다.
“그럼, 이제 마무리를 하지. 마침 증인이 왔으니까.”
“...”
“여기 하영 세르미아. 방금 전 세르미아 공의 여동생이지. 그녀가 직접 아카인 가에 의해 무슨 일을 당했는지 이야기해줄 것이다.”
“그 세르미아 영애는 그런 이름이 아니었던 걸로...”
“이름은, 그녀가 몸을 숨긴 곳에서 사용하던 이름이지.”
“그...그렇습니까.”
“흥.”
아카인 후작은 세르미아가의 아가씨를 실종시킨 장본인이지만, 그녀의 얼굴은 모른다고 한다. 실질적으로 세르미아가는 그가 직접 나설 필요도 없는 약한 귀족이었다. 오만한 횡포, 이 청문회에 내가 증인으로 선 건 그 기만을 조롱하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아카인 가에게 직접적으로 무언가를 당한 사람은 대부분 죽었으니까. 아마 그녀가 유일하게 명확한 증인일테지."
셀리안이 날카롭게 후작을 바라본다. 그의 말에 따라, 나는 앞으로 나선다.
자, 그를 성토하는 축제의 시작이다.
[곧 있을 축제의 날, 나를 기억해. 나를 기억하고 셀리안 크레이누의 절망을 축복하자.]
“?”
“하영?”
“아, 아니요. 이야기하겠습니다.”
순간, 비명소리가 들렸다.
*
여자의 비명소리였다.
청문회장까지 들린다는 건 가깝다는 의미다. 비명소리와 웅성거리는 소리. 비명소리는 찢어질 것 같은 기색을 띄고 있다.
그것은, 녹색의 신전에서 나는 미사소리와 비슷한 느낌으로 여기까지 울려오고 있었다.
청문회의 조금 들뜬 분위기는 서늘하게 가라앉고, 나는 아카인 후작의 새하얀 얼굴이 굳는 걸 발견한다. 그는 이 소동에 기회를 얻었다는 얼굴도, 무엇도 아니었다.
'무슨 일이지?'
곧 청문회장의 문이 열리고, 앤 설리가 들어왔다. 그녀는 부들부들 떨며 공포에 질려 있었다. 얼굴은 절망과 의아함이 공존하고 있다. 그 모습에 조금 불안해진다.
"폐, 폐하... 신전에서...사람이, 사람이 떨어졌습니다."
셀리안이 의자를 박차고 일어난다. 나는 순간적으로 쿵 하고 심장이 멎는 것 같은 기분을 맛본다.
누가 떨어졌다는 말에 과민반응이지만, 어쩔 수 없다.
"가보지."
셀리안이 일어서고, 엘킨이 따른다. 병사들이 아카인 후작을 구금한다. 그외에도 일어서는 몇 사람과 웅성거리는 몇 사람.
나는 일어나는 사람 중 하나다. 내가 일어나자 무슨 명령을 받은 건지 기민하게 몇명의 병사가 나를 따라오는 게 느껴졌다.
*
신전이 세워진 뜰에 도착하자 나는 일단 안심했다. 자세히는 볼 수 없지만 여기서도 히아신스의 검은 머리가 보인다. 그 옆에는 언뜻 에드나도 있었다. 히아신스의 머리는 바닥에 뭉개진 것도 아니었다. 그녀는 서서 신전 위, 지붕을 바라보고 있다.
사람이 떨어졌다고 들었다. 그런데, 왜 히아신스도, 어쩌면 에드나도 지붕을 보고 있는 걸까.
이 각도에서는 무슨 일인지까지는 알 수 없다. 아카인 후작의 청문회, 류가 무언가 했을지도 모른다.
‘류-’
아! 문득 머릿속을 헤집어 퍼지는 기억이 있다.
처음 깨달은 건 왜 여태까지 류에 대해 떠올리지 못했냐는 것이었다. 그에 대해 마치 장막으로 가려놓은 것처럼 기억하지 못했다. 나는 의아함을 느끼며 신전에 가까워졌다.
그리고 점점 안개에 쌓인 것 같은 머리 한 구석에서 류에 대한, 불안했던 지난 날의 내 감정이 살아난다. 살아나고 그것에 더해 사라졌던 어떤 시점에 도달한다.
파이가게에서 만난 류, 미실랭을 이용하겠다고 했던 그, 분노하는 에드나, 뿌옇게 암전하던 기억, 그리고 바로 어제 나에게 찾아왔던 미실랭의 꿈.
동시에 신전이 전부 눈안으로 들어왔다.
“아아-”
신비로운 녹색의 신전. 성물이 보관된 신전. 그 신전의 문은 굳게 닫혀 있고 히아신스는 멀리서 확인한 대로 망연히 신전 위를 올려다보고 있다. 다만 새파랗게 질려 있는 그녀의 얼굴이 보인다. 그리고 그런 히아신스에게 셀리안과 엘킨이 다가서고 있다.
가까이 다가가자 떨어졌다는 사람도 보였다. 바닥에는 여자가 뭉개져 있다. 신전은 아주 높지는 않았지만, 제법 큰, 높이가 있는 신전이었다. 죽일 각오로 추락시키면 높이가 낮은 만큼 추락은 더 참혹한 결과를 낳는다.
완전히 뭉개진 여자의 시체. 갈색 눈동자와 갈색 머리카락. 피와 뇌수가 범벅되었지만 노려보듯 앞을 보는 형형히 빛나는 갈색 눈만은 알아볼 수 있다.
그것은, 안나였다. 헤르티아의 하녀, 안나가 바닥에 뭉개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