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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이지, 이상한 광경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다. 신성한 녹색 신전 아래에는 히아신스가 있고, 히아신스 발 밑에는 안나가 뭉개져 있다.
"정말, 제대로 해줬는 걸."
멍청하게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나는 바로 내 옆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정신을 차린다. 류였다. 그 연회날 이후 처음이었다.
아니다. 나는 이미 기억이 났으니까.
[잠시만 나를 잊는 거야. 그리고, 곧 있을 축제의 날, 나를 기억해. 나를 기억하고 셀리안 크레이누의 절망을 축복하자.]
나는 그를 만났다. 에드나와 둘이 그를 찾았고 만났었다. 그리고, 잊었다. 그에 대해.
“류, 너-”
새하얀 신관복이 지독하게 잘 어울리는 그는 내가 그의 이름을 부르자, 정말 기쁜 듯 휘파람을 불어제낀다.
"이상하네, 놀란 마법왕을 보는 게 제일 기쁠 것 같았는데 나를 기억하는 네가 더 기뻐. 왜지?“
"류, 당신이야? 당신이-"
당신이 안나를 죽인 거야? 왜? 라고 물으면 그는 그저 나를 보며 웃고 있다. 내 질문이나 이런 상황보다는 그의 말마따나 내가 그를 기억한 게 기쁜 것 같다. 자신이 내게 뭔가 한 주제에- 잊게 한 주제에.
내막은 알 수 없지만, 눈앞의 참상에 류가, 어쩌면 엔실렌이 연결되어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장소는 다르지만 높은 곳에서 누군가 추락했다. 안나는 갈색 눈동자와 갈색 머리카락을 가지고 있고, 그것은 엔실렌에 의해 동상 위에서 추락한 사람들과 일치했다.
'범인은 누구지?'
그 전까지의 동상사건은 범인이 짐이었다. 현재 짐은 죽었고 두 번째 범인은 기억나지 않는다.
“?”
머릿속이 휘저어져 전생, 히아신스를 죽였던, 누군가의 눈동자가 은색으로 빛났던 것 같은 기억이 스쳐지나가긴 했지만, 잠깐 둘러본 주위에는 그 비슷한 사람조차 없다. 재차 신전 위를 바라보았지만, 아무도 없는 것도 마찬가지. 고개를 돌려 히아신스를 살폈다. 그 순간 셀리안과 정면에서 눈이 마주쳤다. 그의 붉은 눈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빛을 띠고, 나를, 그리고-
"저 자를 잡아라."
셀리안의 손가락이 류를 가리켰다.
*
“쳇, 기쁨에 취해 있지도 못하게 해- 우왁.”
셀리안의 말에 류의 눈이 가늘어졌고, 그는 가볍게 내게 속삭였지만 끝까지 이어지지는 못했다. 내 뒤에 있던 호위 병사들은 기민하게 류를 잡아 눌렀다. 그는 반항하지 않는다.
"하영, 이쪽으로."
내 뒤로는 어느새 호위들 대신 엘킨이 서 있었다. 엘킨은 나를 류로부터 떼어놓았고, 엎어진 류 앞으로 셀리안이 다가섰다.
"왜 저를..."
류는 당황한 것처럼 연기한다. 그의 황금색 눈동자가 겁에 질려 셀리안을 바라보았다. 새하얀 신관은 부들부들 떤다. 눈동자는 정말로 겁 먹은 것 같았다. 지켜보는 사람들 중에는 갑작스럽게 신관을 겁박한 황제에 대한 의문이 떠오른다.
류는- 다양한 감정을 나타냈지만, 사실 그의 눈에 명확한 감정이 나타난 적은 별로 없었다. 그렇기에 그가 연기를 하면 그 자체로 진짜 같았다.
"세류 키스톤..."
"..."
"맞지?"
하지만 셀리안은 무표정했다. 누가 봐도, 당황한 것 같은 류의 연기를 무시하고 무표정하게 류를 바라보며 선고했다.
“세, 세류 키스톤? 그게 누구인 겁니까. 왜 제게...?”
“왜 그대를 세류 키스톤이라고 생각하냐는 건가?”
“저는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 사람, 들어본 적도 없습니다.”
“우습군. ‘키스톤’이란 성을, 시모갈의 사절이 모를리는 없겠지.”
“모, 모릅니다! 어째서 그러시는 건지 저는 영문을 알 수 없어서...”
“어째서라... 하나는 에피룬 윈드아라는 남자가 너무 재수가 없었기 때문이고-”
“그, 그런!”
셀리안답다면 다운 대답이다. 무표정하긴 했지만, 이 상황에도 진심에 덧씌워 장난스러운 이야기를 했다. 그는 에피룬 윈드아가 그 이름도, 행동도 어진간히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 같다.
“다른 하나는... 하영이 너를 열심히 찾았으니까.”
"엑?!”
셀리안의 말에 반응한 건 나다. 나는 깜짝 놀라 눈을 깜빡였다. 셀리안은 가면처럼 굳은 표정을 풀지는 않았지만, 나를 보며 조금 눈가를 찡그렸다. 그가 내게 농을 건넬 때처럼- 언뜻 비슷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걱정마라. 미행을 한 건 아니야. 그저, 요한 세르기타에게 에피룬 윈드아에 대해, 그대가 묻는 걸 알았을 뿐이니까. 뱀공주는 사람을 따돌리는데 요령이 좋아 미행은 실패했지만... 정말 놀랍군. 짐을 속일 정도의 마법, 예의 흑마법인가. 용을 부리고, 시모갈을 속이고, 정체불명의 흑마법으로 몸을 감싼 남자라, 흥미롭군.”
셀리안의 눈이 다시 류를 향했고 날카롭게 빛났다. 류는 미동하지 않았다. 그저 고개를 푹 숙이고 있다. 그 모습은 언뜻 절망한 것 처럼도 보였지만, 내게는, 조금 고민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아.”
그러다가 고개를 든다. 문득 생각난 것처럼.
“아, 뭔지 생각났어요. 세류 키스톤이...”
“?”
“아아, 몇 달 전인가, 몇 주 전인가까지 사용하던 이름이었네요.”
류는 고개를 끄덕인다. 부끄럽다는 듯이 머리를 긁적였다. 분위기가 달라진 것 같으면서도, 당황하던 에피룬 윈드아에서 별로 변한 것 같지가 않은 게 기묘하다. 그는 정말로 ‘세류 키스톤’이라는 사람에 대해 방금 전까지 잊고 있었던 것이다.
“대단하네요. 마법왕님은- 저에 대해 관심이 많은 건지, 아니면 하영을 과보호하는지는 모르겠는데..."
"둘다 맞지. 짐은 재수없는 존재에게도 사랑스러운 존재에게도 각별히 관심을 갖는, 성가신 버릇이 있어서 말이야."
이상한 광경이었다. 류도, 셀리안도 태연했다. 그들은 당황하지 않고 서로를 이죽인다.
객관적으로는 류가 정신이 나간 것 같다. 유리한 건 셀리안, 엎어진 건 류.
‘하지만, 난 왜-’
왜 셀리안이 위태롭게 느껴질까. 결정적인 뭔가를 간과하고 있는 기분이 든다. 나는 흘끔 안나의 뭉개진 시체를 바라보았다. 이 추락은 무슨 의미가 있는 걸까. 하고. 그때 멀리서 병사들이 달려왔다.
“폐하, 하루드의 공작원들을 발견했습니다.”
“그래.”
“역시, 아카인 후작과, 고문실의 멜링톤 경을 암살하러 왔었습니다.”
멜링톤 경은 생포한 하루드 10인의 간부 중 한 명이었다. 셀리안은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고, 흘끗 나처럼 안나의 시체를 보았다.
태연하다. 그는 태연하다. 유리한 건 셀리안. 그럼에도 나처럼 불안해하고 있다. 다른 사람은 모르겠지만, 어쩌면 그도 모를지도 모르지만 나는 어쩐지 알 수 있었다. 죽은 사람이 ‘안나’이기에, 어쩌면 용이 관계되었을 수도 있기에 그는 불안해하고 있었다.
“굳이 ‘저’ 여자를 죽인 이유는 모르겠지만 네 계획은 실패한 것 같군.”
“실패해?”
“그래, 하루드도, 너도- 추락사건을 막지 못한 건 유감이지만, 더 이상은 힘들겠지.”
류는 눈을 깜빡였다. 셀리안의 말이 의외라는 표정이었다.
“물론, 하루드는 실패한 것 같지만... 으음, 나는 아니야?”
“?”
“솔직히 놀랐어요. 청문회 전부터 지금까지 하루드 녀석들의 시도가 죄다 제압당한 것도 그렇지만. ‘나’를 알아본 것도 제법... 역시 마법왕이라고 해야 할까.”
“그래, 그리고 ‘너’역시 한 발자국도 움직일 수 없을 거다.”
저 추락사건이 무슨 의미인지는 알 수 없다. 없지만 셀리안의 말마따나, 무슨 의미가 있다 해도 이렇게 되면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이다.
“...인간이란 참 이상해. 왜 같이 일어났다고 그게 연결되었을 거라고 생각하지?”
류는 고개를 갸웃했다. 예의, 무언가 이해할 수 없을 때 그가 짓는 표정이었다. 그리고, 시간이 남았으니 좀 설명해볼까요, 라고 말하며 웃었다.
“모두 별개랍니다. 폐하.”
“별개라고?”
“네, 하루드는 청문회를, 아니 당신의 행보를 막을 수 있기를 원했습니다. 저도 뭐, 그들이 폐하께 한 방 먹일 수 있다면 그것도 좋겠다고 생각해 지원했지만... 마지막까지 죄다 실패했죠. 아휴, 무능해라.”
“...”
“그리고, 굳이 높은 곳에서 여자를 추락시킨 건 렌이 하는 짓을 따라한 것 뿐이랍니다. 별로 의미도 없어요. 하루드는 소란을, 저도 소란을, 렌도 마지막으로... 시위를 해보고 싶었던 것 같고, 진은- 어떤 식으로든 ‘저’ 여자를 죽이고 싶어했으니까요.. 저희는 모두 목적이 다르답니다.”
진이라고? 나는 조금 머리가 아프다고 느꼈다. 류는 환하게 웃었다.
“사실, 제 의도는 아직 시작도 안 했답니다.”
“...의도가 뭐든... 이루어지기 전에 고문실에 쳐박히겠군. 그대의 용처럼.”
“하하-”
셀리안이 손을 든다. 황금색 포승줄이 그의 손에서 뻗어나가고, 그를 붙잡은 호위들은 좀더 힘을 준다. 류의 얼굴이 바닥에 쳐박힌다. 동시에 우연처럼 웅성거리는 소리가 커졌다. 시간이 지난 만큼 사람들이 좀더 모여드는 것 같았다.
“마법왕의 고문도 한 번 받아보고 싶긴 한데-”
“소원대로 해주지.”
“아쉽게도, 슬슬 시간이네요. 이런 모습으로 구경하는 건 상정외였지만."
“구경...이라고?”
모여드는 사람 중 시모갈의 신관들이 줄줄줄 등장하는 걸 시작으로 아누휀 윈드아가 사색이 되어 뛰어왔다.
그리고 그 뒤로 느릿하게 걸어오는 귀족의 무리 가운데, 헤르티아와 선왕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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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정말 이상한 일이었다. 선왕은 청문회에는 관심조차 없이 유희에 빠져 있었고, 헤르티아는 이 시간대에는 방에 있었는데.
"이게, 무, 무슨 일입니까. 폐하."
아누휀의 표정은 새하얗게 질려 있다. 그는 녹음의 신전 앞에 뭉개져 있는 아마 그는 이름 모를 하녀를 한 번 보고 구금되어 있는 류를 한 번 본다.
셀리안이 무표정하게 시선을 내려 류를 보았다.
"이 자는, 녹색의 신전에서 사람을 떨어뜨렸다."
그건 나조차 생각하지 못한 말이었다. 간접적으로는 류가 범인일 수 있겠거니 했지만, 직접적인 증거는 없다. 문득 굳어 있던 히아신스가 당혹스러운 눈으로 셀리안을 바라보았다.
실제 범인은 아마 류, 그가 무엇을 꾸미는지 모르겠고, 증거도 없지만, 셀리안은 사전에 몰아세우는 걸 선택했다.
셀리안이 황금색 포승줄을 쥔 채로 딱 손바닥을 마주쳤다.
그러자 검은 이공간이 열리고, 쇠사슬에 묶여 있는, 반즈음 녹은 어린아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엔실렌, 그는 이제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하고 뻐금거리고 있다.
"이것이, 이 자의 사역수. 사람을 조종해 추락시키던 동상추락사건의 진범이며, 그 조종자는 이 남자. 에피룬-"
셀리안은 이름을 입에 내는 것만으로도 불쾌하다는 표정을 했다.
"에피룬 윈드아- 세류 키스톤으로 이 왕궁에서 활동했던 하루드의 간자다. 저 남자는 하루드의 흑마법으로 자신의 정체를 감추고 있지만, 제대로 인식만 하면 그대로 보일 거다. 일단 저 남자를 인식해라. 저 남자가 흉악스러운 동상 추락사건과 지금 신전의 참사를 일으킨, 진범이니까."
마법왕의 말이 선고처럼 떨어지는 순간 사람들의 시선이 류에게로 향한다. 셀리안은 손을 들어 무언가를 그린다. 마법진이었다. 그것은 신전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을 감쌌다. 류에게 걸린, 그를 숨기는 마법이 셀리안조차 놀란 종류의 것이라면 단지 ‘인식’하는 걸로 그를 인식하는 건 불가능할 것이다. ‘인식’하는 걸로 알아챈 건 셀리안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보통 사람들에게는 약간의 가호가 필요했다.
‘나는 어떻게 안 거지.’
나는 그가 세류 키스톤일 때도, 에피룬 윈드아일 때도 인식했다. 내가 셀리안의 환생이기 때문일까. 아니면.
고민은, 류의 중얼거림으로 멈췄다.
"그런가. 이러니 저러니 해도 마법왕이 나를 인식한 가장 일보는 역시 이름인가."
류는 가볍게 웃는다. 바로 곁에 있는 나와 셀리안, 엘킨에게나 들릴 정도로 작은 소리로 홍소했다.
“당신은 역시 ‘에피룬’과 자신을 구별하고 싶어하는구나. 같으면서. ...최고군."
셀리안의 미간이 미미하게 찌푸려졌다. 하지만, 그는 류를 외면하고 덜덜 떨고 있는 아누휀에게로 다가갔다.
"그, 그런. 그 아이는 제."
셀리안은 저벅저벅 걸어가 아누휀 윈드아에게 손을 뻗는다. 손은 아누휀의 이마 앞에서 멈춘다. 셀리안이 손을 대는 순간 아누휀의 이마에서 그가 가진 본연의 하얀 마나가 형태를 갖고 일렁였다. 일렁이는 흰색 가운데에서 셀리안은, 검은 마나를 솎아 걸러넨다. 검은 마나는 그대로 엔실렌에게 연결되었다.
"보아라. 이생물의 마법은 인간의 조종마법과 달리 인을 남기지는 않지. 하지만, 기에 얽혀든다. 그대는 저 자에게 속은 것이지. 저것은 그대의 아들이 아니다."
"아... 하, 하지만..."
멍하니 자신에게서 새어나온 기의 흐름을 본 아누휀 윈드아는 눈을 깜빡거린다.
"하, 하지만... 저 아이는 분명 나와, 그녀의-"
그리고 실 끊어진 인형처럼 말을 멈추고 기이한 표정으로 자신의 양아들을 자칭한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 그녀는?"
“...”
“그녀는 어떻게 되었지?”
"렌- 안 일어나면, 나 운다?"
아누휀의 질문에 류는 조금 희게 웃었다. 희게 웃고, 아누휀의 질문엔 대답하지 않고 렌을 향해 장난스럽게 이야기했다. 순간 녹아있던 엔실렌의 검은 눈동자에 빛이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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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피스 님 // 그렇게 말씀 주셔서 감사합니다.ㅜㅜ 납득할 수 있는 이야기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졸려서, 드립을 치지 못하는 점을 용서해주세요. 그저 감사할 뿐입니다.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