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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실렌의 작은 몸이 꿈틀, 경련한다. 경련과 동시에 검은 마나가 그를 감싸고 새까만 용이 날개를 퍼득이는 건 순식간이었다. 용의 모습도 거의 녹아 있긴 마찬가지였지만, 녹아있는 어린애일 때와는 다르다. 이미 크기부터가 보통 사람의 2~3배는 되는, 이 세상의 것이 아닌 박력을 가진 용이 쇠사슬을 끊고 류 쪽으로 날아들었다. 호위들은 잘 훈련된 정예들이었는지 부들부들 떨면서도 류를 잡고 있다.
"과연, 용은 용인가."
셀리안은 무감하게 중얼거렸고 사람들은 놀란 듯 웅성거린다. 전설에나 나오는, 에피룬의 전설에나 나오는 용이 그들의 눈앞에서 포효한다. 괴로운 듯 포효하는 엔실렌. 그것은 신성하고 위압적이었지만, 한편으로는 그 검은 형태와 반즈음 녹은 몸 때문에 불길하게도, 흉물스럽게도 보인다.
“용?”
“거, 거짓말... 그 전설의-”
“검은 용!!”
"검은, 용! 용이다!"
"파괴의!!"
"흥-"
셀리안이 손을 치자, 성실하게 류를 잡고 있던 호위들이 셀리안 곁으로 이동된다.
"에이, 녹여버리려고 했는데."
"그래, 이제 내숭도 그만 두는 건가. 확실히 인정해주니 유쾌하긴 하군."
“응, 내가 뭐면 어때. 응.”
이어서 셀리안이 손을 치자, 류를 향해 그의 손에 줄곧 들려 있던 황금색 포승줄이 날아들었다.
"류!"
"어라라?"
황금색 포승줄은 엔실렌이 잽싸게 막아냈다. 막아냈지만, 포승줄은 엔실렌이 가로막는 순간 육안으로 보기에도 더 두껍고 날카로워져 그대로 엔실렌의 살에 파고든다. 엔실렌이 피를 흘리며 비틀거렸다. 류가 아쉽다는 얼굴로 일어나 몸을 턴다.
"어휴, 렌 죽겠다... 넌 이래도 쟤가 좋냐."
류는 렌을 보고 혀를 찬 뒤, 셀리안을 향해 천사처럼 미소지었다.
"지금부터 셀리안 크레이누, 지고의 마법왕을 더 숭고하게 만들어주지.'
피를 흘리는 검은 용의 눈이 기묘하게 빛나는 것 같았다. 그 시선의 의미는 알기 어렵다. 용의 시선은 뒤로 뒤로, 신전 뜰의 입구로 향해진다. 나는 그 시선을 따라 천천히 뜰 입구로 시선을 주었고, 그곳에는
"어어, 청문회장에 아무도 없던데, 다들 여기 있네. 무슨 일인가요."
미실랭 부대장이 어슬렁어슬렁 걸어오고 있다.
*
껄렁거리는 목소리와 함께 미실랭 부대장이 나타났다. 그는 청문회장에서 신전으로 들어오는 입구에서 느릿느릿 걸어온다.
"아, 미안미안, 완전 늦잠을 자서 말이에요... 어라? 다들 왜이렇게 심각... 엑?! 용?"
미실랭은 류 앞에 피를 흘리며 엎어져 있는 엔실렌을 발견했다. 발견하고 놀란 듯 눈을 깜빡였다. 엉덩방아까지는 찧지는 않았지만 어지간히 놀란 모양이었다. 옆에 있던 칼미온의 다른 기사가 그것이 세류 키스톤의 인외생물체라고 이야기해주면, 미실랭은 의아한듯 새삼 렌을 본다.
"늦었군, 미실랭."
"죄송합니다. 늦잠을 자서.."
사태가 심각하다는 걸 깨달았는지 자세를 바로하고, 주위를 둘러본다. 주위를 기민하게 둘러보며 히아신스에게 다가갔다. 히아신스는 굳은 것처럼 멍하니 미실랭을 보았고, 에드나는- 미실랭이 왔음에도 고개를 들지 않았다. 그저 안나를, 아니다. 바닥을 보고 있다. 그녀의 눈동자는 녹빛의 긴 머리카락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다.
셀리안은 미실랭으로부터 시선을 떼고 다시 렌과 류를 보았다.
"폐하!"
그런 셀리안을 다시 미실랭이 불렀다. 셀리안의 붉은 눈이 의아하게 그를 본다. 미실랭은 심각한 얼굴로 안나의 곁으로 다가가 시체를 만졌다. 히아신스가 제지하려는 것처럼 손을 들었지만, 미실랭이 좀더 빨랐다. 그는 뭉개진 시체 더미에서 무언가를 확인했다.
나도 보았다. 엘킨은 보지 못한 것 같다. 셀리안과 나는 눈치 챌 수밖에 없다. 셀리안의 입이 벌어지고, 그 근처에 있던 신관들이 비명처럼 소리 지르는 건 찰나적인 시간 사이에 일어난 일이다.
"성물의 상자!"
"성물의 상자다. 성물?!"
"성물을, 추락한 여자가 껴안고 있어!"
안나의 품안에 녹색 상자가 있었다. 실제로 본 성물의 상자는 작은 보석함 정도의 크기로, 안을 볼 수 없는 정교한 초록빛 상자였다. 녹색으로 반짝이는 그 상자는 신전과 같은 재질이어서 마치 신전의 한 부분을 떼어 온 것 같았다.
"..."
셀리안이 손을 쳐 빛과 같은 장막으로 안나를 둘러싼다. 하지만, 거침없이 달려오는 건 요한 세르기타, 그 남자가 성력을 이용해 셀리안의 장막을 뚫었다. 설마 뚫을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을까 여겼건만 그는 자신의 몸이 타는 걸 무릅쓰고 장막 사이를 가로질렀다. 요한의 양뺨과 어깨는 새까맣게 타들어간다.
"요한, 세르기타!!!"
성물의 상자를 발견하고도 평정을 유지하던 셀리안의 목소리가 노호처럼 울리고, 요한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하지만, 그는 아랑곳 않고 상자를 들어올렸다.
상자는 열려 있었다.
그리고, 당연스레 주위 어디에도 성물, 에피룬 크레이누의 심장은 보이지 않았다.
*
신관들이 소리 높인다.
귀족들이 수근거린다.
하녀와 하인들이 웅성거리며, 셀리안 크레이누는 냉정하게 사태를 지시한다. 그러나 그의 눈은 그답지 않은 분노와 초조함으로 가득 차 있다. 그는 손을 들어 요한 세르기타를 포박했고, 요한은 해명을 요청한다며 소리를 지른다. 셀리안의 반대파를 자처하는 소수의 귀족들도 이야기를 높인다.
시끄럽다. 시끄럽지만. 대부분의 여론은 역시 성물은 없었다는 것, 왕실이 짜고 친 고스톱이라는 여론일 것이다. 거기까지는, 괜찮다. 괜찮다고 생각한다. 나도 셀리안도 그렇게, 자신을 진정 시킨다. 아니, 엄밀히 말해 나는 셀리안이 그렇게 생각해주길 바랐다.
'성물의 상자가 열리다니.'
그런 일은 없었다. 과거에는 그저, 시모갈 사절단이 온 기간 동안에도 계속 사람이 떨어져, 사절단이 조금 강하게 셀리안을 압박했던 것 뿐이었다.
류는 뚫어지게 셀리안을 보고 있었다. 그의 행동 하나하나를 놓치지 않겠다는 시선이다. 셀리안의 붉은 눈동자가 번뜩인다. 조금 소름이 돋는다. 한 번도 보지 못한, 아니 꿈속에서는 몇 번이고 본, 그의 눈동자가.
생생한 살기는 무서울 법도 하건만, 나는-
엘킨이 가볍게 숨을 삼키는 게 느껴졌다. 엘킨이 내 눈을 가렸다. 그 행동에서 셀리안이 류를 죽일 생각이라는 걸 깨닫는다.
“...이게 무슨 의미가 있지?”
웅웅거리는, 이제는 구분도 되지 않는 소란스러운 틈에서 셀리안의 억눌린 목소리가 들린다. 류의 웃음기 어린 대답도 들려왔다.
“의미? 마법왕이 그런 표정을 짓는 게 내 의미야.”
“...너는...”
셀리안 크레이누도, 나도 간과한 게 하나 있다. 류는 하루드와 관련이 있다. 하루드란 어두운 일을 도맡아하지만 지극히 세속적인 조직이다. 그러나, 류라는 남자는 상식이니 세속이니 하는 것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 그의 의미는 텅 비어 있다고.
"...됐다, 피곤...하군."
"그래? 난 여느 때보다도 즐거운데. 살아있는 기분이야."
"그래..."
살기가 강해진다.
“해명하시오!! 마법왕!!”
그때 한 목소리로 울리는 청년들의 노호 같은 추궁이 소란을 파고들었다. 젊은 신관무리다. 시모갈의 신관도 있었고, 왕궁 소속의 신관들도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신앙에 취해, 셀리안의 분위기를 느끼지 못한 걸까.
나는 엘킨에게 눈이 가려져 상황을 알 수는 없다. 다만 그들의 목소리가 일부는 요한 세르기타가 포박된 곳에서, 일부는 셀리안 바로 가까이서, 어쩌면 류 근처에서 들린다는 것만을 알았다.
“...비켜라.”
“에피룬 윈드아 사제를 해치려는 게 아니오. 그 전에 그대는 해명해야 할 것이오, 마법왕!”
“크레이누왕조는 해명해야 하오!”
“해명하시오!”
"그 입..."
"왕실을 모욕하지 마시오. 성물은 존재했소."
셀리안이 입을 연다. 하지만 그보다 빠르게 그들을 막은 건, 선왕의 목소리였다.
*
언뜻 본 다리스 크레이누는, 셀리안의 기억에서 본 것처럼 나이보다 늙어보였다. 노쇠한 선왕이 내고 있을, 지금 그의 웃음소리는 실실 웃는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다. 그래도, 젊은 날, 이 키오스를 마력 없이 끌어올리려 했던 유능한 군주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비열한 웃음소리였다.
다정하게 위하는 척, 엄숙하게 선고하는 척, 기만처럼 얄팍한 웃음기를 섞어 선왕은 셀리안을 향해 이야기한다.
"짐은 보았소. 짐이 왕위에 오르는 날, 성물을... 그대도 보았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황제."
류가 키득, 웃는 소리가 들린다. 사람들은 다시 웅성거린다.
엘킨은 여전히 내 눈을 가리고 있지만 그의 손이 부르르 떨리는 게 느껴진다. 과거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따져대는 시모갈의 사절단, 나서서 옹호하는 선왕. 분명 돕는 것 같지만, 분명하게 제 아들에게 악의를 품는 선왕과 그를 경멸하며 떨었던 엘킨 다이브.
그때와 다른 건, 빈 성물 상자가 눈앞에 있다는 것이다.
"선조 에피룬의 심장은, 마치 당장이라도 살아 있을 것처럼- 생각나지 않습니까, 황제. 그 색을..."
전생과 같은 말이, 전생과 달라진 상황에서 똑같이 재연된다. 그때와 달리 셀리안은 억지스러운 수긍조차 하지 않았다. 그는 대답하지 않는다. 셀리안은 모욕당한 것처럼 입을 다물 뿐이다.
전생과는 달리 수긍하지 않는다. 상자는 열려 있다.
나는, 머리가 텅 비어 나도 모르게 엘킨을 밀어냈다. 선왕에 대한 적의로 떨던 엘킨이 멈칫한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를, 푸른 눈이 나를 본다.
그러나, 관계없는 일이었다. 나는, 그 순간만은 엘킨을 보지 않았으니까. 엘킨에게 두근거리지 않았다. 엘킨은 시야에 들어오지 않고 나는 셀리안을 보았다.
수많은 사람들, 사람들의 시선 속에 자신의 아들을 악의에 차 쳐다보는 다리스 크레이누와 그 절망을 전부 이해하고 즐기고 있는 류.
그리고- 그 사이에 황제가 있다.
나는 셀리안 크레이누를 발견했지만 엘킨에게 눈이 가려진 사이에 위치가 조금 바뀌었는지 보이는 건 뒷모습뿐이었다. 그의 크고 강고한 등은 꼿꼿하게 흔들리지 않고 선왕을 응시하고 있다. 그 기백에 선왕이 조금 주춤거렸다.
다행이다. 그는 아직 냉정하다. 냉정할 것이다. 냉정하면 좋겠다고, 그건 소망에 가깝다.
"그게, 무슨... 그럼 성물을 잃어버렸단... 말입니까."
말하지 않고 있던 신관 하나가 입을 연다. 그는 전생에도 왔던 시모갈의 사절 중 하나로, 그때도 말을 아꼈던 남자다. 그는 정중히 셀리안 크레이누를 바라보며 다리스의 이야기와 빈 상자에 대해 의문을 표한다.
"성물은-"
셀리안의 입이 천천히 열린다. 그라면 할 수 있다. 그라면, 이 상황을 요령좋게 넘길 수 있다. 큰 위기지만, 성물이야 왕들 이외에는 보지 못한 것이 아닌가.
"아니요!"
그 전까지 굳어 있던 헤르티아가 다급하게 외쳤다. 헤르티아 답지 않게 강한 목소리로 외치며 그녀는 발을 내딛었다. 참지 못한 것처럼 류가 키득거리는 소리가 작게 들려온다. 당장이라도 폭소하고 싶은 걸 참고 있다. 참고 있는 건 분위기 때문이 아니다. 더 크게 웃기 위해 이 분위기를 망치고 싶지 않은 것이다. 그의 황금색 눈이 기대에 차 반짝거린다.
"무례한 사람들, 성물은 바로 여기에 있는데! 왕실이 성물을 잃어버렸을리가 없지 않습니까!"
헤르티아가 자신 있게 외친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힘이 있었고 거침이 없다. 헤르티아가 다가오는 방향으로 셀리안의 시선이 닿았다. 그 순간 나는 셀리안의 눈을 보았다. 지는 태양같이 강하고 붉은 눈동자는, 피처럼 진득한 절망을 담는다.
"!!"
순간, 나는 이동했다.
바로 헤르티아의 앞으로. 그것은 바닥을 뚫고 이동했을 때와 비슷한 감각이지만 훨씬 짧은 거리였다. 말에 취한 그녀는 나를 보지 못했다. 나는 손을 망설이지 않고 손을 뻗는다.
내가 여기 이동된 건, 내가 바란 건-
"성물은 바로-"
셀리안이 상처 입지 않는 것-
*
나는 헤르티아를 향해 손을 뻗는다.
'조용히해.'
간절히 바란다. 이동하는 것만이 내 쥐꼬리 같은 마나가 할 수 있는 전부라면, 이 손으로라도.
라고, 생각해 손을 뻗었지만, 뻗어진 내 손을 잡은 건 셀리안이다. 셀리안이 내 뒤로 이동해 빠르게 내 손을 제지했다.
헤르티아는 그 자신의 앞으로 이동된 셀리안을 발견하자 꽃처럼 아름답고 자신있게 웃는다.
"성물은 바로 폐하 안에 있으니까요."
나의 이동이 무색하게 헤르티아의 손은 제 앞에 선 셀리안의 심장 부근에 닿았다.
"조ㅇ-읍."
원래 계획한 대로, 다른 한 손을 들어 그녀의 입을 막으려 했지만 셀리안이 내 손을 잡은 한 손으로 나머지 손도 포박하고 다른 한 손으로 내 입을 틀어막는다.
"폐하의 안에 있습니다. 에피룬님의 심장은-"
"그게 무슨..."
사람들이 웅성거린다.
"그야, 제가 에피룬님의 심장으로 폐하를 낳았으니까요. 아뇨. 에피룬 님을 낳은 겁니다."
그녀는 활짝 웃는다. 가슴을 펴고 자랑스럽게. 드디어 이 말을 할 수 있는 걸 기쁨으로 여기는 것처럼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