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루나 패러독스-91화 (91/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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웅성거림은 이어진다. 무슨 말이지, 란 당연스러운 의문부터 시작해 점점 퍼져나가 과거 헤르티아의 입에서 시작되었던 소문을 꺼낸다. 누군가가 죽은 자를 낳는 흑마법에 대해 이야기했다. 누군가는 에피룬과 셀리안이 너무 닮았다는 이야기를 했다. 동상의 이야기가 이어진다. 더없이 엄청난 마나에 대한 새삼스러운 의아함이 떠오른다. 드디어 사람들의 시선이 셀리안 크레이누에게로 모인다.

그 시선은 의아함과 약간의 혐오를 띠었지만.

"...에피룬 폐하-!!"

아누휀 윈드아가 소리치는 순간 경외로 돌변한다. 이 세상 것이 아닌 무언가를 보는 경외로.

"에피룬 폐하!"

"에피룬 님이 다시 세상에 오신 거다!"

"우리 키오스를 위해!"

"키오스를 위해!"

"에피룬 폐하!"

소리 높여 외친다. 에피룬 크레이누의 재림을. 소리는 어느새 그 자리의 모든 사람의 입에서 터져나오고 절로 그들의 무릎을 굽히게 했다.

굽히지 않는 자는 나와 엘킨과, 히아신스 뿐이다.

선왕이 천천히 무릎을 굽힌다.

"제 오랜 의문과 원망이 사라지는 것 같군요."

그는 히죽 웃으며, 무릎을 굽혔다.

"풉-"

그리고 류가 드디어 폭소했다.

"푸하하하하하!!!"

"에피룬 크레이누 폐하!!"

그 폭소는 에피룬 크레이누를 칭송하는 사람들에게 묻혀 그저 하나의 화음처럼 울렸다.

*

"...죽어라."

낮고 조용히 셀리안 크레이누는 눈앞의 헤르티아를 응시하며 이야기한다. 그 말이 누구를 향하고 있는지 알 수 없다. 하지만, 일단 그의 마나는 류를 향해 뻗어나갔다.

"!"

셀리안으로부터 뻗어나간 황금의 빛은 활처럼 류를 향해 돌진했다. 류는 웃음을 멈추지 않고 셀리안을 바라보았다. 엔실렌이 몸을 움직여 검은 날개로 막는다. 녹지 않은 검은 날개가 터져나간다.

"헉-"

파괴의 검은 용은, 파괴력만은 용 중에서 최고라고 불렸다. 그런 그는 전설 속에서 많은 파괴활동을 벌였는데 그것을 멈춘 자는 에피룬 크레이누 뿐이었다고 한다.

전설의 재림, 누구나 그렇게 생각했다.

그 시선이 토할 것 같다.

"하하- 완전 화났나봐."

"웃음이 나오냐."

류는 키득거렸고, 엔실렌은 쉰 목소리로 투덜거린다.

"잡아 눌러라."

셀리안이 다시 읊는다. 그는 손 하나 움직이지 않는다. 나를 잡고 있기 때문이었지만, 손을 들지 않는 건 그가 화를 참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그가 읊자 왕궁에서부터 뻗어나온 은색의 쇠사슬이 엔실렌을 다시 포박했다. 이태껏 쇠사슬이 한 두가닥이었다면 이번에는 다르다. 왕궁의 이생물 포획 쇠사슬이란 쇠사슬은 다 동원되어 녹아내린 검은 용을 땅에 굴복시켰다

그 광경에 칭송하던 사람들이 입을 다물고 그 경이로운 힘에 침묵했다.

"어휴, 렌 날개 다 못 쓰게 되었잖아. 내가 렌의 날개를 얼마나 좋아하는데."

"그만 깐죽거려라. 류. 이번엔... 못 막아준다."

"히힛, 한 번 힘 겨루기 해볼까. 다들 내가 쟤 다음이라는데, 궁금하잖아."

진짜인지- 라고 낮게 으르렁거린 류가 렌을 빗겨 셀리안 앞으로 나온다. 그의 목소리는 신이 나 있었다.

"오늘 난 최고조거든- 일단! 하영부터 놓아볼까. 기분은 좋은데, 그건 좀 별로야."

"그래- 짐과는 반대로군."

셀리안이 날카롭게 이야기하며 웃었다. 이번에는 황금빛 유성우가 그에게서 뻗어나온다. 류가 손을 든다.

마나라는 것이 의도하지 않았는데도 눈에 보인다는 건 엄청난 것으로 알고 있다. 물이라든가 불이라든가 실제 유성이라든가 실체하는 무언가를 끌어들일 수는 있어도 그 자체의 덩어리로 상대를 공격하는 건 웬만한 고위 마법사도 할 수 없다.

굳이 싸우면서 대놓고 마나를 실체화할 필요는 없기도 하고. 그런데도 마나가 육안으로 보인다는 건 그 밀도가 엄청나다는 것이다.

셀리안은 다른 실체를 빌리지 않고 그저 순수한 자신의 마나만으로 류를 죽일 생각인 것 같았다. 황금색, 그의 마나는 황금빛을 띠고 있었다.

그건 에피룬 크레이누의 색이기도 했다. 이 세상 유일무이한 황금의 마나. 셀리안의 위압적인 살기에 눌려 있던 사람들이 가볍게 신음하는 소리가 들린다.

"흥이다, 흥-"

류의 손으로부터 뻗어나온 건 하얀 마나다. 가까이는 몇 십년 전 시모갈의 성녀가 그런 마나를 가졌다고 한다. 신관들은 마나가 강할수록 흰색에 가까운 마나를 갖는다. 류의 마나는 새하얗다.

셀리안과는 다른, 강하기보다는 순결한 느낌의 마나였다. 류와는 어울리지 않는 빛깔이라고 생각하면서도 류와 몹시 잘 어울렸다.

흰 마나와 황금의 마나가 충돌하려 하고 있다.

류의 눈이 두근거림으로 빛나고, 셀리안의 눈동자는 볼 수 없다. 그는 내 뒤에 있었다.

"후-"

가벼운 한숨소리가 그 사이를 파고 들어, 붉은 손이 두 개의 힘을 파쇄시켰다.

*

나타난 건 진이었다. 그는 여전히 인간 같지 않은 미형의 얼굴을 한 채 그때처럼 손만 변형시켜 우리 앞에 나타났다. 두 힘을 파쇄하긴 했지만, 진의 손은 완전히 너덜해졌다. 그는 미간을 살풋 찡그렸지만 별로 개의치 않아했다.

새로운 등장인물에 모두 눈을 깜빡였고 몇명은 인간을 넘어선 아름다운 외모에 숨을 들이키도 했다.

"그 손은...용인가. ...병원에 출몰하던 미남자가 너였군."

“응? 나를, 아네?”

진은 셀리안의 말에 가볍게 이야기했다. 가볍게 이야기했으나 그의 눈동자는 엔실렌마냥 감격의 빛을 띤다. 띠었지만, 얼른 감춰버렸다.

“역겹군.”

“거참... 미안하네. 이건 본능이라.”

그것을 놓치지 않고 발견한 셀리안이 정말로 역겹다는 듯이 내뱉자, 진은 씁쓸하게 웃으며 사과를 했다. 줄곧 웃고 있던 류의 웃음소리가 멈추고 그가 투덜대며 진의 어깨 앞으로 쏙 얼굴을 내밀어 셀리안을 노려보았다.

"진! 왜 방해하는 거야!?"

"네가 이루고 싶어하는 건 이뤘잖아. 여기선 일단 물러나지."

"내가 질 거라고 생각하는 거냐?"

"음...글쎄다. 다만- 내가 사랑하는 영혼과 사랑했던 영혼이 같은 공간에서 치고박는 건 좋아하지 않는 것뿐이야."

그는 모습을 변형시킨다. 진의 어깨로부터 거대한 날개가 돋아나고, 류와 눈을 마주한다.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곧 류는 불퉁하게 그 모습을 보다가 말없이 그의 어깨를 붙잡아 올라탔다.

"뭐, 됐어. 흥이 식었어."

"도망가게 놔둘 것 같나?"

“동감입니다.”

진의 옆으로 엘킨이 선다. 엘킨이 서늘하게 그를 바라보며 정확하게 그의 날개 위에 선 류를 겨눴다.

"도망갈 준비도 하지 않고 마법왕에게 대들리 없잖아? 하프엘프 군, 용에게 대항하지 말라고, 장로가 가르쳐주지 않던가?”

“유감스럽게도 저는 폐하를 따라서요.”

“엘프족 대대적인 추문의 주인공 답군.”

진은 그답지 않게 비꼬았지만, 엘킨은 흔들림 없이 바라보았다. 그 모습에 쉭쉭거리며, 투덜대는 건 렌이었다.

“진짜 재미없는 놈이네. 왜 하영은 이런 걸 좋아하는 거야.”

“...”

“그래? 난 이런 곧은 녀석도 제법 좋아하는데. 렌! 그대로 있으면 용의 수치다-"

진은 엔실렌을 힐끔 바라보았다. 날개가 떨어져 땅을 기고 있는 검은 용은 순간적으로 입에서 불을 뿜는다. 엘킨이 불길을 일도양단했으나 그 틈에 류가 진의 반대쪽 날개로 뛰었다. 진은 자세를 바꿔 한 발자국 앞선다. 앞선 장소는 엔실렌이 널부러진 장소였다.

“이번에는 당신을 베겠습니다.”

“유감- 이 자리가 우리의 도피처다.”

진이 씨익 웃는다. 엘킨은 물러났던 거리를 다시 좁혀 검을 진 쪽을 향했다. 단호한 칼놀림이었지만, 공간은 베지지 않고 일그러진다.

분명하게 진을 향해 겨눠졌지만, 무언가에 튕기듯 일그러진 공간 위로 검이 되돌아왔다.

“......주변에 공간마법을 펼쳐놓은 건가요?"

"응, 이 장소에 우리 쓸모없는 렌이 힘 좀 써놨지. 류와 셀리안 크레이누의 힘을 몽땅 이동시키면 공간 자체가 무너지니까 방금은 팔을 희생시켰지만... 이제부터는 마법왕 혼자만의 힘에다가 하프엘프의 칼춤 정도니까- 어떻게 어떻게 렌의 조잡한 공간 마법으로도 도망칠 시간을 벌 수 있을 것 같아."

"엘킨, 비켜서라. 짐이 끝내지."

"으음, 그래도 마법왕의 힘을 다섯 번 정도 막으면 끝나니까... 얼른 도망 가야겠네."

셀리안이 다시 황금의 마나를 쏘았지만 공간에 막혀 사라진다.

한 번-

엘킨도 검을 휘둘렀지만 공간에 균열만 갈 뿐이다.

“에고, 하프엘프도 꽤 하는군. 어쩌면 세번만에 끝나겠는데.”

진은 가볍게 혀를 차며 다른 한 손으로 엔실렌을 잡아들었다.

"신세 지는군."

"네 '것' 빌렸으니까. 류 녀석이 한 짓은 마음에 안 들지만, 나야 뭐 일단 저걸로 발견한 찌꺼기는 마지막..."

두 번-

진은, 도피 마법인 듯한 주문을 외기 시작했다.

엘킨의 검에 의해 공간에 금이 가 이번에는 황금빛 마나가 류에게 돌진했지만 류 스스로 막아냈다. 공간 탓에 약해진 마나는 어렵지 않게 차단 당한다.

“이거 세 번째에 아작 나겠는데. 어서 가자?”

“놓치지 않아요!”

뒤로부터 히아신스가 진을 향해 칼을 내리친다. 예상치 못한 가세에 진이 주춤했다. 검격은 엘킨이 갈라놓은 틈을 정확히 노렸던 것이다. 나는 놀라서 안나가 쓰러져 있던 자리를 바라보았다. 히아신스는 진의 뒤로 달려온 듯 하다.

“히아! 넌 역부족이야!”

“압니다! 그래도 시간 벌이는!”

“전장의 에메랄드인가. 아가씨는 시간 벌이도 못 돼! 진! 어서!!”

셀리안은 나를 단단히 붙잡고 다음 마나를 길게 연사했다. 진의 주변으로 균열이 좀더 커진다. 균열의 틈으로 파고드는 마나는 류가 막았고, 렌은 움직이지 못했다. 결국 히아 때문에 이동이 차단 당한 진은 주문을 외우며 히아를 향해 손만 살짝 뻗었다. 나는 비명을 삼킨다.

히아가 죽는다!

“흐으!! 히!!!”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진의 손은 히아의 목에 닿았지만 멈췄다. 손은 그녀의 목 바로 앞에 닿을 듯 말 듯 멈췄고 진은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았다.

*

“...너?”

“에?”

진이 히아를 보며 굳었다. 히아가 눈을 깜빡인다. 순간적으로 형성된 적막은 엔실렌의 비명 같은 타박에 깨져버렸지만, 이상한 일이었다.

"진, 지금 뭐 하는 거야!!"

더 이상한 일은, 당황했던 히아가 깨어난 듯 자세를 다잡은 반면, 진은 여전히 굳어 있다는 점이다.

"...진!! 이번 에피룬은 다시 태어나더니 너무 성격이 나빠진 것 같단 말이...읏-하프엘프-"

엔실렌을 묶고 있던 은색의 사슬이 그의 목을 조이고 있었다. 사슬을 움직인 건 엘킨이다. 그는 검을 집어넣고 왕궁의 쇠사슬에 마력을 보내고 있었다. 셀리안이 손에 기를 모으고 황금빛 섬광은 진을 향해 내쏘아진다.

이제 끝이다.

이 자리의 누구나 그렇게 생각했지만 진은 미동조차 하지 않는다. 그저 오래도록 히아신스를 바라보았다.

“진!!”

류가 혀를 차며 진의 이마를 손바닥으로 때리기 전까지는. 그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제스처였지만 덕분에 진은 정신을 차린 듯 주문을 마지막까지 외웠고 날개를 퍼득였다. 순간 히아신스는 공간 밖으로 날아갔다. 날아갔지만 어디 크게 부딪치지는 않고 안전하게 바닥에 떨어진다.

안전하게.

진의 은빛 눈은 히아신스를 한 번 더 짧게 응시했지만, 류 때문인지 방금 전처럼 틈을 보이지는 않았다. 바로 도피마법이 발동되어, 연사해 쏘아진 네 번째 황금빛 기가 정확하게 진의 어깨를 관통했지만 뒤늦은 일이었다. 엘킨의 사슬에 매여 있던 엔실렌도 류의 하얀 마나가 그를 감싸자 거대한 용의 몸은 작은 검으로 화했다. 류의 허리춤에서 보곤 했던 검고 뭉툭한 검이었다.

류가 사라진다. 류는 나를 흘끔 바라보았고, 진은 어그러지는 공간 속에서도 계속 히아신스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진이 완전히 모습을 감추고 자리에는 붉은 용의 피만이 남아 있었다.

*

셀리안 크레이누의 엄청난 힘을 목격한 사람들은 정중하고 조용해졌다. 웅성거리던 소란스러움도 그의 한 마디에 멈췄으며, 그에게 인형처럼 복종했다. 그들의 눈동자는 모두 그를 칭송하고 있었다.

성물이라니, 그런 말을 할 필요도 없다. 의심할 것 없이 그는 에피룬 크레이누다, 라고-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이 그리 생각하는 것처럼.

요한 세르기타만이 진짜 에피룬의 성물이 셀리안 안에 있는 건지 확인하고 싶다는 의사를 조심스럽게 내비쳤지만, 셀리안의 시선에 더이상 말도 꺼내지 못했다.

그날은 그대로 모든 게 파해졌다.

셀리안은 굳은 얼굴로 모두를 해산 시켰다.

에드나는 일선으로 돌아가는 미실랭을 비틀비틀 따라간다. 그녀도 충격이었는지 표정은 읽기 힘들다. 히아신스는 불안한 얼굴로 에드나의 뒤를, 미실랭의 뒤를 따랐다. 칼미온은 일을 수습하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카인 후작은 지하감옥으로 다시 끌려가고, 청문회는 아예 없어졌다. 공식적인 청문회 따위 없어도, 이제는 셀리안의 말 한 마디로도 아카인 후작가는 무너질 것이다.

나는 불안하게 나를 놓는 셀리안을 바라보았다. 그는 더이상 나를 상종할 시간이 없을 것이었다. 다만, 떨어지는 순간 그의 팔이 약간 떨리는 게 안타까웠을 뿐이다.

윤하영은 역할을 잃고 그저 불안하게 방으로 돌아가기로 한다. 엘킨이 나를 방까지 데려다주었다. 그도 바쁜 건 마찬가지일 테고, 칼미온으로 가야할 텐데 드물게 단호하게 나를 방까지 데려다주겠다고 셀리안에게 이야기했다. 셀리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내 방으로 가는 복도에서, 우리 둘은 말이 없었다. 대사고였다. 류가 무얼 의도했든, 상황 자체는 셀리안에게 마이너스는 아니다.

그가 정말 에피룬 크레이누의 환신이란 건 나쁠 게 없으니까.

다만-

히아신스도 걱정되고, 에드나도 마음에 걸리며, 미실랭도 이상하게 무겁다. 무겁지만, 다른 누구보다-

나는 셀리안이. 태연하고 냉정하게 일을 처리해나가는 왕이 나는-

“하영.”

“아, 네?”

엘킨이 나를 부른다. 나는 반사적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의 뒤에 펼쳐지는 밖의 풍경에서 아직 낮이란 걸 깨닫는다. 엄청 긴 시간이 지난 것 같은데 하늘은 여전히 밝기만 했다.

“...”

엘킨이 내게 손을 뻗었다. 나는 눈을 깜빡였다.

“하영.”

“네?”

그의 손이 내 뺨에 닿았다. 푸른 눈은 곧 찌푸려졌다. 새파란 눈동자는 흔들거린다. 흔들흔들, 그 안에 있는 나는 멍한 표정이다.

엘킨을 보는 윤하영의 표정치고는 지독하게 낯설다고 문득 생각했다.

“정말... 최악입니다.”

“그렇네요.”

그렇다. 최악의 날이다.

나쁠 건 하나도 없는데. 류는 정말 최악이었다. 그런, 그런 짓을. 셀리안을 그런 식으로, 전생 때보다 더 최악으로 상처 입혔다. 붉은 눈은 무표정하고, 그 안에 깊게 깊게 자리 잡는 어둠에- 견딜 수 없다. 그 자리에 있는 모든 이의 입을 막고 싶었다.

내게 좀더, 셀리안 만큼이라도 마나가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단순히 헤르티아의 입을 막는 게 아니라 좀더. 애초에 입조차 막지도 못했지만.

“...”

“엘킨?”

문득 엘킨이 기묘하게 웃었다. 어울리지 않는다. 이 상황에서 웃는 건, 그런 식으로 웃는 건 엘킨에게 너무도 어울리지 않았다.

엘킨은 눈을 찌푸린 채로, 입꼬리만 떨리듯 웃고 있다.

“제가, 정말 최악이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엘킨은 잘못이 없어요.”

그가 괴로워할 필요는 없다. 그는 셀리안에게 소중한 사람이다. 사랑이 아니어도 소중한 사람이었다. 그 자리에도 그가 있었기에 셀리안은 폼을 잡을 수 있었던 것이다.

라고.

엘킨의 이상한 표정이, 셀리안을 향한 그의 다정함이라고 나는 생각해버린다. 다른 생각을 할 수 없을 만큼 셀리안을 중심으로 모든 생각이 돌아가고 있었다. 그걸 깨닫지 못할 정도로 말이다.

“아뇨. 최악입니다. 저는, 제가 좀 다를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좀더- ‘사랑’이 얼마나 더러워질 수 있는지 아니까요. 아니까 저는-”

“엘킨?”

“저도 이 정도 밖에 안 되네요.”

울 것 같은 표정.

“엘-”

그가 나에게 가까워졌다. 새파란 눈동자에 비친 나는 점점 가까워지다가 아예 그의 눈동자에 섞여들었다. 눈을 다시 깜빡이면, 엘킨과 나 사이의 거리가 없어졌다. 나는 그의 이름을 채 부르지 못했다.

내 입술을 막는 서늘한 요정의 입술은 가볍게 떨고 있었지만, 화가 난 듯 서서히 격정에 휩싸여- 내 입을 막고 셀리안에 대한 나의 상념을 지울 것처럼 맞닿았다.

============================ 작품 후기 ============================

선추코 언제나 감사합니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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