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97 92 =========================================================================
91
셀리안의 체온은 뜨겁다. 내 체온은 어느 쪽이냐 하면 사실, 잘 모르겠다. 엘킨과 닿아 있으면 그의 서늘한 체온 때문에 내 체온이 뜨겁게 느껴지고 셀리안과 함께 있으면 내가 지나치게 차가운 느낌이 들었다.
‘뜨거워.’
셀리안의 손을 막상 잡았을 때는 따뜻했지만 계속 잡고 있으려니 뜨겁다고밖에 생각되지 않는다. 놓을 수가 없다. 자연스레 놓으려고 했는데 셀리안은 놓아주지 않았다. 나는 셀리안을 노려보다가 탁탁 흔들었다. 흔들지만 그는 놓지 않고 빙글 미소 짓는다. 오히려 같이 흔든다. 다 큰 어른 둘이 쎄쎄쎄라니, 맥이 빠져 손 흔들기를 멈추면 이 멍청이 황제는 아쉽다는 듯 악동처럼 눈을 빛낸다. 의기양양하게.
"손 놓으면 좋겠는데...요."
"왜? 그대는 짐을 위로해주고 싶은 게 아니었나."
"...제가 폐하를요?"
“연기도 되게 못하는군.”
“...”
“그대는 역시 아는군. 알고 위로해주려고 한 거지?”
“제가...폐하의 뭘 안다는 건가요.”
“음? 짐의, 음... 그래. 짐의 굳이 말하면 약점이겠군."
그는 자신이 선택한 약점이란 어휘가 생소하다는 듯이 붉은 눈을 가늘게 접는다. 약점, 약점라니, 지고의 마법왕에게는 익숙하지 않을 것이다.
“짐도 모르는 약점을 아는 사람이 셋이나 있을 줄이야. 어쩌면 그 이상인가. 하여튼... 당장에 처형하고 싶은 존재감 흐린 남자도 아는 것 같은데, 그대는 그 남자나 선왕보다 깊게 아는 것 같군. 게다가, 그 남자나 선왕이 짐을 그 약점으로 갉아 먹고 싶어 안달이 났다면, 그대는-"
셀리안은 말끝을 흐리며 나를 바라본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윤하영은 모르게 차단하는 눈이었다.
셀리안이 말하는 것은, 약점이라면 약점이지만 아는 사람은 그의 말마따나 별로 없다. 그의 어머니는 생각도 못하며, 사람들조차 상상할 수 없다. 굳이 이야기하자면, 그의 아버지 정도. 엘킨은, 온전한 형태로는 모르지만 마음으로 공감해주는 자이다.
결국 그를 싫어하는 아버지, 아버지만이 뚜렷하게 알고 있다. 다른 이들이 모르고 흔든다면 다리스 크레이누만이 알고 흔든다. 유일한 이해자, 라고 하면 우습지도 않겠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랬다.
그리고, 그 약점을, 지금은 나와 류가 알고 있다.
'어쩌면 진도 아는 걸까.'
렌은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았지만 진은 알고 있는 같았다.
“흐음, 뭘 또 고민하고 있나. 그대가 짐을 부러 위로했다고 하면 짐이 상처라도 입을까봐?”
“그런...”
“기운 내거라."
"에?"
"짐은 상처 입지 않는다.“
그는 내 손을 조금 꽉 잡는다. 부드럽게 꽉 잡고 미소 짓는다.
“이야기를 계속하자면, 그대는...”
“...”
"짐을 불쌍히 여기고 있군."
"그렇지-"
"않을까? 그대는 감히 짐을 불쌍히 여기고 동정하고 있어. 그 꿈이, 그대에게 히아를 죽음으로부터 구하고. 전생에 얽매인 불쌍한 짐을 걱정하라고 이야기했나?"
나는 움찔한다. 그는 기운 내라고 했지만 기운 낼 수 없다.
그가 입에 내고 있는 건 내가 줄곧 불안해하던, 현실적인 문제였다. 때가 온 것이다. 꿈에서 이 세계에 대해서 보았다고 주장하는, 다른 세계에서 왔다는 여자. 미래를 아는 것 같기도 하고,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기도 하고, 다른 모든 걸 파악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한 이상한 나. 셀리안 크레이누가 여태까지 깊게 추궁하지 않은 게 이상할 지경이다. 그런 이상한 여자가, 셀리안 크레이누의 약점, 약점을 알고 있다. 멋대로 동정하고 연민하고 위로한다.
정적 속에서 나는 그의 눈을 바라본다. 무섭다.
처형당할까봐? 심문 당하고 추궁당해, 끔찍한 일을 당할까봐?
아니, 아니다. 혹시 내가, 쓸데없이 위로하고 동정한 내가, 그를 역으로 상처 입혔을까봐.
이 자존심 강한 고고한 왕을, 내 멋대로 뒤흔들었을까봐.
"큽."
"?"
"크하하하하."
망연하게 입을 다물고 있으면 그가 폭소했다. 폭소하며 내 손을 놓았다. 그리고 웃는다.
"큰일이군."
"뭐, 뭐가요?"
"아니. 음..."
셀리안이 내게 손을 뻗으려다가 멈칫한다. 멈칫하더니 가볍게 한숨을 쉬며 손을 빙그르 돌린다. 바람이 불어 나는 발이 붕 뜬다. 붕 뜬 채로 둥둥 날아가 성물이 있던 자리에 얌전히 앉혀진다.
"그대는 그대지."
"?"
"물어야 할 게 많다고, 그대와 즐겁게 심문이라도 할까 생각했는데 그대의 표정을 보니 아무래도 좋아져서 말이야."
"그..."
"그래. 어떤 걸 알아도, 이 세계를 알아도, 짐을 알고 동정해도, 그대는 그대야. 어떤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윤하영이 윤하영이라면, 그대가 짐을 걱정하는 건, 그렇게 나쁘지 않은 것 같아."
*
녹색의 신전에서 나와 셀리안은 성물의 상자가 있던 자리에 감히 걸터 앉아 발을 흔들고 있다.
제법 긴 드레스 안에 있는 내 발에는 푸른색 하이힐이 신겨져 흔들거린다. 셀리안은 갈색 샌들 비슷한 신발을 신고 있었다. 두 사람의 발이 함께 흔들거린다. 내가 무심코 흔들면 셀리안도 같이 흔들기 시작했다.
그게 나쁘지 않다.
신전에 예의없게 앉은 우리는 소소하게 잡담을 하고 투덜거리고 있었다.
“진짜, 짜증나는군. 대신관까지 오다니, 진짜 짜증나.”
“그러게요. 그것도 다 신전 돈으로 하는 거 아닌가요.”
“대신관이나 되는 놈이 이동하니, 엄청 들겠지. 시모갈에 대한 지원을 좀 줄여야겠어.”
셀리안이 심술궂게 이죽였다. 그가 손가락을 들어 빙그르 원을 만든다. 그 순간 허공으로부터 투둑투둑 과자들이 떨어졌다. 나는 깜짝 놀라, 손을 들어 그 과자를 손바닥으로 받는다. 손바닥으로 과자들이 쌓인다.
셀리안은 씨익 웃으며, 계속 원을 그린다.
“그, 그만해요!”
“착한 아이에게는 과자를 주고 싶어서 말이야.”
“하하, 아이라고요? 여기서 아이는 정체성 혼란을 겪는 왕밖에 없는데요?”
“설마, 자신이 남자라고 하는 아가씨만할까. 자, 나보다 나이 많은 착한 아이에게 계속 선물이다.”
그는 빙글빙글 손가락을 돌려, 움직일 수도 없을 만큼 내 손에 과자를 쌓아간다. 또 부엌에서 가져온 게 틀림없다. 범인은 이 왕쥐인데 부엌에서는 괜히 소극적인 쥐들만 씨까지 털어 소탕할 것 같다.
나는 셀리안이 건넨 과자를 손에 받은 채 그를 노려보았다. 그는 내 손의 과자더미 중 하나를 집어 제 입에, 다른 하나를 내 입에 넣어준다.
“맛있지?”
“맛있...네요.”
비바, 요리사.
“그렇지. 내일 연설이 끝나고 시모갈과의 다과회 때 내놓을 것이니까.”
“에엑?”
“후후, 너무 좋은 과자를 내놓는 것 같아서 말이야.”
그는 하나 더 집어 다시 제 입으로, 또 하나를 내 입으로 넣어주었다. 이런 말하기는 싫지만 정말 맛있다. 천상의 맛이라 해도 좋았다. 요리사가 얼마나 힘을 기울였을지, 이 과자를 먹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쥐들은 전멸을 면치 못할 것이다.
“...예쁘게도 차려입었군.”
"그런가요? 하녀들이 골라줘서."
산만한 왕님은 이번에는 새삼 내 차림을 위아래로 훑었다.
그래도 내가 최종적으로는 결정했으니 내 취향을 반영한 차림이었다. 히아신스가 골라준 드레스와는 다르다. 내 장점을 죄다 살리는 차림이라, 꽤 예쁠 거라고 자신했던 만큼 으쓱한 느낌이 들었다.
"그래, 예쁘군. 훔쳐가고 싶어질 만큼 말이야."
"네?"
"..."
예의 놀리는 말인가 해서 히죽 웃으며 바라보면 셀리안은 약간 강한 눈으로 나를 응시하고 있다.
“...”
“...”
“폐...폐하?”
손 위의 과자 때문에 움직일 수는 없고, 관찰 당하는 시선으로부터 피하기에도 너무 그와 가깝다. 셀리안의 시선은 그 특유의 나른함과 색정적인 기운이 묻어난다. 우리 왕은 또 이렇게 쓸데없이 색기를 낭비하고, 나는 그 색기에 허둥지둥 못하고 있다. 나인데.
“폐하!”
그를 부르며 당황하고 있으면 셀리안이 피식 웃으며 내 손으로부터 떨어지는 과자 하나를 얼른 받아낸다.
"...리안이라고 부르라고 했는데."
"..."
"후후... 엘킨이 말이다."
셀리안은 표정을 풀고 받아낸 과자를 제 입에 넣어버린다.
"엘킨이 보면 그대를 훔쳐가고 싶어할 것 같군."
"아..."
"오호라, 뭔가 잘못하다가 걸린 애 같은 표정이군."
"애, 아니거든요."
"아니, 그대는 사고뭉치지. 엘킨이 고생이 심하겠어."
“...”
“실제로도 어찌나 그대 생각만 하던지...”
그 말에 엘킨을 이용해 빠져나온 죄책감과 쑥스러움이 동시에 밀려왔다. 얼굴이 벌개지면 셀리안은 킬킬 웃었다. 밉살스러울 만큼 킬킬 웃다가 멍하니 허공을 본다. 표정은 읽을 수 없다. 무언가 생각하는 것 같지만, 그 눈이 어둡다. 나는 그 표정에, 방금까지의 밝은 분위기가 무색할 정도로 살짝 조마조마한 마음이 되었다.
“세, 셀리안-”
또 왜 그러는 걸까. 이 타이밍에 그를 상처 입히거나 어둡게 할 만한 게 있었나. 이 항상 여유로운 왕을?
“응?”
불안해하면 그는 부드럽게 웃었다. 다행이다. 그 웃음에는 한치의 거짓도 없다. 나는 가볍게 안도했다. 변덕스럽지만 날이 날이니만큼 그의 표정 하나하나에 기분이 좌우된다.
마주 웃자 셀리안의 미소가 좀더 깊어졌다.
“...짐이 걱정되는군.”
“그야...”
"짐이..."
너무 건방진가. 아까는 당당했는데 그가 이렇게 여유롭게 웃으니 뭐라 말하기도 쑥스럽다. 우물쭈물하고 있으면, 그는 기분 좋게 웃었다.
“그래, 이번엔 왜 걱정했나?"
"..."
다만 답이 궁했다. 답을 모르겠다. 그냥 셀리안이 이상한 표정을 지어서. 그 전에 걱정한 게 분명한 이유가 있었다면 이번에는 나 자신도 가늠하기 어려운 만큼 미묘한 기분이 든다. 미간을 모으고 생각에 잠겨 있으면, 문득 이 초록의 신전과 신전 안의 셀리안이 눈에 들어온다.
‘엘킨 이야기를 하다가 이상한 표정을 했어.’
설마.
'타이밍 상 있을 만하긴 한데...'
나는 신전에 있는 그를 오늘 처음 봤지만 이미 그는 이 신전, 이 자리에서 엘킨을 만났을지도 모른다. 공언을 하기 전에, 그것은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이미 그는 위로 받고, 엘킨을...
오늘 너무 태연하기도 했기에 더욱.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아닐 거라고 생각했지만 어쩌면.
"...그, 폐하는."
그건 너무 이상하다. 아닐 것 같다는 직감적인 무언가가 있긴 하지만-
"그..."
"그?"
셀리안의 눈이 깊게 나를 보았다. 깊게 나를, 꿰뚫어보는 것처럼. 그의 눈은 깊고 깊었으며, 그의 미소는 기묘하다. 나는 조금 어지러워졌다. 어지러워진 나머지 숙고도 못하고 그대로 내뱉었다.
"폐하는, 엘킨을 좋...좋아하게... 사, 사랑하게 되셨나요?"
셀리안의 표정이 구겨졌다.
============================ 작품 후기 ============================
아무개23님, 적매화 님, 아마도 그건 님... 후원 쿠폰 감사합니다. 정말 기쁩니다. 다들 제가 가지와 뿌리를 흔들며 춤추는 걸 좋아하셔서 또 춤춥니다. 흔들흔들ㅎㅎ
커미션으로 신청한 셀리안과 엘킨, 뜰 혹은 공지에 있습니다. ㅎㅎ
에이리엘 님 @ 90화가 넘었으니 아실 것 같지만, 이 글에 사이다는 없는 것 같아요.ㅜㅜ 아무도 사이다로 안 봐줘서. ㅎㅎ 가끔 뜬금포한 개그가 있을 뿐... 또르륵. 오랜만에 뵈어용!>ㅁ< 고등학교는 방학이 끝났겠군요.ㅜㅜ 출근길에 녹색 아주머니들이 보인지는 벌써 보름정도 된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