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98 93 =========================================================================
방에서 두문불출하던 3일, 아니 4일 간. 할 일 없이 대기하는 동안 엘킨만이 나를 찾아오는 와중의 어느날.
의자에 앉아 책을 읽었다. 만들어진 이야기는 그다지 좋아하지 않지만, 딱히 할 일이 없었기에 저절로 책장에 손이 갔다. 꽂혀 있는 책이라곤 예절교본과 왕국의 역사 등 수업에 사용하던 책들, 그리고 에드나가 읽던 소설책이 몇 권이었다. 수업에 사용하던 책을 굳이 읽는 것도 뭐해 소설을 뒤적이면 대부분이 로맨스 소설이다.
이야기는 원래 세계의 로맨스와 비슷하다. 신데렐라, 달콤한 로맨스-
거의 훑어보듯 팔랑팔랑 책장을 넘기다 보면 노곤한 햇빛에 취한다. 어느새 책은 그저 들고 있었고, 따끈따끈한 햇빛에 멍해졌다.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고개가 떨어지고, 책이 손으로부터 미끄러져 의자에서 그대로 잠들어버리는 건 순식간이었다.
얼마나 잤을까.
머리 위로 인기척이 느껴지고 엘킨이 찾아온 걸 어렴풋이 알았다. 찾아올 사람이 엘킨밖에 없기도 하고, 왠지 엘킨이면 좋겠다고 그런, 정신없는 생각을 잠에 취해 솔직하게 해본다.
엘킨이 와줬다. 나는 그것이 꿈인지 현실인지 약간 구분 되지 않았지만 어쨌든 엘킨이라고 확신했다. 꿈이든 현실이든 그는 나를 찾아온 것이다.
그는 여느 때처럼 나를, 곤란하다는 듯이, 사랑스럽다는 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바라보다가 손을 뻗어- 마치 유리조각이라도 다루는 것처럼 부드럽게 나를 안아 침대로 옮겨준다. 침대로 옮기고 가볍게 이불까지 덮어주었다. 이불을 덮어주고도 한참이나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어느새 두근두근거리고 있었다. 몰려온 졸음기에 눈은 여전히 감겨 있고, 뇌는 노곤하게 수마에 녹아가면서도 심장이 두근거린다.
깨어 있으면 감정은 여기에는 없는 셀리안 크레이누에게 잠식당한다. 윤하영으로서 엘킨 다이브를 사랑하는 건 불가능한 것처럼. 더군다나 요즈음은 여기에 있는 셀리안 크레이누 생각 뿐이다. 그것이 당연한 것처럼 막을 수 없어서, 윤하영의 엘킨은 밀어둔다. 밀어두는 게 진실인 것 마냥, 그가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이.
그렇다면, 잠결에 생각하는 윤하영의 엘킨 다이브는 나의 사치이며, 환상이며, 착각과 닮아 있었다. 한낮의 의미없는 꿈 같은 감정이다. 그 감정을 꿈처럼 즐겼다.
엘킨은 내 이마의 머리카락을 넘겨주며 가볍게 이마에 입을 맞춘 뒤 웃음기 섞인 말로 속삭인다. 속삭인다기보다는 혼잣말 같기도 하다.
“제가 온 것만으로도 두근거리시는군요.”
라고.
사치에 취한 윤하영은 마음속으로 대답했다.
'응, 맞아요. 당신 때문에 두근거려요.'
라고.
잠결이라 나는 온전히 엘킨만을 생각했다. 셀리안에 대해서도, 전생에 대해서도, 착각 같은 감정도 아닌. 그저 두근거리는 심장과 나를 보는 다정한 엘킨에게 집중했다.
“기쁩니다.”
엘킨의 웃음소리는 정말 기쁜 것 같았다.
요즈음 그는, 어쩐지 불안해보였다. 내가 걱정해서, 나를 걱정해서라고 마치 암시하듯 생각했지만 그건 나를 불안하게 하는 무언가였기에, 윤하영은 외면하고 있는 것뿐이다.
사실은- 알고 있다.
엘킨을 불안하게 하는 건, 윤하영. 엘킨은 명백하게 불안해하고 있어, 그 불안이 그를 뒤튼다.
알고 있으면서도, 윤하영은 그 깨달음을, 꿈을 깨면 잊고 말겠지. 전생의 셀리안 크레이누를 위해, 지금의 셀리안 크레이누를 위해, 자신을 위해.
93
"폐하는, 엘킨을 좋...좋아하게...사, 사랑하게 되셨나요?"
내 멍청한 말이 신전을 울린다. 신전은 사실 텅 빈 공간이 더 많아, 내 멍청한 목소리는 유독 크게 느껴졌다. 그래서인지 그 말을 하는 내 자신이 바보 같기도 하고,-실제로 바보겠고- 나의 바보같은 생각은 방향을 잃고 가속한다.
예컨대,
만약 셀리안이 엘킨을 좋아하게 되면 어떻게 되는 거지. 내가 연적이 되는 건가?
라든지.
'...아니 그보다 이런 말...해도 되는 건가.'
나는 셀리안의 눈치를 본다. 셀리안은- 뭐라 형용할 수 없이 얼굴이 구겨져 나를 보고 있었다.
“...좋아한다...라.”
그는 얼굴을 구긴 채, 뻣뻣하게 말을 잇는다. 그답지 않게 매우 당황스러워 보였다. 그를 멍청이라고 몇 번이고 연호하긴 했지만, 지금은 그때와는 약간 다르다. 당황하고 있다. 명백하게.
“사랑...음...”
셀리안은 미간을 찌푸리며 그 말을 곱씹는다.
“...이게 그 좋아랑 사랑이겠지... 짐의 귀가 이상한 건지 모르겠지만. 그대의 말이...
“...”
“신하로서 사랑하냐거나, 친구로서 좋아하냐는 말이 아닌 것 같은 느낌이 드는데.”
그렇게 알아듣는 내가 이상한거지? 라는 표정으로 셀리안은 나를 보았다. 나는 맹하니 셀리안을 보고 있었다.
물론, 아니다. 그는 제대로 알아들었다.
'그도 그럴게, 셀리안은 엘킨을...'
나는 그가 어떻게 엘킨을 사랑했는지, 사랑하게 되는지 알고 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정적이 흐른다. 우리 둘은 입을 다물고 서로를 바라보았다. 서로의 의중을 파악하기 위해 애쓰는 느낌이었다. 셀리안은 내 말의 진위를, 나는 셀리안의 현재 감정을.
"...그대는, 뭐랄까."
답이 안 나오는 눈싸움을 그만둔 건 셀리안이 먼저다. 차마 이 분위기를 깰 수 있는 말이 생각나지 않아 입 다물고 있는 나 대신 셀리안이 고민하다가 입을 연다.
"참신하군."
"...참신."
"그래, 아주 참신해."
"..."
"...하-"
점점 기묘한 표정이 되어가는 셀리안. 그의 표정은 순간적으로 와락 구겨진 뒤에는 당황스럽고 멍해보였다. 곧이어 황당하다는 것처럼 찌푸려지고, 지금은 비웃는 듯하다. 밉살스럽다.
이상한 건 내가 아니고, 너군- 이라고, 이야기하는 듯한 괴상한 눈빛. 동시에 깨달았다.
내가 물은 말이 헛다리를 짚은 것 같다고 어렴풋이 깨달았지만, 망설였다. 셀리안에 대한 엘킨의 사랑은 내 전생의 근간이었으니까. 그럴리 없다고 당연히 생각하면서도 당연히 구애되고 있었다.
그러나 이번 생애의 셀리안은 아직까지는 엘킨을 좋아하지 않는 것 같다. 아니, 좋아야 하겠지. 근데 사랑은 아니다. 지금 확신했다.
"그냥 해본 말이에요. 그냥."
그렇다면, 내가 한 말은 지나치게 멍청한 게 아닌가, 하고. 파닥파닥, 손부채를 만들고 싶지만 손바닥은 과자더미다. 고개를 휙휙 돌리는 걸로 대신하면 셀리안이 허리를 편 뒤 턱을 괴고 나에게 시선을 준다.
“그대도 민망하지?”
“하하, 농담에 누가 민망해요?”
“흠, 짐은 사실 엄청 민망한데. 게다가 그대, 엄청 진지했던 것 같은데?”
“농담도 진지하게 해야 재미있죠. 폐하도 웃으셨잖아요.”
“얼굴이 빨갛군.”
다시 침묵, 얼굴의 열기가 가라앉질 않는다. 셀리안은 내게로 손을 뻗어 팔랑거리기 시작한다. 더 민망하다. 손을 살랑거리던 그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데, 솔직히 이해가 안 가는군."
그냥 이해하지 마.
"그런 발상이 가능하다니. 왜지? 짐이 엘킨에게 뭔가 했나?”
“...”
“하긴, 최근 일을 너무 많이 부려먹은 것 같긴 해. 그대에게 찾아가는 시간은 꼭꼭 내고 있으니 아마 철야에 야근에...”
“엘킨 좀 괴롭히지 말아요.”
“너무 사랑해서 그만.”
셀리안이 키들키들 웃는다. 그는 완전히 여유를 되찾았다. 반면 나는 여유 따위는 멀리 떠나보내고 말았다.
셀리안은 그런 나의, 여전히 벌건 얼굴에 바람을 보내던 손을 아예 갖다 댄다. 식혀주려는 것 같지만 그의 체온이 뜨거워서 별로 효과도 없었다.
”그래... 전생에 남자였다고 했지? 전생에 남자라도 좋아했어? 그래서, 그런 발상을 했다던가."
"..."
뜨끔... 이 아니라, 그거 너라니까.
"정답? 이것참, 그 설정은 참 치밀하기도 하군. 혹시 전생에 좋아했던 남자가 엘킨 같은 남자였다던가..."
뜨끔뜨끔... 아니라니까. 그건 너.
"이것도 정답인가. 거참."
"손!"
"?"
"뜨겁거든요! 폐하 체온 뜨거워요. 짜증나. 찝찝해."
“이런, 무례한 아가씨를 봤나-”
셀리안은 짐짓 엄하게 나를 꾸짖지만, 나는 속지 않는다. 이 자식의 눈은 이미 장난끼로 반짝반짝 빛나고 있다. 막 떠오르는 태양처럼 생기 있는 붉은색이었다.
“용서할 수 없군. 아까부터 계속 폐하라고 부르고. 둘이 있을 때는 리안이라고 부르라고 했지?”
그 쪽이었냐.
"그건 그렇고 큰일이군. 엘킨이 있는데 짐 때문에 몸이 뜨거워져서야, 이것참. 짐은 백성의 이야기는 다 들어주고 싶어서 말이야."
또 시작했다. 색기 낭비.
"...아저씨 같아요."
"아줌마가 주책이군."
내 뺨에 닿은 그의 손이 갑자기 차가워진다. 마법으로 온도를 내린, 적당히 시원해진 커다란 손이 내 뺨에 닿아 있다. 서늘하게 시원한- 사람의 체온이 휙휙 변했기 때문인지, 아니면 갑자기 차가워져서인지, 그것도 아니면 서늘한 촉감이 누군가를 떠오르게 한 것 때문인지. 마법에 익숙하지 않은 내가 눈을 동그랗게 뜨자 그가 아예 두 손으로 내 뺨을 감쌌다.
"짐은 관대한 왕이니, 건전한 쪽으로 들어주도록 하지."
요령 좋게 내 두 뺨을 감싼 그가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엘킨하고는 눈을 마주하는 것만도 두근거리지만, 셀리안을 보는 건 언제나 평온한 느낌이다. 그 밉살스러운 눈에 속이 뒤틀리는 것과는 별개로 가볍다. 더군다나 그의 눈에 걱정했던 그림자는 지금은 없었기에 더욱. 다만, 닿은 그의 손이 차가운게 묘하게 걸린다.
"..."
서늘한 체온은 마치 엘킨의 손 같아, 나를 만지던 엘킨의 체온이 떠올랐던 것이다.
기분은 변덕스럽게 스위치를 바꿔 왔다갔다 한다. 가증스럽지만, 당면한 셀리안에 대한 고민이 누그러지자, 엘킨이 걸린다. 그의 핑계를 대고 나온 것이다. 엘킨을 만난다고. 그가 그렇게 걱정했는데 그로 거짓말을 하고 강박적으로 셀리안을 찾아 이 신전에 와버렸다.
'엘킨이 알게 되면...'
어둡게 가라앉은, 그답지 않은 푸른 눈동자- 셀리안에 대해 그저 괜찮다고만 이야기한, 공언에 대해서는 언급조차 하지 않은 엘킨. 진득한 진흙과 같은 시선으로 입 맞추던, 나를 어루만지는 서늘한 손길의 윤하영을 걱정하는 엘킨 다이브.
엉망이야.
"엘킨 생각이라도 하는 것 같군."
"...계속 했는 걸요."
"그렇지, 짐이 엘킨을 좋아한다던가 그런 이야기를 하면서. 하지만, 왜, 차가운 손에 엘킨이 만지는 것 같기라도 한가 보지?"
셀리안이 비스듬히 눈을 접어 조용히 입만 끌어올려 웃는다. 입만 끌어올려 웃으며 다시 묘한 눈으로 나를 보았다.
“촉감으로 사랑하는 남자를 떠올리다니, 야하고 귀여운 여자로군.”
“...무슨 소리예요. 대체.”
“엘킨을 생각하는 그대는 언제나 귀엽다는 이야기지.”
“...”
“엘킨에게만 그대는 유독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애정에 설레는 얼굴을 하고, 안절부절 못하면서도 교활한 여자처럼 남자를 당혹스럽게 해. 그를 밀어내고 사랑을 부정하고 그럼에도 엘킨 밖에 보지 않아서- 엘킨이 안달나는 것도 이해가 가.”
그는 내 뺨을 붙잡고 있던 한 손을 슬쩍 움직여 손가락 끝을 내 입술에 댄다. 아니 대려 했지만 멈칫하더니 마법으로 과자를 이동시켜 손가락 대신 내 입에 대고 생글 웃었다.
“우으-”
“벌려야지.”
그는 내 입술에는 손가락이 닿지 않게 그저 과자만 요령 좋게, 안으로 들어갈 수 있을 만큼 밀어넣는다. 한계까지 밀어넣어 과자가 톡 하고 입 안으로 떨어지자 손가락을 떼고 웃었다.
“의리 지키기도 참 힘들군.”
나는 기계적으로 셀리안이 입에 넣어준 과자를 씹었다.
"얼른 엘킨에게 고백하도록 해."
"..."
"그대가 망설일수록, 곤란한 일이 일어날 테니까."
"...엘킨이...말인가요?"
"글쎄."
셀리안이 과자를 씹는 나를, 만족스러운 듯 곤란한 듯 바라본다.
문득 다시 어지럽다고 느꼈다. 메슥거린다. 이 어지러움을 알고 있다. 통증을 알고 있다. 불쾌감을 알고 있다. 이유를 알고 있다.
하지만 왜지?
어째서, 나는 셀리안에게 이런-
그때, 신전의 문이 열리고, 내 뺨에서 셀리안이 천천히 손을 뗐다. 붉은 눈동자가 아쉽다는 빛을 띠고 나를 보다가 느릿하게 고개를 돌린다.
그곳에는 엘킨이 서 있었다.
============================ 작품 후기 ============================
선추코 정말 감사합니다! 모두 행복한 일요일 되세용~
아무개23님, 후원쿠폰 감사합니다.>ㅁ// 매일 나무드립을 치기도 뭐해 평범하게 감사를 전해봅니다. 헤헷.
오타나 이상한 단어는 지적해주시면 고쳐요. 스크래치는 받지만, 독자분들의 말에라기보다는 제 실수라...ㅡㅜ 발견해주시면 정말 감사합니다.>ㅁ막 지적해주세용...ㅋㅋ
덧) 연리공님, 부끄럽다니... 그런. 팬앝 주셔서 무쟈게 감사했습니다. 8월에 첫 팬앝의 날, 9월이 두번째 팬앝의 날... 제 가슴 속에 깊게 새겨져 있습니다. 기념일이에용...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