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루나 패러독스-99화 (99/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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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이 열린 그곳에는 이 세상 사람 같지 않은 푸른 남자가 서 있다. 셀리안 크레이누의 기사, 그의 고결한 기사, 엘킨 다이브- 그의 눈에는 나만이 오롯이 차올라 있다. 그림자가 드리워진 호수 같은 푸른 눈동자에는 내가 투영되어 흔들리고 있었다.

‘아, 엘킨.’

나는 조금 안심했다. 엘킨이다. 엘킨이 가까이 와서 그랬구나, 엘킨이 가까워져서 메슥거렸던 것이다. 조금 이상하지만, 그게 가장 납득할 수 있는 이유였기에 안심했다. 다만, 이상하게도 앙금이 남아 있다. 안심하는 마음 한 켠에 개운하지 못한 앙금이, 그것을 나는 뜨거운 셀리안의 체온이 차갑게 변해 뺨을 감쌌던 여운이라고 생각했다. 그 기묘한 감각, 차갑고 뜨거운 체온. 엘킨과 셀리안의 체온이 뒤섞이는 감각- 그것이 기묘하게 뒤섞여 그 여운은 채찍질하듯 나를 깨운다. 안심하면 안 된다. 상황을 편한 대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고.

하지만-

“...”

“...”

엘킨은 나를 보고, 셀리안을 보았다. 엘킨 다이브의 시선과 셀리안 크레이누의 시선이 얽힌다.

둘은 마주 본다. 기묘하게 긴 시간이었다. 엘킨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셀리안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먼저 움직인 건 엘킨이었다. 입은 굳게 다문 채 엘킨은 저벅저벅 걸어, 셀리안과 내 앞에, 엄밀히 말해 내 바로 앞에 섰다.

섰지만, 몸만 비틀어 다시 셀리안을 보고 예를 갖추어 고개를 숙였다.

“폐하를 뵙습니다.”

“음, 나도 엘킨을 보는군. 저녁시간 전에도 봤지?”

셀리안은 그런 엘킨을 물끄러미 보다가, 나를 마주보던 자세를 바꿔 상단 뒤의 벽에 기대듯 느긋하게 앉아 빙그레 웃는다.

“그래, 나의 사랑하는 엘킨도 왔으니- 그대도 함께 먹지 않겠나.”

그는 내 손으로부터 과자를 들어 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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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을 쉴 수 없다. 이상하게도 숨을 쉴 수 없었다. 셀리안은 느른하게 기대 앉아 과자를 권하고 엘킨은 그를 바라보며 바로 내 앞에 꼿꼿하게 서 있었다.

다시 찾아온 침묵은 쉽사리 깨지지 않고 나는 조마조마한 기분이 된다. 셀리안과 엘킨이 마주 보는데, 어째서 조마조마한 기분이 되어야 하는지 알 수 없다. 헤맨다. 헤매고 있으면 엘킨이 셀리안으로부터 과자를 받아든다.

“또 부엌인가요?”

“음, 내일 시모갈 녀석들에게 대접할 거니까, 엄청 맛있을 거야.”

“폐하-”

엘킨은 지끈거리는 것처럼 이마를 짚고 셀리안은 장난스럽게 웃었다. 평상시와 같다. 평상시와 같은 두 사람이다. 그것을 암시하듯 재차 확인하고, 나는 몇 번이고 엘킨의 표정을 살피듯 바라보았다. 그러고 있으면, 엘킨은 과자를 든 채 나를 보았다.

“...가...”

“에?”

엘킨이 내 앞에 무릎을 꿇고 나와 시선을 마주한다. 나는 깜짝 놀랐지만, 엘킨은 생글 웃으며, 내 입 옆으로 손을 뻗는다. 역시 차가운 체온이었다. 셀리안이 마법으로 내린 체온과는 다른, 엘킨 특유의 차가운 손끝.

“과자가루가 묻었습니다.”

“...아.”

그는 방금 전까지 셀리안이 볼에서부터 입까지 과자를 이동시켰던 자리를 손가락으로 쓸었다.

쓸은 뒤, 자세를 바꾸지도 못하고 과자더미를 들고 있는 내 손을 보더니 한숨을 쉬었다.

“폐하, 하영에게 이건 너무 하지 않습니까.”

그렇게 이야기한 엘킨은 품에서 손수건을 꺼내 들었다. 새하얀 손수건이 바로 내 옆에 놓이고, 그는 요령좋게 내 손 위의 과자를 손수건 위로 올린다. 덕분에 손이 자유로워졌다.

“응? 벌이야. 멋대로 돌아다닌 벌.”

“...그렇군요. 호위도 없는데.”

꾸짖는 듯한 시선에 움칫 어깨를 움츠린다. 나는 지금 약간 얼떨떨해서, 상황상황에 맞는 반응 밖에 못하고 있다. 방금 전까지 느꼈던 기묘한 긴장감, 이래서는 안 된다는 냉정한 이성의 경고, 그런 것들을 피하게 하는 부드러운 분위기- 갈피를 잡을 수 없지만, 인간은 간사해서, 편한 쪽으로 적응을 해간다. 나는 차라리 나를 꾸짖는 두 사람의 분위기에 편승하기로 한다.

꽤 예전이 된 기억 속, 두 사람에게 야단 맞던 기억은 당혹스럽지만은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이 세계에 와서 처음으로 마음 편하다고 느꼈던 기억이다.

“하지만 이번엔 뭐라고 하지 못하겠군요."

"음? 너무 오냐오냐 하는 건 좋지 못하다고. 엘킨."

"그게- 저 때문인 걸요. 저를 만나고 싶어서 나오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대를 만나고 싶어서?"

“그렇죠? 하영?"

엘킨은 나를 보며 공범자처럼 웃는다. 나는 안일한 안도감에서 깨어난다. 셀리안의 나른했던 시선이 조금 또렷하게 나를 응시했다.

"길이 엇갈렸네요.”

엘킨은 다정하게 웃으며, 아쉽다는 듯이 이야기했다. 그는 자신의 손을 내 손에 포개며 남아 있는 과자가루를 마법으로 말끔하게 털어낸다.

“...마법 쓸 필요 없는데, 신전에 떨어뜨려도 돼. 짐이 허락하지.”

셀리안은 가볍게 키들거렸지만, 조금 부러 키들거리는 느낌이 있다. 그것을, 엘킨도 셀리안도 외면한다. 엘킨은 폐하, 라고 가볍게 반발했으며, 셀리안도 그 위화감을 들출 생각은 없는 것 같았다. 다만, 그의 붉은 눈동자만이 나를 꿰뚫어볼 듯 빛나고 있었다.

“엇갈렸지만, 결국은 만날 수 있어 기쁩니다.”

"엘킨, 저는-”

나는 셀리안의 시선으로부터 눈을 떼지 못한다. 눈을 떼지 못한 채, 외면하던 이야기를, 거짓을, 누가 하고 있는지 모를 기만을 들추기 위해 용기를 낸다. 대체 이 용기가 무슨 의미가 있는지 모르지만, 그래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

"!"

그러나 내가 말을 다 잇기 전에 셀리안은 나로부터 시선을 돌렸고, 엘킨은 다시 손을 뻗어 내 입가를 만졌다. 방금 전과 같이 입꼬리를 쓸듯이 만져 옆으로 스윽 쓴다. 그리고 그 손가락을 자신의 입으로 가져가 낼름 핥았다.

“과자가루가 아직 묻어 있어서요.”

그는 빙글 미소 지었다.

*

엘킨과 함께 신전을 나선다. 엘킨은 정중하게, 셀리안에게 나와 함께 돌아가겠다고 이야기했고 셀리안은 그 자신은 좀더 신전에 있다가 가겠다고 이야기했다. 셀리안은 우리로부터 완전히 등을 돌린 뒤 신전 중앙의 창문에 시선을 준 채 팔랑팔랑 손만 흔들어 배웅했다.

복도를 걷는다.

나는 개운하지 못한 기분을 떨치지 못한다. 그 자리에서 이야기했어야 했다. 왜 굳이 이야기해야 하는지는 모르지만, 역시 이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야기하고, 엘킨의 이야기를 듣고, 잘못 꼬인 게 있다면 바로 잡아야 한다. 강박적이다. 강박적이지만 옳은 것이다. 아마 엘킨이라면, 엘킨이 내막을 안다면 그렇게 했을 것이다.

분명 지금 엘킨은 모르고 있다. 액면 그대로 내 거짓말을 믿어 그걸 풀 사람은 나밖에 없는 것이리라.

“엘킨-”

“죄송합니다.”

“네?”

“...나오신 건 폐하 때문이지요?”

엘킨이 멈춰서 나를 보았다. 나를 보며 눈을 살짝 찌푸리고 웃었다.

"...어떻게..."

"그야... 당신이 내일 아침에 있을 일을 알았다는 걸 들었으니까요."

"..."

“하영이 걱정할 것 같아 말하지 않았습니다만, 이럴 줄 알았으면 차라리 공언식에 대해 제가 이야기할 걸 그랬습니다. 걱정되셔서 폐하를 찾으러 오신 거죠?”

엘킨은 내 손을 꼭 잡고 나와 눈을 마주했다. 나는 이상하게 다정하기 그지없는 그의 푸른 눈동자에 압도 당한다.

“죄, 죄송해요. 거짓말을...”

“아뇨, 그러지 말아주세요.”

그는 내 손만 꼭 잡고, 가볍게 고개를 숙여 내 이마에 입을 맞춘다. 이마에 입을 맞추고 바로 앞에서 내 눈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의 푸른 눈동자에는 내가 담겨 있다.

“사과할 건 접니다. 당신을 위해서라고 이야기하긴 했지만, 저를 위한 것도 있으니까요.”

“...”

“숨겨서, 죄송합니다. 당신이 걱정되는 것도 있었지만, 한편으로 질투가 없었다고 말하기도 뭐하네요.”

“질투...”

“네, 당신께서 폐하를 너무 생각하셔서, 걱정하는 마음에... 저도 모르게 그런 게 섞였을지도 모릅니다.”

그는 지극히 엘킨 답게, 솔직하게 그 자신의 마음을 내게 이야기했다. 나는 나도 이야기 해야 하는데-라고 생각했지만 한편으로 무얼 이야기해야 할지 모르게 되어 버렸다. 왜 이야기해야 하는지가 아니라, 무얼 이야기해야 하는지. 내가 할 이야기는 엘킨의 입에서 전부 나오고 있었다.

더이상 내가 무엇을 이야기할 수 있을까, 무엇을 이야기해야 할까.

“용서해주시겠습니까.”

“용서?”

“당신에게 이야기하지 않은 것을요. 당신이 위험하게 이 밤에 그 방을 빠져나오게 한 데는 제 탓이 큽니다. 제가 속였기에, 당신이-”

“아, 아니에요.”

뭔가 아닌 것 같다고, 생각한다. 눈앞의 엘킨은 지극히 엘킨답고, 그의 말에는 한치 거짓도 없지만, 뭔가 아닌 것 같다고. 위화감을 느끼면서도 나는 사과하는 엘킨의 손을 내쪽에서 꼭 잡을 수밖에 없다.

“아니에요. 제가 딱히 뭘 할 수 있는 것도 아닌데, 너무 감정적이었던 것 같아요. 엘킨이 말하지 않은 것도 이해가 되요. 저야말로 죄송해요.”

“...음...서로 사과만 하네요.”

"그, 그런가요."

뭘까. 이건 아닌 것 같아.

지극히 옳게 흐르고 있는데 결정적으로 잘못된 것 같다. 기분 탓일 게 뻔하다. 나는 지나치게 생각하고 있는 감이 있으니까.

"네, 그럼-"

그는 그저 내 말에 기쁜 듯 활짝 웃었다. 그 미소에 나는 움찔한다. 언젠가 봤던, 윤하영만이 알고 있는 나를 설레게 하는 엘킨의 미소였다.

“그럼, 서로 용서하기로 해요. 그리고, 앞으로는 서로에게 숨기는 것도 없도록 하면 되겠군요.”

오래 잡은 탓에 엘킨의 손은 다시 미지근해진다. 나는 망설인다. 망설일 게 없지만 그의 눈을 바라보며 망설였다. 망설임의 순간 해야 할 말이 떠오르지 않은 채, 곧 나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윤하영만이 아는, 전생의 셀리안 크레이누가 그렇게도 갈구했던 애정어린 눈빛을 받으며 말이다.

*

다음날 아침, 나도 공언식에 참여하게 되었다. 나를 맞이하러 온 엘킨과 신전까지 함께 왔지만, 엘킨은 셀리안의 옆에 있기 위해 도중에 헤어졌다. 나는 일반 귀족들이 앉아 있는 자리에 자리를 잡았다.

주욱 살펴보면 공언식에는 계속 걱정했던 사람들도 대부분 참여해 있었다.

칼미온 기사단의 자리에는 미실랭이 있었고, 그 옆에는 에드나가 있었다. 미실랭도, 에드나도 뭐라고 딱 집기는 어렵지만 마음에 걸렸던지라, 일단은 무사한 모습을 보니 안심이 되었다. 미실랭은, 청문회 전까지 보였던 다크써클이 완전히 사라져 그의 얼굴은 오히려 전보다 좋아보였다. 에드나도, 여느때와 같았다. 나는 에드나와 인사를 하고 싶었지만, 자리는 멀었고 그녀는 좀처럼 미실랭 이외에는 시선을 주지 않고 있었다.

앤과 산은 엘킨의 말대로 이미 지온으로 떠났는지 공언식에는 보이지 않았다.

'히아신스는 어디 있는 걸까.'

어쩌면 그녀도 파견을 갔을지도 모르지만, 공공연하게 알리지 않았다 뿐이지 히아신스는 셀리안의 약혼녀였다. 셀리안의 공언식에 그녀가 없는 건 이상해 나는 재차 칼미온을 살펴보았다.

그 동안 셀리안이 설 단상에도 슬슬 한 사람 두 사람 자리를 채우기 시작했다. 먼저 엘킨은 단상에 서자마자 내 자리로 시선을 주며 미소 지었고, 시간이 임박하자 왕족들이 들어왔다. 선왕과 헤르티아, 그리고 선왕의 후비 두 사람과 아직 미혼인 3왕녀 애리.

선왕은 유독 기분이 나빠보였다. 그건, 꽤 기분이 좋았다. 셀리안이 그 자신조차 명확하게 눈치채지 못하게 외면했던 진실, 선왕이 슬금슬금 긁어대던 약점은 이제 일단은 약점이 아니게 된 것이다.

다만, 이상한 건 헤르티아의 얼굴이 어둡다는 것이었다. 어이없는 일이지만, 셀리안의 공언식을 가장 기뻐할 사람은 헤르티아라고 생각했었다.

'차라리 잘 된 걸까.'

황홀해하는 헤르티아의 얼굴을 보는 건 나로서도 곤욕스러운 일이니까, 나는 다시 히아신스를 찾기 위해 칼미온에 시선을 주었다.

"...히아신스 에이나네요."

"어째서..."

순간 귀족 영애들과 몇몇 귀족들이 웅성거리는 게 느껴졌다. 찾고 있던 히아신스의 이름에 나는 칼미온을 좀더 열심히 찾았지만 보이지 않는다. 웅성거리는 소리만 커져갔다.

'어디에 있는 거지?'

눈을 데로록 굴려보지만, 칼미온 어디에도 그녀는 없다. 나는, 그녀를 내 힘으로 찾지 못하고 웅성거리는 귀족 영애들의 시선을 따랐다. 그녀들의 시선은 칼미온이 아닌 단상으로 향해 있다. 따라가보면 히아신스는 왕족들이 앉아 있는 단상 근처에서 등장했다.

드물게 군복이 아닌, 귀족 영애로서의 드레스를 정갈하게 차려 입고 있었는데, 그녀는 단상 쪽 비어 있는 왕비의 자리에 앉았다.

그때 챙그랑, 하고 여기서 들릴 정도로 큰 소리가 났다. 쇠붙이가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였다.

'애리일까.'

히아신스가 셀리안의 약혼녀라는 건 공언된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가 직접적으로 약혼녀로서 그녀를 대동한 건 처음이었다. 에피룬 크레이누로서의 공언과 동시에 셀리안은 히아신스의 위치 역시 공고히 할 생각인가 보다. 그렇게 된다면 그녀는 이르지만 칼미온에서 멀어질 수밖에 없고 왕비로서 본격적인 준비가 시작 된다. 전생 때와는 또 다른 일이지만, 그녀가 위험할 일은 훨씬 줄 것이었다.

묘하게 안도감을 느끼며 애리 쪽에 시선을 주면 역시나 애리는 잔뜩 심통이 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녀의 밑으로는 아무것도 떨어져 있지 않았지만, 그녀는 히아신스를 싫어하니 분해서 발이라도 구른 건지도 모른다.

대수롭지 않게 히아신스에게 다시 시선을 준다. 주려고 했지만, 곧 작은 비명소리가 들렸다.

“싫어...”

라고.

선왕의 옆에는 방금 전까지 앉아 있던 헤르티아가 서 있었다. 그녀의 발 아래에는 그녀가 쥐고 있었던 듯한 잔이 나뒹굴고 있었다.

============================ 작품 후기 ============================

선작이 너무 늘었습니다.;ㅁ; 정말 감사하고 송구스럽고 기쁘고 부끄럽습니다ㅜㅜ;;

아무개23님 후원쿠폰 감사합니다. 즐거운 월요일 되실 수 있도록, 솔라빔... 지송합니다.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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