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루나 패러독스-100화 (100/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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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티아는 비명을 지를 것처럼 입을 벌리고 히아신스를 귀신처럼 노려보고 있었다. 애초에 기분이 나빠보였던 선왕의 얼굴이 좀더 토할 것처럼 일그러진다. 그는 헤르티아를 막지는 않았지만, 역겨워하는 것처럼 보였다.

마놀공주와 애리는 조금 어리둥절한 표정이었고, 세피오스 백작 영애-그의 제2후비만이 입가를 비웃듯이 끌어올리며 동정하는 표정으로 헤르티아를 바라보았다.

“싫...”

헤르티아의 입이 다시 한 번 벌어지고 그녀가 비틀거리며 히아신스 쪽으로 다가갈 듯 움직인다.

그리고 웅성거리던 좌중이 조용해지고 헤르티아의 움직임이 멈췄다.

셀리안 크레이누가 등장한 것이다. 전설의 재림이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는 금발, 타오르는 듯한 붉은 눈동자, 마법사라기보다는 장군같은 체격을 한 지고의 왕-

헤르티아의 시선이 셀리안으로 향한다. 무언가를 갈구하는 표정으로 왕을 본다.

그러나 그는 붉은 눈으로 그의 어머니를 흘끔 바라보고 히아신스에게 가볍게 미소지으며 단상으로 완전히 올라섰다.

헤르티아가 줄이 끊어진 인형처럼 주저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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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세계는 혼란에 빠져있지. 안정되어 있는 것 같지만 삐걱거리고 있다.”

역사 속의, 신을 자처하는 사기꾼 같은 왕들이 바로 저런 모습일까.

셀리안의 붉은 눈은 위압적이지 않다. 하지만, 그가 그 붉은 눈으로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숨을 삼키게 되는 무언가가 있었다. 셀리안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이야기는 기묘한 힘을 갖고 있었다. 그저 현실을 좀더 심각하게 표현한 연설용 멘트인데도 그가 입에 내는 것만으로도 마치 진실 같기도 하고, 예언 같기도 했다.

“하루드라는 세계의 어둠이 이 나라, 아니 세계 곳곳에 침투해 있으며, 이종족과의 관계도 살얼음 판과 같지. 보기에는 평온해보이지만 최근 억지로 맺어지는 계약이나, 이종족에 의한 인간 살해도 드물지 않아졌어.”

사람들은 꿀꺽 침을 삼키며 다음 말을 얌전히 듣고 있다. 셀리안의 눈가가 살짝 끌어 올라간다. 만족하고 있다. 눈에 띄지 않지만 나는 그렇게 느꼈다. 역시 이러니 저러니 해도 그는 군림하고 조종하고 다스리는 걸 좋아한다. 성격이 나쁘다.

“그리고- 검은용이 등장해 에피룬의 동상에서 여인들을 떨어뜨린 것 또한-”

저 나쁜 성격을 연설에 꼭꼭 녹여내다니, 마법왕은 완전히 결심을 굳힌 것 같았다.  좌중이 숨을 삼킨다. 용을 본 사람들은 공포를, 용을 보지 못한 사람들은 근원모를 두려움을. 모두 다, 어린시절 순진하게 옛날 이야기에 심취한 어린 아이들처럼 맹목적으로 셀리안을 보고 있다. 그 시끄러웠던 시모갈 사절단조차 완전히 몰입한다.

셀리안은 그런 좌중을 두루두루, 오랫동안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렇기에 짐이 있는 것이다.”

셀리안은 이왕지사 이렇게 된 거 에피룬의 환신임을 이용하기로 결심한 듯, 당당하고 오만하면서도 누구보다 자애로운 얼굴로 미소 짓는다.

“짐이 세계에, 다시 온 것이다.”

라고.

“그대들을 다시 한 번 구하기 위해-”

자신의 전생이 에피룬 크레이누임을 공언한다.

그 증명에 마법 따윈 필요없다. 내가 에피룬 크레이누라고 촌스럽게 이야기할 필요도 없다. 그저, 그 자리에서 일파만파 퍼진, 이미 암묵적으로 공언화된 사실에 대해 직접적인 증거로 자신을 내세우면 되는 것 뿐이다.

에피룬 크레이누의 환신이라고 해도, 그것이 기분 나쁜 흑마법을 이용한 시점에서 구설수에 올라 있었다. 하지만, 그에게는 그런 구설수를 힘으로 제압할 압도적인 카리스마가 있었다.

숙연했던 신전 안은 더욱더 조용해진다. 조용해지고, 우레 같은 함성이 쏟아지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셀리안 크레이누를 연호하고, 에피룬 크레이누를 연호한다.

그 자리를, 셀리안 크레이누는 무감한 가면을 쓰고 보고 있었다. 오만하고 자애롭게, 하지만 그 붉은 눈동자에는 언뜻 비웃음이 서려 있었다.

아프다, 아프다고 느꼈다. 이것은 이 나라나, 셀리안 크레이누의 치세에 있어서는 최고의 시나리오이나, 셀리안이란 사람 자체에게는 최악의 시나리오다. 이런 것이 없어도, 그는 잘 할 수 있는데.

셀리안과 눈을 마주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응원하고 싶다고. 하지만, 마주친 건 엘킨과다. 엘킨은 걱정말라는 것처럼 상냥하게 눈을 휜다.

‘그래, 괜찮을 거야.’

그날, 셀리안 크레이누는 그 자체로 살아 있는 신이 되었다.

*

공언식이 끝났다. 마약에 취한 것처럼 경외심에 웅성거리는 신전을 두고, 사라지는 셀리안을 나는 눈으로 쫓는다. 그런 나를 엘킨이 쫓는 걸 알겠다.

기우다. 셀리안에게도 과잉된 걱정이며, 엘킨에게는 마냥 미안한 걱정이다.

그러나, 나는 내가 아는 전생보다 더 엄청난 인물이 된 셀리안을 응원하듯 계속 바라보았다.

‘내가 있어, 내가 당신을 알고 있어. 윤하영이 셀리안 크레이누를 알아.’

뭘 어쩌겠다는 것이 아니다. 그저 응원을, 소망을, 바람을.

“...”

“?”

들아가던 셀리안이 내쪽으로 슬며시 고개를 돌린다. 심장이 두방망이질 친다. 쳤지만 순간적으로 시선은 빗겨나간다. 그럴 리가 없다. 그가 나에게 이 순간 시선을 줄 수는 없는 일이다. 착각이라고, 분에 넘치는 환상이라고 생각하며 그저 끝까지 그의 뒷모습을 바라본다.

‘셀리안-’

그런데 셀리안이 완전 모습을 감출 즈음, 순간적으로 손에 무언가가 쥐어졌다.

“!”

열어보면 어제 신전에서 셀리안이 내 손으로 떨어뜨렸던 과자였다.

*

공언식 이후, 나라의 정세는 빠르게 바뀌어 가는 것 같았지만 왕궁에서의 내 생활은 별반 다를 게 없었다. 엄밀히 말하자면, 나에 한해서는 많은 게 멈춰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변한 게 있다고 하면 있겠지만, 기본적으로는 멈춰 있었다.

엘킨은 자주 나를 찾아왔지만, 히아신스나 다른 사람들은 만날 기회가 줄어버렸다. 칼미온 기사단은 엘킨의 말대로 더 바쁘게 움직이게 되었고, 히아신스는- 곧 칼미온 기사단에서 나온다는 이야기만 들었다. 셀리안의 탄신일이 지나면 날짜를 정해 히아신스와 식을 올린다고 했다. 왕궁은 여러모로 바빠졌다.

일단은 셀리안의 탄신일 준비로. 어딜 가도 사람들은 분주했고 이 나라 저 나라에서 끊임없이 손님들이 찾아오는 것 같았다. 전생 때보다 더 했다. 수도는 포화 상태였다. 그 중에는 이국에서 온 상인이나 귀족, 심지어 평민들도 있는 것 같았다. 다들, 그 유명한 에피룬의 환신인 왕과, 시모갈의 대신관을 볼 대대적인 행사에 들떠 있었다.

나는 셀리안의 탄신일이 지나는 대로, 세르미아의 영지에 방문할 예정이라고 하지만 일단 답답하다면 답답한 생활이 이어졌다. 여러가지 제약이 사라지긴 했어도 엔실렌이 나에게 기본적으로 관심을 갖고 있는 한 호위는 따라 붙었고, 아무래도 입장이 있다 보니 동선에는 한계가 있었다. 밖에 나갈 수 있어도 갈 수 있는 곳은 한정 되어 있었다.

다만, 셀리안의 경우 열외가 된다. 그 역시 날 찾아오는 일은 아예 없어졌지만 밖에서 우연히 만나는 일이 종종 있었다. 도서실이나 정원을 나가면 그와 가끔 만날 수 있었다. 빈도가 많지는 않았지만 잊을만하면 그와 우연히 부딪치고는 했다.

아무래도 과거생에 대한 기억 때문에 무의식적으로 그와 목적지가 겹쳤던 건지도 모른다. 만나도 딱히 할 말은 없었지만, 그 만남을 나는 은근히 기다리게 되었다.

지금도 그랬다.

아침 일찍, 도서실에 책을 찾으러 오면 그가 있었다. 나는 만들어진 이야기는 별로 좋아하지 않았기에 도서실에는 거의 오지 않았는데 마침 온 도서실에서 그를 마주친 건 기가 막힌 우연이었다.

이른 아침의 왕궁 도서관에는 사람이 드물었다. 어쩌면 책을 읽고 싶다기보다는 이 분위기가 좋았던 건지도 모른다. 나는 혼자 차지한 듯한 넓은 도서관을 즐기며, 책장의 책들을 하나하나 손가락으로 쓸었다. 그렇게 무의미하게 지나치다가, 지나치게 화려한 황금색 책이 있어 아무 생각없이 뽑으면 반대쪽 책장으로 붉은 눈과 마주쳤던 것이다.

셀리안이었다. 그는 나를 보자 눈가를 접으며 웃었다.

“아.”

“쉿.”

그는 자신의 입에 손가락을 대고 쉿 하고 속삭인다. 그 자리에 서 있으면 그가 곧 내게로 다가왔다.

“오랜만이군.”

바로 가까이 다가온 그는 소곤소곤 속삭여왔다. 나는 그를 올려다본다. 그는 내 앞에 서 황금색 책이 꽂혀 있던 책장에 비스듬히 기대 나른하게 미소지었다.

“오랜만...은 아닌 것 같은데요. 지난 주에도 정원에서 우연히 만났잖아요.”

“야박하군. 일주일만인데.”

“엄밀하게는 지난주다 뿐이지, 3일 만이에요. 직접 책을 찾으러 오신 건가요. 한가하시네요.”

요즈음 바쁠 텐데. 전생의 기억속에서 탄신일 전에는 꽤나 바빴다. 그래서 보고 싶은 책이 있어도 하인들을 시켰었는데. 아마 이번 생일은 더 바쁠 것이다.

알고 있어서 그럴까, 아니면 버릇인 걸까. 반가우면서도 예쁜 말은 나가지 않았다.

“부지런하다고 이야기해주면 좋은데.”

나도, 셀리안도 그것에 기분 상하지 않았다. 우리는 서로가 충분히 서로에 대해 신이 나 있음을 알고 있다.

“...부지런하시네요.”

못해줄 건 또 뭐람.

“그대도, 드디어 책을 보는군.”

하지만, 은혜도 모르는 황제님은 히죽이죽 웃으며 나를 비웃었다. 그는 내가 책을 별로 안 좋아하는 걸 알고 있었다. 만든 이야기는 좋아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교양서를 읽을 만큼 지적 탐구에 열정적인 것도 아니었다. 셀리안은 반대로, 독서가 취미셨다. 고상도 해라. 고상도 하지만, 엄밀히 말해 내가 책을 싫어하는 건 셀리안 때문이다. 이 분의 생애가 너무 스펙터클해 만들어진 이야기 따위에 정신을 소모하기 싫어 멀어진 거니까.

“저 완전 지적이거든요.”

“그래, 내가 아는 여자 중 그대가 가장 지적이야.”

“...”

그는 부지런하다고 대답해준 내 말투를 흉내내며 키득거렸다.

“그래, 또 물을 게 있지?”

그런 다음, 자 하던 대로 물어봐, 라는 포즈를 취하며 내 질문을 재촉한다. 나는 그를 우연히 만날 때마다 물었던 것을 입에 냈다.

“음... 히아신스는요?”

“큭.”

“잘 지내나요?”

“짐을 만나 냉큼 히아신스라니- 부럽구만.”

“자기가 물으라고 해놓고.”

“언제나 묻잖아?”

그녀가 날 찾아오지 못하는 이유는, 요즈음 한창 진지하게 왕비가 되기 위한 준비를 시작했기 때문이다. 전생에는 이렇지 못했다. 좋게 바뀌는 거겠지. 절망적이라고 생각했지만, 더 좋아지고 있는 게 분명하다. 이제 셀리안을 음습하게 위협할 건 아무것도 없고, 히아신스의 위치 또한 공고해진 것이다.

“잘 못 지내.”

“에엑!?”

“그대가 보고 싶다고 난리야.”

“...우와, 성격.”

“좋다고? 어휴, 질투나는군. 엘킨에 이어 짐의 약혼녀까지.”

셀리안은 다정하게 미소 짓는다.

“마성의 여자가 따로 없군.”

“...놀리는 거죠?”

“나중에는 꼭 셋이, 아니 넷이 보지.”

“네.”

나쁘지 않다. 모든 게 다 좋아지고 있다.

============================ 작품 후기 ============================

1. 선추코 감사합니다!! 빵파레를 울립니다>ㅁ//

2. 어떤 분이 연참하라고 해서 힘내봤습니다. 오늘은 2개 썼어요. 예뻐해주세요.

3. 사이드스토리 포함 100화입니다만 제 체력이 저질이라 감사밖에 드릴게 없... 또륵

4. 완결은 지난 번 리코멘으로 살짝 이야기 드렸듯 150화 전후입니다.ㅜㅜ 넘을 수도 있... 또르륵. 이 소설 플룻이 거지라서 120화나 100화 안에는 끝낼 수가 없... 하영을 죽여버리고 끝낼까. 다 얘 때문이야.+_+...농담입니다. 저는 해피종자..ㅇㅇ

5. 좋은 월요일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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