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루나 패러독스-101화 (101/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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셀리안과 헤어지고 도서실을 나선다. 역시 딱히 빌릴 책은 없었지만, 그냥 나오기도 뭐해 눈을 끌었던 황금색 책을 갖고 나왔다. 삐까뻔쩍한 황금색 표지의 책은 동화였다. 검은 용이 마을 여성들을 탑으로 유혹해 떨어뜨리고, 황금의 용사가 구하는 이야기. 사실 내용이야 그 자리에서 다 봤고, 말그대로 빈손으로 가기 싫어서 집은 것 뿐이다.

복도를 걷는다. 햇볕이 기분 좋았다.

‘도서실에서 내 방으로 가는 길은 의외로 사람이 없구나.’

아침시간이라 특히 그럴지도 모른다. 요즈음은 왕궁 이곳저곳이 분주했기에 한산한 복도가 좋게 느껴졌다. 책은 좋아하지 않지만, 아침시간에는 도서관까지 산책을 와도 좋을 것 같다.

황금색 동화책의 묵직함도 나쁘지 않았다. 우연히 만난 셀리안처럼.

‘이상한 느낌이네.’

그때 또각 거리는 소리가 겹쳐 들렸다. 내 신은 단화여서 그닥 굽소리가 크게 나지 않는다. 상대의 굽소리도, 발걸음이 조심스러운건지 그다지 크지는 않았지만 아무래도 굽이 있는 신발은 소리가 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혼자만의 시간이라 좋다고 생각하기 무섭게 사람을 만나다니. 왕궁에서 한명도 안 마주치고 돌아갈 수 있다고 생각한 게 사치일까. 좀더 일찍 일어나는 편이 좋을 것 같다고 생각하며, 복도를 울리는 나 아닌 누군가의 굽소리에 고개를 들어올렸다.

“...”

헤르티아였다.

*

그녀를 만난 건 통상 4번째로, 둘이서만 대면하는 건 두번째였다. 새하얗게 하늘거리는 옷을 입고 있는 그녀는 언제나처럼 작은 체구였으나 더 마른 것 같았다. 흔해빠진 갈색 머리카락과 갈색 눈동자가 특별하게 보일 정도로 사랑스러운 왕비, 그녀였지만 오늘은 기묘하게 힘이 없어보였다. 마치 바삭바삭 시들어가는 갈빛으로 변색된 백합처럼 그녀는 비틀비틀 햇빛을 받으며 걷고 있었다.

헤르티아의 눈은 바닥을 멍하니 보고 있었다.

황제의 어머니이자, 셀리안이 결혼하지 않은 지금 유일한 왕비인 그녀지만, 그런 지위의 여성치고는 주위에 아무도 없었다.

그녀는 사실 외출 때 누구도 대동하지 않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사교계에 나갔을 때 어색하게 제 이야기를 하며 어울리기는 했으나 기본적으로 대인공포증이 있는 여자였다. 진지하게는 상대와 사귈 줄 모르는 타입이다.

그녀의 그런 특성 때문일까, 아니면 단지 홀대받는 왕비이기 때문일까. 그녀가 대동하는 하녀란 안나가 전부였고 그녀는 왕궁 밖으로 나가지도 않았으며 행동은 몽유병에 걸린 것 같이 비틀거리는 일이 많아 직접적인 호위조차 붙지 않고 돌아다닐 때가 많았다. 그녀가 싫어하기도 했으니 역시 전자일지도 모른다.

덕분에 그 지위가 올라가고도 나라의 신관들에게 받은 축복만을 두르고 혼자 돌아다녔다.

“...”

솔직히 말해 셀리안의 기억 속 헤르티아는 언제나 안나와 둘뿐이었고, 주로 혼자였으며 약에 취한 여자 같았기에 지금 모습이 이상할 것은 없었다. 인간미란 전혀 없이, 언제나 무언가에 홀려 있는 광신도 같은 여자.

그렇긴 하지만.

가까워지자 헤르티아와 눈이 마주친다. 아니 엄밀히 말하면 그녀는 조금 흐릿한 눈으로 반사적으로 다가오는 나를 보았을 뿐이다.

"..."

역시 착각이 아니다. 그녀는 정말 시든 것 같았다.

그녀는 언제나 마치 이 자리에 없는 것 같은 여자였다. 전생이나 뭐 그런 것에 사로잡힌 것도 아니건만 현실에 발 붙이지 못하고 있는 그런 느낌이었다. 그것이, 그날 신전에서는 어느 때보다 당당하게 꽃처럼 피어났었다.

지금은 달랐다. 한 번 꽃처럼 피어나 시든 것처럼 그녀의 특별하게 빛나던 눈동자는 힘을 잃고 멍하니 허공을 향해 있었다.

동정이 갈 법도 하건만, 나는 언제나 그녀에게는 어떤 감정의 끌림도 없었다. 전생의 어머니임에도.

'정말 싫다.'

미묘한 께름칙함과 타당하지 않은 원망- 그날 신전에서 셀리안을 가장 상처 입힌 건 그녀였다. 전생에도 언제나. 물론 원망 받아야 할 건 류였지만, 나는 그녀가 미웠다. 셀리안에게 그렇게밖에 할 수 없는 그녀가- 전생의 어머니라고는 하지만 나는 그녀를 처음 만났을 때 신기할 정도로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었다. 그런 만큼 이제 자리 잡는 건 원망에 가까웠다. 순수하게 아무 감정도 섞이지 않은 원망.

나는 언제나 생기로 불탔던 셀리안의 붉은 눈이 그녀의 이야기로 어둡게 가라앉았던 그 날을 떠올리며 그녀를 무시하고 지나친다. 인사조차 하지 않았다.

아마 그녀는 신경쓰지 않겠지. 아무도 지적하지 않겠지.

교활하게도 그걸 알고 있기에 가짜 귀족 영애 윤하영은 한 나라의 유일한 왕비를 무시할 수 있었다.

그대로 지나친다.

지나치려 했지만, 나를 붙잡은 건 의외로 헤르티아였다. 스쳐지나가는 순간 그녀의 손이 내 옷자락을 붙잡았다.

“...히아신스, 에이나...”

나를 히아신스로 착각한 걸까.

'하나도 닮지 않았는데.'

나는 나에 대한 자부심은 넘치는 편이지만, 아무래도 엄청난 미인에 속하는 히아신스에게 평범한 미인인 내가 대입되니 양심에 찔리긴 한다. 검은 머리카락은 멸시 받고, 드물다. 왕궁에서는 더욱, 사람들은 그녀보다 일단 머리카락을 보았다. 그때문일지도 모른다. 착각할만도 했다.

"저는-"

"히아신스-"

히아신스를 부른 헤르티아의 눈은 기묘한 원망으로 번들거리고 있다. 아니, 원망이라고 해야 할까.

그 눈동자에 흠칫하면 헤르티아의 몸이 무너진다.

“우왓!”

반사적으로 그녀를 붙잡았지만. 체력이 없어서인지 함께 복도 바닥에 주저앉는다.

‘너무 말랐는데.’

워낙 작고 마른 체구였던 그녀는 부러질 것처럼 가늘다. 헤르티아는 꺼질 듯 신음했다. 신음하며 내 머리카락을 본다. 그녀는 몽롱한 눈으로 내 머리카락을 죽일 듯 노려보고 있었다. 노려보며, 꺼질 것 같은 한숨과 어울리지 않는 적의에 찬 목소리로 비명을 지른다.

“폐하를 이 세상에 현신시킨 건 나예요!”

그녀는 쉭쉭 거리는 목소리로 히스테릭하게 소리쳤다. 소리치며 나를 죽일 것처럼 노려보았고, 손을 뻗는다.

“에? 윽-”

"내가 그 분을! 당신 따위보다 훨씬-"

시야가 반전한다. 그녀는 내 위로 올라타 내 목을 조르기 시작했다. 어떻게 그런 힘이 난 건지 놀랄 만큼 강한 힘으로 내 목을 조르기 시작했다. 앙상한 그녀의 뼈마디가 목뼈와 부딪친다.

"큭!"

밀어낼 수 없다. 초인적인 힘이다. 그녀는 지금 당장 나를 죽이지 못하면 큰일날 것 같은 얼굴로 내 목을 졸라댔다.

“으...윽. 윽.”

“기억도 못 하면서!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주제에, 아무것도 안 하고 팔자 좋게 살았던 주제에!!!”

그녀는 비명처럼 소리를 질렀다. 숨이 막힌다. 턱턱 숨이 막혀 손을 뻗어 그녀의 팔목을 잡으려 했지만 소용이 없다.

“커헉-”

“뭐 하는 짓입니까!”

시야가 검게 변한다. 순간 헤르티아가 튕기듯 나로부터 떼어내졌다. 노호 같은 엘킨의 목소리가 들렸다.

*

“하영!”

엘킨이었다. 엘킨은 헤르티아를 떼어내 나를 꼭 껴안는다. 헤르티아가 나가떨어져 비명을 질렀지만 엘킨은 신경쓰지도 않는다. 그는 나만을 껴안고 나만을 본다. 따끔거리는 목과 아찔한 정신 속에서 그의 일렁이는 푸른 눈을 보았다. 언제나 올곧고 누구에게 다정했던 엘킨 다이브의 눈은 이제 윤하영만을 보고 있다. 올곧게, 마치 내가 전부인 것처럼.

"하영, 하영-"

그의 손이 떨리고, 빠르게 내 목을 어루만졌다. 몸을 감싸는 따스한 기운은 점점 퍼져나가 눈을 깜빡거리면 숨이 돌아온다.

“에...엘킨.”

“아, 하영-”

엘킨의 푸른 눈이 당장이라도 울 것처럼 일렁이고 나를 확인하듯 다시금 품에 안아 뺨을 어루만진다.

“다행입니다.”

“시, 싫어!! 죽여야 돼!!”

"!"

"다시 죽어!!"

심하게 나동그라졌음에도 다시금 헤르티아가 내쪽으로 기어왔지만 엘킨의 시선에 그녀는 반사적으로 흠칫 몸을 떨었다. 단지 보는 것만으로 저런 상태의 헤르티아를 막을 수 있을리 없다. 아마 기압이나 살기를 사용했을 것이다. 다만 신기할 정도로 그 편린조차 나는 느낄 수 없었다. 없었지만 당장이라도 헤르티아를 죽일 것 같은 그의 시선에 다급하게 그를 붙잡는다.

“엘킨, 나는 괜찮아요.”

"괜찮지 않습니다."

엘킨의 손이 떨리듯 내 목에 닿는다. 헤르티아에게 졸렸지만, 그에 의해 나은 목은 말끔하다.

"감사해요. 엘킨 덕분에 저는 괜찮..."

"어떻게!!"

"!"

"...어떻게, 괜찮을 수 있나요. 여전히 당신은...”

"엘킨."

"제발 그러지 말아주세요."

엘킨의 시선이 다시 나에게 돌아왔고 그는 나를 와락 껴안았다.

"당신이 몇 번이나 제 앞에서 다치는 것도, 당신이 그런 말을 하는 것도...어째서...--하지 않는 건가요. 저는... 전부 견딜 수 없습니다. 머리가 이상해질 것 같아요."

"..."

엘킨의 목소리가 떨려 나는 말없이 그를 마주 안았다. 사랑스러운 엘킨- 이것은 누구의 감정이었던가.

그렇게, 엘킨의 품에 안겨 있으면, 헤르티아는 차마 다가오지는 못하고 나를 무섭게 노려보고 있다. 그녀의 눈에는 핏발이 서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

나는 그녀의 갈색 눈을 마주했다. 그리고, 곧 그녀가 멈칫하며 내 눈을 빤히 바라보다가 눈을 깜빡였다.

“...히아신스 에이나가... 아니야?”

“...”

“...아니...”

당황한 듯 말을 더듬는다. 간신히 내가 히아신스가 아닌 걸 안 그녀는 급격히 기운을 잃은 것처럼 눈을 깜빡이더니 쓰러졌다.

“아.”

그 모습에 당황했지만 엘킨은 나를 놔주지 않았다. 하지만, 그래도 한 나라의 왕비가 쓰러졌는데 그대로 두는 것도 아닌 것 같다고 걱정하고 있으면, 헤르티아 옆으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이런이런, 역시 그릇일 뿐인 여자는 자신이 사랑하는 영혼도 구별하지 못하는군요.’

비웃는 건 아니었다. 그저 담담히 사실을 고할 뿐인 목소리, 그 목소리는 다만 내 머릿속으로 울린다. 이 감각을 알고 있다.

엘킨에게 안긴 채 고개를 들면 호박색 눈동자와 눈이 마주친다. 나를 본 호박색 눈동자는 그 안의 검은 동공만이 세로로 가늘어진다. 상대는 남자였다. 허리까지 찰랑거리는 녹색 머리카락을 위로 틀어올려 비녀로 고정했으며 연두색 바탕에 붉은 수가 놓인 옷을 입고 있다. 옷은 중국옷 같기도 하고 기모노 같기도 한 느낌을 준다. 미남이다. 미남이긴 한데 모르는 얼굴이었다. 모르지만 낯이 익다.

“...에드나.”

“눈썰미가 좋은 아가씨네요.”

그가 흰색 눈썹을 씰룩거린다. 남자는 나를 향해 정중하게 허리를 굽힌다.

“물뱀 일족의, 키오후라고 합니다.”

- 위대했던 영혼이여.

이어지는 남자의 목소리는 머릿속을 울렸다.

============================ 작품 후기 ============================

yev님! 팬아트 감사합니다. 공지 게시판에 올렸습니다.ㅜㅜ 아, 정말 감사해요. 그런데 하나 더 저는 봤지요. 봤는데 없어져서 엄마 잃은 애처럼 나무는 웁니다.

아마도그건님, pen1107님, 스즈카님 후원 쿠폰 감사 드립니다!!>ㅁ/ 100화에 선물이 많아 기쁩니다!!

옆집바나나 님 @ 사실 150화 전후인건지 딱 어디가 완결이라고는 말하기 힘들답니다.(수줍) 열심히 쓰겠습니다. 가능하면 납득할 수 있는 결론을 내고 싶습니다. 등장인물 한 명도 빠뜨리지 않고 끝까지 제대로 데려가겠습니다.ㅜㅜ 사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용가리 드립은 현웃 했습니다.bb

에이리엘 님 // 에이리엘님!, 이뻐해주셔서 감사합니다.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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