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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나 패러독스-103화 (103/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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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뱀의 대장로 키오후가 방문한 건 공언이 있고 얼마 후였다고 한다. 나와는 접점이 없었으나 셀리안의 탄신일까지 주욱 왕궁에 머물고 있다고 했다. 에드나와는 이미 만났을 것이다. 키오후는 그녀를 반가워하는 것 같았지만 오랜만에 본다는 느낌은 없었다. 에드나도, 무표정하게 대장로를 보았고, 곧 그 옆에 있는 나와 눈이 마주쳤다. 나를 보는 순간에도 에드나의 표정에는 변화가 없다. 다만, 그녀의 하얀 눈썹이 조금 찌푸려진다. 불쾌? 거북함- 아니다, 곤혹스러워 하고 있다.

곤혹스러운 듯 나를 보다가, 빳빳하게 고개를 세워 태연하게 우리 쪽으로 다가왔다.

변함없이 고압적이고 오만한 뱀의 공주답게.

그 모습이 굉장히 반가웠다.

"에드나-"

"오랜만...이네."

"정말, 정말 오랜만이에요."

"여전히 넌 얼빠진 얼굴이나 하고. 그게, 무슨 얼굴이야?"

"보고 싶었거든요. 많이 보고 싶었어요. 인사도 못 했잖아요."

"..."

정말로. 무슨 이유 때문에 그녀가 나를 만나는 걸 곤혹스러워하는지 알 수는 없으나 정말 그랬다. 오랜만에 그녀를 봐 기뻤다. 그녀가 나에게 오랜만이라고 해주어서, 기뻤다. 그녀가 적어도, 외관적으로는 건강해 보여서 다행이었다.

"...대장로!"

"음?"

에드나는 그런 나를 멍하니 보다가 시선을 돌려 날카롭게 키오후를 부른다. 키오후는 홀짝 홍차를 마시다가, 그 부름에 어깨를 움찔하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표정 변화는 없었지만, 에드나를 향하는 시선을 일단 자상해보였다.

"왜 그러느냐. 얘야. 나는 신경 쓰지 말고 하영과 이야기하면 된단다. 오랜만이지 않느냐."

"...그럴 시간 없어요..."

에드나는 안절부절 못하고 있다. 안절부절 못하며 대장로와 눈을 마주 하지만, 그는 느긋하게 찻잔을 들어올렸다.

"~~~!! 하영, 가!"

"어?"

"난 대장로님과 할 이야기가 있어. 너도 할 일이 있잖아. 어서."

에드나가 급작스럽게 나에게 다가와 소리친다. 할 일이라니, 할 일이라고 해봤자 셀리안을 찾는 정도다. 당혹해하며 그녀를 보면 그녀의 눈에 스미는 건 이제 죄책감이다. 죄책감? 어째서?

"에드나, 여기 있나요?"

"아-"

그때 이 구역으로 누군가가 다가오는 소리가 들리고 그 상대가 히아신스라는 건 금방 알 수 있었다. 맑고 당당한 여기사의 목소리.

"히아?!"

"어?! 영도 있나요?"

연이어 만나게 되는 반가운 사람들에 나는 눈을 깜빡였다. 나의 시선이 히아의 목소리가 들렸던 쪽을 향한다. 에드나의 얼굴이 찌푸려진다. 그녀는 작게 탄식했다. 입술을 짓이기듯 물며 고개를 떨어뜨렸다. 나를 향해 재촉하던 움직임을 멈춘 채 황금색 눈동자는 테이블만 바라본다. 무언가 체념한 것처럼.

"아아-!"

그리고 키오후가 벌떡 자리를 박차고 탄성처럼 전율했다.

*

“영!”

“히, 히아!?”

히아신스였다.

히아신스는 새까만 머리카락을 위로 틀어올리고, 그녀에게 제법 잘 어울리는 푸른 빛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화려하진 않지만 귀족 영애들이 평상시에 입는 드레스다. 옷에는 프릴이 달려 있었다. 작긴 하지만, 그녀의 고집이 느껴져 나는 조금 웃었다. 관리를 잘 받는지, 힘든 기사일에 치이지 않고 있기 때문인지 피부도 좋아지고 눈도 맑은 게, 누가 봐도 흠 잡을 데 없는 왕의 약혼자였다. 새삼 흐뭇한 느낌이 들었다.

"너무 예뻐졌어요. 히아."

"그런- 영은 정말 저를 들뜨게 해요! 영도, 예뻐요!"

예쁘다고? 확실히 소귀족 영애가 입을 수 있는 최소한의 격식은 갖췄지만 지나치게 가볍다고 예절 선생에게 한 마디 들었는데.

고개를 갸웃하면 히아신스의 시선이 내 옷에 달린 앙증맞은 나비 모양 리본에 향해 있다.

"하하."

"에?"

"여전하네요. 히아는."

"아니에요. 사실, 살 쪘는걸요. 최근에는 방에만 있어서."

"저도요."

그녀와 마주하고 웃었다. 오랜만에 보는 녹음의 눈동자가 생기 있게 반짝인다. 전장에서도 에메랄드라고 칭해지던, 그녀의 보석 같은 눈동자.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그녀는 이렇게 건강하게 살아 있고- 아직 전생의 히아신스가 죽은 날이 지나지는 않았지만. 곧 결혼을 앞둔 왕비가 동상에서 떨어질 일은 없을 것이다. 그녀는 이제 기사로서 여기저기 돌아다니지도 않으니까.

변함없이, 더 좋아질 날들의 상징처럼 빛나는 히아신스-

"?"

"영?"

"아, 아니에요. 왠지 오랜만에 히아를 보니까."

그녀를 계속 보고 있자니 뭔가 가슴이 꽉 조이는 듯한 애틋한 느낌이 들었다. 그녀가 건강하게 살아 있는 걸 봤기 때문일까. 하지만 그것과는 조금 다른- 기묘하게 그리운 것 같기도 하고 눈물이 날 것 같기도 하고, 동시에-

'어째서?'

고개를 갸웃하고 있으면 히아신스가 수줍게 웃는다.

"사실, 좀 이해해요."

"응?"

"오랜만에 봐서 그런지 모르지만, 왠지 영이 제게 많이 특별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으니까요."

"히아-"

그 말에 새삼 기뻐서 미소지으면, 히아신스도 나를 따라 기쁘게 웃는다. 그 사이 에드나는 빠르게 키오후 쪽으로 다가갔다. 키오후는, 에드나가 다가갔지만 히아신스를 바라보고 있다. 넋을 잃은 것처럼 히아신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한다.

“?”

“대장로.”

“아, 음?”

에드나는 나와 히아신스를 아예 외면하고 키오후를 부른다. 에드나의 목소리에 키오후가 정신을 차린 듯 그녀를 보았다.

"당신이라면 아시겠죠?"

"어?"

"하란 대로 했다고요."

"아- 아아아, 알다마다. 정말, 잘 해주었구나."

대장로는 흐뭇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다. 에드나는 가면처럼 표정을 굳히고 대장로를 향해 손을 내민다. 키오후는 아쉽다는 표정으로 자신의 품을 뒤적였다.

"흐음, 가능하면 넷이서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지만."

"넷이서?"

그 말에 내가 고개를 갸웃하면, 키오후가 내 쪽을 바라보았다.

"키오스의 새 왕비님을 위해, 저희 물뱀 일족의 호수를 조금 가져왔습니다. 오늘 마침 왕비님께서 시간을 내주셨지요. 아아, 저는 물뱀의 대장로 '키오후'라고 합니다. 왕비 마마."

새왕비에게, 물뱀 일족의 장로가 직접 호수를? 그런 행사가 있었던 건가. 전생, 후에 몇 번인가 셀리안이 왕비와 후비를 들였지만 그런 일은 없었다. 고민하는 사이 키오후는 투명한 유리병 속에서도 기묘하게 녹색 빛이 도는 물을 두 개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 놓는다.

"아직 왕비는..."

"아뇨, 아뇨. 앞으로 바쁘실 텐데, 늙은이의 작은 재롱에 어울려주셔서 감사할 뿐입니다."

"늙은이라뇨."

히아가 눈을 깜빡인다. 눈앞에는 누가 봐도 신비로운 느낌의 젊은 청년이 서서 히아신스를 뚫어지게 보고 있었다. 히아신스의 의아함에 키오후의 얼굴이 달아오른다. 소년처럼. 색소가 없는 건, 에드나나 엘킨과 비슷하다. 그리고, 그런 얼굴에 홍조가 깃드는 순간 소년 같은 인상을 준다.

"으음. 이거 또 부끄럽군요. 사실, 아름다운 왕비님을 만나 뵐 생각에 주책없이 꾸며봤답니다."

"에?"

"이종족은 '인간으로서의' 외관에는 별로 신경쓰지 않습니다만. 아무래도 들떴던 모양입니다. 더더욱 주책이라 차마 말하기 그렇지만 어쨌든, 인간이란 외관에 좌우되지 않습니까. 가능하면 멋진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서 힘 좀 써봤습니다. 어떠십니까. 좀 괜찮은가요?”

"아, 아아. 후후. 멋있으세요."

에드나와 마찬가지로 날카로운 느낌이 드는 미남이었지만, 그는 능글거리며 말끝을 흐린다. 능글거렸지만 긴장한 것 같다. 미실랭에 대해 이야기할 때의 에드나와 비슷한 느낌도 든다. 히아신스는 당혹스러워 했지만 농담이라고 생각했는지 미소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전,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에드나?"

에드나가 재빠르게 유리병 하나를 손에 쥐고, 등을 돌린다. 그녀는 내 부름에는 대답하지 않고 나와 히아신스를 보았다. 장미 나무 아래에 있어서일까, 그늘이 진 그녀의 눈이 어둡다.

"그럼."

휙 등을 돌린 그녀는 미련없이 멀어져갔다.

"...사랑에 빠지면, 애가 달라진다니까요. 아주 섭섭합니다."

"에, 에드나씨가요?"

"그렇답니다."

키오후는 흰 눈썹을 씰룩 거리며 히아신스를 향해 미소짓는다.

"사랑이란 역시 참 위대합니다."

*

정원에는 나와 키오후, 히아신스만이 남아 있다. 에드나가 걸렸지만, 히아신스가 옆에 있어 크게 내색할 수는 없었다. 나중에 엘킨에게 부탁해 칼미온에 가봐야겠다고 생각한다. 그녀는 미실랭을 따라 칼미온에서 일하고 있다고 했으니까.

"자, 그럼."

키오후는 손을 높이 들었고 곧 테이블 위에 은색의 그릇이 등장했다. 키오후는 남은 유리병을 열어 녹빛의 물을 대야에 쏟아 부었다.

"자, 준비가 되었습니다."

"...사실, 그렇게 궁금한 건 없는데."

"무욕하신 것도 똑같군요."

"네?"

"후후, 아버님과 말입니다."

"아, 제 아버님을 아시나요?"

"에이나 경은 젊은 시절 모험을 즐겨 저희의 호수에 방문하신 적도 있답니다."

키오후는 상냥하게 이야기하며 물끄러미 히아신스의 눈동자를 본다. 보며 홀린 것처럼 중얼거렸다.

"아름다운 눈입니다."

"아, 감사합니다."

히아신스가 기쁜 듯 대답한다. 녹색의 눈은 그녀를 낳고 죽은 어머니의 색이었다고, 언젠가 들은 적이 있다.

"당신의 눈동자는 저희의 호수빛을 닮았습니다. 그게 마치- 후후, 또 주책이었네요. 그럼, 아름다운 왕비님의 고민이 생각날 때까지, 티타임을 즐겨보죠."

*

이게 뭐지. 알 수 없다.

히아도 눈만 데로록 굴리고 있다.

“드세요, 들어요.”

그는 마음 좋은 할아버지처럼 웃는다. 실제 나이가 그랬겠지만, 행동이 이러니 외관과는 별개로 정말 할아버지 같았다. 우리 앞에는 각종 스위트가 가득 늘어서 있다. 달콤한 쿠키, 홍차, 케이크- 그뿐 아니다. 내 취향인 달지 않은 간식들도. 양갱이라든가, 밤파이라든가, 시나몬쿠키라든가.

어린 손녀들에게 이런 저런 과자를 왕창 사주는 팔불출 할아버지 같다. 그는 히아신스가 달콤한 종류의 과자를 좋아한다는 이야기가 화제에 오르자, 눈을 빛내며 간식들을 소환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걱정 마십시오. 제대로 인간들의 돈과 등가교환 했으니까."

"..."

역시- 각종 스위트가 아무래도 왕성 내 유명한 빵집에서 한 번씩은 봤던 거라고 생각했는데 역시나였다. 왕궁 곳곳의 베이커리에서 갑작스레 진열대의 과자들이 없어지고, 돈만 놓여있다라...

'어떤 의미로는 호러네.'

그가 연이어 손을 들어 딱 소리를 낸다. 가뜩이나 많은 스위트들이 점점 더 늘어난다. 그는 나와 히아신스 앞에 앉아 이리저리 들떠 손을 딱딱 치며 과자를 늘려 갔다.

치즈케이크, 마카롱, 타르트, 에끌레어, 밀푀유, 스콘 등등. 나와 히아가 멍하니 보고 있으면 상의 끝까지 아슬아슬하게 늘어난다. 늘어난 뒤, 몇 개는 쌓이기까지 한다. 마카롱 위로 마카롱이 올라가 탑을 이룬다. 점점 더.

멍하니 있던 우리 중 얼른 정신을 차리고 손을 든 건 나다.

“그, 그만두세요!”

“응? 부족한 거 아니었어요?”

“아니에요!”

나도 히아도 고개를 젓는다. 키오후는 손을 멈추고 기대에 차 바라보았다. 아까 둘이 있을 때는 뭔가 알 수 없는 느낌의 대장로 그 자체였는데 갑자기 이미지가 바뀌었다. 그는 마치 소년 처럼 눈을 빛낸다. 아니 할아버지처럼. 어쨌든 미인의 기대 어린 시선에 나와 히아는 눈빛을 교환했다.

“잘 먹겠습니다.”

“잘 먹을게요.”

“그래, 그래요.”

나는 입안으로 시나몬 쿠키를 집어 넣는다. 사르르 녹는다. 다시 확인하면, 나비 모양이 양각되어 있다.

'이건 버터플라이의 시나몬 쿠키네.'

버터플라이는 광장 쪽에 있는 베이커리다. 히아는 엄청 달콤해 보이는 설탕 덩어리 도너츠를 입에 물었다. 물고 자신도 모르게 부르르 떨었다.

"이건, 생토베리의 신제품이네요!"

"그런가요. 갓 구운 걸로 소환했는데 보람이 있네요."

키오후가 흐뭇하게 미소지었고, 나는 빵집 주인들에게 살짝 묵념했다.

*

한동안 각종 늘어선 음식들을 묵묵히 먹었는데 전부 맛있었다. 홍차조차도 엄청나게. 배가 부를 때까지 먹으면 입을 연 건 히아신스다. 그녀는 머뭇머뭇 키오후를 바라보며 이야기했다.

“사실, 처음 뵈었는데 인사도 제대로 못 드렸네요. 다시 한 번 인사 드려요. 저는 히아신스 에이나, 라고 합니다. 물뱀의 대장로시어.”

“아.”

자리에서 일어나 히아신스가 우아하게 인사한다. 기사의 인사가 아닌, 영애의 인사다. 우아하지만, 본인은 어색한지 살짝 나를 보며 미소지었다. 그녀를 보던 키오후는 조금 멍해 있다. 고민하는 것 같기도 했다.

“대장로?”

“키오후, 키오후라고 불러줬음 합니다만.”

“그런.”

“하영도 그렇게 부르기로 했죠?”

히아신스가 부담스러워했지만, 키오후는 냉큼 나를 보며 묻는다. 이름이 들리는 걸 보면 그는 자신의 이름을 나와 히아에게 허락한 것이다.

'원래 스스럼이 없는 성격인가?'

그는 히아신스가 퍽 마음에 들은 것 같았다. 히아신스를 실제 접하고 그녀를 싫어할 이가 있을거라고는 생각할 수 없지만, 지나친 호의였다.

“자자.”

다시 한 번 기대에 차 그는 히아신스를 재촉했다.

“키...키오후 님...”

“음.”

히아의 부름에 그의 호박색 눈동자가 기묘하게 빛난다. 님이 붙긴 했지만, 이름이 불린 것만도 만족한 듯. 키오후는 정말 기분이 좋아보였다. 계속 텐션이 높았지만 지금은 더 했다.

"한 번 더 부탁하면 이상할까요."

"...어, 아뇨. 그..."

"부디."

"키오후... 님."

"네, 네, 키오후입니다.

그립기도 하고 사랑스럽기도 한 시선으로 그는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 작품 후기 ============================

yev님 팬앝 감사합니다! 류와 하영이 매우 귀엽습니다.ㅜㅜ 이렇게 류는 두 번이나 팬앝을 획득한 남자가 되었습니다! 근데 등장이 없다!(쿠궁)

선추코 언제나 감사합니다. 흡... 사실 퇴고가 안 끝나서 오늘은 살짝 빠지려고 했는데...//ㅁ//;; 어떤 분이 제가 나타날 때라고.ㅜㅜ ㅋㅋ

옆집바나나 님 // 흡...ㅜㅜ 전 한동안 야식 삼매경 및 친척이 보내준 찹쌀떡 삼매경에 빠져서 몸무게가 급 증가했습니다. 이제 다이어터로 변신해야겠습니다. 또르륵... 루나 패러독스가 꼬여가고 있습니다.ㅜㅜ 크흡, 저도 요즈음은 1부터 10까지 풀어야 할 걸 써놓고 체크하면서 글 쓰고 있습니다. 1. 히아신스는 언제 OOO 하나 2. 엘킨은 언제 OOO 하나 3. 셀리안과 하영이의 ... 등등. 왜 나는 이렇게 글을 벌려놓았는가... 다 하영이 때문인 게 확실하죠?+_+ 얘가 애들만 아니고 저도 미치게 하네요.ㅎㅎ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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