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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
꽉 조이고 있던 다리가 풀리자 저절로 막혀 있던 숨이 토해졌다. 피가 통하지 않을 만큼 아프게 죄였던 다리가 풀리면서, 저릿저릿하다. 슬쩍 보면, 조였던 부분이 붉게 부풀어 있다. 역시 꿈이 아니다. 꿈이 아닌, 분명한 현실속에서 히아신스의 가위가 나타났고, 정체불명의 장미줄기가 내 다리를 죄였다. 그리고-
‘이렇게 오래 있는 건 처음인 것 같은데.’
히아신스의 가위는 여전히 사라지지 않고 있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으면, 류가 줄기를 찔렀던 식칼을 칼집에 넣으려다가 멈칫하고 있었다. 그의 금안은 가늠하는 것처럼 식칼의 날을 살피다가 심드렁하게 흥미를 잃고 대수롭지 않게 칼집에 꽂아 넣는다. 꽂아넣고, 나를 보며 씨익 웃었다.
"..."
"..."
무슨 말을 원하는지는 알겠는데 더이상 볼일도 없기에 무시해주기로 했다.
"치사해라~ 그런데, 방금 그건 대체 뭐지? 동물이야, 식물이야?”
그는 그대로 털썩 침대 위로 주저앉으며 나를 향해 고개를 기울였다. 대답없이 입을 다물고 있으면 점점 더 옆으로 옆으로 고개를 기울인다. 내 어깨에 그의 베이지색 머리카락이 살랑살랑 닿을 것 같을 때까지.
'무례한 자식.'
나는 떨떠름하게, 줄기에 대해 생각하며 대답했다.
“...일단, 식물 아니었나? ...너랑 관계 있는 거 아냐?”
했지만 말은 곱게 나가지 않았다.
“관계라고?”
류는 고개를 갸웃하며 눈을 마주해온다. 나는 남자에게서 시선을 돌려 그가 밟았던 침대자리를 노려본다. 그는 줄기를 자르기 위해 흙발로 침대 위에 올라왔었다. 지금은 앉아 있긴 했지만, 방금 전의 행동으로 하얀 침대보는 금방 더러워져버렸다.
새까만 옷을 입었기 때문일까, 새까만 어둠 속에서 그의 금안만이 맑게 빛나고 있던 걸 안다. 마치 이 세상 무엇보다 깨끗한 어떤 것처럼, 그때도 그랬지. 하얀 신관복을 입고, 그 소란스럽고 멍청한 공간에서 저 혼자 낭랑하게 웃으며 어울리지 않는 새하얀 마나를 뿜어댔다. 하지만, 그가 있던, 그 신전은 이 침대보마냥 흙발 투성이가 되었다.
‘나 얘가 어지간히 미운 것 같네.’
밉다.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그는 나를 도와줬다. 내가 선물한 식칼을, 그 우습지도 않은 칼을 소중한 듯 간직하고 있다. 그는, 아마 내게 호의가 있는 거겠지. 그럼에도, 그 날, 그 자리에서 셀리안을 비웃고 상처 입히고 폭소하던 웃음소리가 기억속에서 사라지질 않는다.
"방금 그거, 하루드나 그런 애들이 한 거 아니야?"
"왜?"
"나를 노린다거나."
청문회가 끝난 시점에서 그럴 일은 없다는 걸 안다. 알지만 삐뚜름하게 반발하며 말도 안 되는 트집을 잡아보았다. 반면 류는 기분을 헤친 것 같지도 않았는데, 그게 또 분하다. 그는 고개를 갸웃하더니 손을 살레살레 흔든다.
"설마, 이 왕궁에서 그런 건 불가능하지 않아? 마법왕 너무 무시한다~ 너."
원래 분위기 파악 못하는 놈인 걸 알았지만, 오늘은 한층 심했다. 그는 지나치게 들떠 있었다.
뭐가 그렇게 좋은 거야? 뭐가 그렇게 기쁜 거야? 후회하지 않는 거야?
류가 자신의 행동에 후회한다니 그야말로 개그지만. 아랑곳 않고, 휘파람을 불며 내 바로 옆에 앉아 있는 걸 보니 배알이 뒤틀렸다.
“너 어떻게 들어온 거야? 네 말대로 셀리안이 너를 놓칠리 없잖아?”
그래. 그의 말대로 셀리안이 그를 놓칠리 없다. 류가 두 번이나 이 왕궁에 숨어들 수 있을 만큼 셀리안은 만만한 사람이 아닌 것이다.
“...하루드는 몰라도 나는 아니거든."
내 말에 태연하게 흥얼거리던 콧노래가 멈추고 드디어 그의 미간이 와락 구겨졌다.
"마법왕 따위 별 거야? 너 편 좀 들지 마. 나 짜증나니까.”
"어떻게 들어 온 거냐고."
"진짜, 너."
그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똑바로 바라보며 재차 질문하면, 류는 자세를 풀고 무릎 걸음으로 내게로 다가왔다. 다가온 뒤, 위에서 덮쳐 누르듯 내 위로 올라탄 것은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마침 그의 열받는 얼굴이 깨져서, 잘 되었다고 생각했던 차였다. 설마 이렇게 나올 줄은 몰랐지만.
몰랐지만, 떠올려보면 이런 일이 또 있었다. 수도에 처음 와, 병원에서 이런 적이 있었다. 내 위를 덮쳐 누르며, 양손을 포박했다. 지금 내 양손은 히아신스의 가위를 안고 있고, 나는 누워 있지 않고 앉아 있었지만, 그때와 비슷하다면 비슷한 구도였다.
“죽을래?”
"누구? 너한테?"
류는 히죽이죽 웃으며 내가 다리를 움직이지 못하게 교묘하게 자신의 두 다리로 고정시킨다. 줄기 다음에는 이 망할 자식 다리냐. 왜소하고 작은 남자지만 은근히 잔근육이 있던 걸로 기억하고 있는데, 다리도 그랬다. 바위처럼 딱딱하게 나를 고정시킨다.
발버둥쳐도 손을 풀 수 없었던 예전과 이마저도 비슷했다.
“빌어먹을 자식.”
“아- 네 그 험한 입버릇을 들으니 기분 좋다. 사실, 진이 그러면 안 된다고 했는데, 너무 오래 걸려서... 네가 너무 보고 싶어서, 그냥 들어온 거야. 나 들키면 어떡해?"
"죽어."
류는 내 말에 더더욱 즐거운 표정을 지으며 내 얼굴을 향해 손을 내뻗었다. 그것을 피할까 생각했지만 피하면 히아신스다. 히아신스의 가위야 남에게 보일리 없지만, 어쩐지 꺼려져 가만히 있으면 그가 손을 멈칫했다.
"왜 안 피해?"
"..."
"아니, 안 피하는 건 좋은데... 좋은 건데...? 음?"
그는 금안을 갸름하게 뜨고, 확인하듯 나를 바라보다가 내가 여전히 붙잡고 있는 히아신스의 가위 쪽으로 천천히 시선을 주었다. 우연일 것이다. 다른 사람에게는 안 보이는 것 같으니 착각이 분명하다. 그녀를 껴안은 내 자세는 매우 부자연스러울 테지만, 이것이 보이지 않는다는 건 알고 있다. 몇 번의 추락사건에서 예고처럼 나타났던 히아신스를 나 이외에는 알아채지 못했기 때문이다.
못했지만, 어제 정오부터 그녀는 이상하게 존재감이 있었다. 그 줄기도 어쩐지 히아신스의 가위를 노리는 것 같았고.
"됐어, 헛소리 말고 비켜!"
“...?”
다른 의미로 초조해진다. 착각일 텐데, 우연일 텐데.
“야, 비키라니까.”
“...”
“...?”
우연이라고 생각했던 류의 시선이 분명하게 히아신스의 가위에 닿아 있다는 걸 깨닫는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깜짝 놀라 그 손으로부터 좀더 히아신스의 가위를 피하게 하지만 한계가 있었다. 류 자체가 나를 압박하듯 바로 가까이서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상하네, 정말.’
이상한 일이었다. 여태까지 히아신스의 가위는 내 죄책감이 만든 환상이며, 환상이 아니라면 말그대로 히아신스의 유령으로 내게 추락사건을 알려주는 경보 같은 느낌이었는데.
지금은, 무려 오랜시간 내 옆에 있는데다가 류도 확실히 보고 있는 것 같은-
“...너, 설마 보여?”
“응? 뭐가? 네가 안고 있는 거? 안 보여.”
“안 보인다고?”
“음... 잘 보려고 노력하면- 마나가 뭉쳐 있는 게 보이는 것 같기도 한데. 워낙 미세해서.”
류는 다시 한 번 확인하려는 것처럼 눈을 뜨다가, 곧 질린 듯 포기했다.
“눈 아파. 안 봐도 되지?”
“...”
“그래서- 그게 뭔데?”
그는 손을 거둬, 처음 목표한 대로 내 뺨을 쓰다듬는다. 마치 친구나, 가족, 생각하기도 싫지만 연인처럼 다정한 손으로 뺨을 쓸며 상냥하게 물어왔다. 정말 어울리지 않았다.
“나도 몰라.”
“모른다고? 너랑 연결 되어 있는 것 같은데?”
“나랑?”
금시초문이다. 눈을 둥그렇게 뜨자, 류가 어깨를 으쓱한다.
"그런 것 같다고. 안 보여. 눈 아파서 귀찮고. 이것도 도와줘야 해?"
"...됐어... 잠깐... 그래, 질문 정도에는 대답해줄 수 있지?"
"음. 귀찮긴 한데."
"혹시... 렌이 누군가를 떨어뜨렸니?"
별 의미가 있는 건 아니다. 다만, 내가 알고 있는 히아신스의 가위에 대한 몇 가지 규칙이 무의미해지는 것 같아 확인하는 것 뿐이었다. 더군다나 혹시 모르는 일이니까. 동상이 아니라도, 어딘가에서. 혹시 왕궁에는 접수 되지 않은 무언가가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혹시나 해서 물은 것 뿐이다. 히아신스의 가위가 이렇게 오래도록 나타나는 이유를 알 수가 없었기에.
"뭐? 그런 걸 왜 물어?"
"..."
"저거랑 관계 있는 거야?"
류는 생각도 못한 질문이란 것처럼 눈을 깜빡였고, 내 뺨에서 손을 떼 히아신스 쪽으로 손을 뻗었다. 이번에 나는 막지 않았다. 류가 손을 뻗는 순간 내 품 안의 히아신스가 안개처럼 흩어진다. 류는 잡지 못한 제 손을 바라보며 미간을 찌푸린다.
“짜증...”
“그래서, 떨어뜨렸냐고.”
"설마. 렌은 움직이지도 못해. 마법왕이 애를 완전 걸레로 만들어서, 지금 치료중이야."
떨어뜨리지 않았구나. 안심하는 동시에, 역시 히아신스의 가위에 대한 규칙이 깨졌다는 걸 재차 확인했다.
"마법왕 그 자식 완전 싸이코패스 아니야? 어떻게 애한테 그래?"
"...아니거든."
정말 화난 것 같지도 않은 얼굴로 류는 무심하게 투덜거렸고 나는, 기묘한 부분에서 반발하고 있었다. 류는 어리둥절하다는 얼굴로 되물어온다.
"뭐? 정말 많이 다쳤거든?"
“알아. 내가 말한 건, 리안은 아니라는 거야.”
“...리안이라고.”
그가 엔실렌에게 심한 짓을 한 건 안다. 꿈 속에서 봤던, 아마 현실이었을 그 감옥 속에서 그는 엔실렌에게 잔인했으니까. 하지만, 그건 그가 추락사건의 범인이고, 자꾸 셀리안에게 강요했기 때문이다. 셀리안이 렌에게 한 처사가 심하긴 했지만, 렌을 비롯 류들이 한 짓은 더 끔찍했다.
‘나 계속 화가 나 있구나.’
셀리안은 극복했는데 이상하게 나는 계속 앙금처럼 그것이 남아 있다. 그 감정은 잊고 있다가도 불쑥 불쑥 안쪽에서 치솟아올랐다. 류는 눈을 찌푸리며 부루퉁한 표정을 짓는다.
“맞거든. 걔 싸이코패스야.”
"그건 너지. 너만 그래. 리안은 달라..."
“또 리안이라고...잠깐. 흐음.”
“...뭐야?”
방금 전까지 불만스럽게 나를 보던 금안이 갑작스레 휘어진다. 원래 종잡을 수 없는 놈이라고 생각했지만 감정변화가 급작스럽다. 그는 어느새 다시 들뜬 듯 어깨를 들썩이며 좀더 내게로 가까이 다가왔다.
*
"읏!"
류가 가까이 다가와 그대로 나를 밀어 제 품에 가두었다. 히아신스의 가위가 없어졌기 때문일까 나는 자세가 무너져 그대로 푹, 침대로 쓰러진다. 이제 그는 나를 품에 가둔 채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류의 양팔에 갇혀 황당한 표정으로 그를 노려본다.
“저리, 비켜.”
“나만?"
"뭐?"
여전히 말하기 힘든 상대다. 나는 갑자기 들떠 내게 얼굴을 들이대는 류를 노려본다. 내 위를 완전히 덮어버린 그가 제 몸만 끌어올려 바로 코앞에서 눈을 깜빡이고 있다.
이상하게도 그늘 한 점 없는, 성스럽게까지 느껴지는 금안이다. 기만- 그의 존재처럼 기만스러운 눈동자.
“나만, 싸이코패스인거야?”
"너... 내가 싸이코패스가 무슨 뜻인지 이야기 안 해줬던가?"
셀리안이 싸이코패스니 떠든 걸 보면 제대로 들은 것 같은데.
"응? 그런가? '나'같은 사람이 싸이코패스라고 전에 말했던 건 기억해."
"..."
“그래, 셀리안 크레이누는 아니란 말이지. 나만...후후, 나만이란 말이지? 나같은 사람이 둘 있는 건 말도 안 되지.”
그래, 계속 잊고 있었지만 얘랑 정상적인 대화가 가능할리 없어. 최근 귀족 포지션, 신관 포지션의 류랑 너무 많이 만나 이렇게 멍청이인 걸 잊고 있었다.
코앞에서 그의 작은 눈이 똑바로 나를 본다. 그의 눈은 언제나 표정 없이 건조하긴 했지만 오늘은 기묘하게 달뜬 느낌이 들었다.
그는 나를 위아래로 훑어본다.
“아 기분 좋다. 이상해, 이렇게 봐도, 저렇게 봐도 너는 참 시시한데.”
“너 진짜, 가라. 좀.”
머리가 지끈거린다. 밉살스럽고 증오스럽고 짜증스럽고, 하지만 그보다 피곤해지기 시작했다. 어떻게 들어왔는지는 모르겠지만 자고 싶어졌다. 피곤하다. 아니지, 엘킨이 준 보석이 어디있지. 나는 슬금슬금 내 품안에 있는 엘킨이 준 보석을 어루만진다. 숨을 불어넣는 거였지만, 조금 쉽게 개조되어 한동안 쥐고 있으면 신호가 가는 걸로 바뀌었다.
아무리 피곤해도 얘는 넘기고 자야지.
"아, 가지마."
"정말?"
"그래, 그래...무슨... 짓이야?"
보석을 쥐고 있으면, 류가 슬금슬금 내 허벅지를 더듬기 시작했다.
뭐?
나는 보석을 쥔 채, 다른 한 손을 뻗어 그의 손을 꼬집는다. 내 허벅지를 더듬는 괘씸한 손이다.
"아야. 왜 꼬집어?"
"뭐하는데?"
꼬집고 있는데도 고집스럽게 내 허벅지를 더듬는 류의 손을 더 세게 꼬집으면 그가 불만스럽게 말한다.
"너를 보다 보니, 부어있는 걸 알았어. 아플 것 같아서."
나무 줄기에 의해 이리저리 감겼던 다리는 붉게 부어올랐었다. 인식하니 아프긴 했고 류가 그 부분만 더듬는 걸 깨닫는다. 깨닫긴 했지만 이 남자에 대한 짜증스러움 때문에 다 상관없어졌다. 더 어이없는 건 이 멍청이가 정말 아픈가 만져보기만 하는 거라는 점이다. 딱히 치료를 하고 있지도 않다. 치유마법은 한톨도 쓰지 않고 그저 슥슥 만지기만 할 뿐이다. 때로는 부드럽게, 때로는 세게.
'내가 왜 이런 성희롱을 당하고 있어야 하는 건데?'
보석을 좀더 꽉 쥐며 류를 노려보았다. 설사, 그의 말마따나 아픈지 확인하려는 거라 해도 치료가 아니라면 성희롱일 뿐이다. 노려보며 좀더 세게 그의 손을 꼬집었다.
"죽인다-"
"그래, 좋은 생각이군."
참지못해 으르렁 거리면, 내 목소리에 겹쳐져 낮은 목소리가 들렸다.
*
"그래, 좋은 생각이군."
다시 상황을 정리해보자- 나는 지금 류 밑에 깔려 있고, 셀리안은 그런 류 바로 뒤에 서 있다. 그의 붉은 눈동자가 서늘하게 류를 보고 있었고, 류는 생글생글 웃으며 내게 소곤거린다.
"어휴, 일찍도 끼어드네."
"끼어든다고?"
"응, 온 거는 좀더 전이거든."
류는 냉큼 고개를 들어 침대 앞에 나타난 셀리안을 바라보았다. 바라보고, 마치 오랜만에 만난 친구를 향하는 것처럼 손을 흔들었다.
"안녕, 셀리안 크레이누, 아니지, 에피룬 크레이누라고 불러줄까?"
"제정신이 아닌 남자라고는 생각했지만-죽고 싶나 보군."
셀리안이 무표정하게 손을 들면, 류는 내 허벅지를 더듬던 손을 셀리안 쪽으로 척 내밀었다.
“더이상 오면, 하영을-”
“하영에게 손 대기 전에 죽여주지.”
셀리안의 붉은 눈동자가 오싹하게 가늘어진다. 가늘어진 눈동자가 죽일 것처럼 류를 보고 있다. 내 허벅지에 닿아 있는 류의 손을, 아니 내 위에 올라와 있는 류 자체를. 이상하게 또 메스꺼워진다.
셀리안이야 지난 번 일도 있으니 당연히 류를 죽이고 싶을 것이다.
그건 이해한다. 나도 이 남자가 미워 죽겠으니까.
문제는, 그가 왜 나도 노려보고 있는가다. 셀리안은 나 역시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었다. 그래서 메스꺼운 건가? 죽음을 직감하고-
'그것도 이상하네. 리안이 왜 날 죽여?'
그런데 잘 보면 죽일 듯이와는 좀 어울리지 않는다. 저 표정이 뭐지? 하는 기분으로 헤매고 있으면 셀리안은 나와 눈을 마주하다가 짜증스럽다는 듯이 제 머리카락을 손으로 밀어올린다. 밀어올리는 순간 금발이 헝크러진다. 헝크러진 금발을 재차 넘기며, 무언가 말할 것 처럼 나와 시선을 마주하다가 가볍게 한숨을 쉰다.
“이 남자를, 죽여도 그대는 상관없겠지?”
“...에?”
“왜... 망설이는 거지?”
“아, 아니, 망설인다기보다는.”
죽어라고 연호하긴 했지만 류가 내 앞에서 죽는 것도 좀 그렇긴 한데... 저런 이야기를 묻는 셀리안도 이해가 가지 않는다. 망설인 걸로 또 죽일듯이 쳐다보는 것도 무섭고. 대체 왜 그러는 건데.
“쳇, 음흉하게- 왔으면 바로 나올 것이지. 이제야 나와놓고 영문 모를 소리만."
"영문 모를 건 네 놈의 회화실력이겠지. 용들이 말은 안 가르쳐줬나보지?"
셀리안이 손을 든다. 그의 손을 황금의 마나가 감싼다.
"좋아. 말은 고문실에서 짐이 직접 가르쳐주도록 하지. 짜증스럽긴 하지만, 늦은 엘킨 녀석이 잘못이다. 짐이 직접 생포하도록 하마.”
한 손에는 금빛 마나가 실처럼 꼬여가고, 머리를 헝크러뜨리던 다른 손 사이로 셀리안의 붉은 눈이 날카롭게 류를 응시했다. 그 모습을 본 류의 금안이 가늘어진다.
“생포? 무리야."
"그야, 해봐야 알지."
"그것도 좋긴 한데...나 분명 말했다. 더 이상 오면, 하영을-”
“그 전에 죽인다고 했을 텐데?”
셀리안이 류에게 손을 뻗는다. 류는, 그대로 내 허벅지 위로 손을 밀어올렸다. 거짓말처럼 셀리안이 멈칫한다. 류가 빙글빙글 미소 짓는다.
“역시 렌은 대단해. 여자 하나를 사이에 두고 다른 남자와 마주하고 있을 때는 일단 여자 위에 올라탄 사람이 이기는 거라고 했거든.”
“...”
“그리고, 치마로 손을 넣는 사람이 확인사살 한다고도 했지.”
류가 눈을 반짝인다. 나는 허벅지 위까지 올라온 손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머리가 지끈거린다.
“렌이, 뭐라고 했는지는 됐고...뭔지도 모르면서 따라하는 건 좀 관둬라.”
“음? 왜 모른다고 생각해? 어이, 셀리안 크레이누. 다가오면 나 좀더 위로 손 넣는다?”
멍청한 협박이다. 정말 멍청한 협박. 그런데, 문제는 셀리안이 정말로 이 멍청한 협박에 순간적으로 굳었다는 것이었다.
============================ 작품 후기 ============================
완결 안 가까워요. 이제 본편 100인걸요.ㅜㅜ; 또륵, 길기도 하다. 이 글...
이 글의 전신이 된, 2014년 5월에 썼던 헌터 패러디를 다시 읽었습니다. 오글거린다, 시공간이 사라진다. ㅋㅋㅋ 그때 읽어주신 분들께 새삼 정말 감사드립니다~
Lucyte님이 또 류 팬앝 줌. 갱신★ 감사! 이 소설 남주 류인가요?o_o;;;
해랑나랑 님 // 죄송해요.ㅜㅜ 정신이 없어서 리코멘을 못 했네요. 용서해주세용!재미있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남주가 확정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느껴지시지 않나요. 남주의 기운이... 남주남주 외치고 있잖아요.+_+ 하영이는 제 소설 캐릭터가 좀 그런 것 같습니다. 애들이 우유부단하다고 할까, 다 햄릿이네용.ㅜㅜ 크흡. 가능하면 성실연재 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잘 부탁드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