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루나 패러독스-106화 (106/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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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가까운 과거 어느날의 기억이다. 류는 광장의 테이블 위로 쓰러진 내 머리카락을 다정하게 쓸어넘긴다.

자신이 무언가 해놓고 가증스럽기 그지없다.

더 가증스러운 건, 그는 다정함과는 거리가 먼 존재라는 것이다. 다정한 척, 좋아하는 척, 아끼는 척. 그리고 그 척을 할 정도로 나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다.

가증스럽고 교활하고 그조차도 의미가 없는 그런 남자.

“너는 나를 인식하고 있는데. 항상 인식했는데. 한순간이라도 네 안에서 나를 사라지게 하는게 생각보다 참-”

류라는 남자는 나를 좋아하고 있다. 그것은 다른 사람들이 품는 호의의 일부도 안 되는 감정이지만, 남자에게 있어서는 그가 가질 수 있는 감정의 최대치라고, 나는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깨닫는다.

“하지만, 마법왕에게 말하게 할 수도 없고, 네가 나를 계속 쫓게 할 수도 없지. 아, 아쉽다. 그리고- 이 뱀공주도 문제니.”

그 말이 갖는 달콤함도 달콤함이지만, 머릿속을 헤집는 새하얀 마나는 정결하고 순수해, 그의 감정이 갖는 감정의 밀도를 알려준다.

그는 그 마나를 내 안에 꼭꼭 숨겨둔다.

“잠시만 나를 잊는 거야. 그리고, 곧 있을 축제의 날, 나를 기억해. 나를 기억하고 셀리안 크레이누의 절망을 축복하자.”

그가 가볍게 내 머리에 입을 맞추는 게 느껴진다. 미적지근한 숨결은 셀리안의 마나를 피해 나를 옭아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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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는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셀리안을 바라보며 눈을 반짝인다. 셀리안은 굳어 있다. 나는  빌어먹을 남자의 손에 정신을 집중하고 있다.

“...”

“...”

“...”

집중하다가 퍼뜩 정신이 든다. 이게 대체 무슨 분위기야. 이대로라면 100년이든 1000년이든- 오바겠지만 이 상태가 유지될 것 같은 예감 아닌 예감이 스친다. 문제는 이 바보 같은 상황에서 이겼다는 표정을 하는 빌어먹을 자식이랑 긴장된 얼굴을 하고 있는 멍청이가 이 멍청한 상황을 깨닫지 않는 점이다. 기가 막힌다.

“리안! 난, 상관없으니까 뭐든 해요!”

“!"

내 목소리에 셀리안의 어깨가 움찔했다. 정신을 차린 것 같다. 솔직히 왜 굳었는지도 모르겠다. 셀리안 크레이누는 그렇게 순진한 남자도 아니고 멍청이 같지만 진짜 멍청이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천천히, 셀리안의 굳어 있던 눈동자가 나를 향했다. 나를 보는, 그의 눈동자는...

“왜... 그래요?”

기가 막히고 화가 났었는데 그 눈을 마주하는 순간 나도 모르게 기죽은 목소리가 나와 버렸다.

“상관없다고?”

셀리안은 으르렁거린다. 아까 그 눈이다. 나를 죽일 듯이 노려보는, 아니 죽일 듯이라는 표현은 어울리지 않는다.

“그대는, 참... 쉽군.”

“...”

이제 알았다. 저건 마치 바람난 아내를 닦달하는 의부증 남편 같은 얼굴이었다. 나는 손으로 이마를 매만졌다. 뭔지 모르겠네, 셀리안이 대체 왜 저러는 건지 모르겠다.

설마 진짜 멍청이인가, 그것도 영문 모를 멍청이.

"..."

설마...

‘설마 날 좋아하나?’

아니, 그럴리야 없지. 쟤는 나인 걸, 나는 쟤고. 쟤가 평생 사랑 했던 건 엘킨 뿐이었다. 게다가 쟤가 날 좋아하게 되면 히아신스는? 아니 내가 왜 이런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해야 하지. 셀리안이 날 좋아해서 히아신스랑 치정...

"흐하하..."

"왜 웃어?"

"그대는 가끔 영문 모르게 웃는군."

너 때문이잖아. 크게는 니들 때문이고.

여전히 무시무시한 눈빛으로 날 보는 셀리안으로부터 시선을 돌렸다. 일단 생각을 정리하자.

‘가장 유력한 건 그거네. 엘킨을 두고 왜 다른 남자에게 쉽게 구냐고.’

하지만 그것도 이상하다. 셀리안이 아무리 엘킨을 아껴도, 그가 셀리안의 오른팔이라 해도 저 폐하가 그렇게 오지랖이 넓은 애였는지는 의문이다. 내가 편안한 결론이긴 한데 뭔가 이치가 맞지 않아 나는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헝크러뜨렸다. 머리를...

“...아.”

머리를 헝크러뜨리다보니 깨달았다. 손이 자유롭다. 히아신스의 가위가 사라져 손은 자유로워졌다. 류에 의해 쉽게 쓰러질 수도 있지만, 손도 쓸 수 있게 된 것이다. 류도 무슨 배짱인지 아까부터 내 손은 그대로 내버려두고 있었다.

나는 두 손을 들었다.

“아야!”

쾅쾅 하고, 류의 머리를 북 치듯이 두들겼다.

“너 좋은 말 할 때 내려와라..."

나는 내가 지켜야지. 나는 류의 머리카락을 한 움큼 잡는다. 그의 옅은 갈색 머리카락은 마치 갈대처럼 버석거리면서도 묘하게 부드러웠다. 흔남 주제에 머리결이 참 좋네.

나는 그의 머리카락을 인질처럼 잡고 셀리안을 향해 말했다.

"그리고, 셀리안, 지금 이게 그런 걸 따질 상황인 건가요? 얘를 잡든지 해야...히익.”

순간 류가 그의 손이 멈춰 있던 허벅지를 스윽 쓴 것이다.

나는 오싹한 느낌에 나도 모르게 신음했다. 지금까지는 손바닥이었는데 갑작스레 손가락으로 그 자리를 빙글 돌렸다. 돌리더니 주욱 긋기까지 한다. 일부러 치마 안에서 치마 밑으로 내려왔다가 다시 올라간다. 피아노를 치는 듯한 가벼운, 동시에 진득하게 눌러붙는 듯한 손길이었다.

“너 엄청 귀여운 소리 냈어.”

휙 노려보면 그의 금안이 반짝 거린다.

“역시 렌이 해주는 말은 최고...으악!!”

다시 손을 들어 류의 머리를 연속으로 퍽퍽 때렸다. 북을 치듯이, 정말 퍽퍽 소리가 나게 때렸는데 놈의 작은 머리통이 흔들렸다. 틈을 두지 않고 머리카락을 붙잡아 흔든다.

"야야, 그만해. 머리 빠져."

"대머리나 되어버려. 이 변태야."

이 미친놈의 손도 손이지만 내가 낸 소리 때문에 조금 민망한 느낌이 든다. 그걸 숨기기 위해 더 세게 손을 놀렸다.

*

손이 얼얼할 때까지 구타를 한 후 헉헉 댄다. 놈은 여전히 내 위에 있다. 이 미친놈은 내려오지 않는 것 뿐 아니라 꿋꿋하게 치마에서 손을 빼지도 않았다. 다른 한 손으로는 제 머리를 스윽 스윽 문지른다.

'아픈 거겠지.'

끈질긴 자식이지만, 내 손에는 류의 머리카락이 뽑혀 한 움큼 잡혀 있다. 그것만은 조금 위로가 되었다.

“완전 아파, 무지 아프잖아!”

"알면 내려오지."

"자,잠깐."

나는 한숨을 쉬고 다시 손을 들었다. 류가 움찔한다. 2차전이었다.

“...정말 사이가 좋군.”

손이 멈칫했다. 그 모습을 빤히 보던 셀리안이 핀잔을 주듯 중얼거린 것이다.

쟨 진짜 왜 저러니.

“응, 우리 사이 좋아.”

얘도...

“...그래, 사이 좋은 두 사람을 찢어놓기는 마음 아프지만... 시간이다.”

"!"

셀리안은 참는 듯한 목소리로 경고하며 손을 딱딱 쳤다.

"짐의 기사가 막 완성 한 것 같으니까."

순간, 은색 쇠사슬이 침대 밑에서부터 끌어올려져 류의 어깨를 잡아챘다. 내 다리에 있던 손도 강제로 빠져 올라갔다.

류는 조금 놀라 눈을 끔뻑거렸다.

"이건-"

"네 놈의 전용 방이지."

"방이라고?"

"그래-"

류는 눈을 끔뻑거리다가 한숨을 쉬었다. 아쉬운 듯 나를 보던 눈빛에 체념과 기대가 깃들었다.

"굉장하군, 마법왕. 나도... 굉장하지만."

"?"

기대라고?

“쳇. 뭐 됐나. 진은 말렸지만...”

떼어내지는 순간 그가 사슬에 묶인 채 억지로 몸을 기울인다.

"애초에 이러려고 심어놓은 마나였으니까."

기울여 내 귓가에 무언가 속삭였다. 나는 알아들을 수 없다. 속삭임은 한순간이고 그는 나와 눈을 마주치며 금안을 빛냈다. 오래도록 나를 그 눈에 담고 싶은 것처럼, 열렬하지만 아무것도 아닌 듯 식은 눈동자였다.

“근성 있군.”

셀리안이 비웃듯 이야기하는 순간, 그는 완전히 위로 들려졌다. 류가 나에게서 완전히 떨어지자 사슬은 둥근 구를 만든다. 둥그런 감옥에 갇힌 채 류는 공중으로 붕 떠오른 것이다. 엄밀히 말해 류를 가둔 둥근 감옥이 공중에 둥둥 떠올라 있다.

“네 놈이 대단한 마법사라는 건 알겠다, 짐보다는 못 하지만.”

“아이고야. 고맙네.”

류는 둥근 감옥의 기둥을 매만졌다. 쇠사슬로 엮인 은색의 구는 촘촘한 듯 엉성한 듯 엮어져 있었지만, 마치 그 자체가 이 세계의 다른 공간을 떼어놓은 것처럼 이질적인 느낌을 주었다.

“굉장하네. 이런 걸 언제 만들었지? 이거, 그거지? 인외생물을 가두는 감옥. 그걸 응용...한 건가?”

“똑똑하군. 용도 빠져나오지 못한 사슬이다. 인간에게 적용되게 하는 건 꽤 즐거운 작업이었지. 이 정도로 훌륭하게 완성 시킨 건 짐의 기사지만.”

“엘킨 다이브가 마법사였던가?”

“마법사는 아니지만, 재능은 있지. 식만 전해두면 누구보다 완벽히 완수 할 수 있을 정도로 말이야. 지각은 했지만, 정말 훌륭하군.”

셀리안이 씨익 웃는다. 붉은 눈빛은 오만하게 빛난다.

“비겁하게.”

비겁하다고는 이야기했지만 류는 별로 위기감을 느끼는 것 같지는 않다. 위기감을 느끼는 류라니 상상이 안 되긴 하지만, 저 여유가 뭔지 모르겠다.

나야 마법을 전혀 못하지만 전생의 지식 덕에 문외한은 아니었다. 전생의 셀리안은 인외 생물체를 가두는 사슬을 인간에게 대입한다는 건 생각도 못 했다. 생각을 못 했다기보다는, 그 자체가 인외생물에게는 관심이 없어 생각하지 않았었다.

인외생물체 대상의 마법은 인외생물과 인간이 가지는 근본적인 격차를 메우기 위해 집요한 면이 있었다. 집요하게 얽어매고 집요하게 구속하고, 제대로 된 계약이라면 그것까지는 필요없지만 억지스럽다면 상대의, 심하면 서로의 영혼에 부담을 주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 걸 인간에게 적용하다니. 그 대상이 셀리안과 류,그리고 엘킨이기 때문에 가능한 거겠지만 상상초월이었다.

다른, 류나 셀리안 정도의 마법사 그게 아니라면 용 정도의 도움이 없는한 저 감옥은 부술 수 없다.

============================ 작품 후기 ============================

스즈카님, 아마도그건 님, 해로롱님 후원 쿠폰 감사 드립니다.>ㅁ<

그리고 스즈카님에게 첫 서평 받음...ㅜㅜ 정말 감사합니다. 첫서평입니다.ㅜㅜ 너무 감사해요. 다만, 성실한 연재를 칭찬해주셨는데 지각했다o-<-< 어제 저녁에 과자 먹으며 침대에서 뒹굴거리다가 그대로 기절했다는 건 안 비밀...ㅜ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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