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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
셀리안은 느릿하게 류가 갇힌 은색의 구를 바라보았다. 그가 손을 탁 치자, 구가 빙글 돈다. 느릿하게 빙글 돌았다. 류는 빙글 도는 구 바깥을 놀이기구를 탄 어린 아이처럼 멍하니 바라보았다.
“어때? 나올 수 있을 것 같나.”
“아니, 무리인데.”
무리라고 이야기했지만, 류의 표정은 심각해보이지는 않는다.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지만, 저 여유는 뭘까. 사실 저 남자에 대해서는 판단하기 힘들다. 그의 마나는 잘은 몰라도 셀리안을 웃돈다고 하기에 뭔가 방법이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셀리안이 그 정도도 파악하지 못할리 없다. 그에게는 절대적인 자신감이 있었다.
"네놈 스스로는 뭘 해도 소용없을 걸."
"안다니까."
셀리안은 느릿하게 손을 흔들었다. 그는 나른해보였다. 사냥을 마친 고양이처럼 나른하게 미소지으며, 나를 보았다.
"..."
보고 외면했다.
"흠흠..."
"?"
그의 볼이 조금 붉다. 볼을 붉힌 채 책망하는 시선으로 나를 본다. 내 얼굴을. 얼굴만. 시선이 어색하긴 하지만, 그 시선에 담긴 책망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아니 대체 왜 저러는 건데. 나는 맹하니 상황을 보다가 기분이 나빠져버렸다.
뭔가 되게 엉덩이 가벼운 여자를 보는 것 같은 시선이다. 아니 29살 될 때까지 주구장창 썸만 타고 제대로 연애조차 못 해본 순결한 나에게... 라기보다는 루저네. 하여튼 나에게 저게 무슨 시선이야.
"...다리는 또 왜 그렇지?"
그런 기분 나쁜 시선으로 나를 보던 그가 미간을 찌푸린다. 류가 치유하지 않고 만지기만 한 다리에는 줄기에 묶인 붉은 자국이 간간히 새겨져 있다.
셀리안이 미간을 찌푸리며 손뼉을 쳤다. 순간 류의 구가 빙글 돌아, 나로부터 등을 지게 된다. 류가 다시 내쪽으로 시선을 둘라치면 다시 빙글 돈다.
"야, 어지러워!"
나도 어지럽다.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어지러운 것 같다. 지나치게 생생한 어지러움이긴 하지만.
“흥.”
류의 아우성에 코웃음으로 대응한 셀리안이 나로부터 등을 돌려 몇 번 손뼉을 탁탁 친다.
순간 나를 바람이 감쌌다. 신전에서 나를 들어올렸던 미적지근하고 다정한 바람이었다. 그 바람은 어루만지듯 내 다리를 치유하고, 치마를 정돈시킨다. 치마- 그제야 류의 손이 갑자기 빠져나간 치마가 뒤집어져버린 채란 걸 깨닫는다. 속옷이 보이거나 하지는 않지만, 속치마까지 미묘하게 뒤집혀져 허벅지까지 올라와 있었다. 정신이 없어 눈치채지 못했다.
"칠칠치 못하군."
치마 정돈을 마치자 류의 구가 돌기를 멈추고, 드디어 류는 나를 볼 수 있게 되었다.
셀리안은 마지막으로 어디서 소환했는지 붉은 소파를 가져와 그 자리에 앉았다. 류가 갇힌 구 바로 앞이고 내 침대 바로 옆이다. 그냥 침대에 앉아도 되고, 치마야 지가 내려주면 되는데. 신사인 척 하면서도 항상 남에게 손 대길 스스럼 없던 남자라 묘하다.
"...아, 치유. 그렇구나. 치유를 해야 하는군."
류는 류대로 치료가 된 내 다리를 보며 그제야 깨달은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끄덕이고, 셀리안을 보았다.
"하지만, 마법왕 너- 치유할 때 다른 사람의 기운을 쓰는군."
"네 놈이 낸 상처니 당연하지."
"아니, 내가 낸 상처는 아닌데. 그게 아니고..."
류가 나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상처라고는 하지만 가볍게 까진 거라 그는 그렇게 많은 기를 소비하지는 않은 것 같다.
"?"
다만, 상처가 낫는 순간 나는 약간 어지러움을 느꼈다. 류의 구가 돌아가는 걸 보고 있었기 때문일까. 좀 기운이 없어진 것 같기도 하고, 정말 이상한 일이다. 기운을 빼앗긴 건 류일 텐데. 고개를 갸웃하고 있으면, 셀리안이 손가락을 딱 쳤다. 딱 치는 순간 창문이 닫히고 금빛 막이 창밖을 감쌌다.
“에이, 진은 안 와. 몰래 나왔고... 렌은... 알지만, 못 움직이고. 뭘 그리 방비하나.”
류의 시선이 다시 셀리안에게로 돌아갔다.
“하루드가 올지도 모르지.”
“그 멍청이들은 별로 경계하지도 않잖아.”
하루드는 세계의 어둠인데, 이 둘 사이에서는 꽤 다운그레이드 된 것 같다.
“사실 짐의 힘으로 직접 눌러주고 싶었지만, 요즈음 궁에는 손님이 제법 많아서 말이다, 소란을 일으킬 수야 없지."
"재미없어라."
"네 놈과 달리 짊어질 게 많아서 말이다. 짐은 네 놈의 마나를 얕잡아보진 않아. 마나를...?”
셀리안이 눈썹을 찌푸리며 류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가 미심쩍은 듯 고개를 갸웃하는 순간 문이 열리고, 엘킨이 들어왔다.
*
“늦었군, 엘킨.”
셀리안이 류로부터 고개를 돌려 씨익 웃으며 엘킨을 본다. 엘킨은 가볍게 목례를 하고 얼른 나를 보았다. 나는 일어나고 싶었지만 어째 기운이 없어져 그대로 침대에 기대 있는 터였다.
"하영, 죄송합니다. 늦었습니다."
"그래, 그대는 너무 늦었어. 여자를 기다리게 하다니 최악이군."
"정말 죄송합니다."
그는 핀잔을 주는 셀리안의 말에 죄 지은 사람처럼 당혹해 한다. 지가 일을 시키고 저러다니, 몹쓸 주인이다. 나는 뻔뻔스레 능글거리는 셀리안을 노려보고 다시 엘킨을 바라보았다. 그는 미안한 것처럼 나를 일으킨다. 여전히 유리 다루듯 조심스럽게 나를 지지하는, 상냥한 손길이었다.
그는 나를 일으키며 그가 준 보석이 담긴 품 쪽으로 시선을 주었다. 새파란 눈동자가 일렁이는 수면처럼 흔들렸다.
"당신께서 계속 불렀는데."
"와주셨잖아요. 그리고 다 폐하 때문이잖아요."
"..."
“아이참, 전 괜찮아요! 정말 아무렇지도...음.”
그의 걱정스러운 표정이 풀리질 않아 괜찮다고 연호하려 했지만, 문득 머뭇거렸다. 경험에 의한 건데 그는 내가 괜찮다고 이야기하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하지만 괜찮지 않다고 하기도 좀 그렇다. 실제 이제는 괜찮아졌는데 아프다고 징징 거리고 무섭다고 훌쩍이는 것도 어리광 같은데... 괜찮다고 연호하면 또 내 몸을 못 챙긴다고 더 걱정스러워 할까. 눈치만 보고 있으면 엘킨의 눈썹이 휘어진다.
“큽-”
“엘킨?”
“하하, 당신은...”
엘킨은 내 머리를 쓰다듬는다. 부드러운 손길이었다.
“정말 귀여운 분입니다.”
“윽, 닭살.”
류가 투덜거렸지만, 엘킨은 무시해버린다. 나는 엘킨의 다정한 손길에 조금 느른해진다. 느른해졌지만 순간 류가 가려운 것처럼 제 머리를 만지작거리는 걸 알게 되었다. 엘킨이 쓰다듬었던 내 이마 부분이다. 놀리는 걸까.
내가 그를 보고 있다는 걸 눈치 챈 엘킨이 아쉬운 듯 손을 떼고 공중에 시선을 준다. 구에 갇힌 채 류는 제 머리를 긁적이며 구의 감옥을 매만지고 있었다.
“폐하.”
“아아, 드디어 잡았군.”
셀리안이 구를 휙 끌어당긴다. 구는 내 침대로부터 좀더 멀어진다. 상대를 배려하지 않는 거친 움직임이다. 다만, 류는 요령 좋게 자세를 유지하며 흔들거리는 구에서도 넘어지거나 하지는 않았다.
“?”
다만, 나는 다시 어지러워졌다. 왜 어지러운지 모르겠다. 내 고질병과는 다르다. 마치 덜컹거리는 차에 탄 듯한...
'그건 류인데.'
류는 구의 감옥으로부터 손을 떼고 한숨을 쉬었다.
“우와, 분해.”
“그래, 다행이군. 짐도 네놈 때문에 퍽 속이 뒤틀렸으니까.”
셀리안이 악당처럼 씨익 웃는다. 씨익 웃다가 눈을 갸름하게 뜨고 다시 류를 살폈다. 엘킨이 들어오면서 흩어졌던 그의 시선이 다시금 구 안의 남자를 관찰했다.
"...네 놈... 마나가?"
그는 류를 살피다가 확 얼굴을 찌푸렸다. 찌푸리고 나와 류를 번갈아 보고 무시무시한 얼굴로 다시 류를 본다.
“...네 놈...”
“우와, 눈치 챈 거야? 진짜 대단하네. 마법왕. 나는, 내가 몇 대 정도 얻어 맞은 후에야 깨달을 줄 알았는데.”
류가 생글 웃는다. 천사처럼 생글 웃으며 입을 열었다.
“인외생물을 가두는 감옥을 응용한- 전혀 새로운 마법이라니. 진짜 놀랐어. 나도, 인외생물과 관련된 주술에서 마침 새로운 마법을 창안했거든. 이런 걸 뭐라고 하지? 마음이 통했다고 해야 하나.”
마음이 통했다고 말하자마자 류는 역겹다는 제스처를 취했다. 셀리안과 마음이 통했다는 게 싫어 죽겠다는 듯이 몸을 부르르 떤다.
인외생물과 관련 된 주술을 이용했다고?
"이거 지난 번 만났을 때는 생각 안 했던 거지? 게다가 식을 완성해 엘킨 다이브에게 직접 건네주려면..."
"..."
"대충 그때부터 고안했어도..."
그는 날짜를 세는 것처럼 손가락을 편다.
"하아, 난 그 전부터 고민해서 오늘 완성한 건데. 분하다-"
류는 꾸민 것처럼 어깨를 축 늘어뜨린다. 늘어뜨리다가 휙 고개를 들어 아무렇지도 않은 것처럼 으쓱했다.
"됐어, 에피룬 크레이누 폐하가 나보다 일단은, 잘난 건 인정하기로 했으니까..."
류는 천천히 나에게 시선을 주었다. 셀리안에게 주었던 시선과 달리 다정하기 그지없다. 다정한 척 하는, 시선.
"나는 말이야.”
그의 시선은 실상 텅 빈 것처럼 아무 감정도 담고 있지 않다. 담고 있지 않았지만, 나를 보는 시선은 어째 들떠 있었다. 그것만은 척이 아니다.
“너랑 있는 게 참 좋았어. 그냥 너와 있는 게 좋아. 이상해,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래. 그리고 네가 마법왕과 있는 게 싫어.”
들떠 있었지만, 약간 심드렁해보이기도 한 게 류답다. 열렬한 고백이었지만 그의 감정은 굉장히 작다. 작고 작은 감정에 남자는 매달리지만 그것은 미미해서, 나는 그 고백에도 아무런 통증도 느끼지 않았다.
“...하지만, 그 뿐이지. 네가 죽는 건 싫지만... 나는 네가 피 흘리고 상처 입고, 괴로워하고 강간 당해도 아무 생각이 없거든. 너를 보지 못해도, 그냥 뱃속이 꾸물거릴 뿐이야. 감정이 더 커지지 않아.”
그는 웃었다. 셀리안의 눈은 무시무시하다. 무시무시한 표정으로 류를 보고 있고, 엘킨은 그런 왕의 표정을 살핀 뒤 천천히 류를 관찰한다. 관찰하고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했다.
"...저 남자, 마나가."
"..."
셀리안은 입을 꾹 다물고 류를 노려본다. 그는 아랑곳 안 하고 나만을 보았다.
“나는- 좀더 너에게 공감하고 싶어.”
“...”
“하지만 무리란 것도 알아. 나도 알아. 그건 무리라는 걸. 솔직히 나는- 렌이나 진이 마법왕에게 갖는 감정도, 내 아버지의 그 복잡미묘한.”
거기까지 이야기하고 그는 킬킬 웃었다.
“감정도 모르겠고. 어머니에 대해서도 잘 모르겠어. 아, 우리 엄마는 마법왕 네 엄마와 달리 진짜 엄마야. 나를 낳고 죽이고 나를 다시 낳은- 명실공히 나를 제대로 사랑하고 증오해준 내 엄마지.”
그는 장난스럽게 셀리안을 바라보았다. 무슨 이야기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정말 싫어죽겠다는 것처럼 셀리안을 보다가 다시 나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러니 너를 좋아하는 감정은 진짜야. 그건 알겠어. 정말 좋아해. 신기하지.”
“...”
“너는- 같은데.”
너는- 셀리안 크레이누와 같은 존재인데- 라고. 그런 이야기라고 깨닫는다. 대상이 생략된 그 말을 알아들은 것은 아마 이 공간에서 나뿐. 알고 있는 나뿐이다.
그가 어떻게 알았을까. 인간은 영혼을 보지 못한다. 그게 얼마나 대단한 마법사라도.
‘렌이나 진이 알려준 걸까.’
류는 피곤한 것처럼 입을 다물었다. 이야기하는 것도 질린 것 같이. 질렸지만 나와 눈을 마주하고 빙긋 웃는다.
“결론은, 너와, 셀리안 크레이누보다 더 가까운 존재가 되고 싶어. 네가 피 흘리고 상처 입고 괴로워하고 강간 당하면 안타까워하는 척 하고 싶어. 안타까워하는 척이라도 하기 위해 너와 가장 가까워져서, 꼭 널 구할 수 있도록."
그는 몸을 세우고 감옥의 기둥을 두 손으로 잡는다.
"아무리 나라도 내가 피 흘리고, 상처 입고, 강간 당하는 건 거북할 테니까."
그 감옥은, 아마도 지나친 타격을 받으면 상대에게 고통을 돌려주는 걸지도 모른다. 류가 미간을 찌푸리고 손을 뗀다. 그의 손바닥이 새빨갛게 부풀어오른다.
그리고, 동시에 내 손바닥이 새빨갛게 부풀어올랐다.
셀리안이 당황한 듯 내게로 달려온다. 이 방에 들어와 처음으로 그는 나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다가와 내 손을 들어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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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시멈exe님 리퀘
: 오싹한느낌에 신음했다가 아니라 기겁했다로 바꿔주세요!!!
"히익"이 신음이라기엔좀..또 하영이 그렇게 느낀 것같진 않고..
아님 신음소리를 다른것으로 바꿔야 좀 자연스럽지않을까 조심조심 생각해봄니다
(결국 류녀석이 맘에 안듦)
...그래서 신음소리를 신음답게 바꿔보면 다음과 같이 됩니다. 월요일이네요. 하아-ㅡ_ㅡ//
[나는 그의 머리카락을 인질처럼 잡고 셀리안을 향해 말했다.
"그리고, 셀리안, 지금 이게 그런 걸 따질 상황인 건가요? 얘를 잡든지 해야...아,아앙♥"
순간 류가 그의 손이 멈춰 있던 허벅지를 스윽 쓴 것이다. ]
자, 저런 신음을 내고 후에 어떻게 될지는 여러분 상상속. ㅇ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