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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나 패러독스-108화 (108/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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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

"아무리 나라도 내가 피 흘리고, 상처 입고, 강간 당하는 건 거북할 테니까."

글쎄-

순간 든 생각은 그거다. 과연 눈앞의 남자가 자신이 피 흘리고 상처 입고, 강간 당한다고 거북해할까. 거북해하긴 하겠지. 하지만 거북해하는 것 뿐이다. 성가셔하는 것뿐이다. 그렇게 큰 감정의 원동력은 되지 못할 것이라고.

그럼에도 거북함이라도 느껴 공감하려고 한다는 건-

'나를 위해?'

조금 우습다고 생각하며 나는 류의 금안을 마주했다. 그가 나에게 호의를 갖고 있는 건 안다. 그 호의가 그로서는 꽤 무거운 감정이라는 것도. 나 역시 류에 대해, 호의가 아주 없는 건 아니다. 아무래도 정도 들고, 상대가 날 좋아하고 그게 내 트라우마를 자극하지 않는 이상 나쁘게는 느껴지지 않으니까. 다만, 솔직히 말하자면 그 장단에 어울려주는 게 성가시게 느껴졌다.

나는 그저, 그가 셀리안을 상처 입힐까봐 전전긍긍할 뿐이다. 지금도.

'왜 그렇게 셀리안을 미워해?'

라고 물어봤을 때 그가 뭐라고 답했더라.

"..."

지금, 류는 내 시선을 피하지 않고 또렷하게 나를 쳐다보았다. 식어 있는, 차가운 눈동자로 제정신이 아닌 주술을 쓰고, 마치 죽을 만큼 나를 사랑하는 것처럼 이야기한다.

"너-"

얼얼하게 타오르는 손을 견디며, 입을 연다. 여는 순간 셀리안이 내 손을 붙잡았다. 시선은 흩어져 다시 마주하는 건 나를 보는 적안이었다. 얼마만의 접촉인가- 라고 문득 생각했다.

"조금만, 참아라."

"..."

셀리안이 괴로운 듯 신음했다. 자기가 아픈 건 처럼. 물론 나도 어마어마하게 아프다. 생살이 타들어가는 감각이 역겹고, 통증은 비현실적일 정도로 생생하다.

공유되는 감각은 분명 류와 함께 하고 있는데 정작 아픈 사람은 미소하고, 아프지 않은 사람이 괴로운 얼굴을 했다.

셀리안이 내 손의 치유를 끝냈다. 옆에 놓여 있던 화분의 꽃이 시들어버린다. 시든 꽃잎이 누렇게 말라비틀어져 툭툭 떨어지고 있었다.

"휘유~"

류가 휘파람을 불며 웃었다. 시선을 주면 그의 손도 깨끗하게 치유되어 있다.

셀리안은 내 손을 붙잡은 채 고개를 숙인다. 손은 치유되고, 나는 아프지 않은데 그는 여전히 자신이 다친 것 같은 얼굴을 했다. 아니 자신이 나를 상처 입힌 것 같은.

“...리...”

그의 이름을 부르려 했다. 하지만, 그 순간 셀리안은 정신을 차린 것처럼 고개를 들었다. 고개를 들고 내 손을 놓는다. 내 손을 놓고 나에게서 멀어졌다. 시선을 피하는 그대신 시선을 맞추는 건 엘킨이었다.

언제 온 걸까. 침대 바로 앞에서 물끄러미 그 모습을 보던 엘킨의 시선은 줄곧 나를 보고 있었다는 걸 깨닫는다. 내가 그를 깨닫자, 그는 걱정스러운 얼굴을 한다. 상냥한 얼굴이다.

그리고 곧 셀리안을 향했다. 엘킨의 눈은 그저 투명한 물처럼 잔잔하다. 흐르지 않는 투명한 물, 그 눈동자를 셀리안은 외면하고 류가 갇힌 구로 다가갔다.

“하영에게 건 게, 인외생물에 대한 주술...이라고 했나."

"응~ 너랑 같지."

"...계약..."

"..."

셀리안은 나에게 닿았던 자신의 손을 바라보다가 문득 읊조리고 류를 보았다.

"인외생물과 인간이 맺는 계약을... 하영에게 적용했군."

셀리안의 말에 엘킨이 의아한 표정을 짓는다. 류의 눈이 조금 가늘어진다. 셀리안의 말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하지만, 엘킨과 셀리안이 만든, 그를 가둔 구를 보면 그렇게 이치에 안 맞는 것도 아니다.

이치는 이미 틀어진 것이다.

"어떤 흐름인가 했더니, 계약과 비슷하군. 계약을 적용했지만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는 불가능해. 그런데도 억지로 영혼과 영혼을 연결했어. 연결했지만, 계약은 실패...인가. 결국 부작용으로 감각이 공유되었을 뿐이군."

"실패한 거 아니거든! 완전 성공이야. 성공!"

류는 셀리안의 말에 잽싸게 반발했다. 반발하고 나를 보았다.

"오해하면 안돼. 말했잖아. 애초에 그러려고 넣었던 마나라고..."

"..."

"나는 말야. 하영에게 나를 남기고 싶었어. 마법왕만 그런 건 너무 치사하잖아. 물론 그때는 아직 마법에 대한 구상이 끝나지 않았을 무렵이었긴 했지만... 이번엔, 이미 공유되는 걸 알고 한 거라구! 성공이야."

류는 자랑스럽게 가슴을 편다. 멍한 내 얼굴을 어떻게 생각했는지, 설득을 시작하는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는 초조한 것처럼 내막을 이야기했다.

류는 황당하게도 나를 자신의 곁으로 데려오고 싶었다고 한다. 하루드로 시선을 끌고, 진이 계획을 짜고- 그런 흐름이었다고 하지만, 시간이 걸렸다. 결국 질려버린 그를, 진이 달래기 위해 엔실렌에게로 보냈다. 몸이 안 나은 엔실렌은 엔실렌 대로, 하루드의 연구실에서 인외생물 전용 감옥과 쇠사슬에 대해 연구하고 있었는데-

"되게 쪼잔한 일을 하네, 라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영감이 탁 스치는 거야. 이거구나, 하고. 그래서 인외생물과의 계약을 인간과 인간 사이에 적용해보았거든-"

하루드의 연구실에는 실험체 따위 넘쳐나니까, 라고 무감하게 남자는 이야기했다. 정말 아무것도 아닌 것 처럼.

"미쳤군."

"에이~ 인외생물 족쇄를 나에게 쓸 생각을 한 분이 겸손은-"

"겸손이라고?"

셀리안은 류의 대답에 기묘한 표정을 지었다. 류는 상식에 어긋나 있다.  사슬이 대상에서 분리된 마법이라면, 류의 마법은 연결되어 있다. 인간을 실험체로 삼을 수 밖에 없다. 명백하게 다른 두 사례가 그에게는 같았다. 류에게는 같게 느껴지는 게 분명했다. 사람을 상처 입히는 것이나, 입히지 않는 것이나 그저 파격적인 구상이란 것에 집중하고 있었다.

"어쨌든 이게 꽤 어려웠는데. 일단! 내가 생각해낸 게 마나가 많은 쪽이 적은 쪽에게 마나를 흘려보내는 거야. 마나가 섞여들면 영혼이 비슷해지고, 그럼 계약이 성사되는 것과 비슷한 효과를 낼거라고 생각했거든. 너랑 계약하는 것도 좋겠다고 생각했어."

"..."

"그런데 막상 까보니까... 양방의 감각만 공유되더라고. 영혼이 비틀려 연결되어버린 거라고, 렌이 그러더라.. 그 순간, 생각했어. 아, 이거다, 하고."

류는 황홀한 듯, 발견의 순간을 떠올리는 것 같았다. 셀리안의 말에 미심쩍은 표정을 짓던 엘킨이 류의 말이 계속 될수록 경악한다. 잔잔했던 눈동자에 파문이 인다. 이상하게도 나는 그 표정에 안심했다.

경악하며 나에게 좀더 다가온 엘킨은 나를 폭 껴안는다.

"하영-"

인간의 영혼과 영혼을 연결한다는 건 불가능하다. 인간이 인간을 조종하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고위마법에 낙인이나 각인이 생길 정도다. 영혼이란 인간은 확인할 수 없는 불가침 영역. 인외생물조차도 영혼에 상처를 입히는 건 엄청난 고위생물이어야 가능하다. 일반적인 인외생물은 아무리 하찮은 인간이라도, 육체를 죽일 수는 있어도 영혼을 닳게 하는 건 불가능했다.

그걸 인간이 억지로 연결했다. 원래 인간에게 쓰이는 마법도 아닌 방법으로. 오싹한 일이다. 오싹한 일이지만.

'설마 놔주진 않겠지.'

터무니없는 걱정이지만, 그런 걱정을 하는 내가 있다. 나를 걱정한 셀리안이 류를 놔주게 된다면, 붙잡지 않는다면. 또 그는, 셀리안 크레이누를 상처입히려 할까.

전혀 관계없는 것이지만, 문득 청문회가 있던 날을 떠올렸다. 신전에서 셀리안이 지었던 표정만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그가, 나를 잡고 떨었다. 나를 붙잡고 떨던 셀리안, 에피룬임을 스스로 공언한 셀리안, 엘킨을 사랑하지 않는 셀리안- 셀리안을 위로하지 않은 엘킨-

'...그런 게 아닐 거야.'

사고를 멈춘다. 그는 최종적으로는 괜찮았고, 엘킨도 괜찮다. 괜찮으니까.

나는 류를 보았다. 류, 류가 끼어들수록 무언가 어긋나는 느낌이 든다. 모든 건 류 때문이다. 류 때문.

정말?

"...그럼, 계약을 끊으면 되겠군."

"끊어? 누가? 니가? 내가?"

"어느 쪽이든."

" 너- 진짜 싫다. 그리고 거기 하프엘프! 대충 껴안아줘, 일정 시간이 지나면 금방 전이된단 말이야. 앞으로는 더 빨라질 거고...”

류는 닭살이 돋는 것처럼 두 팔을 벅벅 문질렀다. 문지르면 엘킨의 눈이 서늘하게 그를 노려보았다.

“점점...빨라진다고? 그런 짓을 하면- 하영 영혼에 무리가 갑니다.”

“엘킨, 멈춰라. 저 놈을 상처 입히면 하영이 다친다.”

셀리안이 천천히 이야기하고, 엘킨은 참는 것처럼 나를 꼭꼭 껴안으며 류를 노려보았다.

“생각보다 더 미친 놈이군. 이래서 네가 얻는 게 뭐지? 이건... 제약밖에 없어. 네 놈은 억지로 영혼을 연결 하느라 마나를 전부 사용하고 있군. 지금의 네놈은 짐의 손가락으로도 죽일 수 있어.”

“응, 하지만 그러면 하영도 죽지.”

“...그래. 그 감각의 연결조차 실상 부작용이고 말이야. 부작용을 성공이라고 떠들어대다니, 미쳤군. 명백히 미쳤지만 인식하지 못하겠지.”

“어디가 미쳤다는 건지 모르겠네. 이렇게 황홀한데- 한 번도 느껴본 적이 없는 감각이 나에게- 전해지고 있어.”

그는 황홀하게 미소 지었다. 류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강한 감정의 표현이었다. 그리고-

'셀리안?'

셀리안은 묘한 표정으로 류를 보고 있었다.

“그리고~ 현실적인 이야기로 변명하자면, 덕분에 마법왕님은 나를 죽일 수도, 고문할 수도 없게 되었잖아? 오히려 지켜줄 판이지.”

류가 힐쭉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의 금안이 가늘어진다. 그냥 이야기한 것 뿐이다. 그런 부수적인 이점은 그에게 중요하지 않을 것이다.

“나에게 특별한 건 남에게도 특별할 수 있다고, 진이 이야기했지. 사실 그건, 짜증나는 일이지만, 네 그런 얼굴을 보니 통쾌할 지경이야. 마법왕. 뭘 그렇게 참고만 있는지 나는 이해가 안 가지만- 훨씬 유쾌해졌어.”

“계약을 짐이 못 끊을 거라 생각하나?”

“힘으로 밀어붙이게? 으아, 괴물. 나도, 하영도 죽이게?”

류는 가늘어진 눈을 그대로 감았다. 감고, 입꼬리를 올렸다. 셀리안과 엘킨 두 사람에게서 짙은 살기가 새어나온다. 하지만, 갈곳을 잃은 살기는 그저 오싹하게 공간을 채울 뿐이다. 류는 천천히 그것을 음미하고 느릿하게 눈을 떴다.

“그래서, 제안이 있는데. 제안이라기보다는 타협안이라고 해야 할까."

"허튼소리."

"허튼소리가 아냐. 일단, 내가 얌전히 있을게. 물론, 하영 옆에서, 라는 전제하지만."

"허튼소리였군."

"어이어이 끝까지 들어. 이건 너네들한테도 좋은 안이 될 수 있어.”

방금 전까지 황홀했던 표정을 무감하게 굳히며, 그는 구 안에 주저앉았다. 주저 앉아 고개를 끄덕끄덕이며 냉정한 표정으로 셀리안을 바라보았다.

“아까, 하영의 다리에 상처 있었잖아. 그건 나 아니다?”

“...”

세류 키스톤인 척 할 때와 비슷한, 교섭을 하는 표정이었다. 그 표정에 무시무시하게 류를 노려보던 셀리안이 멈칫한다. 그는 빠르게 감정을 갈무리하고 류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

냉정하고 현명한 왕, 그는 그런 사람이었다. 언제나, 언제든.

“네놈이 아니라고?”

엘킨은 나를 품안에서 떼어 다리를 바라보았다. 그의 푸른 눈이 다리에 남아 있는 치유 마나의 흔적을 감지한 걸 알았다.

“응, 이런- 말이야.”

류가 손가락을 들어올려 꾸물꾸물 움직였다.

“식물인지 동물인지 알 수 없는 주술이 그녀를 습격했어. 몰랐지?”

셀리안의 눈썹이 꿈틀한다.

“그것도 그럴 거야. 마법왕의 눈을 피하기 위해, 마나를 최대한 죽이고 일부러 이 왕궁에 있는 걸, 사용한 것 같았으니까.”

“...”

“아마, 너를, 아니 어쩌면 네 마법의 근원, 에피룬 크레이누를 엄청 잘 아는 자의 소행일지도 모르지.”

셀리안의 표정이 심각해진다. 그는 팔짱을 끼고, 류의 말을 가늠한다. 엘킨이 입을 열었다.

“범인은 인외생물...이겠군요.”

“음. 그럴 가능성이 크지. 마법왕 생일 때문에 엄청 왔지? 보니까 막 유니콘들도 있더라.”

류가 빙글빙글 웃는다.

“무슨 목적인지 모르지만, 하영을 공격하고 있었어. 내가 없었다면 어떻게 되었을지 모른다?”

“...”

“니들은 너무 바쁘잖아. 하영이 위험하게-”

류가 몸을 감옥의 기둥으로 기울인다. 저 기둥에 오래 닿아 있으면 살이 타고 만다는 걸 이제 안다. 나도, 류는 그 이전부터. 셀리안이 눈썹을 꿈틀 하더니 손을 탁 쳤다. 그 순간 감옥의 기둥이 사라졌다. 류를 감싸고 있던 감옥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엘킨이 한숨을 쉬며 나를 껴안은 채 손을 움직였다. 멀찍이 떨어져 있던 간이 의자가 쑤욱 밀려오고, 셀리안의 바람이 류를 가볍게 의자에 앉힌다.

“오오, 다정들도 해라.”

“쯧. 그래서.”

“그러니까, 내가 옆에서 지켜주지. 마법왕도 이야기했듯 난 엄청 세니까.”

류가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셀리안은, 한쪽 눈을 슬쩍 접으며 깔보는 것처럼 류를 바라보았다.

“지금의 너는 그야말로 쓸모 없는 것 같지만.”

맞는 이야기다. 그는 모든 마나를 나와의, 이 터무니없는 마법에 쓰고 있었다. 류는 어깨를 으쓱한다.

“아니, 설마 내가 마법밖에 없다고 생각해?”

그는 슬쩍 엘킨에게 시선을 주었다. 엘킨이 가볍게 한숨을 쉰다.

“그는 제법, 체술이나 검술에도 수준급 실력을 갖추고 있습니다.”

“그래, 게다가- 마나는 거의 소진되었지만, 마법에 대한 지식이나 소량의 마나로도 대단한 마법 비슷한 걸 할 수 있는 잔수들도 잔뜩 갖추고 있지. 완전 유능하다고. 그동안 나는 하영을 지키고 마법왕은 안전하게 이 주술을 푸는 법을 생각하든 말든 맘대로 하는 거야."

완벽하지, 라고 말도 안 되는 계획을 이야기하며 류는 의자에 나른하게 기대 앉았다. 아마도... 붉은 쇼파에 앉아 있던 셀리안을 따라하는 것 같다.

“상대가 누구라도, 니들이 올 때까지 하영을 보호할 수 있다고.”

"보호한다고?"

"굳이 말하면, 돕고 싶은 거지."

"도와?"

"응, 돕고 싶어서, 나는- 이런 마법을 쓴 거니까."

"..."

“필요없어!”

나는 외쳤다. 무슨 이유인지 류를 그저 물끄러미 보던 셀리안의 눈이 나를 향했다. 엘킨은 나를 안고 있던 몸을 떼어 나를 마주한다. 나는 강하게 엘킨을 보았다.

“필요없어요. 그런 거. 방에서 안 나가도 되고, 여기다가 결계를 쳐도 되요. 저 바보 감옥에 쳐넣으세요.”

“...감옥은 꽤 불편해, 춥기도 하고.”

“바닥도 딱딱합니다.”

셀리안과 엘킨이 나를 불안하게 바라본다. 얘네들은 진짜 너무 과보호다.

“상관없어요.”

“상관 있어.”

“상관 있습니다.”

박력, 데쟈뷰다. 언젠가 이렇게 두 사람에게 설득당한 적이 있던 것 같다. 나는 그 박력에 움찔한다.

셀리안이 탁탁 바닥을 치면서 눈을 감는다. 생각하는 것 같은 얼굴이다.

'설마, 아니겠지. 아니겠지?'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후에 셀리안은 눈을 떴다.

“승낙하지.”

“그런!!”

“...저는 반대입니다.”

내가 반발하려는 순간, 엘킨의 낮은 목소리가 울렸다.

“엘킨, 그 외에는 방법이 없지 않나. 그대도 방금 그에게 능력이 있다고... 저 남자의 행보를 걱정하는 거라면, 이 왕궁은 전부 저 남자의 감옥이 될 수 있어. 게다가, 그는..."

셀리안은 흘끔 류를 바라보았다. 또 묘한 눈, 그는 묘한 눈으로 류를 바라보고 있었다.

"저 남자는, 감옥이 아닌 어딘가에 가둬두면 됩니다. 편하게 하는 건 분한 일입니다만, 하영을 생각하면 감수해야겠지요. 그리고-"

엘킨은 나로부터 조금 떨어져 자신의 주군을 마주했다. 그는 바로 서서 셀리안을 향해 격식을 갖춰 이야기했다.

“제가 하영의 호위로 붙겠습니다.”

“에, 엘킨?”

내 부름에 엘킨이 나를 보았다. 푸른 눈이 흔들림 없이 나를 보고 있었다.

*

“부디, 허락해주십시오."

엘킨 다이브는 허락을 구한다. 셀리안에게-

아니, 나에게.

"사실... 항상 그러고 싶었습니다. 이번에도, 지난 번에도, 그 전에도.”

엘킨의 푸른 눈은 망설임이 없다. 나를 보는 눈은 단호하고, 절박하다.

“하영을, 지키고 싶습니다.”

“저를?”

“당신만을.”

“나만을?”

나는 움찔했다. 그것은 명실공히 내 개인 호위가 되겠다는 선언이었다. 칼미온 기사단장을 그만 두고 윤하영만을 지키겠다고 그는 공언한다.

나는 류를 보았다. 역시 저 남자 때문이다. 저 남자 때문에 이런 사태가 온 거다. 저 남자 때문에-

하지만, 류를 왕성까지 끌고 온 게 누구던가. 전생에는 표면에 등장하지 않았던 하루드의 수장, 두 마리 용의 주인- 그를 불러들여 모든 어긋남을 만든 사람은.  사실, 이런 결말을 바랐던, 전생의 셀리안 크레이누를 품은 사람은.

'이런 위험한 왕궁 따위 벗어나, 모든 걸 버리고 어쩌면- 나만을- 이라고.'

말도 안 되는 일이다. 말도 안 되는 생각이다.

그, 말도 안 되는 일이 일어났다.

엘킨은 어느새 나만을 보고 있었다. 지금만이 아니다. 언제든, 언제라도.

셀리안조차 보지 않게 되었다. 뒤틀려 간다. 사실- 깨닫고 있다. 그저 외면했을 뿐이다. 그에 대해. 그는 그날, 에피룬 크레이누가 셀리안이라고 밝혀졌던 그날 셀리안을 찾아가지 않았다. 찾아야 갔겠지. 일로. 그의 옆에서 그를 부하로서 지지했다. 지지했지만 굳이 굳이 나처럼 신전에 찾아가진 않았다. 그를 위로하지 않는다. 함께 있어주지 않는다.

여전히 셀리안 크레이누는 그에게 유일무이한 주군이지만, 그의 위에 누군가 있다. 있어서는 안 되는데 있었다.

“하영-”

그건 몹시 황홀한 일이었다. 먼 옛날, 이 시공간에는 없는 기억- 셀리안 크레이누가 말했던 꿈이 이루어진 거니까.

[칼미온의 수장은 그만 둬도 좋겠지. 그래, 원한다면 근신을 명하마. 내 곁에서 내 호위기사가 되어도 되겠지. 꼭 변경일 필요가 있을까. 엘킨-, 내 말을 듣고 있느냐, 엘킨- 꼭 변경으로 가야겠느냐.]

그때, 엘킨은 거절했다. 청명하고 고귀한 기사는 엇나가지 않는다. 않았지만.

나는 엘킨 다이브의 푸른 눈을 다시 한 번 바라본다. 여전히 청명하고 깨끗한 눈이 윤하영을 보고 있었다.

“허락해, 주십시오.”

그 속에 깃든 어둠을- 나는 간신히 인정했다.

============================ 작품 후기 ============================

yourin님, mikal님 후원 쿠폰 감사 드립니다.ㅜㅜ/ 이 인사를 너무 하고 싶었는데 글이 늦었네요.

헌터헌터 패러디가 전신인 건 주인공 설정을 가져와서/ㅁ/ 그외에는 많이 달라요. 히힛, 사실 주인공 성격도 스토리도 완전 달라서...;; 아마 보시면... 이건 무슨 어덜트한 된장녀의 전생 극복기인가 하실듯. ㅋㅋ

스즈카 님 // 류가 주술을 발동시킨 시점이 셀리안의 사슬에 끌려가면서 하영의 귓가에 무언가 속삭일 때였거든요.ㅜㅜ 제 설명이 부족했네요. 감사합니다! ㅎㅎ 스즈카님께 리코멘 요청 받은 게 처음인 것 같아요/ㅁ/ 기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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