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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나 패러독스-111화 (111/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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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와의 기묘한 공동생활이 시작되고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셀리안의 생일이 일주일 앞으로 다가오는 걸 나는 멍하니 실감했다.

나는 류를 핑계로, 나를 노리는 누군가를 핑계로 외출을 자제했고, 그것은 나를 고립 시켜갔다. 그것은 의도치 않은 우연이었지만, 어느 정도는 내가 의도한 것이기도 했다. 윤하영은, 아무것도 하지 않기로 했다. 셀리안은 상처 입지 않고, 엘킨을 사랑하지도 않으며, 엘킨은 윤하영을 사랑하고 윤하영도 엘킨에게 사랑을 고백했다.

나는, 나를 찾아오는 엘킨과 셀리안에게서 그 감각에 대한 확신을 얻어갔다. 그걸로 충분했고, 모든 건 수월하다고 결론을 내렸다.

나는,  더 이상 이 현실에 개입하고 싶지 않았다.

왕궁에서, 계속 시간이 흐르는 걸 안다. 이곳에 온지도 1년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가장 많은 일이 일어나고 바뀌어가는 공간에서, 그 감각을 바로 가까이서 느꼈다. 느끼는 주제에 마치 현실에서는 떨어져 나온 것 같은 기묘한 감각 속에서 생활을 하곤 했던 것이다.

하지만, 또다른, 의외의 손님이 가끔 나를 흔들었다.

‘이것도, 찾아온다고 해야 할까.’

아이러니하게도, 현실을 일깨우는 건 바쁜 왕궁의 흐름도, 시간이 간다는 감각도 아니었다.

'환상인데.'

그녀는 이제 내게 다가오지 않았다. 멀찍이 한 발자국 떨어진 공간에서 히아신스 에이나가 나를 보고 있다. 검은 머리카락 사이로 으깨진 머리가 보인다. 공허한 눈동자는 무언가 호소하듯 나를 보고 있다.

그리고 키오후 못지 않게 마음에 걸리는 그것을, 나는 외면하고 있었다.

히아신스가, 죽었던 그 날이 가까워지고 있는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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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녀들이 티테이블을 꾸몄다. 과자접시와 홍차 두 잔이 테이블에 놓인다. 혹시 류가 끼어들어 쿠키를 집어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치긴 했지만, 여태까지 그의 행동을 봐서는 그런 걱정은 없었다. 저 남자에 대해 완벽한 확신은 어렵지만, 적어도 그는 셀리안이나 엘킨외의 사람에 대해서는 심드렁했고, 별달리 돌발행동을 하지 않았다.

나와 히아신스는 과자를 먹으며, 소소한 잡담을 나눴다. 근황이라든가, 탄신일에 입을 드레스, 다가오는 결혼식 등에 대해 이야기했다. 평상시처럼.

“그래서, 좀 안 어울려도 이번에는 프릴이 많이 달린 드레스로 입어보게요.”

“좋은 생각 같은데요. 히아에게라면 분명 어울릴 거예요.”

“또 그런 말을... 영도 같이 입기예요.”

“음, 그건-”

"저와 달리 엄청 잘 어울릴 거예요."

녹색의 생기있는 눈동자와, 혈색 좋은 분홍색 뺨, 여전한 히아신스의 모습이 나를 안심하게 한다.

언제나 즐거운 한편으로 껄끄러웠던 히아신스와의 만남이 온전히 즐겁다.

류에 대한 걱정도 흐릿해져갔다. 그녀가 그를 눈치 채지 못하고, 이제는 내게서 시선을 뗀 류는 제법 조용한 태도로 뒹굴거리고 있었다.

“후후, 영과 이런 이야기를 하니 역시 좋네요.”

한바탕 드레스의 디자인에 대한 권유를 끝낸 그녀가 살짝 기지개를 켜고 웃었다. 최근에는 처음부터 예의를 다시 배워서 이렇게 기지개를 켜는 여유도 없어졌다고, 그런 그녀와 마주한 나도 기지개를 켜며 대답한다.

“저도 히아와 이야기하니 너무 좋아요.”

정말 좋았다. 그녀를 줄곧 만나고 싶다고 생각했고 만난 그녀는 건강해보인다. 행복해보인다. 그녀가 나를 찾아와줘서 다행이었다.

- 그렇다면 내가 만나러 가도 좋았을 텐데.

하지만, 히아신스는 그녀의 이야기로 미루어 짐작했을 때 매우 바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오늘도 간신히 시간을 낸 것이라고 했다.

“드물게 솔직하네요! 엘킨 대장에게 고백한 것도 그렇고, 저도 모르는 사이 솔직해진 것 같아요.”

“아!"

"치사하게 말도 안 해주고."

히아신스가 빵빵하게 볼을 부풀린다. 당황하고 있으면, 그녀가 손으로 입을 가리고 키득거린다. 낭랑한 그녀의 웃음소리가 방안을 울렸다.

“하하, 농담이에요. 두 사람이 잘 되어서 다행이야.”

히아신스는 편안한 얼굴로 미소지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그녀의 녹색 눈동자는 안정되어 있었다. 그 전에 만난 그녀는 이래저래 바빠보였지만, 오늘 날 찾아온 것도 그렇고 이제는 제법 여유로워진 것 같다.

‘역시, 이게 제일 좋은 거야. 강박처럼 그녀를 찾아가는 건 경솔한 행동이었을 거야. 오히려 그녀를 걱정하게 했겠지.’

고작 환상 같은 가위, 그 불길한 가위 때문에, 키오후가 걸린다는 이상한 감에 의지해 그녀를 찾아가는 건 너무 경솔했을 것이다.

류와 공명이 된 그날 이후, 히아신스의 가위가 나타나는 빈도가 늘었다. 그리고, 그걸 류도 보고 있었다.

히아신스의 가위는 내 바로 앞에 서 있고는 했다. 전과 달리 나에게 접촉하지 않고 무언가 바라는 것처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류가 그 존재를 눈치 채고, 손을 뻗으면 사라지고는 했다. 그 때문에 류는 처음에는 화를 냈고, 짜증스러워했지만, 지금은 아무래도 좋다는 느낌이었다. 어느샌가 손도 뻗지 않았고 그저 물끄러미 내가 보는 방향을 보고는 했다.

그와 내가 공유되는 시간이 빨라질수록, 아마도 그 역시 점점 가위의 윤곽이 보이는 것 같았다. 다만, 아직까지는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는 금빛 마나덩어리에 새까만 무언가가 덕지덕지 끼어 있다고 이야기했다. 그 새까만 무언가가 위험한 거냐고 묻자 그는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저었다.

위험한 게 아니다. 사고를 예언하는 것도, 지금은 아니다. 다만 불안을 가중시킬 뿐인, 어쩌면, 윤하영의 환상일지도 모르는 것이다.

그런 것 때문에 바쁜 히아신스를 찾아가다니.

게다가 내가 나서면 더 이상한 일이 벌어질지도 모른다. 범인을 찾는답시고 돌아다닐 때도 그랬다.  오히려 내가 사고를 당하고, 그녀를 혼자 두고.

류를 끌어들인 것도 나다. 어떻게 어떻게 좋게 좋게 흘러갔지만, 다른 일은 하지 않는 게 좋다.

멍하니 만족하고 있으면, 히아신스가 생각난 것처럼 입을 열었다.

“아, 저 키오후님의 호수에 물어 봤어요.”

“에?”

나는 한 대 얻어 맞은 기분에 고개를 들었다.

“기억하시죠? 물뱀의 호수에 고민을 물었는데, 대답을 못 봤었잖아요."

히아신스가 대수롭지 않은 잡담처럼 이야기하며 웃었다. 나는 이상하게 긴장해서 그녀를 보았다. 내 시선에 미소 짓는 그녀를 따라 입꼬리를 올렸다.

올렸지만, 머리 한구석이 차갑게 식어갔다.

그녀는 왕궁에 있으니까, 직접 만나러 가 확인해도 되는 거였다. 아무리 그녀가 바빠도 윤하영은 그녀의 방을 알고 그녀 역시 아무리 바빠도 윤하영이 직접 찾아가는 걸 거절할리 없었다고, 마음 속 어딘가에서 속삭인다. 진작에 찾아가서 막았어야 했다.

'막아? 뭘? 왜?'

윤하영은 형편 좋은 생각만 하고 있다. 산 때처럼, 엘킨 때처럼. 또 실패하고 말 것이다. 아니, 실패했다.

'아니야.'

그런 게 아니다. 히아신스는 그들과는 다르다

“사실, 저는 꼭 고민을 상담해야 한다고는 느끼지 않았는데 그 후로도 계속 꿈을 꿨거든요. 그런데 우연히 에드나님과 함께 있는 키오후님을 만난 거예요.”

“그래요?"

"키오후님이 마침 호수의 물을 가지고 계시더라구요. 기왕지사, 만난 거 묻기로 했어요."

"...그래서 뭐라고 하던가요?”

나는 태연한 척 이야기하려고 노력했다. 태연한 척 할 필요따윈 없는데, 히아신스는 정말 자연스러워 보인다. 나는 재차 그녀의 눈을 마주하며 마음을 다스린다. 나는 키오후에 대해 편견이 있었다. 상대는 안나와 관련이 있고, 에드나의 말이 있어서인지 썩 좋은 인상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게-"

"?"

"꿈이 아니래요.”

히아신스가 나에게 가까이 다가온다. 비밀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그러면서도 소녀처럼 얼굴을 붉히며 속삭인다.

“그게, 전생의 모습이래요.”

*

손끝이 기묘하게 차가워졌다.

나는 멍한 얼굴로 가까이 다가온 히아신스와 눈을 마주 했다. 아름다운 녹빛 눈동자. 당당하고, 투명하게 맑은, 다정한 눈동자였다. 히아신스는 히아신스였다.

“하영도 아시죠. 폐하가, 에피룬님의 현신인 걸요.”

히아신스는 약간 들떠 있었다.

그녀는- 셀리안의 전생과는 관계가 없는 사람이었다. 아무리 칼미온의 기사고 전장의 에메랄드였지만, 정말 평범한 인간이었고 이러니 저러니 해도 공작의 금지옥엽 외동딸이었다. 정말이지 인외와도 전생과도 관련이 없던 히아신스는 셀리안의 트라우마가 가진 자취조차 파악하지 못했다. 그랬기에 셀리안은 히아신스를 사랑하지 않았지만, 소중하게 여겼다. 그와 그의 주변과는 너무도 다른, 온전히 이 세상 사람으로서 존재하는 히아신스.

“그건 폐하의 꿈이었지만, 폐하가 아닌 에피룬님의 꿈이었던 거예요.”

그만해.

“아니지. 폐하가 에피룬 크레이누님의 현신이니까. 음... 폐하의 꿈이긴 하네요.”

그만해.

“신기해요. 저도 모르는 영혼의 기억 속에- 하하, 이건 키오후님의 말이에요... 음. 폐하와 함께 한 시간이 있다니.”

나는 히아신스의 시선을 피했다. 책상 끝을 노려본다.

“저는 폐하의 뭐였을까요. 그런 건 생각해본 적이 없는데, 막상 알게 되니 궁금해져요.”

“...재, 재미있네요. 전생이라니. 하지만...그런 건 별로 중요한, 일은...아니잖아요?"

책상 끝의 작은 균열을 보며 가볍게 주먹을 쥔다. 히아신스의 목소리가 바로 곁에서 들려 들을 수밖에 없다.

“중요하진 않지만, 그게 재미있다고 할까, 역시 신기하다는 표현이 옳은 것 같아요. 키오후님은- 전생을 기억하거나 꾸는 건 쉽지 않은 일이라고, 이 기회에 이름도 생각해보라고 하셨어요.”

“이름...”

히아신스는 고개를 갸웃한다. 그리고 해맑게 웃었다.

“호수의 물이 답을 내는 걸 보고 조금 멍해졌는데, 키오후님이 이름이 생각나냐고 물었거든요. 키오후님은 에피룬님의 시절부터 살고 계셨으니 그 분도 궁금하셨던 것 같아요. 어라, 그러면 저 키오후님과도 아는 사이였을지도.”

“...히아.”

“그래서 요즈음은 이름을 기억하려고 노력해보고 있어요. 그랬더니 이번에는 꿈속에-”

“히아!!!”

나는 비명처럼 소리를 질렀다. 바로 곁에서 웃고 있던 히아신스의 눈이 동그래진다.

나는 그녀의 표정을 신경쓰지 못했다. 견딜 수 없다. 이 자리가, 히아신스가, 아니 히아신스를 견딜 수 없다고 생각하는 내가.

“하영?”

“...히...아는...”

나는 고개를 들어 그녀를 마주했다. 녹빛의 눈동자. 아름다운 여기사.

“히아는 히아잖아요. 전생이라니... 왠지 저에게는 너무 먼 이야기라...”

"..."

"그, 당황스러워서. 사실, 이런 화제는 좋아하지 않아요."

좋아하지 않는다.

"...그만 했음 좋겠...어요."

셀리안 크레이누가 그의 전생을 끔찍하게 여기는 것만큼 나도, 윤하영도 그랬다.

============================ 작품 후기 ============================

해바라기유님, 덩임님, YouURin님 후원쿠폰 감사 드립니다!>ㅁ/ 내일이 월요일이라는 것도 잊을 만큼 기뻐요.

항상 선추코 감사드립니다.

사이다, 까지는 아니어도 천천히 열심히 풀어갈 예정이니 제 가지와 뿌리에 농약 뿌리지 말아주세요ㅡ_ㅜ// 사이다는 뿌리셔도 됩니다! 아, 사이다는 제가 뿌려야하는데. 여러분, 사랑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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