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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7
"...그만 했음 좋겠...어요."
내 말에 히아신스가 입을 다물었다.
히아신스에게 감정을 부딪친 건 처음이었다. 나는 그녀에게 항상 몸을 사렸다. 그녀의 호의에도, 내가 그녀에게 갖는 호의에도. 모든 것에.
그리고, 지금 감정을 부딪쳤다. 처음으로 화를 내고, 처음으로 그녀의 말을 막았다.
감정을 처음으로 드러냈건만, 기묘하게 서늘해진 마음으로 그녀를 보고 있다. 그녀의 입을 막고 그녀를 외면하고, 그녀를 껄끄러워하며.
셀리안 크레이누가 그의 전생을 끔찍하게 여기는 것만큼 나도, 윤하영도 그랬다. 정말로 끔찍하다. 히아신스가 셀리안을 에피룬이라고 이야기하고, 그녀가 그의 전생에 관련되어 있고.
나는 그녀의 녹빛 눈을 보며, 그 뒤에 다른 무언가가 있다는 것에 몸서리친다.
"..."
"..."
내 시선을 받으며 히아신스의 눈이 떨린다. 떨렸고, 툭 하고-
“!!!”
툭 하고, 그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미안...해요."
녹빛의 눈동자가 떨리고 뚝뚝 하고, 보석처럼 눈물이 방울져 티테이블을 적신다.
“...”
갑자기 윤하영은 당황스러움을 느꼈다. 방금 전까지 세상이 무너질 것 같은 배신감이 어이없을 정도로 나는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번에는 바보처럼.
“아, 나 왜 이러지?”
히아신스가 티테이블에 떨어진 자신의 눈물에 깜짝 놀란다. 정말 놀란 것 같았다. 그녀는 전장의 에메랄드- 아무리 힘든 일이 있어도, 작게는 어린 시절 주변 영애들이 얼만큼 괴롭혀도 울지 않던 그녀였다.
그런 그녀가.
“미안해요, 정말 나- 윽...”
“...”
히아신스가 눈물을 닦아내며, 멈추지 않는 눈물을 억지로 비벼 숨기다 결국 시선을 내렸다. 녹빛의 눈은 나를 향하지 않고 그녀의 검은 머리카락이 사르륵 소리를 내며 그녀의 눈동자를 가려버렸다.
하지만, 티테이블은 그녀의 눈물로 젖어 가고 있다.
“진짜, 미안해요... 그, 저는 그냥 재미있어서. 하지만, 영문 모를 이야기만 하고 말았는지도요. 제가 좀 그래요.”
나는- 전생에 대해 싫어했다. 그건 사실이다. 줄곧 싫어했다. 셀리안 크레이누도, 사랑도, 이 세계도, 아니 전생을 떠올리게 하는 그 모든 것을. 하지만-
“...”
“...”
침묵 속에서 히아신스는 한 손으로는 눈을 비비며, 다른 한 손으로는 제 접시에 있는 쿠키를 만지작거렸다. 불안한 듯, 죄지은 사람마냥 고개조차 들지 못했다.
윤하영이, 히아신스 에이나에게 감정을 부딪치고, 처음으로 화를 낸 이유- 그것은 그녀가 에피룬 크레이누와 연관되어 있을까봐다. 윤하영은 히아신스 에이나가 관련이 없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 끔찍한 전생에 히아신스가 엮여 있다는 게 싫어서. 히아신스만은 아니길 바라서. 아니길. 그 정도로 히아신스 에이나가 나는-
"미, 미안해요.. 윽. 이러면 안 되는데."
"!!"
방울지던 눈물이 줄줄줄 흐르자, 나는 나도 모르게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끼이익하고 의자가 끌리는 소리가 났지만 히아신스는 고개를 들지 못한다. 눈물이 멈추기는커녕 뚝뚝 떨어지고 있어서다.
‘좋아해.’
깨달았다. 나는 히아신스 에이나가 정말 좋다.
'이렇게 좋아하는데.'
좋아하는데도 고작, 전생 때문에. 몇 번이고 히아신스는 히아신스라고 스스로에게 암시하면서도. 고작 전생. 그렇다. 고작 전생.
“저는 사실...친구가 하영밖에 없어서. 친구를 사귄적이 없어서 상대의, 하영의 기분을 생각 못 했던 것 같아요.”
나는 일어선 그대로 히아신스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물끄러미 바라보면서도 그녀의 눈에서 뚝뚝 떨어지는 눈물을 안절부절 못하며 보고 있다.
영문 모르게 화를 낸 나를 향해 그녀는 눈물을 흘리며 천천히 이야기한다. 나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며, 마주한다. 언제나 시선을 돌리지 않는 올곧고 솔직한 히아신스 에이나.
그런 그녀이기에, 그녀는 셀리안 크레이누의 내면, 그 깊숙한 전생에 대한 혐오는 끝까지 몰랐지만, 그래도 그의 허세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여줄 수 있었던 것이다. 엘킨과는 또다른 버팀목으로. 그런 그녀였다. 그런 그녀였기에 전생 동안 히아신스 에이나의 죽음을 외면한 주제에, 셀리안 크레이누의 기억은 엘킨 만큼이나 나에게 히아신스를 보여줬던 것이었다.
“제가, 그래요. 한 번 집중하며 정신을 못 차려요.”
히아신스가 결국 눈물을 멈추는 걸 포기하고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여기사의 꿈결 같이 반짝이던 눈동자는, 이제는 벌 받는 소녀처럼 망설임을 담고 나를 보았다. 내가 혹시 여전히 그녀를 서늘하게 보고 있을까봐 두려워하는 눈동자였다.
"지, 지금도 그렇고. 그, 전부터 내가 너무 내 취향만 하영에게 강요하는 것 같다고 누가 그러더라구요."
...무슨 소리야. 이건.
“...하영은 단 것도 안 좋아하고..."
...
"프릴도 안 좋아한다고. 들었는데도 아니라고 멋대로 생각했던 건지도... 그런데도 억지로 항상 강요하고... 귀찮게 찾아...오...고...흑..."
“무슨 소리예요!!”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소리를 지른 걸 기점으로 나는 일으킨 몸을 그녀에게로 기울였다. 눈물을 가리는 그녀의 손을 붙잡고 동그래진 그녀의 초록색 눈을 마주했다.
눈이 새빨갛다.
“아아, 완전. 비비면 어떡해요.”
“...아. 미안해요. 하영."
"왜 사과 해요?"
"그게, 강요해서. 하영은 단 것도, 프릴도-"
“아니에요! 그, 다 좋아한다구요.”
“에-”
“처, 처음에는 별로 좋아하지 않았는데 이제는 좋아해요, 히아가 추천하는 건 다 맛있고, 프릴도 예뻐서. 다 좋아해요. 그러니까. 아아, 눈에 상처 나면 어떡해.”
히아신스는 히아신스. 그렇다. 히아신스는 히아신스다. 나는 품안의 손수건을 꺼내 그녀의 눈가를 누르며 미간을 찌푸렸다.
“누가 그랬어요?”
“네?”
“내, 내가 다 싫어한다고. 히아- 말해봐요. 내가 가서 따질게요. 누가 내가 프릴도, 단 것도 싫어한다고 그랬어요? 설마 폐하는 아니겠죠?”
“아, 아니에요.”
히아신스는 고개를 저으면서 당황한다. 이제는 서로 말을 더듬고 있다. 하지만, 히아의 눈에 비친 나도, 내 눈에 비친 히아도 어느새 눈에 생기가 돌기 시작하는 걸 안다. 현실의 서로를 보고 있다. 아니, 히아신스는 처음부터. 나만이 이제서야.
다행이었다. 전생과 관련된 그녀는 여전히 껄끄럽지만, 내 시선을 피하고 죄책감을 갖고 나 때문에 우는 히아신스를 보는 게 훨씬 괴롭다. 적어도, 윤하영은. 그래, 윤하영은.
“누구예요! 진짜-“
뒤늦게 몰려오는 머슥함에 소리를 지르면 그녀는 이제 부끄러운 듯 고개를 기울였다.
“으음.”
“어서요.”
“그...그게, 미실랭 부대장이.”
“정말, 그 사람은!”
쓸데없는 이야기를 한다. 아니, 사실 그녀를 울린 내 잘못이다. 고작 전생 때문에 그녀를 울려버렸다. 전생이 싫다고 하면서도! 역시 그 전생의 그 환생, 바보 같은 탓을 하고 있었다. 아니 전생보다도 못났다. 아마 셀리안이라면 나보다 더 제대로 대처했을 것이다. 괴로워는 했을 테지만 히아신스를 울리지는 않았을 테지.
'그래도... 역시 괴로워하는 셀리안은 보기 싫은데.'
나는 류에게 힐끔을 시선을 주었다. 셀리안은 모르겠지. 몰라야 하는데- 하는 생각이 무심코 스쳤다.
그러고 있으면, 어느새 침묵하고 있는 히아신스를 눈치챘다.
“히아?”
히아신스가 조금 멍한 표정으로 허공을 보고 있었다. 나를 보고 있었는데.
"히아?"
역시, 아직도 울고 싶은 걸까. 불안하게 이름을 부르면, 그녀가 고개를 갸웃한다.
“미실랭...?”
“네?”
“아, 아니에요! 정말, 저도 한 마디 해야겠어요. 미실랭 부대장한테... 부대장한테...”
그녀는 활기차게 이야기하면서도 찜찜한 얼굴로 말을 잇지 못했다. 쉽사리 표정이 풀리지 않는 히아신스를 보자니, 애매했던 감정이 완전히 죄책감으로 다가오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나는 허둥지둥 그녀의 눈치를 보았다.
“히아, 진짜에요. 히아신스가 권하는 건 이제 나도 다 좋아요. ... 그, 전생도 조금 더 이야기해봐요. 미안해요. 내가 그런 화제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고 할까. 최근 방에만 있어서, 괜히 화냈다고 할까. 아유, 진짜- 산책이라도 해야겠어요. 그러니까, 정말 미안해요.”
히아신스가 에피룬 크레이누의 전생에 아는 사이였어도 상관없다. 그녀는 이미, 윤하영의 전생 속 셀리안 크레이누의 약혼자이며, 현재 윤하영의 친구이기도 하니까.
무엇보다 일반적으로 소녀들은 전생이니 환생이니에 낭만을 느끼기 마련이었다. 히아신스도 충분히 그럴 수 있었다. 더군다나 결혼하는 상대와 전생부터 아는 사이라니, 그녀가 셀리안에 대해 연애감정을 느끼기 시작하는 계기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영은 정말 다정하네요.”
“진짜인걸요. 전, 정말 히안신스를 좋아해요.”
“에?”
“정말요.”
내 말에 히아신스가 고개를 들고 그녀의 입이 천천히 벌어진다. 그녀의 눈이 기쁨으로 반짝였다.
“...기뻐요. 하영에게 그런 이야기, 처음 들어요. 매일 나만 좋아한다고.”
"좋아해요, 히아."
“으으, 정말 기뻐요. 영에게 그런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면 제 취향을 막 밀어붙여서 곤란하게 하는 것도 잘 한 건지도.”
그녀는 장난스럽게 이야기하며 나를 애정어린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보다가 문득 눈을 감았다. 조는 것처럼 눈이 감기고, 순간적으로 뜬다.
“사실요. 처음에는 하영이, 왠지 폐하랑 닮았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좋다고.”
“제가요?”
“분위기가요.”
히아신스는 가볍게 웃더니 그 녹빛의 눈을 살풋 접었다. 그녀의 눈이 약간 또렷해진다. 또렷하게 나를 보는 눈은 열정적이다. 열정적이고-
“하지만, 이제 알겠어요. 당신은...”
동시에 히아신스가 입을 다물었다.
“히아?”
“아... 미안해요. 알았다고 생각했는데 갑자기...헤헤, 최근 이래요. 일이 많아서 그런지- 막 깜빡깜빡하고 그러더라구요.”
“아, 이해해요.”
“응, 다만, 폐하라든가 그런 이유와 관계없이, 저는 정말 하영을 좋아하니까.”
히아신스는 밝게 웃으며 내 손을 꼭 잡았다.
다시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전생에 대한 그녀의 동경과 소소한 근황들에 대해 다시, 하지만 때때로 히아신스는 멍해보였다. 피곤한 건지, 졸린 건지 몇 번이고 눈을 감았다 잠에서 깨어난 것처럼 눈을 깜빡인다. 깜빡이다가 창밖으로 시선을 주기도 했다.
“...”
별 게 아닐지도 모르지만, 훨씬 감각이 날카로워진다. 불안하다. 뭔지 모르겠는데 다시 불안해진다. 어긋났던 시선을 다시 맞췄는데, 내가 그녀를 드디어 제대로 바라보았는데, 히아신스의 시선이 어긋나는 그런 감각-
'기분 탓이겠지. 하지만.'
하지만, 기분 탓이라고, 히아신스를 좋아한다고 깨달은 윤하영은 더이상 외면할 수 없다.
*
“어디 가는 거야?”
“찾으러.”
“누구를?”
류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고 나는 척척 걸어나갔다. 히아신스가 돌아가자마자 바로 방을 나왔다.
안심하고, 죄책감을 느끼고, 의아해하고, 그렇게. 다 잘 되었다고 안주하고.
그걸로 충분했을지도 모르지만, 충분하지 않다. 그래서는 안 된다.
이건 감이다. 이유없는 감, 감이지만, 이번에는 그 감을 따르기로 했다.
"류-"
"응?"
목표로 했던 장소 바로 앞에서, 나는 돌아서서 류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내가 다가서는 걸로는 그가 떠오르지 않았다. 나는 바싹 몸을 대고 속삭이듯 그의 귀에 입을 가져다댔다.
“혹시 아까 히아랑 이야기할 때, 셀리안이 나를 감시했어?”
“나 마나 못 써?”
“그래도, 알 수는 있잖아.”
셀리안은 이제 보지 않는다고 했다. 거짓말은 아닐 것이다. 그래도 나는 묻는다. 이건 셀리안을 위해서이기도 했고, 히아를 위해서기도 했다. 누구도 상처 입지 않길 바라니까.
류는 눈을 갸름하게 뜨고 나를 가늠하다가 입을 열었다.
“아니. 마법왕은 의외로 이상한 걸 참는 중이니까.”
“안 봤다는 거지?”
“안 봐. 결벽적일 정도로.”
류가 웃었다.
"왜일까."
"뭐가?"
"왜 마법왕은-"
그때 버서석, 하고 나뭇잎 밟는 소리가 들렸다. 떨어진 나뭇잎 옆으로는 가시 없는 줄기들이 이리저리 엉켜 있고 그 사이 사이로는 붉은 색 장미가 탐스럽게 피어 있다.
류로부터 시선을 떼고 공격성을 잃은 장미들로 가득 찬 정원에서 나오고 있는 이를 보았다. 찾고 있던 이였다.
남자는 초록색의 머리카락을 위로 틀어올리고, 나비가 수놓아진 붉은색 치파오를 입고 있었다. 나를 발견한 그의 입가가 기계적으로 휘어진다.
"어라, 당신도 이 정원이 마음에 드셨는지요?"
"아뇨, 당신을 찾으러 온 거예요."
바람이 산산하게 불고, 그의 호박색 눈동자 속 검은 부분이 가늘어졌다.
============================ 작품 후기 ============================
pen107님, 마사히님, YouURin님, 적매화님 후원쿠폰 감사 드립니다. 다들 제가 엄청 사랑하시는 거 아시죠!ㅜㅜ
선추코 항상 감사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