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16 Side story 6 =========================================================================
Side story 6
젊은 혈기에 실수를 하거나 감정에 치우치는 일은 인외생물조차 피해갈 수 없다고- 키오후는 자신을 찾아온 에드나를 보고 문득 자신의 과거를 떠올렸다.
"...도와주세요."
키오스의 왕성에 도착했을 때, 키오후는 에드나가 자신을 찾아올 거라 기대하지 않았다. 언제부터인가 에드나가 자신을 꺼리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날, 처음 그녀가 호수의 정화를 맡은 날 이후, 물뱀의 공주는 갑작스레 인간과 계약해 일족을 떠난 것이다.
"이대로라면, 도련님이 사라져요."
에드나는 입술을 지긋이 물고, 그 호박색 눈동자로 절실하게 키오후를 바라보았다. 야위었다. 언제나 당당했던 물뱀의 자랑스러운 공주가 간신히 무너지지 않고 있었다. 겨우겨우 자신을 유지하고 있다. 그 스스로를 위해서라기보다는, 지키기 위해서다. 아마도, 그녀가 이야기하는 도련님을 위해서.
"도련님을..."
"..."
"..."
에드나는 괴로운 듯 더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도련님이라면, 아마 키도스 미실랭이겠거니, 키오후는 짐작했다. 이 분방한 후계자가 특별한 호의를 품고 있는 인간이다. 미숙하고 반항적이고 그러면서도 순수하기 그지없는 에드나가 마음을 빼앗긴 인간.
"무슨 일인지 나에게 이야기해줄 수 있겠느냐?"
잠시의 침묵 끝에 키오후는 웃으며 에드나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예전과 다름없이, 자애로운 손길이라고 에드나는 생각했다. 에드나와, 뱀족의 아이들을 모아놓고 이야기를 해줄 때와 다름없는 자상한 눈길.
그 손과 눈에 의지해, 에드나는 줄곧 자신의 마음에만 품어왔던 고민을 뱀족의 대장로에게 풀어놓았다.
키오후는 에드나의 이야기를 들으며, 과거의 자신을 떠올리고 있었다. 에드나의 편벽할 정도로 결벽한 성격, 키도스 미실랭에게 구애되는 모습, 그런 것들이 과거를 떠올리게 했다. 그녀는 키오후에게 반발하고 있었지만, 그런 그녀는 젊은 시절의 키오후를 닮아 있었다. 키오후는 후계자로서의 자질과 별개로, 에드나의 그런 점도 마음에 들었다. 제법 마음에 드는 아이였다.
과거, 먼 과거 아직 키오후가 에드나와 같은 물뱀의 차기장로 정도의 위치였을 무렵 그 역시 마을을 떠나 여행을 했었다. 에드나와 완전히 같지는 않지만, 그 역시 고루한 장로들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였다.
여행 중, 안나를 만났다. 어떻게 만났는지는 지금에 와서는 기억도 나지 않는다. 그저 따스한 햇살, 햇살 속에서 무표정한 얼굴로 자신을 보던, 평범한 갈색 눈동자에 담긴 선량함- 그런 것들이 잔상처럼 남아 있을 뿐이다.
안나라는 소녀는 자기애가 부족했지만 다정했고, 인간의 추함에 대해 인지하고 있으면서도 순수했다. 강함과 약함의 대비, 모순적이기 그지없는 존재, 가장 깨끗하게도, 가장 추하게도 추락할 수 있는 하찮음- 젊은 키오후는 그런 인간 소녀를 깔보고 있었지만, 언제부터인가 눈을 빼앗겼던 건지도 모른다.
물론 인간의 연애감정과는 다르다. 키오후는 안나를 소유하고 싶다거나, 계약을 맺고 싶다고 소망하지는 않았다. 때문에 그녀가 에피룬 크레이누를 선택한 건 제법 괜찮다고 생각했다. 약한 안나가 강한 에피룬 크레이누를 사모하고, 그 에피룬 크레이누가 안나를 지키는 모습을 보는 것은 나쁘지 않았다.
그 정도의 호의였다. 그저- 그 약한 존재가 티끌 같이 짧은 생애 동안은 ‘행복했으면 좋겠다’는 그 정도의 감정이었다.
인간 주제에, 마치 신마냥 제 그릇을 넘어 세상을 구원하려는 에피룬 크레이누의 그 오지랖은 퍽 아니꼽게 느껴졌지만, 그 정도 힘을 가진 인간이 오만할 정도로 위선적인 것도 한편으로는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많은 것을 결여한 안나에게, 너무도 많은 것을 가진 에피룬 크레이누는 딱 맞는다고, 위안했다.
설마- 그 에피룬 크레이누가 안나를 두고 절대다수의 인간들을 선택할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지만. 모든 건 에피룬 크레이누가, 손에 잡히지 않는 제 백성의 행복에 집착했기 때문이다. 보이지 않는 만인을 위해-
"..."
키오후는 눈앞에서 주먹을 쥐고 있는 에드나를 바라보았다. 이야기는 끝이 났다. 무슨 이야기인지 알 수 있었다.
용에 의해, 그녀의 도련님이 농락당하고 있다는 이야기다. 그의 정신이, 영혼이 온전한지조차 알 수 없다. 그런 이야기.
덕분에 몰랐던 여러가지를 이것저것 알 수 있었다. 아무리 관심을 기울여도 전해지는 소식이나, 호수의 대답만으로는 부족한 감이 있었다. 예컨대- 누가, 그 헤르티아 왕비 곁에 있던 안나의 아이를 죽였는지, 현재의 마법왕이 에피룬의 환신으로 공표되었는지 같은 이야기의 내막들-
그외에도, 자신의 어린 후계자가 어느새 인간못지 않은 강한 사랑의 주인공이 되었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사랑이란 굉장하구나."
"..."
에드나는, 감탄한 듯 흐뭇하게 자신을 바라보는 대장로를 기묘한 표정으로 보았다.
왕궁에 젊은 모습으로 온 것도 그렇고, 그에게서 느껴지는 호수의 기운도 그렇고- 무슨 생각인지는 모르겠다. 의지할 사람이 그밖에 없어 찾아오긴 했지만, 역시 꺼림칙하다. 싫은 게 아니다. 오히려 그녀는 눈앞의 대장로를 의지하고 좋아했지만.
더이상 안나의 후손들 따위는 한 사람도 남아 있지 않은 이 성에서 무엇을 할 생각인지는 모르겠다.
"도와, 주세요. 대장로뿐이에요."
"물론이다, 누구 부탁인데."
키오후는 자신을 꼭 닮은 호박색 눈동자의 소녀에게로 다가섰다. 에드나는 어쩐지 불안한 느낌에 물러서고 싶었지만, 마음을 다잡았다.
지금은 그의 도움이, 호수의 도움이 절실하다. 미실랭을 구하고 싶다. 그의 영혼이, 사라질지도 모른다.
어쩌면, 이미 사라졌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그 생각은 접는다. 아직, 방법이 있을 것이다.
"아, 하지만 곤란하게 되었구나"
"에?"
"나도 네게 부탁할 게 있었는데 말이다."
"부탁..."
"아, 네 부탁을 들어주는 대신, 이런 건 아니란다. 그냥, 마침 네가 도와줬음 하는 일이 있었는데, 네가 부탁을 해와서- 그와 별개로, 그저 이야기하는 거란다."
키오후가 입가를 끌어올려 웃었다.
"혹시, 히아신스- 히아신스 에이나라는 아가씨를 알고 있느냐."
*
키오후는 자신의 앞에 나타난 마법왕을 놀란 것처럼 바라보았다. 갑자기 나타난 그에게 놀랐고, 동시에 위압당한다.
"!"
황금색 갈기 같은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붉은 눈의 왕이 키오후의 앞길을 가로막았다. 그 옛날, 인간 주제에 자신을 압도하고는 했던 에피룬 크레이누와 정말 꼭 닮아 있다. 압도적인 마나도, 오만한 눈동자도 똑같다. 다만, 전생의 에피룬은 좀더 따뜻한 눈을 하고 있던 것 같긴 하다.
윤하영처럼.
'불쾌하군.'
그는 칼미온에 들렀다 오는 길이었다. 류에게 찔린 피를 지혈하며, 왕궁의 복도를 걷고 있었다. 자신의 후계자가 용들의 주인을 찾고 있는 걸 알고 있었다. 알려주자마자, 에드나는 앞뒤 재지 않고 뛰어갔는데 괜찮을까 조금 걱정을 하고 있던 차였다. 아마, 아이는 윤하영이 있는 곳으로 달려갔을 것이다.
윤하영, 그래, 윤하영. 마나도, 외관도 성별조차 다르지만 묘하게 에피룬을 떠올리게 하는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다.
“이런, 셀리안 크레이누 폐하가 아니십니까.”
키오후는 정중하게 허리를 굽혔다.
놀라긴 했지만, 그가 무슨 일로 자신을 가로막았는지는 짐작이 갔다. 윤하영이, 그 에피룬 크레이누의 찌꺼기라고 불러도 어폐가 아닐만큼 하찮은 여자가 마법왕에게 그녀가 생각하는 바를 결국 고해바친 것이다.
그리고, 키오후는- 셀리안 크레이누가, 에피룬 크레이누의 현신이라는 그 말이 과장이 아닐 만큼 어마어마한 마력을 가진 이 마법왕이 제 전생을 혐오하는 걸 알고 있었다.
인간이란 쓸데없는 것에 구애되는 일이 많다.
정말이지, ‘안나’의 소원이 드디어 이루어졌건만 생각외의 장애가 너무 많다.
‘모든 게 갖춰졌는데.’
조금 부족한 감이 있긴 해도, 그 에피룬 크레이누와 외모부터 능력까지 완전히 동일한 남자가 눈앞에 있고, 몇 년 전 진짜 안나의 환생체를 드디어 발견했다. 유능했던 안나의 아이는 셀리안 크레이누의 약혼자로서, 그녀를 인도했다.
더없이 완벽한 조건이다. 그럼에도 삐걱삐걱 어긋나는 건 왜일까.
일단, 셀리안 크레이누가 전생은 전혀 기억하지 못하고, 오히려 전생을 혐오한다는 게 문제였다.
헤르티아 왕비를 모시던 안나의 아이는 제법 똘똘한 여자였다. 머리도 좋았고 빈틈없이 일을 했다. 특히 키오후를 방문해 조곤조곤 이야기하는 모습은 ‘최초의 안나’와도 흡사해 그녀의 자손 중에서는 특히나 애정이 가는 아이였다.
그런 그녀가 헤르티아를 선택한 건, 헤르티아가 누구에게도 사랑받지 못했으며 야심가인 다리스 크레이누가 선택할 법한 여러 조건을 갖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릇으로 선택받은 헤르티아가, 그릇에 만족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것은 분수도 모르고 에피룬 크레이누에게 연모의 감정을 품고 말았다. 사랑받지 못하고, 사랑하지 못한 여자는 유일한 제 편인 안나의 이야기를 들으며 에피룬 크레이누를, 자신을 구할 왕자님-같은 존재로 생각했던 듯하다.
실소가 나오는 일이지만, 그 분수를 모르는 그릇이 설친 탓에 셀리안 크레이누는 필시 전생에 대해 거부감을 갖게 된 것이리라.
자기 자신의 환생에게 혐오당하는 에피룬 크레이누라는 건, 솔직히 키오후를 재미있게 하긴 했지만, 덕분에 일이 복잡해진 것도 사실이었다.
인간이란 전생이나 환생에 대해서는 인지하지 못한다. 하지만 히아신스 에이나의 반응을 보듯, 그런 종류의 운명은 동경하기 마련이었다. 그랬건만 전생을 혐오하게 된 셀리안 크레이누의 앞에서는 되려 전생에 관해서 조심하게 되었다. 자칫하다가는, 용들처럼 거절당하게 될지도 모르니까.
때문에 천천히 해나갈 생각이었다. 히아신스 에이나는 이미 그의 약혼자이며 둘은 서로를 소중히 여기는 듯했다. 남은 건 히아신스가 서서히 안나의 기억을 되찾는 것-
왕궁 내 안나의 아이들은 모두 죽었지만, 그 뒤는 자신과 에드나가 할 수 있는 범위의 것이었다. 에드나가 ‘안나’의 조각을 히아신스 에이나 안에 넣는 것까지는 성공했다.
에드나의 도련님은 용들에게 조종당해 신전에서 안나를 떨어뜨렸고 그것을 히아신스도 목격했다. 뱀공주는 그런 히아신스를 어떻게든 하고 싶어했다. 그리고, 미실랭을 원래대로 돌릴 방법을 호수에 묻고 싶어했고.
키오후는 두가지 모두를 이루어주기로, 사랑스러운 후계자에게 약속했던 것이다.
예상대로, 조각을 품은 히아신스 에이나는 점점 안나로서의 기억을 꿈에서 조우했으며, 히아신스 에이나로서의 기억은 뒤죽박죽 섞여 가기 시작했다. 미실랭의 일을 정확하게 잊은 건, 에드나를 위해 키오후가 조각에 약간의 손을 쓴 것이긴 했지만- 어쨌든, 마지막으로 호수의 물을 통해 그 꿈이, 전생의 기억이란 것만 깨달으면 모든 것은 완성될 예정이었다.
또다른 방해이자 예상외인 윤하영만 없었다면 말이다.
에드나에게 또다른 에피룬의 환생체에 대해 들었을 때는 반신반의했고, 그 존재를 확인한 뒤에는 도움이 될 거라고 여겼건만 아니었다. 영혼의 종착점인 듯한 그 불균형한 존재가 키오후를 방해했다. 제 그릇도 안 되면서, 이것저것 바쁘게 마음 쓰는 오지랖 넓은 여자- 에피룬 크레이누가 가진 힘의 끄트머리도 갖추지 못했으면서 그런 점은 에피룬 크레이누를 닮아 있는, 기분 나쁜 여자.
“물뱀의 대장로여, 정식으로 인사를 하고 싶지만, 나중으로 미루기로 하지."
그래서 곤란하다. 지금 자신을 찾아온 셀리안 크레이누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난감했다.
여기서 일이 어그러지게 할 수는 없다. 키오후, 그는 정말로 안나를-
아니, 아니다. 원래 있어야 했던, 죽음으로 가로막혔던 영혼의 사랑을 완성하고 싶은 것이다.
"그대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어, 왔다만.”
“저에게?”
하고 싶은 말이라고?
키오후는 눈썹을 꿈틀 움직였다. 그가 윤하영으로부터 일련의 이야기를 들었다면 자신을 찾아오는 건 당연하지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는 건 조금 앞뒤가 맞지 않는다. 어울리는 말은 오히려 경고하고 싶다던가, 그런 게 아닐까.
키오후는 호박색 눈을 가늘게 뜨고 눈앞의 마법왕을 새삼 다시 바라보았다.
조금 다르다고, 문득 생각했다. 언젠가, 과거의 어느날, 용들이 그에게 거절당했다는 말에 호수를 통해 그를 훔쳐본 일이 있었다. 미숙하고 날카롭고 상처 받기 쉬운 소년을 보았다.
그 모습이 남아 있기 때문에 자신을 찾아올 셀리안 크레이누의 분노를 예상했지만, 그는 꽤 담담한 표정을 하고 있다. 아니, 무언가 눌러 참는 건 알겠지만, 그건 전생을 들쑤시려는 키오후에 대한 분노와는 거리가 멀다. 먼 것 같다.
“무슨 말이든 해주십시오, 마법왕이시어.”
오히려 잘 된 건지도 모른다. 그가 ‘무슨 이유 때문이든’ 전생과 관련된 미숙한 혼란에서 벗어났다면 키오후의 소망은 좀더 쉽게 이루어질 것이다. 지나치게 낙관적인 걸까, 고민하며 키오후는 셀리안의 다음말을 기다렸다.
“호수를 빌려다오.”
“네?”
키오후는 의외의 말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호수를 빌려준다면, 모두 불문에 붙이마.”
“그게 무슨?”
셀리안 크레이누의 붉은 눈은 어떤 감정도 담지 않고 무심하게 그를 본다. 무심하게 보고 있지만, 초조해하고 있다. 초조하게 급한 듯 이야기하고 있다고, 착각일지도 모르지만 그렇게 느꼈다.
아니, 착각이 아니다.
“...호수는, 만능이 아닙니다. 마법왕님께서는 저희 일족의 호수를 사용하지 않으셔도 이 세상 모든 것을...”
“평화롭게 해결하고 싶다.”
“평화롭게?”
셀리안 크레이누는 눈을 감았다 떴다.
“그대는, 히아신스에게 위해를 가할 생각인가?”
“설마요... 잊으셨던 걸 기억해주셨음... 하는 것 뿐입니다.”
“그것을 떠올리면, 히아신스는 없어지는 건가?”
“아닙니다. 히아신스 님의 지금 기억도 그대로입니다. 단순히 잊었던 걸 기억하기 위해 지금은 잠시 혼란하신 것뿐이라, 차라리 기억이 전부 돌아오시면, 안정되실 겁니다."
물론 기억을 전부 되찾은 히아신스 에이나는 지금의 히아신스 에이나와는 다를 것이지만 키오후는 입을 다물었다.
인간의 인격이란 삶과 기억에 의해 형성되는 거니까. 안나를 떠올린 히아신스는 더이상 히아신스 에이나는 아니겠지만, 그게 옳은 것이고 제대로 된 것이다. 잊고 있는 걸 되찾는 것이 오히려. 중요한 걸 잊은 인격이 오히려 불완전한 게 아닌가, 하고.
"그렇-군."
"...그렇, 습니다."
키오후는 본능적으로 그 부분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었지만, 눈앞의 마법왕이 그에 대해 짐작하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어렴풋하게 생각했다. 그러니까, 마법왕의 수긍은 이상했다. 너무도 이상하다. 이 대화의 흐름은, 그가 바라마지 않던 것이지만, 무언가 이상하다.
“그렇다면, 네 마음대로 해도 좋다.”
“...기억을 되찾은 하이신스 님을 내치실 생각은 아니시겠지요.”
"내쳐? 짐이?"
"..."
“설마, 나는 히아가 소중하다, 전생에 휘둘려 그녀를 내치다니, 그런 짓은 하지 않아."
"...다행, 이군요."
"다만- 어느 쪽이든 빨리 히아를 안정시켜다오."
"..."
키오후는 미간을 찌푸렸다. 이야기 자체는 히아신스 에이나를 걱정하는 것 같다. 이미 발동된 기억의 개화, 마법 등을 도중에 번복하긴 힘들다. 특히 전생이나 환생에 대한 건은 영혼에 직접 관여하는 만큼 결론을 빨리내리는 편이 좋았다. 하지만-
키오후는 조금 메슥거린다고 생각했다.
“폐하가 저희의 호수에게 묻고 싶은 게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까.”
“..."
"호수에의 질문은... 물뱀의 일족- 즉, 저와 함께가 아니면 할 수 없습니다. 이야기, 해주십시오.”
"...그대도 알겠지, 하영에 대해."
"하영...?"
셀리안이 한 발 내딛었다. 키오후는 자신도 모르게 뒤로 물러섰다. 그런 그를, 셀리안의 붉은 눈동자가 옭아매듯 응시한다. 처음 셀리안이 자신의 앞을 가로막았을 때보다, 더 강하게 압도당하는 기분이 들었다.
“그녀가 용들에게 납치당했다, 아마 그들은 그녀에게 위해를 가하진 않겠지- 그렇다고 두고 보고만 있을 수야 없지 않나.”
태연한 척, 아무렇지 않은 척 하고 있지만, 그 눈에 서린 감정을 읽은 키오후는 멍해지고 만다.
빨리 히아신스를 안정시키라고 했다. 왜?
--가 걱정하지 않게? 불안해하지 않게? 설마?
키오후는 문득 든 구상에 멍해졌고 자신도 모르게 실소를 터뜨리고 말았다.
*
이런 골계도 없군- 키오후는 비틀비틀 걷는다. 도망치자, 아니 도망칠 수 없다는 걸 안다. 알지만, 우습기 그지없어서-
'저것은 뭐란 말이냐.'
키오후는 인간 주제에, 성자인 척 구는 에피룬 크레이누가 너무나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안나를 사랑하면서, 사랑하는 주제에 그녀와 같은 위치로 떨어지지 않는다. 넘치는 사랑은 안나만을 향하지 않고, 세상 모두를 감싸고 싶어했다. 가장 사랑하는 건 안나이면서도 그의 최우선은 세계였다. 세계를 위해, 세계를 위해! 그깟 세계가 뭐라고, 키오스가 뭐라고, 백성이 뭐라고.
백성을 버리고, 안나를 선택했다면 좋았을 것이다. 마법, 왕, 그런 것에 의지한 키오스라는 나라가 강대한 제국이면서도 언제나 불안했던 건 그의 탓이다. 뭘 그렇게 끝까지 안정시키고 책임지려고 했단 말인가. 인간주제에.
아니, 그가 그럴 수밖에 없는 인간이라면 차라리, 그가 조금이라도 이기심을 부렸다면 좋았을 것이다. 혼자 남겨둘 안나를 걱정한다느니 그런 개소리를 하지 않고 그녀에게 자신의 씨라도 뿌렸다면 좋았을 것이다. 지극히 인간답게. 생물체 답게 사랑하는 여자에게 자신이라도 남겼다면.
그는 그런 집착이나 욕심보다는 다른 이를 먼저 생각하는 자였다. 그게 자신의 백성들에게도, 안나에게도 독이라는 것도 모르고.
“희극, 이로군요.”
녹색 머리카락이 바람에 아무렇게나 휘날린다. 키오후의 손에는 흰색 살점이 피와 함께 엉겨 붙어 있는 녹색의 비늘이 들려 있었다.
그의 후계자는, 그 고고하고 아름다웠던 물뱀의 공주는 지금 고작 이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
"어디까지 가나, 했더니- 여긴가."
"..."
왕궁의 가장 높은 곳, 그 외부 복도 끝에서 키오후는 뒤로부터 들려오는 목소리에 비웃듯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따라잡혔다. 결국, 따라잡혔다. 그의 뒤로 느긋하게 따라붙은 황금색 마나의 주인을 흘끗 쳐다본다.
흘끗 보고, 다시 조각을 바라보았다. 에드나, 그녀의 남은 조각이 이것뿐이란 것도 우습다. 정말이지, 우습다.
그 계집애에 눈이 멀어 앞뒤 안 가리고 물뱀 일족의 후계자를 이리 만들었단 말이지.
“도망칠 줄은 몰랐는데, 이리 쉽게 따라잡히는 것도 예상외군.”
키오후는 자신을 향해 천천히 다가오는 셀리안 크레이누를 향해 호박색 눈동자를 번뜩였다.
눈앞의 저건, 과거 키오후가 바라마지 않던, 아니 그랬다면 좋았을 텐데 하고 지금도 가끔 안타까워했던- 지극히 인간다운 에피룬 크레이누다. 키오후는 안나에게 에피룬이 저런 감정을 가져주길 바랐다. 바랐지만, 끝까지 그런 일은 없었다.
그것이, 지금- ‘그 계집’을 위해 저 눈을 하고 있단 말이지.
“물뱀의 대장로...라고 해서, 나름 경외를 갖고 대하려고 했지만, 지독하게 하찮군.”
셀리안 크레이누의 붉은 눈동자가 키오후 못지 않은 무기질한 시선으로 남자를 바라보았다.
물뱀의 일족은 인외생물 중에서도 고위에 속한다. 차기 장로라고는 하지만 어리디 어린 뱀공주 에드나의 마나도 만만하게 볼 수준은 아니었다. 하지만, 청년의 모습을 한 대장로의 마나는 ‘마법을 그럭저럭 쓸 수 있는 인간’ 수준이다. 인외생물이 가질 마나는 아니다.
그는 자신의 마나를 숨기는데 익숙해, 마치 안개에 싸인 것처럼 가늠하기 어렵게 해놨지만, 셀리안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실제 그 마나의 양을 본 셀리안은 그것을 숨긴 남자의 행동조차 모두 졸렬해보인다고 생각했다.
“어쩔 수 없지요. 저도 늙었는 걸요.”
키오후는 눈가를 찡그린다. 찡그렸지만, 별로 수치스럽지는 않았다. 수치스러워야 할 건, 눈앞에 있는 에피룬의 영혼이라고, 그는 반발했다.
“그런가, 확실히, 그대의 꼬락서니는 희극이긴 하군. 무얼 원하는지- 마나는 수치스러울 정도로 낮으면서 그 마나를 긁어다가 젊은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건가.”
셀리안은 남자가 비틀비틀 걸으며 중얼거렸던 말을 따라하며 웃었다. 키오후가 가볍게 한숨을 쉰다.
“당신은, 정말 에피룬과 닮지 않았군요.”
“호오, 제법 마음에 드는 소리를 하는군.”
“그래도 당신의 영혼이 그와 같다는 건 변하지 않겠죠.”
“흐음. 그런가.”
“전생에 대해 제법 민감하신 걸로 알고 있었습니다만...지금 당신이 그런 태연한 얼굴을 하게 된 게 설마- 설마 ‘윤하영’ 때문이라고 하면 전 정말 웃을 겁니다.”
키오후는 허탈하게 중얼거렸다. 손안의 에드나를 꼭 쥐며, 떨리는 목소리로 말한다. 목소리가 떨리는 게 예상외의 존재가 된 에피룬에 대한 공포인지 분노인지- 알 수가 없다.
“...당신은, 저를 어쩔 생각입니까.”
“가능하면, 그대가 호수에 물어줬으면 하는데.”
“싫습니다.”
키오후는 딱 잘라 이야기했다. 정말이지, 이 세계의 모든 것을 사랑하고 이 세계의 모든 것을 위해 자신을 희생했던 남자가, 모든 것을 버릴 정도로 사랑하게 된 게 자기 자신이라니, 우습기 그지없다. 우습다. 골계다. 멍청한 희극이다.
“...그럼 어쩔 수 없군.”
셀리안은 어깨를 으쓱했다.
키오후는 약간 절망적인 기분으로 눈앞의 남자를 바라보았다. 물뱀의 일족만이 질문할 수 있는 호수, 하지만, 저 남자라면- 어쩌면 그 이치까지 뒤틀 수 있을 것이다.
키오후에게 굳이 굳이 권한 건 그의 말마따나 경외를 가져준 건가. 물뱀의 대장로에 대한 경외?
“하하, 최악이군.”
키오후는 뒷걸음질 쳤다.
그리고, 그는 깨달았다. 이것은 분노다. 예상 외의 존재들이 된 에피룬에 대한 분노라는 것을, 증오라는 것을- 조용히 인지했다.
정말 싫었던 남자, 그의 위선이, 안나를 뒤틀어버린 그 위선이 싫고 싫었지만, 지금은-
키오후의 호박색 눈이, 그가 서있는 난간도 없는 복도 바로 밑의 바닥을 향해 요요하게 빛났다.
============================ 작품 후기 ============================
오랜만에 나타나서 외전이네요. ㅎㅎ 앞으로 외전 1개를 더 연재하고, 본편 진행으로 넘어갑니다~ ㅎㅎ 사실 이 글의 외전은, 하영이 1인칭 시점을 보완하기 위해, 스토리 진행상 필요한 외전이라... 양해 부탁드려요.ㅜㅜ
라이니엘 님 @ 셀리안은 몰랐습니다. 미실랭을 의심하지 않았다고 할까, 미실랭에게 관심이 없었다고 해야 하나. 셀리안은 가능하면 좋은 왕으로 남고 싶어하니까요. 그게 그의 신념이기도 했고, 어렴풋이 그런 자신을 하영이 마음에 들어한다는 걸 알았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네르비안 님 @
Q1. 키오후는 왜 제3자의 일에 오지랖넓게 나서는 건가요? 에피룬이 초대 안나랑 에피룬이랑 친한 사이였나요? 둘을 직접 본 적이 있나요? 113편에서인가 키오후가 '(생김새와 능력을 제외하면) 본질이 에피룬과 더 닮은 듯한' 하영을 거슬려 하는 게 이상합니다. 키오후랑 에피룬은 어떤 사이였나요? 키오후와 (에피룬과 친했던)안나, 키오후와 에피룬의 사이가 스포일러가 아니라면 답변해주실 수 있나요?
-> 이번 외전이 대답이 되어 드렸음 좋겠어요. 정리하자면, 키오후는 안나에게 특별한 감정을 품고 있었고, 에피룬은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Q2. 에피룬과 안나가.. 연인이라는 설과 오누이같은 사이라는 설이 있는데 어떤 게 진실..인가요..?
-> 연인이었습니다. 그것도 이번편으로...ㅋㅋ
Q3. 113편을 보다가 뒤늦게 캐치한 건데요.
키오후가 언급한 말들 중에 '당신의 ~한 영혼이 동일한 큰 영혼에 이끌려~ ... 당신의 과거...가 있는 곳으로요'에서 동일한 큰 영혼이면... 셀리안인 거죠?
-> 넴, 근데 이 이야기는 이번편을 보시면 알겠지만 키오후가 대충 추측해 이야기한 거랍니다.
해랑나랑, 블루바라, cool999, YouURin, 아무개23님 후원쿠폰 감사합니다.ㅜㅜ
황혼나비님이 팬픽 주셨습니다. 이걸로, 엘킨 흑화엔딩은 제가 신경쓰지 않아도 되...(퍽퍽) 너무 재미있게 써주셔서 정말 기뻤습니다.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