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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
붉은 산?
아니다. 검은 바위산이 붉게 끓고 있다. 마치 태초의 땅이 이런 모습일까 싶은 압도적인 광경에 입을 벌렸다.
“케틀리아-”
나도 모르게 탄성을 지르면, 진이 흥미롭다는 듯이 눈을 깜빡인다.
“정답.”
케틀리아는, 성국 시모갈과 키오스 사이에 있는 화산섬이다. 언제 화산이 폭발할지 모르는, 누구의 소유도 아닌 섬이라고는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키오스 령내에 있었다.
이 섬은 아무나 올 수 없다. 일단, 이 섬을 둘러싼 바다는 죄다 바다 소용돌이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었다. 블랙홀 같은 이 소용돌이를 건널 수 있는 배는 없는데다가, 섬 자체가 활동하는 화산섬이기에 하늘은 화산재로 언제나 어두컴컴했다. 생물은 살 수 없고, 그런 불편함을 감수하고 올만큼 대단한 무언가가 있는 섬도 아니었다. 그런 이유로 거의 방치되고 있었다.
“어떻게 아는 거야? 온 적이 있어?”
고개를 젓는다.
나는 본적이 없다.
그저, 젊은 시절 셀리안이, 좋은 왕이 되겠다는 패기로 키오스 전체를 돌아봤을 때 한 번 온 일이 있었다. 케틀리아 자체는 셀리안이 재차 확인해도 별 쓸모가 없는 섬이었지만, 이 광경에는 그도 제법 압도되었던 걸로 기억한다.
“여기서 너를 본 기억은 없는데.”
“네?”
“여긴 내가 사는 곳이니까.”
자기 집에 누가 방문하는지 정도는 확인해야지, 라고 이야기하며 진이 웃는다. 말하고 물끄러미 나를 보았다.
"온 적이 없는데 알고 있다는 건 역시... 네 것이 아닌 기억이 네게 있다는 걸까."
"미리 말해두는데, 전 에피룬 크레이누 따위 몰라요."
“따위인가... 그래도 네 것이 아닌 기억이 있긴 하다는 거지? 그건 아마도...흐음, 신기하네. 이것도, 뒤틀림의 한 현상인가.”
“...”
“또 기분이 나빠졌네.”
그 말 그대로다. 케틀리아의 광경에 압도 되어 한순간 멍해졌지만, 그의- 뒤틀림의 한 현상이느니 하는 내려다보는 듯한 말에 또 기분이 나빠지고 말았다. 과민반응일지도 모르지만, 그의 다 안다는 듯한 말이 유난히 싫었다. 그의 말로 미루어보면 그는 나에 대해 어렴풋이 짐작만 하고 있다. 결국 짐작하는 것뿐이다. 내가 다른 세계에서 온 존재인지도 모르는 주제에- 잘난 척이나 하고.
꾹 입을 다물고, 그를 외면하면 진이 내 얼굴 앞에 제 얼굴을 휙 들이대며 씨익 웃었다. 독보적으로 아름다운 남자의 얼굴에 한순간 멍해진다. 불가항력적이라 조금 분하고, 문득 이 남자가 제 얼굴의 위력을 아는 게 아닌가 싶다.
'점점 더 싫네.'
이놈의 외모지상주의.
“뭔가요?”
“기분전환을 시켜주지. 류나 렌의 변덕으로 데려오긴 했지만, 딱히 나는 너를 감금할 생각은 없어.”
“난, 할 건데... 하영은 내 거야. 내 것이 되도록 꼬실 거야. 그 편이 류도 나도 좋-으악!!”
“!!”
같이 이동된 렌이 웅얼대며 다시 내 손을 쥐려고 했다. 순간 진이 렌을 발로 찼다. 정말 순간적이었다. 가죽신으로 감싸인 매끈하게 뻗은 진의 다리가 렌을 가볍게 찼는데, 실제로 가벼웠던 건 아니었던 것 같다. 렌은 저항도 못하고 그대로 부글부글 끓는 용암으로 추락한다.
“...”
“...”
렌의 비명소리가 산을 울리고, 곧 풍덩 하는 소리와 함께 렌이 사라진다. 그로데스크하기까지 한 일련의 과정을 보고 진에게 시선을 주면 그가 어깨를 으쓱한다.
“쟤 아직 회복 안 되었거든. 특히 날개가. 설마 발차기 한 방에 떨어질 줄은 몰랐지만.”
“...”
“아, 걱정마. 안 죽었어. 용이 이 정도로 죽어서야 되겠냐.”
언젠가, 진은 제법 상식인이라고 생각한 일이 있었다. 어른스럽고 상식적이고, 류의 보모역할로 고생한다고까지 생각했었다. 하지만, 몇 시간 전의 대화도 그렇고 지금 그의 행동도 그렇고 생각을 수정해야 할 것 같다.
멀거니 진을 바라보고 있자면, 그가 제 볼을 가볍게 긁었고, 곧 그의 등에서 붉은 날개가 펼쳐진다. 그날, 신전 앞에서 도망칠 때 한 번 보았던 용암색과 흡사한 붉은 날개였다.
“타.”
“...싫은데.”
“좋아, 좋아.”
"뭐가, 좋-윽!"
진이 내 손을 잡은 채 나를 휙 들어올린다. 순간 마치 무슨 공이라도 된 것처럼 통 튀긴 내가 그의 날개에 가볍게 올려진다. 올려졌다. 물건도 아닌데 그가 나를 휙 올리는 순간 불가항력적으로 그의 날개에 타게 되었다.
“자, 그럼 갈까.”
“싫다니-흐읍!!”
진이 날개를 퍼득이고,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역시 용 따위는 다 그게 그거다. 정말 싫다-
*
검은 하늘은 높디 높고, 비현실적일 정도로 끓고 있는 용암은 붉고 붉었다. 붉고 붉은 대지를 감싼 푸르른 바다는 깊고 깊게 소용돌이치고 있다. 셀리안이 이 광경을 보고 느꼈던 감정을 나도 느낀다. 조금 숙연한 기분이 들기도 한다.
'왠지 또 눈물이 나올 것 같아.'
셀리안만 생각하면 우는 것도 꼴사나워, 부러 진의 머리를 향해 손을 들었지만 그는 렌과 달리 맞아주지 않는다. 게다가 하늘 위다 보니까, 아무래도 그에게 심한 발버둥을 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어느새 나는 입을 꾹 다물고, 그의 등 위에서 하늘을 보고 있을 수 밖에 없었다.
울고 싶지 않았지만, 소리없이 또다시 눈물이 나온다. 들키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으면 진이 입을 열었다
“...아까는 미안했다.”
나는 대꾸하지 않았지만, 그는 또다시 제멋대로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기진맥진한 탓인지 울고 있는 탓인지 그 말을 별다른 감정의 요동 없이 흘려 듣는다.
“감정적이었다고 할까. 이기적이었어.”
“...”
“그, 키도스 미실랭은 너와 인연이 있는 자였지. 그렇게 이야기하면 안 되는 거였어. 네가 약해서 그런 일을 당하는 게 당연하다고 말한 것도, 미안하다.”
“...맞는 이야기인데요. 뭐. 지금도- 나는 미실랭의 원수인 당신이랑 세상 구경이나 하고 있잖아요.”
약하니까, 태평하게- 비틀린 말을 내뱉으면, 진은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그런 이야기 하지마. 음...”
진은 팔을 들어 제 붉은 머리를 흐트러뜨렸다.
“내가 그런 식으로 이야기한 건, 내가 너를 좋아하기 때문이야.”
“하하, 필요없는데요.”
화산 위의 바람이라 그런지 뜨겁게 느껴진다.
"짜증나."
오히려 제발 그만 좀 좋아했음 좋겠다. 손을 들어 볼을 적시는 눈물을 닦아냈다.
또 에피룬의 환생이니 뭐니 알 수 없는 이야기로 호의를 토로하는 걸까. 지긋지긋하다.
게다가 왜 나를 좋아하는 게 그런 이야기로 이어졌다는 건지 알 수가 없다. 어떻게 이렇게 하나하나가 의미를 내포하고, 한 마디 한 마디에 진득하게 감정이 얽히는지 모르겠다. 심플해졌음 좋겠다. 상대의 이야기에 대해 지금 존재하는 윤하영만 생각하고 싶다. 그러면 편할 텐데.
하지만 모두에게 갖는 내 감정조차, 오롯이 윤하영의 감정일 수 없다는 걸 안다. 모두 뜨뜻미지근하고 모호하게 뒤섞여 있었다.
더 어이가 없는 건, 엘킨에 대한 감정, 히아신스에 대한 감정의 끝에 셀리안이 있다는 것이다. 만약, 만약 그래- 만약 셀리안 크레이누라는 사람이 내 전생이 아니라면- 나는 그에게 이렇게까지 관심을 갖지 않았을 것이다. 그 때문에 울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유리 같이 약한 사람도 아니고, 이 세상 누구보다 강하니까 말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내가 과연 에피룬 타령을 하는 이들에 대해 왈가불가 할 수 있을까.
"필요없어도, 좋아하는 건 어쩔 수 없지."
"..."
"어쩔 수 없는 거야. 우리의 감정은 전생과 연결되어 있고 그게 당연하니까. 연결된 걸 억지로 없는 걸로 생각할 수는 없잖아?”
“!”
진이 휙 몸을 돌리고, 나는 그의 날개에서 내려와 허공에 둥둥 떴다. 그는 나를 마주본다. 새삼 나를 확인하는 것 같다. 위아래로 본다.
“에피룬이 여자애라니-.”
“...애라고 할 나이는 아닌데.”
“응, 영혼도 애는 아니지만.”
진이 웃었다. 웃으며 내 손을 잡는다. 나는 뿌리치지 않고 그와 눈을 마주했다.
“키도스 미실랭이 그렇게 된 건 유감이다. 하지만, 그래도 나는 너에게 미움받고 싶지 않아. 너를, 좋아하니까. 그래서 변명을 했어. 나쁜 의도만은 아니었다고, 너무 싫어하지 말아달라고.”
“하...”
“후후.”
그는 내 머리를 뒤로 넘겨주었다. 넘겨주며 웃었다. 시간 가늠도 되지 않는 어둠 속에서 들끓는 붉은 화산, 그리고 저 멀리서 달이 반짝이고 있다.
나는 그를 용서하지도, 그따위 말에 호의를 갖게 되지도, 그를 이해하게 되지도 않았지만, 그는 마치 나와 마주 보는 것만으로도 만족한다는 것처럼 웃고 있었다.
*
계속 가둬둘 줄 알았는데, 그 후에는 종종 내 의지와 상관없이 케틀리아에서 함께 식사를 하거나 진의 날개를 타고 하늘 위를 날거나 하며 지내게 되었다. 케틀리아 자체가 워낙 고립된 화산섬이라 내 힘으로는 함부로 도망칠 수 없기에 가질 수 있는 자유였다.
그들에 대한 감정은 변하지 않았지만, 함께 있는 시간이 늘어나는 만큼, 평범하게 지낼 수밖에 없게 되었다. 거의 24시간 같이 있는 자를 향해 매일 같이 화를 내고, 매일 같이 외면만 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무엇보다 내게 그들을 거부할 만한 힘이 없었다.
하지만 아무리 핑계를 대도- 그것은 마치, 내게는 별로 미실랭이 중요하지 않았다는 반증 같아 조금 괴롭다는 걸 빼면, 나는 이 용들과 지내는데 익숙해지고 있었다.
============================ 작품 후기 ============================
짧다...ㅜㅜ;; 비축이랍시고 만들어놓은 게 있는데 퇴고할 게 너무 많아 오늘은 여기까지.
자두맛사탕쪼아 님, 모이란 님, 카페모카ICE님, 아무개23님, 르레 님 후원쿠폰 감사드립니다.;ㅁ;// 다섯분이 주신 후원쿠폰의 힘으로 가지춤, 뿌리춤에 이어, 새롭게 줄기춤을 추겠습니다~ >ㅁ<(여러분이 이런 개드립을 용서해주시니까 자꾸 치게 되네요.//// ㅎㅎ)
해랑나랑 님 // 저도 요즈음 글 쓰다가 문득 류 생각을 합니다. ㅋㅋㅋ 류는 하영이랑 감각이 공유되는 덕분에 셀리안으로부터 완전 소중히 다뤄질 텐데 하영이는...ㅜㅜ 흑흑
@ 안나가 먼저 에피룬을 짝사랑했고, 에피룬은 나중에 그녀를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일단 왕이다 보니까 그 전에 결혼해서 자식을 봤고요. 후에는 키오스를 위해 희생하려고 했기 때문에... 정비가 될 수 없는 안나를 자신 곁에 묶어 둘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복잡한 새끼고, 여자한테는 똥차네요.
스즈카 님 // 사실 리리플 잘리신 게 아니라, 제가 답을 쓰다보니까 막 길어져서 구렁이 담 넘듯 넘어가려고 했(소근소근) 죄송해요.ㅋㅋ 어떻게 스즈카님의 리리플 요청을 못 봤겠어요...봤는데 쓰다보면 외전 한 편 나올 것 같아서 ㅋㅋ 용서해주세용. 으음... 여기의 일을 꿈으로 봤다고 한 하영이의 말에 대한 생각은... 간단하게 말하면 반신반의했습니다. 거짓이라고는 생각하진 않지만, 온전히 진실이라고도 생각하지 않았달까. 그렇습니다.ㅎㅎ
푸푸님 // 감탄사 같은 기분이 들지만 일단 @를 보면 리리플을 달고 보는 저... ㅋㅋ 재미있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