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21 114 =========================================================================
있는 빛은 진이 만들어낸 등불 같은 빛이다.
검은 방, 화산재로 덮힌 케틀리아-
검은 방의 어둠 속에서 눈을 떴다. 어두운 방은 언제까지 밤이고 언제까지 낮인지 알 수 없게 했다.
그럼에도 하루 하루 날을 셌다. 이 즈음이면 하루가 지나겠지, 그 다음 또다시 하루가 지나겠지- 그런 식으로. 진한 어둠에 침몰해가는 꿈을 꾸고 일어나 용이 만든 등불을 확인하는 것으로 하루하루를 가늠했다.
그런식으로 일주일 정도 지났다고 가늠했다.
일주일이란 날들은 셀리안을 생각해도 눈물부터 나지는 않게 해주었고, 전생에 얽매인 용들과 나름대로 어떻게 지내야 할지 감을 잡게 했다.
함께 한지 일주일이 지난 날, 나는 일부러 생각하지 않았고 언급하지 않았다. 진과 렌은- 글쎄 모르겠다.
렌은 나를 향해 설사 거짓일지라도 '전생따위 상관없다'고 고백했으며, 나는 히아신스를 생각하며 진에게 '전생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고 질문했다. 진은, 담담하게 내게 대답해준다. 전생과 영혼에 대해-
그들과 함께 한지 일주일, 어쩌면 일주일, 정확히 일주일, 그렇게 일주일이 지나-
오늘은 그가 태어난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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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진이 깍지를 끼고 나를 마주 보았다. 그는 다 먹은 샌드위치의 잔해들을 용암 속으로 던져 넣었다. 딱 렌이 빠진 부분으로 녹아들어가는 샌드위치 포장지를 보니 기분이 묘하다.
"갑자기 내 영혼론은 왜 묻는 건데?”
진의 영혼론, 표현은 미묘하지만 어쨌든- 그는 키오후처럼 억지로 전생을 기억해야 한다는 데는 동의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게 어디까지 진심인지는 알 수 없지만, 내 비위에 맞춰 괜한 이야기를 하는건 아니리라. 그는, 내 눈치를 보긴 했지만 완전히 나에게 맞춰서 말하지 않는다는 건 렌과 비슷했다. 좋아한다 좋아한다 연호해도, 결론적으로는 자신들의 생각을 바탕으로 사과하고 유혹하고 설득하려고 했다.
그렇다면, 나는 그 고집을 신뢰하고, 나에 대한 호의를 이용할 수밖에 없다. 이용이라고 하기에도 뭐하긴 하지만.
"묻고 싶다고 할까, 조언을 구할 게 있어요."
"내게?"
마음을 가다듬었다.
그들이 나를 아무리 좋아한다고 해도 온전하게 나는 그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더이상 사랑의 감정에 메스꺼움을 느끼거나 두통이 오진 않았지만, 그조차 왜 사라졌는지 알 수 없다. 본질적으로 나는 나를 향하는 감정들에 피로를 느끼고 있었고, 지금은 더 했다.
윤하영이라는 여자는 몹시 건조한 여자였건만, 나는 이제 내가 어떤 사람인지조차 가늠이 가지 않는다. 그저 흘러가며, 흘러가는 동안 받는 감정은 너무도 무거워 그저 피로하고 암담할 뿐이었다. 암담했지만 외면할 수 없다.
감정과 감정, 그것은 내가 전생에 얽매여 있기에 취한 태도들이 만든 감정이었고,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았건만 전생에 얽매인 이들의 마음 속에서 멋대로 피어난 감정들이었기 때문이다.
"진-그때, 신전에서-"
"?"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한정되어 있고, 한정된 만큼 정보가 필요했다. 힘이 없는 윤하영의 유일한 강점인, '알고 있다'는 것조차 에피룬과 관련된 이들이 등장하며 무용해졌다. 그렇기에, 나는 눈앞의 용에게 묻기로 한 것이다.
히아신스의 전생이 어떤 건지 알고 싶었다. 사실 알고 싶지 않았지만, 알아야 했다.
그 다음은 전생의 기억을 억지로 불러일으키는 것에 대한 처리- 키오후는 히아에게 전생을 끌어내려고 했고 그런 식의 마법은 사후처리가 꽤 성가셨는데, 셀리안은 전생이나 영혼 쪽에는 관심이 없어서 내게도 지식이 없었다.
“히아신스를 보고 멈칫했었죠?”
"..."
내 물음에 진은 나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그 표정은 조금 묘했다. 물론 그가 히아신스라는 이름을 모를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그는 세류 키스톤으로서의 류를 대신해 잡일들을 처리했던 것 같다. 알 가능성이 높았다. 그뿐 아니라, 정말 그가 신전에서 히아신스에 대해 신경을 썼던 거라면-
“...진?”
"..."
"혹시 모르나요. 히아신스 에이나라고-"
"알아, 아는데... 갑자기 그런 건 왜 묻는데."
딱딱하게 진은 일갈했다.
'역시.'
그는 히아신스를 알고 있다. 어쩌면, 아니 분명히 신경쓰고 있다. 지금의 표정은 묘하게 렌에게 화를 냈던 때와 비슷하다.
'이야기하고 싶지 않아 하고 있어.'
차단하는 듯한 서늘한 시선에 실수한 걸까, 싶었지만 주사위는 던져졌다. 어디부터 이야기해야 할지 조금 고민한 뒤 웃는다.
"저는 차면 안 돼요. 죽는다구요."
"...하."
"..."
"교활하군, 안 차. 말했잖아. 너는 빠지면 죽는다고."
그는 어깨를 으쓱하며, 조금 풀어진 얼굴로 나를 보았다. 나는 살짝 고맙다는 뜻으로 고개를 숙인 뒤,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키오후씨라고 아시나요?"
“...니가 어떻게 그 물뱀의 이름을 알아?”
내 물음에 진의 눈이 다시 날카로워진다. 조금 움찔했지만, 이번엔 나를 향한 차단이 아니다. 용기를 내 말을 잇는다.
“아시는 것 같네요. 그 키오후씨가 지금 왕성에 있어요.”
“...뭐?”
“그 사람이...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는데. 히아신스에게 전생의 기억을 불러일으키려고 해요. 그래서, 히아신스가 지금- 아야.”
벌떡 일어난 진이 내 어깨를 붙잡는다. 아플 정도로 꽉 붙잡았다. 그의 은색 눈이 위험스럽게 빛났다. 역시 실수였나? 아니 실수는 아니다. 단지 위험할지도 모른다. 이번에도 위험한 건 내가 아니다.
'위험한 건- 위험해지는 건-...?'
저 눈을 본 적이 있다. 그야, 진의 눈은 요 며칠 계속 봤으니까 보고 자시고 할 것도 없지만, 좀더 예전에 좀더 오래 전 기억에.
저 눈을, 저 은빛 눈을 본 적이 있는데.
“히아신스, 히아신스라는 아가씨가 전생을 기억해냈나?”
“아뇨, 그게- 언젠가부터인가 꿈을 꿨다고 해요. 왜인지는 모르지만, 전에는 꾸지 않던 꿈을 꾸게 되었는데, 그게 키오후씨가 오고부터 같아요. 그리고, 최근에 키오후씨가 그게 단지 꿈이 아니라 전생이라고 이야기해준 모양이에요.”
“...”
그의 손에서 힘이 빠진다. 나는 약간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그를 본다.
“그뿐인 것 같지만, 여전히 꿈도 꾸고 최근에는 기억이 누락될 때가 많아졌다고 해서.”
머뭇머뭇, 상담하려고 했던 이야기를 꺼내는 순간, 진이 가볍게 숨을 몰아쉰다. 참는 것처럼 천천히.
“...내가 어떻게든 할게.”
“에?”
“아가씨는, 그 아가씨가 기억이 오락가락해서, 걱정된다는 거잖아. 전생을 억지로 기억해내는 것도 싫지?”
“그...렇죠.”
시원스런 대답에 놀랐다. 그의 등에서 갑작스레 날개를 돋아났다. 붉은 날개가 활짝 펼쳐지고, 어쩐지 주변의 대기가 좀더 뿌옇게 변한다. 용암의 연기와 재들이 휘날리고 있다.
"다녀올게."
"에?"
"해결하고 올게."
진이 발을 찬다. 그는 살짝 떠올랐다. 떠올라 천천히 나를 보고 있던 고개를 돌려 하늘을 향해 퍼득였다. 안 좋아진 날씨로 인해, 진의 표정은 이상하게 잘 보이지 않는다.
"잠깐만요!"
나는 다급하게 그를 불러세운다. 해결해주길 바란 게 아니다. 조언이라도 구할 수 있을까 싶었던 것뿐이다. 더불어 히아신스의 전생에 대해서도 듣고자 했던 것뿐이다.
"잠깐만요. 해결한다니, 왕성에 가는 건가요? 그럼 저도 데려가줘요!"
그가 왕성으로 가겠다고 할 줄은 몰랐다. 당장 히아를 구하겠다고 할 줄도 몰랐다. 그렇다면, 나야말로 언제까지 이곳에 있을 수는 없다. 갈거라면, 데려다 주었음 했다. 나는 돌아가야 한다.
그곳에는 엘킨이 있고, 히아가 있고, 셀리안이 있었다. 직접 갈 거라면, 진에게 말할 필요도 없었다. 가서 확인하면 된다. 나는 셀리안에게 말했으니까, 부탁했으니까.
그리고, 셀리안은 그녀를 구하겠다고 이야기했다. 그가 해결해줬을 것이다. 이것은 굳이 말하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내가 드는 보험일 뿐이다.
'상처 입은 눈으로, 명백하게 달라진 눈으로 나를 위로하듯 이야기했지.'
아니, 지금의 셀리안은 다르다. 그는 내가 기억하는 전생과는 다르니까.
'다르지 않을지도 몰라, 그는 나를 사랑하게 되었으니까. 엘킨을 사랑하게 되고 히아를 죽였듯, 나를 사랑하게 되었으니까 이번에도-'
이번에도? 어떻게 되는 걸까.
셀리안이 나를 사랑한다고 머릿속으로 정리하는 순간 버겁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곧 고개를 젓는다. 어느쪽이든, 그것과는 관련이 없다.
나는 그를 떠나지 않을 것이다. 히아신스가 죽을 필요는 없다. 없을 것이다.
"무엇보다 오늘 왕성에 당신이 가는 건 잘못된 선택이에요. 어쩌면 오늘은-"
"..."
그래 오늘은, 오늘은 그의-
“!"
"진?"
"지금...물뱀의 호수가 말라붙었다.”
내 말을 묵묵히 듣고 있던 진이, 놀란 것처럼 중얼거린 건 순간적이었다.
*
"지금...물뱀의 호수가 말라붙었다."
진이 놀란 듯 이야기하고 바로 허공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그가 향한 허공에 시선을 주면, 허공이, 하늘이 찢어지는 기묘한 광경이 펼쳐졌다.
기본적으로 이곳은 낮에도 어두웠다. 화산재가 하늘을 덮었기 때문이다. 곧 그 어두운 검은 하늘을 잡아 찢고 황금색 빛이 쏟아져들어왔다.
그것은, 마치 떠오르는 태양처럼 눈부시기 그지없는 빛이다. 아니, 태양보다도 더한, 있을 수 없는 광명- 그 속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영-”
그 목소리가.
"!"
황금빛 속에 그가 있었다.
빛이 점점 사그라들고, 그의 표정이 보였다. 그의 얼굴이 보였다. 붉은 눈동자가 안도와 사랑스러움을 담아 나를 본다. 알고 있는 눈, 아니 그보다 강하게 나를 꿰뚫을 것처럼 바라보는 부드러운 눈동자.
강하고, 오만하고, 언제나와 변함없이-
"무사했군."
나를 안심시키듯 바라보지만, 그 안에서 애원을 본다. 불안하게 나를 바라본 그가 내게 손을 뻗는 걸 슬로모션처럼 바라보았다. 뻗어오는 손을 멍하니 보고 있으면, 그 손이 멈춘다. 닿지 않은 채로 멈칫 내 눈을 바라보고 있었다.
"...리안."
"아아-"
이름을 부르면, 탄식하는 것처럼 대답하고 셀리안은 한 걸음 떨어져 있다. 나는 그런 그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왜 몰랐던 걸까.
왜 이렇게 된 걸까.
“...!!”
셀리안의 붉은 눈동자가 흔들린다. 그가 다급하게 나에게로 다가온다. 다가오지도 못하고 한 걸음 떨어져서 바라보더니 화들짝 놀라 내게로 달려오듯 다가왔다.
"왜?"
"왜는 짐이 할 말이다, 왜, 우는 것이냐. 무슨 일이 있었느냐.”
그는 안절부절 못하는 얼굴로 내 눈가를 어루만진다. 그의 눈이 매섭게 허공의 진을 노려본다. 진은 굳은 채로 천천히 그의 이름을 불렀다.
“셀리안, 크레이누.”
천천히 조심스럽게, 단호히 불렀지만 진의 눈은 흔들리고 있었다. 황금빛 속에서 흐려진 날씨 따위는 무색해지고, 그의 표정이 드러났다. 그것이 방금 전과 같은 표정인지는 알 수 없다.
원래, 렌과 다르게 셀리안에게 초연한 척하는 느낌이 강했던 진이었지만, 신전에서는 그리운 시선을 보냈다. 나도, 셀리안도 눈치 챌 정도로 숨기지 못한 그리움.
“...셀리안 크레이누, 너- 물뱀의 일족은 어떻게 한 거냐.”
하지만, 지금 그의 눈은 경악의 감정만을 담고 있었다.
============================ 작품 후기 ============================
림토마님님~YouURin님~ 후원쿠폰 감사합니다. 배고픈 금요일입니닷>ㅁ/ 후원쿠폰으로 배불러졌어요.ㅎㅎ
네르비안 님 // 양파깎을 때 썼던 단검이 진입이다. 큐큐.
1.안나를 짝사랑하는 생물학적 남성체는 둘인가요. 키오후랑 진.
-ㅋㅋ 글쎄요, 주인공이 안나가 아니라 그렇게 많이, 자세히는 안 나올 듯.ㅎㅎ
2. 그나저나 류는 다시 낳은 거 말고도 무슨 다른 중요한 영혼의 환생인가요? 아니면 그냥 렌과 진이 정든 거?류가 셀리안과 하영보다 그릇이 크다니.. 어떤 의미인지 모르겠습니다. 용들마저 포용해주는 포용력인가요? 에피룬이면 모를까, 류는 도덕에 무지해서 그들의 행동이 잘못된 줄조차 모르고, 그래서 스펀지처럼 받아들이는 것 같은데요..
- 류에 대해서는 나중에 꼭 풉니다. 근데 얘가 주인공이 아니라 어떤 타이밍에서 풀어야 할지 고민중입니다.ㅎㅎ 류에 대해 진이 포용력 어쩌고하는 건 반은 콩깍지 현상입니다. ㅋㅋ
3.앞으로의 전개나 복선회수를 눈여겨볼 때 누구를 보면 이해가 쉬워지나요?
-...포기하세요. 이 글은 쓸데없이 복잡한 게 어느새 아이덴티티가...(퍽퍽)
4. 진의 말이요.. 류의 그릇이 셀리안이나 하영보다 크다고 칭찬하는 거.. 에피룬의 환생 앞에서 언급하는 걸 보면 '내 사랑이 에피룬에게서 떠났다'&'나 새로 사랑하는 사람 생김. 이 인간이 더 내겐 완벽해'를 엄청 돌려말하는 거죠?ㅋㅋㅋㅋ
이건 마치 솔로 앞에서 '내 애인 예쁘다~'하고 자랑하는 인간을 보는 느낌..(깊은 빡침)
- ㅎㅎ 콩깍지는 위대합니다!!
시은랑 님 // 리코멘의 기쁨이란!! 셀리안 오늘 나왔어용.쿄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