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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7
“엘킨-”
목소리가 울린다. 그를 부르는 나의 목소리-
이것은, 히아신스가 죽기 전날의 기억이다. 셀리안 크레이누는, 아니 나는 천천히 엘킨에게로 다가갔다. 엘킨 다이브는 칼미온에 있는 자신의 방에 있었다. 원래가 담박한 엘킨이었지만, 방은 좀더 썰렁한 느낌을 주었다. 마치 떠나려는 사람처럼, 짐이 없는 방.
"엘킨-"
대답없는 그를 향해 한 번 더- 자신의 목소리에 화들짝 놀란다. 낮게 낮게 긴장한 목소리는 가라앉아 쉰 것처럼 음습하다.
“폐하.”
엘킨은 내 목소리에 침대에 앉아 있던 몸을 일으켜 바닥에 무릎을 굽혔다.
“정말, 그 생각에 변함이 없느냐.”
아니, 떠나려는 사람처럼이 아니다. 그는 떠날 것이다. 나를, 나를 떠나고 말 것이다.
“폐하께서 불충한 저를 생각해주신 점, 감사합니다.”
엘킨은 일어나지 않았다. 셀리안 크레이누는 그의 숙여진 머리를 망연히 바라본다. 기사의 눈동자는 흔들림이 없겠지. 흔들림없이 셀리안 크레이누를 셀리안 크레이누라 긍정했던 그 날처럼 흔들림 없이- 나를 떠나겠다고 하는 것인가.
“정말 떠나겠다는 것이냐.”
“죄송합니다.”
나는 무릎을 굽힌다. 그를 일으켜 세우지 않고 그와 같은 눈높이로 무릎을 굽히면 엘킨이 당황하는 게 느껴졌다.
투명하게 청명한 눈동자를 마주했다.
"엘킨-"
"폐하, 이러시면-"
놀란 듯, 만류하려는 엘킨을 향해 나는 다시금 묻는다.
“정말로... 짐을- 떠나겠다고?”
"..."
"정말로?"
“...제 마음은 폐하와 함께 할 겁니다. 폐하가 진정한 성군이 되시길- 바라겠습니다.”
잔혹하고, 사랑스러운 너는 나를 믿고 나를 떠난다고 이야기했다.
*
눈을 뜬다. 나무로 된 천장이 보였다. 눈을 깜빡인다. 알고 있는 천장, 익숙한 천장이었다. 아니 모르는 천장이지만 저런 식의 천장들을 알고 있다. 나무로 얼기설기 엮어진, 가난한 마을의 나무집에 흔하게 있던 천장.
손가락을 움직여본다. 손가락은 문제없이 움직이고 발가락을 움직이면 발가락도 마찬가지다. 몸에는 이상이 없다. 오히려 한숨 잔 탓에 가뿐함까지 느껴지는 것 같다.
나는 몸을 일으켰다. 몸을 일으키며 조심스럽게 경계했지만 아무도 나를 막지 않는다. 그대로 벌떡 일어나 나무 문으로 달려간다. 삐걱삐걱 나무바닥이 울리고, 바닥 역시 익숙하다. 도달한 문 역시 아는 방식의 문이었다.
미는 게 아니라, 손잡이를 돌린 채 당긴다. 바람이 부는 이곳에서는 그냥 밀거나 당기는 걸로 열리거나 닫히는 문은 무용지물이 되니까.
문을 여는 순간 얼굴에 모래가 부딪쳐 나는 반사적으로 다시 눈을 감았다. 눈을 감았지만 바람에 실려 모래바람이 얼굴을 친다.
올려다보면 아침인데도 뿌연 하늘이 있다. 황톳빛 하늘- 그 아래 나를 감싸는 바람은 모래를 실어왔다. 사막, 아니 모래바람-
“지온-”
“그렇습니다.”
목소리에 고개를 드는 순간, 옆에서부터 엘킨이 짐바구니를 들고 다가왔다. 그가 든 짐바구니에는 당근과 기타 먹거리가 들어있다.
“일어나셨나요.”
“엘킨-”
엘킨이다. 엘킨이었지만 그의 푸른 머리카락은 짧은 갈색 머리카락이 되어 있었고, 그의 눈동자도 마찬가지로 갈색이다.
멍하니 보고 있으면 그가 쑥스러운 듯 웃는다.
“마법으로 바꿔봤는데 어울리나요?”
“어울리다니... 대체 이건.”
“야, 우리 무슨 형제 같다. 기분 나쁘게.”
뒤에서부터 누군가가 내 어깨를 놀래키듯이 잡았다. 뒤돌아 바라보면 류였다.
"안 놀라네- 으음, 놀란다는 기분도 알고 싶었는데."
"류..."
"아, 역시 네가 부르는 내 이름이 제일 좋아."
류 역시 갈색 머리카락에 갈색 눈이다. 요요하게 빛나던 황금빛 눈동자는 갈빛 눈동자가 되어, 가느다랗게 접혀 휘어졌다.
“방에... 있었어?”
“응, 숨어 있었지. 아무리 너라도, 내가 작정하고 숨으면 모른다는 게 증명된 거지.”
그가 키들거리며, 내 어깨를 감싸려는 순간 엘킨이 빠르게 다가와 그의 어깨를 밀어낸다.
“일단, 식사를 하죠. 배는 자정에 온다고 하니까요.”
“치사하게, 게다가 그 짐은 왜 그꼴이야? 당근이랑 양파가 왜이렇게 많고?”
"당신이 싫어한다면 최고군요."
"싫어하는 거 아니거든!"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건지 모르겠다. 혼란스러운 마음에 나는 엘킨을 바라보았지만, 그는 내 시선을 마주하며 그저 부드럽게 웃을 뿐이다. 어째서? 어째서- 나는 조금 조마조마한 마음이 된다.
“나름대로, 나랑 하영의 추억의 음식이니까!”
“하영은 금시초문 같은데요?”
어째서 류가 여기 있는 거고, 둘이 친한 듯 이야기하는 걸까. 왜 우리가 지온에, 키오스의 끝에서 이런 모습으로 머물고 있는 걸까.
“엘킨!!”
소리를 지른다. 소리를 지르며 엘킨을 마주하면, 간신히 두 사람 사이의 대화가 멈추었다. 그들의 시선이 나를 향하고 그 침묵의 힘을 빌려 물어야 할 걸 묻기로 한다.
“어째서, 우리가... 여기에 있는 거죠?”
“...”
“아니, 아니죠.”
아니다. 아니야. 말이 잘못 됐어. 이런 질문은 조금 이상해.
지금 내가 생각하는 건 말도 안 되는 것이다. 질문을 바꿔야한다. 우리가 왜 여기에 있냐니, 그 말은 마치 엘킨이 셀리안으로부터 나를 떼어놓았다는 걸 전제로 한 것 같지 않나.
“일단 저만 데리고 도망치시기로 한거죠? 폐하는 지금 많이 지쳐 있다고 하니까...”
셀리안은 지쳐 있다. 많은 마나를 썼고, 아무리 셀리안이라도 그것은 과부하다. 나를 데리고 진으로부터 도피하는 건 그에게조차 조금 버거울지도 모른다. 그러나, 셀리안 혼자라면 무리가 없을 것이다.
그래서, 엘킨이-
그게 가장 맞다.
솔직히 나까지 있으면 혹시 잘못해, 셀리안이 진을 ‘죽일’ 수도 있었다. 진을 좋아하지 않는다. 새삼 정이 끓는 것도 아니다. 미실랭의 원수란 건 잊지 않고 있다. 잊지 않고 있지만 어쩐지 그를 셀리안의 손에 죽게 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셀리안이 ‘나를 위해서’ 누군가를 죽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여기에, 먼저 피해 온 거죠?”
잘 생각해보면 여기는 키오스다. 셀리안의 나라 키오스. 그 끝인 지온이라도 그랬다. 그래, 잘못 생각한 거야. 그는 셀리안과 미리 이야기해, 나를 데리고 먼저 키오스로 오기로 한 거다. 이동마법은 단거리로 한계가 있다. 그래서 천마 아니온을 타고 일단 지온에-
이제 곧 셀리안과 합류해 왕성으로 돌아갈 것이다.
“네, 폐하가 지쳐 계신 지금이 기회니까요.”
“기회? 아. 진으로부터, 그러니까 그, 붉은 용으로부터 저를 데리고 먼저 도망치기로 이야기하셨다는 건가요?”
모르겠다. 내 말이 전혀 이치에 맞지 않는다는 걸 인식하면서도 더듬더듬 호소한다. 그는 지금 분명히 진이 아닌 ‘셀리안’으로부터 도망친 것 같은 뉘앙스로 이야기했건만.
나도 내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모르겠으니까.
다만, 하나는 안다. 나는 엘킨과 행복해질 거다. 행복해져야 한다. 그 궁에서, 나도, 엘킨도, 히아신스도- 셀리안의 곁에서 행복해지겠다고 방금 결심했는데.
“울지 마십시오.”
“울어?”
“응, 너 울고 있어. 우와, 진짜 아프다. 혹시 렌들과 같이 있으면서도 울었어? 울어서 아팠던 건가?”
류가, 내 눈물을 닦으려다가 엘킨에게 저지당했다. 류가 부루퉁하게 투덜거리고, 엘킨이 손수건으로 내 눈물을 닦아준다. 다정한 손길, 뒤에서부터 류가 칭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완전 아파서, 걱정했어.”
“아프...다고?”
류가 내 눈 앞에서, 제 심장 부근을 가리켰다.
그와 나는 감각이 공유되고 있다. 아마도. 하지만, 심장이 아팠던 일은 없다.
"이상한 소리 하지마. 우는 것도 별 거 아니야. 그보다, 대답해줘요. 엘킨-"
별일 아니라고- 별거 아니라고.
왜 류가 여기에 있고, 왜 엘킨은 나를 데리고 지온에 온 건지 그 대답은 그의 한 마디로 정리될 수 있었다. 다 셀리안하고 이야기가 되어 있는 게 맞겠지. 맞아야 하는데.
"윽, 진짜 아프다.
“아니야, 아니야!! 아프지 않아! 나는! 눈물은 그냥 흐르는 것 뿐이야.”
"뭐, 아프지야 않겠지만. 진의 결계가 사라졌으니, 우리의 공유는 진해질테고, 네가 느끼지 못하는 건 나도 느끼지 못하게 되겠지만."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어."
나는 류로부터 시선을 돌려 엘킨의 수건으로부터 물러난다. 눈물은 줄줄 흐르고, 머리는 그저 빙글빙글 돈다.
“엘킨- 어서 대답해줘요!! 류는, 아니 우리는 왜!!”
“그야, 나랑 얘, 동맹을 맺었거든.”
대답은 류로부터 들려왔다.
“동맹?”
“셀리안 크레이누로부터 너를 멀리 떨어뜨려놓는 동맹. 이제부터 우리는 시모갈, 내 고향에 갈 거거든! 그리고, 도착하고 나서는 동맹은 깨지고 나는 너를 엘킨 다이브로부터 빼앗는 거야.”
“불가능할 겁니다만.”
“뭐?”
셀리안 크레이누로부터 나를 멀리 떨어뜨려놓는다고?
나는 엘킨으로부터 멀어졌던 걸음을 내 스스로 좁혔다. 그게에로 다가가 손을 뻗어 엘킨의 얼굴을 잡았다. 호수 같은 푸른 눈은 갈빛을 띄고 있지만, 색이 중요한 게 아니다. 여전히 청명하고 올곧게 나를 보는 엘킨의 눈동자.
“무슨 소리를, 하는 거예요? 나, 이해가 안 돼서.”
셀리안 크레이누로부터 나를 떨어뜨려놓는다니.
“계속 우시는군요.”
“읏- 이건, 신경 쓰지 마세요. 오늘 놀랄 일이 너무 많아서 흐르는 거니까, 곧 멈출 테니까.”
그의 얼굴을 붙잡은 한 손을 떼어 눈을 비빈다. 분명 진이나 렌과 함께 하고 눈물이 잦아든 것처럼 이 눈물도 멈출 것이다. 나는 손을 들어 눈을 비볐다. 슥슥 비비고 있으면 엘킨이 내 손을 잡아 그것을 막았다.
“하영, 저를 사랑하십니까.”
조금 멍해지면, 엘킨은 한 손으로는 눈을 비비고 있던 내 팔을, 다른 한 손으로는 그의 얼굴을 잡은 내 팔을 잡는다. 잡고 내 손에 가볍게 입을 맞춘 뒤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웃었다.
“저는 사랑합니다.”
“엘킨-저도.”
반사적으로 사랑을 고백하려고 했지만, 막히고 만다. 엘킨의 입술이 내 입술을 막았기 때문이다. 차가운 입술이 내 입술에 닿아 깊게 들어오지도 않고 멈춘 채 갈빛 눈동자는 변함없이 호수처럼 나를 비춘다.
‘이상하네.’
윤하영은 매우 무감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줄줄줄 눈물을 흘리며, 새빨개진 눈으로 엘킨을 보고 있었지만 그 표정은 얼음처럼 굳어 있어, 그 모습이 생소하다. 내 얼굴에 내가 놀라 멍해 있으면 한참이 지나서야 입술이 떨어졌다.
“당신은, 저에게 저답게 있어 달라고 이야기, 했습니다.”
“...”
“사랑한다고 해주었습니다.”
엘킨은 조금 틈을 두고, 기사다운 올곧은 자세로, 올곧은 시선으로 나를 보았다.
“그날, 저는 구원받았습니다. 당신에게.”
“엘-”
“사랑을, 저 자신을 지킬 수 있었습니다. 당신이 지켜준 겁니다.”
기묘한 데자뷰가 있다.
가지 말아달라고 애원하는 셀리안에게 엘킨은 드물게 완강하게 거절한다. 몇 번이고- 아마 엘킨은 직감적으로, 셀리안이 점점 그에게 집착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성군이었던 그가, 행동이 변하진 않았지만 묘하게 방향성이 달라져 있다는 걸. 가는 길은 같지만 흔들리고 있다는 걸..
그걸 알았던 엘킨은-
“그걸로 충분합니다. 그 순간 당신은 저를, 선택하셨으니까요."
그의 눈은 올곧고 울 것 같았지만 애정을 담고 있다.
"그때, 당신은 버리신 거지요. 고통을."
"고통을?"
"그 순간 저도 맹세를 했습니다. 당신을 행복하게 해드릴 겁니다. 진정한 행복을 드릴 겁니다. 그리고, 이 나라를 지킬 겁니다.”
기사의 눈에는 더 이상 어둠이 없고, 그의 눈은 윤하영에 대한 따뜻하고 배려넘치는 애정을 담았다.
"그게, 엘킨 다이브니까요."
나를 보는 갈빛 눈동자, 고결하고 청아한 ‘내가’ 사랑했던 눈동자로, 기사는 맹세처럼 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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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화는 10/7 00시에 올라옵니다//(죄송해요. 수정수정...;ㅁ;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