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루나 패러독스-125화 (125/155)

00125  Side story8  =========================================================================

“하영...제발.”

엘킨 다이브는 애원한다. 그녀를 향해- 절박하게 읊조렸다. 모든 것을 버리겠다고, 그녀만의 기사가 되겠다고 이야기했다. 윤하영만을 생각하는 그런 삶을 애원했다.

"안돼요."

그리고, 여자는 그 소망을 거절한다.

"하영!“

“엘킨, 좋아해요.”

“!”

소망의 거절은 가장 달콤한 말로부터 시작되어.

마음은 이미 너덜너덜해져, 사실은- 엘킨 다이브가 가장 엘킨 다이브답게 존재하기 위한 방법은 그뿐이건만. 올곧게 누구도 배신하지 않고 누구에게도 거짓을 고하지 않고 윤하영만을 바라보는 것이건만.

"사랑해요."

“...”

“아주, 오래 전부터.”

엘킨은 입을 다문다. 그 달콤함에 취해.

마음속 어딘가에서 외치는 소리가 있지만 무시한다.

그것은 마치 주문처럼 윤하영의 입에서 넘쳐흘러 엘킨 다이브의 입을 막아버린다.

"사랑해요."

라고,

전신이 떨릴 만큼 달콤한 소리에 엘킨 다이브는 입을 다물었던 것이다. 여자의 눈이 점점 가라앉아 가는 걸, 사랑이 지는 걸 그저 지켜만 보고 말았다.

Side story8

"가장 큰 사랑에 의해 고귀한 자를 파멸시키고 고귀한 자에게 파멸될 것이다- 저는 당신의 고귀한 자는 저 카밀라 에일리가 될 거라 생각했었지만요."

연회가 한창인 장내를 벗어나면 왕궁의 정원으로 통하는 테라스가 있다. 테라스에는 연회의 요란스러움과는 차단된 고요함이 떠돌고 있었다. 문 하나만 열면 떠들썩한 연회의 열기와 마주하게 되는 게 기이할 정도다.

"저 이번에 결혼해요."

테라스의 난간에 기댄 연둣빛 눈동자의 영애는 붉은 머리카락을 제멋대로 손가락에 감았다. 빙글빙글, 버릇인 것 같기도 하고 초조한 것 같기도 한 몸짓으로 제 앞에 선 푸른 기사를 요염하게 흝어보았다. 어떻게 바라봐도 남자가 자신에게 움직이지 않을 걸 알면서도 말이다.

"축하 드립니다."

"정말- 잔인한 분."

역시나 푸른 눈동자는 상냥한 빛을 띤 채 흔들림없이 자신을 바라볼 뿐이다. 그것이 분하다. 분하지만 소용없다는 걸 이제는 안다.

카밀라 에일리는 엘킨 다이브가 좋았다. 아마 지금도 좋아하고 있다.

처음에는- 호기심이었던 것 같다.

아버지 영지의 용병단은 귀족에게 속해 있기에 안정적이기는 했어도 용병은 용병이었다. 사납고 거칠고 돈이라면 모든지 하는 자들. 딱히 아버지에게 충성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녀의 아버지 에일리경이 용병 다루는 법을 잘 알고 있었기에 복종하는 것이었다.

그들을 찾아온 엘킨 다이브는, 용병들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남자였다. 베일 것 같은 새하얀 피부와 하늘과 같은 푸른 머리카락, 호수 같이 푸른 눈동자. 그 손은 확실히 무인의 손이었고, 그의 몸도 결코 허약하지는 않았지만, 무언가 이질적었다. 남자는 용병보다는, 용병을 부리는 성의 영주에 어울리는 풍모를 가지고 있었다. 아니, 아니다. 영주와도 다르다. 인간과도 다르고, 그렇다고 그의 반이 엘프이기 때문이라고 치부하기도 묘한 분위기-

그에 반하는, 추잡한 소문-

엘킨 다이브와 레시온 공작의 약혼녀 사이에 있던 추문은 알 사람은 모두 아는 것이었다.

레시온 공작의 약혼녀는 청초한 백합 같은 여성이었다. 카밀라 에일리는 딱 한 번 그녀를 본 적이 있었다. 남자에게 사랑을 구걸하고, 거절당해 몸을 던질 만큼 강단이 있어 보이는 여자는 아니었다. 흔한 귀족 영애. 아버지에게, 남편에게, 후에는 아들에게 순종하는 법만을 배운 아가씨.

물론 키오스는, 원한다면 여성의 지위에도 관대하기는 했다. 그러나 레시온 공작의 약혼녀는 그런 걸 원하기는커녕, 일반적인 귀족 영애의 삶에 만족하는 그런 아가씨였다.

그런 여자를, 탑에서 떨어뜨려 수도원에 쳐넣은 남자-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지만, 소문을 좋아하는 자들은 그렇게 수군거렸고, 음유시인들은 재미난 오락거리마냥 읊어댔던 것이다

고결한 기사는 마성으로 고귀한 자를 유혹하고 고귀한 자를 파멸시킨다, 라고.

그런 남자를, 내가- 이 카밀라 에일리가 유혹해보겠다는, 영지 제일의 미녀인 그녀 나름의 도박. 그것이 시작이었다.

그리고, 카밀라 에일리는 새까만 세상에서 고고하게 빛나는 남자에게 취해갔다.

기사 중의 기사, 누구에게나 평등하고 다정한 남자였다. 강한 자에게는 당당하고, 약한 자에게는 상냥하며, 불의를 모르는 올곧은 남자. 더러운 소문, 음유시인들의 조롱, 치욕스러운 추방 등에도 홀로 고고한 남자에게 마음을 빼앗겨갔다.

사람은, 누구나 그래- 상대의 배경을 보게 된다. 카밀라도 그랬고 카밀라 주변의 사람들도 그랬다. 그녀는 자신에게 쏟아지는 시선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었다. 그들은 카밀라를 이루는 것들을 칭송했고 사랑했다. 영주의 딸이라는 것, 아름다운 외모, 도도한 성격... 그런 것들.

그런 것에 전혀 상관하지 않는 엘킨 다이브는- 너무도 아름다워서, 갖고 싶다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결국 차였지만.'

카밀라는 피식 웃으며 엘킨 다이브에게 다가갔다.

거진 몇 년 만인지 모르겠다. 엘킨 다이브를 유혹했다가 침대 위에서 거절당하고 심술로 그를 용병단의 변방 원정에 보내버리고, 후회하고. 다시 찾으려고 했을 때 이미 그는 빛의 세계로 돌아가버렸다. 지고의 마법왕의 곁을 지키는 기사님이 된 것이다.

"당신은, 하나도 안 변했네요. 놀랐어요."

"카밀라님도 그렇습니다."

"후후, 말도 잘 하셔라. 그 말은 여전히- 저는 당신을 동하게 하지 않는다는 건가요?"

새빨간 입술을 유혹스럽게 내밀며, 육감적인 몸매를 돋보이게 하는 몸짓으로 다가갔지만, 엘킨 다이브는 엘킨 다이브였다. 재미없다고, 섭섭한 마음을 다스리며 마음을 다독인다.

어차피 자신의 젊은 날도 끝이다. 그녀는 그녀가 선고한 대로 곧 아버지가 정해준 상대와 결혼하게 된다.

그런 것이다.

그때, 두어명의 여자가 소곤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누가 오나 보군요."

"..."

"엘킨?"

소리는 점점 가까워져 왔다. 잘 들어보면 한 사람이 한 사람을 이끌고 있다. 이끄는 사람은 카밀라도 대충 아는 자였다.

히아신스 에이나- 전장의 에메랄드, 마법왕의 약혼녀... 후자야 뭐, 부정하는 사람들이 있긴 해도 결정된 일이니까.

'설마-'

미묘하게 굳은 것 같은 엘킨을 보며, 카밀라는 소문을 떠올렸다. 카밀라 에일리가 들은 소문 중에는 그런 것도 있었다.

엘킨 다이브는 소꿉친구인 히아신스 에이나를 사랑한다. 마법왕이 그녀와의 결혼을 미루는 건, 마법왕과 엘킨 다이브가 그녀를 두고 다투고 있기 때문이다-

카밀라는 눈동자를 가느다랗게 떴다. 말도 안 된다고 부정했지만, 지금 엘킨의 움직임을 보면 혹시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히아신스의 목소리가 가까워지자 엘킨이 그답지 않은 급한 걸음으로 테라스문을 향해 다가가는 게 보였다. 카밀라를 신경쓰듯 흘끔 보기까지 했다.

'설마, 여자 때문에 나를 신경쓰는 엘킨 다이브라니!'

이 누구에게나 평등하게 다정한 남자는 다르게 보면 지독하게 무감한 게 아닐까 하는 심술맞은 정의- 그것이 있었기 때문에 카밀라는 자신을 위로할 수 있었던 것이다.

카밀라는 슬그머니 테라스 뒤로 몸을 감춘다. 나갈 생각이 없다는 신호였다. 동시에 엘킨이 용병단에 머물 무렵 그에게만 보여주었던 장난스러운 표정을 지어보였다.-마음이 찢어지는 것과는 별개로- 그녀는 그때도 용병들과 아버지가 이야기할 때 몰래 몰래 숨어 그것을 엿듣고는 했고, 그것을 아는 건 기민한 엘킨 다이브와 아버지 뿐이었다.

*

카밀라는 조금 멍한 표정으로 눈앞의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다. 테라스 안으로 들어온 건 벚꽃색 드레스를 입은 어린 소녀 뿐이다. 히아신스 에이나는 테라스 밖으로 밀려나고, 엘킨과 소녀만이 테라스 안에 있었다.

소녀는 딱 봐도, 엘킨을 좋아하고 있었다. 얼굴을 벌겋게 물들이고 우왕좡왕 하는 게 보인다. 엘킨 본인과는 눈도 마주치지 못하고, 테라스의 유리문으로 엘킨을 힐끔힐끔 보고 있다.

어지간히 어설픈 귀족 계집애, 어떤 의미로는 귀엽기도 하겠지만- 문제는 그게 아니다.

유리문을 살피는 여자의 눈을, 엘킨이 놓치지 않고 마주하고 있다는 것이다. 집요함을 넘어 편집증적이기까지 하다. 이 얼마나, 엘킨 다이브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수식인가.

"보고 싶었습니다."

여자를 향해 울리는 엘킨의 목소리는 낮다. 카밀라는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목소리였다. 다정하고 상냥하고, 누구에게나 평등한 엘킨 다이브는 누구에게 무엇을 강요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지금의 엘킨 다이브- 아니 저 사내. 푸른 눈과 푸른 머리카락을 가진 고결한 외양의 사내는 여자의 모든 걸 강요하고 있는 것 같았다.

시선, 목소리, 숨결- 모든 것을.

"하영-"

"...저, 저도-"

남자의 목소리에, 여자는 안절부절못하고 결국 요구하는 대로 따르고 만다. 따르게 된다.

그때, 창밖으로 사제복을 입은 남자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

그 다음에는 정신이 없었다. 엘킨은 그를 찾는 기사에 의해 불려가고, 불려가는 와중에도 잊지 않고 소녀의 손에 입을 맞췄으며- 테라스에는 잠시간 소녀와 사제가 남아 있었다. 물론 그들도 곧 테라스를 떠났다. 문이 아니라, 테라스를 넘어 정원으로 가긴 했지만.

이상한 건, 사제와 소녀의 대화는 거리가 지척인데도 전혀 들리지 않았다는 점이다. 더 이상한 건, 아니 무서운 건, 테라스를 먼저 떠나려는 사제와 카밀라의 눈이 정확히 맞았을 때였다. 맞을 수야 있다. 카밀라는 거의 멍한 상태였으니까. 다만 남자의 눈이 매우 무기질했다는 것이었다. 무기질한 사물을 보는 눈-

사실 어떤 위협도 가해지지 않았으며, 지금에 와서는 사제의 얼굴도 생각나지 않는다. 그렇게 인상 깊었지만 어떤 사제인지조차 모르겠다. 다만, 여기서 본 일에 대해 함부로 이야기하면 자신은 죽는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실제로 듣지도 못한 것, 기억나지도 않는 사제에 대해 이야기해봤자 아무런 해도 없겠지만, 카밀라는 그런 느낌을 받았다. 그것은 용병을 거느리는 수완가였던 아버지, 그 아버지 밑에서 자란 감이었다.

"됐어, 결혼 전에 쓸데없는 신경은 꺼야지."

카밀라는 공포로 쿵쿵 거리는 심장을 가라앉히기 위해 부러 큰 소리로 이야기했다. 어째, 아버지가 최근 자신에게 하는 말을 그대로 읊는 것 같다는 생각에 카밀라는 웃었다.

웃고, 진정하고, 마음을 다잡은 순간 머리를 가득 채우는 건 엘킨 다이브의 눈동자였다. 소녀를 보는 눈동자. 그것은-

"..."

무섭다고 생각했다. 망상과 비슷한 직감적 공포가 방금 전 사제가 주었던 감정이라면, 그 전에 봤던 엘킨의 눈동자는 실질적으로 무서웠다.

아무도 요구하지 않던 푸른 눈이 누군가를 요구하는 순간 그 눈동자는 이제까지 카밀라가 보았던 그 무엇보다도 아름다웠다. 가진 자를 파멸시키는 어떤 보석처럼 그 눈을 손에 넣는 자는, 혹은 손에 넣기 위해 발버둥치는 자는 그 자신도, 그리고 보석도 불행하게 만들 것이라는-

그런 생각-

[가장 큰 사랑에 의해 고귀한 자를 파멸시키고 고귀한 자에게 파멸될 것이다.]

카밀라 에일리는 엘킨과 소녀가 있던 자리를, 부러움과 기이함이 담긴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

엘킨 다이브는 윤하영의 검은 눈동자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언제나 도망치던, 도망치려고 안절부절하던 그 눈을 이제는 따로 붙잡을 필요가 없게 되었다. 집요하게 그녀를 찾을 필요가 없게 되었다.

그녀는, 이제 엘킨으로부터 도망치지 않는다, 피하지 않는다.

'끔찍하군.'

끔찍하고 달콤하다. 엘킨은 그런 생각을 했다.

"저는 사랑을, 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줄곧."

물론, 지금도 그렇게 생각한다.

"당신을 만나고, 당신을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사랑에 눈이 멀고 사랑이 아름답다고 생각했습니다."

“...”

"그렇지만 점점, 사랑이 추한 게 아니라. 제가 추한 것을 깨달았습니다."

"...엘-"

이제 그녀는 확실히 엘킨을 보고 있다. 예전과는 다르지만, 사랑의 자취는 그녀의 심장을 뛰게 했고 그녀는 확실히 엘킨 다이브에게 연정과 비슷한 감정을 남겨두고 있긴 했으니까.

"가장 추한 건 접니다. 당신도 아셨을 거라 생각합니다. 아시기에 그런 이야기를 하신 거죠?“

그녀는 그날, 그런 이야기를 했다. 그날, 엘킨 다이브에게 사랑을 고백했고, 감사를 전했으며 마지막까지 엘킨다운 엘킨으로 있어 달라고, 그렇게 이야기했다.

엘킨다운 엘킨이라니-

- 당신의 엘킨 다이브는 셀리안 크레이누 곁을 지키는 엘킨 다이브냐고, 그의 완벽한 정원을 채우는 엘킨 다이브냐고

마음 속에서 외치는 소리가 있었지만, 엘킨은 말을 삼킨다.

삼키고, 윤하영이 원하는 고해를, 엘킨 다이브다운 고해를 입에 낸다.

“이제는 지난 일입니다만. 그날, 저 남자가 신전 앞에서 일을 벌였을 때... 제가 당신에게 입을 맞춘 건 당신이 저를 보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이것도 분명히 진실이긴 하니까. 두 개의 진실 중 그녀를 행복하게 할 수 있는 진실을 입에 내는 것이다.

“일부러 말하지 않았습니다. 폐하의 일을... 그리고, 계속 시간을 내 당신 곁에 있었습니다. 당신이 달아날까, 폐하에게 갈까. 폐하를 지켜야 하는데, 지키기로 결심했는데- 당신 생각밖에 할 수 없었습니다. 점점, 저는 저답지 않아졌습니다. 아니, 저다운 게 뭔지도 모르게 되어서."

그래, 네가 바란다면-

"당신이, 용기를 내주셔서 기쁩니다.”

엘킨은 행복한 듯 웃었다.

왜냐하면 이제 곧-

“저에게, 저답게 있어달라고 해주셔서, 그런 저를 사랑한다고 해주셔서.”

그래, 이제 곧.

“사실, 저 남자보다 아직도 제가 당신 곁에 있고 싶습니다만. 당신이 저를 위해, 변해주셨으니. 저도- 당신의 마음에 보답하고 싶습니다."

네가 곧, 나에게 이야기해줄 테니까. 꿈에도 그리던, 그 말을, 드디어 이제사 그런 이유로.

"사랑합니다. 하영.”

“저도요. 정말 좋아해요. 엘킨.”

달콤하고 잔혹한 호의를 다정하게 속삭여줄 테니까.

*

쾅 하는 소리와 함께, 엘킨 다이브의 몸이 벽에 쳐박혔다. 새까만 손은 하얗고, 그 손의 끝에는 검은 손톱이 박혀 있다. 엘킨의 몸을 쳐박는 순간 손바닥에 입이 생겨난다. 붉은 입이 생겨나 엘킨을 향해 웃으며 속삭인다.

'어둠이다-'

너를 위해 준비한 어둠-이라고.

엘프들은, 이종족 중 가장 인간과 가까운 종족이었다. 인외생물로 분류되기보다는 엘프 그 자체로 분리되는 것도 그런 이유였다. 그들은 인간과의 혼혈이 이상할 정도로 적은 반면, 인간과 사랑에 빠진 수는 이종족 중 가장 많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들 사이에 혼혈이 적은 이유는 일족 자체의 폐쇄성도 있었지만, 엘프들이 세계의 흐름에 가장 가까운 일족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어그러짐에 약하다. 오염에 약하다. 규율에 반하는 것에 약하다. 그들이 규율을 숭상하고 그것을 숨쉬는 것처럼 당연하게 여기는 이유는 사실 그것이 그들을 살게 하기 때문이었다.

"큭-"

엘킨 다이브가 이를 사려무는 소리에, 손은 킬킬 웃음지으며 제가 나왔던 곳으로 돌아간다.

엔실렌이라고 하는 검은 용과 엘킨 다이브라는 하프엘프는 악연이었다. 그날 거의 손에 들어온 윤하영을 빼앗은 건 류였지만, 류는 엔실렌에게는 에피룬 다음으로 만난 기적이었다. 결국 그에게 있어 원망의 대상은 엘킨 다이브가 되어버렸다.

그가 말한 어둠이란, 그런 악의가 빚어낸 독이었다. 이 독은 인간이 인외생물과의 계약을 엘프에게 적용하기 위해 사용하는 수법이었다. 보통 계약을 맺는 인외생물 중 엘프는 없다. 엘프는 인간과 가장 비슷하면서도 인간과는 별개로, 인간이 부릴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하지만, 아름답고 고결한 이 일족을 인간이 탐내지 않을리가 없었고, 그들을 약화시키는 게 어둠이란 독이었다. 세계의 흐름에 반하는 무언가를 흑마법으로 응집시킨 독- 어린 아이들의 시체, 병마에 신음하는 누군가의 피 같은 것들, 그런 것은 하루드에 넘쳐났고 엔실렌은 흑마법에 정통해 있었던 것이다.

엔실렌이 엘킨 다이브를 향해 정제하고 정제한 악의.

"..."

엘킨은 검게 변색되는 자신의 손가락을 바라보았다. 이런 류의 수는 전장에서 몇 번이고 받아봤다고, 그는 자신에게 암시하듯 속삭였다. 실제로 하프엘프인 자신의 약점을 적들이 내버려둘리 없었다. 물론, 엔실렌의 독은 그보다 정교하게 정제되어 그렇게 쉽사리 떨칠 수는 없지만-

엘킨 다이브는 기사다. 그는 제 몸을 아끼지 않았다. 그런 삶을 살았다. 훗날 영향을 미치게 되더라도, 전장에서는 지금이 중요했다. 삶이란 지금 죽느냐, 나중에 죽느냐였다. 그런 의미에서 엘프의 피는 그의 수명을 늘려주었고, 다른 인간보다 그의 회복력을 좋게 해주었다.

그만하면 크나큰 혜택이라고 생각했다. 손이 저릿해지고, 눈이 희미하게 흐릿해지는 걸 무시하고 엘킨 다이브는 일어서서-

윤하영, 그녀를 보았다. 오로지 똑바로, 기이한 형상의 미실랭도, 울부짖으며 찢어지는 뱀족의 공주도, 자신의 주군도 아닌 윤하영을.

'이건 기사답지는 않군.'

사랑스럽고 사랑스러워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는 사람이 그곳에 있다.

'또 눈을 감고 있어.'

하영은 사라지는 순간까지도 눈을 감고 있었다. 눈을 감고, 귀를 막고, 마음을 닫고, 강하게 이끄는 대로 끌려온다. 마음은 약하고 부서지기 쉬워 이리저리 흔들려, 오롯이 사랑하는 순간에도 사랑한다고 이야기하지 못하고, 그 사랑을 버리는 순간 사랑한다고 말한다.

"하영!!"

셀리안 크레이누의 외침이 장내를 울리고, 윤하영이 완전히 어둠 속에 먹혀버린다. 자신의 왕은 그녀를 놓쳐버렸다. 뱀족 공주의 몸이 갈기갈기 찢겨 조각조각 흩어지고, 자신의 왕- 셀리안 크레이누가 그 피비의 가운데 서서 그녀를 놓치고 있었다. 누군가를 죽이고, 그녀를 흔들고도 결국은-, 그래 결국은-

그저 그것을 서서 관망하는 자신이 가장 한심하다고 생각하면서도 그것이, 문득 희미해지는 시야 속에서 기쁘다고 느꼈다.

황홀하도록 역겨운 일이다.

*

"엘킨대장-!"

엘킨은 자신을 불러세우는 목소리에 걸음을 멈췄다. 옆에서 함께 걷고 있던 류는 멈추지 않고 진행한다. 주욱주욱 진행해 간다. 정말 이상한 남자다. 엘킨은 이해할 수 없는 남자였고, 솔직히 이해할 마음도 없었다.

[우리 같이 하영을 데리러 가자.]

라고 뻔뻔스럽게 제안한 남자-

[셀리안 크레이누보다 먼저-]

[필요없습니다만.]

[셀리안 크레이누의 눈을 피할 수 있는 장소를 알고 있어.]

[필요없습니다.]

인외생물이 갇히는 지하 깊숙한 감옥, 안온한 솜같은 구 안에 갇힌 남자를 향해 엘킨은 일갈했다. 일갈했지만, 굳이 이 감옥으로 자신이 온 건 이상하다. 남자도 그리 생각했는지 고개를 갸웃한다.

[그럼 대체 여기 왜 온 거야?]

[글쎄요...]

[글쎄라니?]

다시 한 번 갸웃하는 남자를 바라보며 엘킨은 무심코 남자에게 물었다.

[하영은 지금, 울고 있나요?]

[...가르쳐줄테니까 데리러 가자! 아니 동맹 맺자. 셀리안 크레이누로부터 윤하영을 떨어뜨려놓는 동맹!]

[하, 그게 무슨 의미가 있나요?]

[의미야 있지. 너도 알지? 그 둘은 이 세상에서 가장 가까우니까, 가까운 둘이 붙어 있기까지 하다니, 끔찍하잖아. 배알 꼴려서 원!]

[모르겠군요. 당신이 지금 무슨 말을 하는지도.]

엘킨은 눈을 가늘게 뜨고 눈앞에서 영문 모를 소리를 지껄이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으악, 재미없는 자식.]

[그래서...]

[응?]

[그래서, 이  세상에서 그녀와 가장 가까운 게 폐하라면, 두번째로 가까운 당신이 느끼기에... 그녀는 울고 있습니까?]

[흐음...울고, 있지.]

이번에 류는 앞과 같은 조건을 내걸지 않고 대답한다. 마음이 바뀌었다기보다는 그저 그때그때 말하고 싶은 대로 말하는 것이다. 종잡을 수 없는 남자다.

[완전 아파서... 전에도 이랬는데 괜찮아졌었거든... 이번엔 아무래도, 진이 쳐놓은 결계 때문에 걔 소망에 공급하던 내 마나가 끊어졌거든, 그 때문에 나도 계속 아프네.]

[당신이 공급하던 마나...입니까.]

엘킨의 물음에 류는 두서없이 자신이 그녀에게 마나를 공급한 배경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남자는 별로 말재주가 좋지 않았고 이야기는 중언부언했지만 대략 내용은 이러했다.

남자와 하영과 연결된 그날, 하영은 엘킨 다이브의 절절한 고백에 엄청난 통증-류의 말에 의하면-을 느꼈다. 류는 정말 죽을 것 같다고, 태어나서 처음으로 생각했다고 말했고 엘킨은 그 이야기를 조용히 들었다.

고통, 그래 생각해보면 그녀는 엘킨 앞에서 얼굴을 붉히며 사랑에 빠진 소녀의 얼굴을 하고는 했지만, 그 연정의 뒤에는 통증과 비슷한 기묘한 감각이 드러나있었다.

[그게 정말로 통증이었던 거군요.]

[응?]

[아닙니다. 계속 하십시오.]

[어?...음... 그게~ 렌이 그러는데 말이야. 하영이랑 셀리안 크레이누는 같잖아. 아, 짜증...]

[가장 가까운데 이어, 이번엔 같다...입니까.]

[그래, 같아서 그런지 마나가 없어도 그게 가능하다고 하더라고.]

[그거, 라면?]

[그때 신전에서 걔가 셀리안네 엄마 앞으로 이동했잖아. 그게 소망발현이라고 하더라구. 셀리안 크레이누도, 에피룬 크레이누도 어릴 때는 그런 일이 종종 있었다던데. 아, 나도!]

[...소망발현...]

소망발현은 그것이다. 대부분은 마나가 많은 자들에게, 즉 마법에 특별한 재능을 가진 자들에게 일어나는 세계의 축복- 원하는 것을 이루어준다는 개념. 엘킨은 거기까지 생각하고 피식 웃었다.

[왜 그래?]

[아뇨, 그냥... 하영은 저로 인해 느끼는 통증이 없어지길 바랐던 거군요.]

[음, 말하면 그런데... 왜 널 보면 아팠던 거지?]

[글쎄요.]

[뭐, 어쨌든-]

그 통증은 갑자기 사라졌고, 류는 아프지 않게 되었다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하영이 엔실렌에게 납치되고 다시 찾아온 고통에 류는 깨달았다. 하영은 그녀가 엘킨에게 느끼는 고통의 상실을 소망했고, 세계는 가능하면 그것을 이루어주고 싶어했다. 그걸 이루기 위해서는 마나가 필요했는데 윤하영에게는 여분의 마나가 없었다. 결국, 그녀는, 아니 세계는 그녀에게 연결된 류의 마나를 갖다가 쓴 것이다.

[아마 걔도 이런 아픔은 싫었을 거야. 당연히 그만 아프고 싶었겠지. 근데 진의 결계 때문인지 이번에는 계속 아프네. 윤하영도 그럴까? 울기는 하는 것 같은데...]

[이번 아픔은, 저 때문은 아니겠군요.]

[너 때문에 아픈 건 '사라졌다니까']

[사라, 졌군요.]

그래, 그날, 사랑한다는 이 세상 가장 황홀한 말을 하던 여자의 눈에서 사라진 열기를 기억한다. 남은 건 그저 열기의 자취. 남은 열기의 자취를 따라 여자는 평범하게 얼굴을 붉힌다. 더이상 고통스러워하지 않고 엘킨의 사랑을 받아들였고, 엘킨에게 좋아한다고 말했다. 더없이 가벼워진 달콤한 말들.

그때 엘킨은 진심으로, 셀리안 크레이누를 떠나더라도 그녀와 함께 사라지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녀만을 지키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엘킨 답지 않은 선택이었지만 그로서 그는 충분히 행복해질 수 있었다. 설사 오욕과 치욕을 뒤집어쓰고 기사로서의 명예가 땅에 떨어져도 사랑에 빠진 남자는 그걸로 만족했을 텐데- 그것을 막기 위해 윤하영은 엘킨에게 받던 지독한 고통을-사랑을 버리고, 그에게 사랑한다고 속삭인 것이다. 엘킨 다이브를 받아들이고 '사랑'을 이야기하기 위해 윤하영은 엘킨이 주는 고통으로 벗어나길 소망했고, 그녀는 영원히 엘킨에 대한 고통을 상실했다.

엘킨 다이브가 거기까지 알 수는 없었지만, 그는 직감적으로, 아니 서서히 그녀에게서 그날 이후 감정이 사라지는 걸 지켜보았던 것이다. 자신에 대한 사랑이 사라져가는 걸.

그래도, 사랑한다고 이야기해주었기에.

[당신을 죽일 걸 그랬어요.]

하영이 '죽음'을 경험한다 해도, 경험하는 것 뿐이다. 공유되는 건 감각으로, 죽지는 않을 것이다. 류라는 남자를 없애, 그녀의 소망이 이루어질 수 없게- 마나따윈 줄 수 없도록.

[응?]

[아닙니다.]

[뭐야, 뭔데.]

[...좋다고요.]

[응?]

[좋다고요. 그 멍청한 동맹, 해보지요.]

[해보자고?]

[어떻게 되는지 보고 싶어졌습니다.]

[뭘?]

뭘 보고 싶어졌는지는 스스로도 정의하기 힘들지만.

[글쎄요. 일단, 그게 가장 엘킨 다이브 다운 것 같기도 하고요.]

[무슨 소리야?]

엘킨은 구에 담겨 의아하다는 듯 황금빛 눈을 반짝이는 남자를 보며 쓰게 웃었다. 가장 엘킨 다이브다운 일을 가장 엘킨 다이브 답지 않게 하는구나, 하는 생각에-

"엘킨 대장, 어디 가시는 건가요?"

어느새 엘킨 바로 앞까지 다가온 히아신스 에이나의 물음에 엘킨은 눈을 깜빡였다.

"히아, 몸은 괜찮나요?"

"몸이요? 몸은 엘킨 대장이 문제지요."

히아신스가 어이없다는 것처럼 웃는다. 엔실렌의 독은 아직 다 빠지지 않은 상태였다.

알려진 이야기는 키도스 미실랭이 하루드 수장의 용을 제어하지 못해 정신이 먹혀 왕궁을 배신했고, 엘킨 다이브는 그 독에 당했다는 것이었다. 이 일이 있었을 당시, 물뱀의 공주 에드나가 '죽고' '하영 세르미아' 영애가 납치 당했다는 것은 알려지지 않았다.

아니, 물뱀의 공주가 죽었다는 건 어폐가 있다. 정신은 돌아오지 않았지만, 다시 심장이 뛰게 된 물뱀의 공주는 현재 성 어딘가에서 회복중에 있었다.

엘킨은 떠오른 구상에 조금 비틀리게 웃고 다시 히아신스를 보았다.

자신의 소꿉친구, 녹빛 눈동자의 소녀는 최근 일주일 동안 몇 번이고 쓰러졌다. 다가올 결혼식에 지쳐서라고는 하지만, 그럴리가 없지 않은가. 본인이, 자신이 쓰러졌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건 말이 안 된다. 그리고 그 옆에 있는 남자- 히아신스 옆에는 녹빛 머리카락의 호박색 눈을 한 장신의 남자가 서 있다. 마치 그림자처럼.

엘킨의 서늘하기까지한 푸른 눈동자에도 남자는 신경도 쓰지 않고 히아신스 에이나를 보고 있다. 자신도 '그녀'에게 저러는 걸까 생각하니 묘한 기분이 든다.

"히아신스님, 안으로 들어가시지요. 햇빛이 뜨겁습니다."

"아, 고마워요. 키오후."

고마워요, 키오후라니- 매우 오래된 것 같은 부름, 스스럼없는 관계. 고작 '일주일'만에 두 사람은 저기까지 가까워졌다. 아니 가까운 사이라고 히아신스는 생각하게 되었다. 키오후야 저런 관계가 원래 당연하다는 얼굴이고.

엘킨은 곰곰이 셀리안이 건 조건을 떠올렸다. 그래, 오늘, 오늘까지도 히아신스가 넘어지거나 기억에 혼란을 느끼면 키오후는 히아신스로부터 배제되고, 셀리안이 친히 히아신스를 '원래의 히아신스'로 돌려놓을 거라고 했다. 만약, 만약 히아신스가 위화감없이 '그 전생'이라는 것과 제대로 융합해 안정된다면, 키오후는 그녀 곁에 있을 수 있다. 하영의 눈에 띄지 않는다면.

그리고, 그 조건에 이의 따위 제기하지 않는 자신-

"아, 그래서, 어디 가는 건가요? 엘킨 대장-"

히아신스가 밝게 미소지으며 이야기한다.

"글쎄요. 어딜 가는 걸까요."

"엘킨 대장?"

"일단 보고 싶네요. 그 다음에는 알고 싶달까."

"?"

일단은- 그래, 일단은 보고 싶다. 자신을 위해 고통을 버린 윤하영, 그 상냥함이 잔혹하고, 잔혹함이 원망스럽다. 원망스럽지만 그저 사랑스러워서- 보고 싶었다.

이건 지극히 엘킨 다이브다운 선택이다. 그가 그녀를 사랑하지 않았어도, 그는 이런 선택을 했을 테고, 사랑했어도 결국 이 선택이다.

"몸 건강하세요. 히아."

엘킨은 입가를 휘며 미소 지은 뒤, 몸을 돌렸다.

============================ 작품 후기 ============================

늦어서 죄송해요.ㅜㅜ 늦었는데 외전이라 또 죄송하긔. 흑흑

시로야차98님, 도둑눈님이 팬앝 주셨습니다. 셀리안입니다. 드디어 셀리안이 팬앝을 받기 시작합니다. ㅎㅎ

도둑눈님, pen1107님, lee428님, 기막힌인연님, navice님, masamasa님 후원쿠폰 감사 드립니다!! 이번주는 한글날이 있어서 유난히 짧은 한주입니다만, 여러분의 사랑으로 좀더 빠르게 주말까지 날아갈 수 있을 것 같아요!!

롯찡 님 // @만 보면 리코멘 다는 리코멘 본능(웃음) 엘킨의 머릿속도 완결 전에 납득 갈 수 있게 정리할게요.ㅎㅎ

옆집바나나 님// 진의 심정은 아마 그렇겠지요.ㅎㅎ 같은 영혼이 둘 있는 것도 일탈적 상황인데 그 둘이 서로를 부둥부둥까지 하다니. 복잡미묘미묘미묘한 감정이라고 보심 되겠습니다. ㅋㅋ

엘킨이 엘킨다워졌습니다. ㅎㅎ 엘킨이야 어떤 의미로 여기서 제일 멘탈이 좋았지요. 복잡한 여자 하영 때문에 망가질 것 '같다'고 느끼고 갈등하긴 했어도... 그러나 과연 어떨지는 끝까지 ㅎㅎ 셀리안 좋아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맥시멈exe님 // 제가 해피엔딩을 좋아합니다. 엔딩은 일단 해피로 적어놓긴 했는데... ㅎㅎ 사실... 저도 불안해요. 엉엉(퍽퍽)

月光天女璉 님 // 요즈음 엘킨 분량이 비루해서, 엘킨이 반란을 일으켰습니다.ㅜㅜ 뒤통수 맞은 건 셀리안이 아니라 저였어요.ㅜㅜ

KRRD 님 // 저도 사랑해욧!! 하트 뿅뿅, 별 초롱초롱~

스즈카 님 // 일단, 하영이 생각한 감정은 스즈카님이 이야기한 부정적인 감정 전부? mix한 것 정도일까요.(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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