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루나 패러독스-131화 (131/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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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이 마지막이다-

그런 생각을 한다. 류의 시시한 사랑 이야기를 들으며, 잠에서 깨어난 오늘이 내가 '셀리안 크레이누'를 그저 '기다리는' 마지막 날이라고 다짐하고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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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에서 깨어나 아침을 먹고, 건성이라고 느껴지지 않는다는 점에서 더욱 곤란한 수준의 치료를 받고 나면, 어김없이 책 몇 권이 내 앞으로 도착했다. 무료한 시간을 보내라는 의미인 듯한 책들을 한 권 한 권 살펴 보면 역시 로맨스 소설이 주가 되었다.

달콤하고 아름다운 사랑이야기들-

"허-"

침대에서 딱힐 할 것도 없고, 마지막으로 그를 기다려보기로 결정하고 팔랑팔랑 책장을 넘기고 던지는 걸 반복하다 보면 나도 모르게 코웃음이 나왔다.

"이건 뭐야."

한 권의 책이 문제라면 문제였다. 문제일 것도 없지만, 소재가 기묘했다.

오늘 온 책들은 모두 어제, 그제, 그 전날과 전전날 본 사랑 이야기들과 다를 바 없었고 이 책도 비슷하다. 다만, 이상한 소재- 아니 이상하다고 하기도 뭐하지만, 손이 멈추게 되는 소설이 한 권 끼어 있었다.

내용 자체는 공작과 하녀가 사랑하는 평범한 신분차 로맨스였지만, 좀 당혹스러운 게 그 공작이 제 충복의 여자를 빼앗는다는 설정이 대놓고 있는 것이었다. 그 설정 자체는 아름답게 포장되어 있지만...

'대체 누가 고른 거야, 이 책은...'

도둑이 제 발 저리는 걸까. 나는 객관적으로 내가 엘킨에게 한 짓은 인식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건 셀리안과는 상관 없어.'

공작이 충복의 애인을 빼앗는다-

어쩌면, 내가 아는 전생의 기억 속에 비슷한 일화가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엘킨 다이브의 약혼자를 빼앗은 셀리안 크레이누- 물론 셀리안은 전생 당시 그 여자를 사랑하지는 않았고, 지금의 상황도 엄밀히 말해 셀리안이 날 그에게서 빼앗은 건 아니다. 모든 건 나의 선택이었다. 셀리안 탓이 아니다. 하물며, 내가 엘킨을 버렸다고 셀리안과 연애적인 관계가 되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혹시 외부에서 보면 그렇게 보일지도 모른다고, 묘하게 그 책이 걸렸고 불쾌했다.

*

“...”

안 온다.

그, 셀리안 크레이누는 오늘도 단 한 번도 오지 않았다.

아침 시간에도, 점심 시간에도, 저녁 시간에도.

계속- 오지 않았다. 결국 저녁 식사가 끝나고 한참 시간이 지나자 시녀들은 평상시처럼 초를 끄고 나가버렸다.

그렇게 또 성과 없이 밤이 된 것이다. 치료도 더디고, 셀리안도 오지 않는다. 그런 밋밋한 하루-

나는 들어오는 달빛을 노려보고 있었다. 오지 않는 멍청이 남자 때문일까. 그의 머리카락을 닮은 금빛의 달이 밉살맞아 보인다.

'난 충분히 기다렸어.'

손을 움직여본다. 푹 찢어졌던 팔은 다리와는 달리 완전히 고쳐진 터였다. 지금에 와서는 앉는 것을 포함해 상반신을 움직이는 모든 활동이 수월했다. 책을 읽는 것도 밥을 먹는 것도 무리가 없었던 것이다.

누운 그대로 몸을 일으켜 손깍지를 켜고 주욱 편다.

피하는 건 짐작하고 있지만, 이 정도로 피하다니. 뭐가 고민인지는 모르지만 용서가 안 된다.

내가 그 남자의 소극성을 간과했다. 그의 사랑은 소극적, 엘킨이 도망치려 했기에 붙잡으려 했지만 반대로 그 옆에 머물면 더더욱 소극적여질 수도 있는 것이었다. 워낙 겉보기에는 적극적이고 과단성 있는, 허세왕이라 차마 이런 경우를 생각하지 못한 내가 멍청이다.

일으킨 몸을 옆으로 기울여 초가 올려진 탁자를 잡았다.

“후우.”

그대로 탁자를 잡고 침대로부터 다리를 빼내 바닥을 내딛는다.

"크윽-"

다친 다리가 땅에 닿자 무뎌진 고통이 깨어나듯 척추를 때린다. 이를 사려물고 천천히 일어섰다. 몸이 부르르 떨린다. 한 쪽 다리로 지탱하지만, 다른 한 쪽 다리에도 저절로 힘이 실렸고 아파 죽을 것 같았다.

“하...”

그도 그럴게, 하얀색 뼈가 보였던 것이다. 그때는 아무래도 좋다는 생각이 컸지만, 끔찍한 일이다.

그리고, 그 뼈는 최근까지도 낫지 않고 그대로 있었다.

'뼈가 보이다니.'

윤하영은 매우 이기적인 여자고, 제 몸을 지키는 여자인데- 여자였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내 팔을 내가 찌른 것도, 스스로 행하기는 했지만 내 탓이라고 체념하기에는 억울해진다. 사실 전부 셀리안 크레이누 때문에, 전부, 리안 때문이다. 그가 류에게 다칠까봐 라든가- 전부.

‘웬수... 고생만 시키고.’

투덜거리면서 오늘 아침 전달된 로맨스 소설들을 바닥에 던진다. 한 권, 한 권, 한 권-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 괴상한- 로맨스의 탈을 쓴 치정소설- 그 한 권을 문과 침대 사이로 던졌다. 던진 뒤 조심스럽게 탁자를 놓고 한 발로 콩콩 뛰기 시작한다.

이를 사려물고 천천히 뛴다.

'분명히 당신은 알 거야, 지금 내가 하는 걸.'

정말 안다면, 알면서도 나오지 않는 게 더 괘씸하다.

엘킨 때는 엘킨이 피해서 그럴까, 셀리안은 그의 마음을 붙잡는데 연연했고 언제나 저돌적이었다. 그의 것을 부수는 데 망설임없이, 그를 밀어붙이는 데 온 힘을 다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달랐다. 그가 사랑하게 된 윤하영은 왕궁에서 머물기로 결정했고, 그 의사를 셀리안에게 피력한 것이다. 나는 그를 떠나지 않을 거고-

'그럼 된 거잖아, 뭐가 문제인 거야?'

나를 붙잡으려고?

나에게 숨기는 뭔가가 있어서?

혹시, 혹시 잘 풀리지 않는 일들 때문에 그러는 걸까. 요컨대 에드나의 일도, 히아신스 일도, 엘킨 일도- 내가 그것을 책망할 걸 걱정하는 걸까. 걱정해서 나를 피하는 걸까?

어느 쪽이라도-

‘겁쟁이.’

이렇게까지 겁쟁이일 줄은 몰랐다. 그리고, 그 겁쟁이가 나를 아예 안 볼리도 없다.

나는 거기에 거는 것이다. 그가 겁쟁이라는 것과, 나를 사랑한다는 것에-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어둠 속을 뛴다. 뛰고 간신히 목표로 한 침대와 문 사이에 도착했다. 그 사이, 내가 던져놓은 책 앞에 섰다.

“허휴-”

각오를 다진다. 정말 자해만 두 번을 할 줄은 꿈도 꾸지 못했다.

그 찝찝한 치정소설에 다친 발을 올린다. 그리고, 그대로 허리를 뒤로 젖히고- 휙 하는 소리와 함께 몸이 기울어졌다.

"힉-"

눕지도 않았는데 천장이 보인다. 힘이 실려 미끄러지는 다리에 어마어마한 통증이 느껴진다. 류가 이 밑에서 비명을 지를 것 같다.

내 탓은 무슨, 역시 전부 셀리안 탓이다. 이 마법왕, 바보왕-

"~~~"

이대로라면 뇌진탕 확정이다. 적당한 자리에 간이의자도 있고 여기 저기 책도 떨어뜨려 놨으니 잘 하면 다른 데도 다치고, 더 잘 하면 다친 다리도, 남은 다리도 찢어질 것이다.

'이 방향이라면 다친 다리 또 다치겠네.'

눈을 꾹 감는다.

“리안 바보, 왕바보-!”

비명대신 외치며 주욱 미끄지면, 순간 내 몸이 누군가에게 안겼다.

*

"하아-"

당황한 듯, 안도한 듯 내쉬는 숨결은 내 머리 바로 위에서 느껴졌다. 나를 받아든 건, 알고 있는 단단한 팔, 커다란 품안이다.

살금살금 눈을 뜨면, 흰색 옷을 걸친 가슴이 보였다. 역시 마법왕 답지 않게 장군 같이 넓은 가슴이라고, 멍하니 생각한다.

남자는 내 머리를 한 손으로 감싸고 다쳤던 내 다리를 안고 있었다. 무리없이 윤하영을 감싸안는 남자.

창문의 커튼이 팔락거리는 걸 보면, 창밖에라도 서 있었나 보지, 싶다. 기가 막힌다.

“이 어리석은 여자가.”

기가 막힌 건 나인데 나를 안아든 그가 기가 막힌 듯 이야기한다. 기가 막힌 것처럼 이야기하면서도, 목소리는 다급하고, 화를 내고 있다.

그의 가슴으로부터 위로 시선을 들면, 그의 붉은 눈도 목소리와 같은 감정을 담고 있었다. 기가 막힌 듯, 다급하게 화를 내고- 걱정하고.

"..."

나는 눈앞의 남자를 괘씸하다고 생각하는 반면 다시 한 번 안도했다. 전생, 그의 사랑을 보며 몇 번이나 내가 상상했던 눈은 아니었던 것이다. 알고 있는 눈이었다. 결코 광기를 담지도 잔혹하게도 보이지 않았다. 성군이 되기 위해 노력하는 셀리안 크레이누를 인정한 다음부터, 줄곧 보아왔던 따스하고 태양같은 눈이다.

“후후-”

“뭐가 좋다고 웃는지... 그대가 뭘 했는지 알고 있-"

"바보-"

"...넘어질 때도 그렇고, 그대는 누구에게 감히 바보라고 했는지는 자각하고 있느냐?”

그도 안도하고 있을 게 틀림없다. 다만 의아한 듯 화난 듯, 짐짓 위엄있게 물어온다.

바보-

그의 눈이 조금 커진다. 뭘 그렇게 멍청하게 또 보고 있는지-

“당신이요. 이 음흉한 남자-”

나는 손을 들어 찰싹, 그의 뺨을 때렸다.

*

내가 꾸는 셀리안의 꿈, 전생의 꿈은 그냥 엘킨에 대한 꿈이었다.

스토커처럼 엘킨을 그 눈으로 포착한 꿈. 간간히 그 꿈속에 다른 사람이 있긴 했지만 그것은 좋아하는 누군가를 도촬하듯 찍을 때 어쩌다가 찍힌 사진 같은 것이었다.

엘킨만을 사랑했던 이 고장난 사진기는 죽는 순간까지도 엘킨만을 담고 싶어 했다.

그저 눈에 보이면 된다. 눈앞에서 그를 인정해주면 되었던 것이다.

뒤틀린 그는 남을 사랑할 줄 모르는 사람이었다. 어떻게 사랑해야 할지 모르는 사람. 영문도 모를, 일방적인 사랑에 상처 입어- 아무리 발버둥쳐도 언제나 자신에 대해 고민했고 절망했다. 어떤 더러움도 없고 과거도 없는 깨끗하고 올곧은 것들을 주변에 이리저리 모았지만 마음은 채워지지 않는다.

그러던 그가 엘킨 다이브를 사랑하게 된다.

엘킨 다이브는 그의 기준에 들어맞았다. 그의 과거와 관계없이, 한 점 더러움 없이, 거짓없이 청렴하고 맑은 자.

갖고 싶었다, 하지만 갖고 싶지 않았다. 지키고 싶었다, 옆에서 그저.

지켜보고 싶었던 마음은 세월 속에서 뒤틀린다. 셀리안 크레이누는 자기 자신이 가장 원하지 않았던 형태로 뒤틀린다.

엘킨 역시- 받지 않아야 할 고통을 받았다. 용납할 수 없는 죄가, 마치 세계의 정당한 흐름처럼 인정되는 것을 지켜봐야만 했다. 엘킨의 어머니가, 아버지가, 혈육이, 히아신스가 당연한 것처럼 죽는 걸 그저 지켜만 봤다.

그러고 싶지 않았는데.

어느 순간, 그를 자신이 있는 대로 떨어뜨리고 싶어서, 나 자신을 이해해주기를 바라서, 욕심은 커지고 마음은 엉망이 되어 모두 망쳐버린 것이다.

기억도 안 나는 죄, 알지도 못하는 죄책감- 그 속에서 셀리안 크레이누는 자신에게 죽음이 다가오는 것만을 안다.

윤하영은, 몇 번이고 그 장면을 기억해낸다.

이걸로 마지막이라고-

[그래도 사랑해]

청아한 눈동자에는 추례한 왕이 비춰지고 있다. 광기에 찬 눈동자가 있다. 사랑에 미친 남자가 있다.

[그래도, 계속 사랑해.]

결국 그 삶에는 보답받지 못한, 그리고 제 손으로 뒤튼 사랑만이 남아 있었다.

그리고, 죽음은 이어져 나는 당신이 기억하지 않는 죄, 알지 못했던 죄책감, 간절히 바라던 최초의 소망을 전부 떠올리며 눈물을 흘린다.

그 눈물이 나를 여기에 있게 하는 것이라고.

*

“당신이요. 이 음흉한 남자-”

나는 손을 들어 찰싹, 그의 뺨을 때렸다. 일부러, 아직 다 낫지 않은 손이다. 가벼운 찰싹임에 그는 눈을 찌푸렸다.

“왕의 얼굴에- 무례하긴.”

“아야야.”

“!!”

아야- 라는 말에 그가 당황한다. 방금 전까지 척이라도 나의 무례함을 타박했었는데 그마저도 무너진다.

이런 엉성한 연기에...

"괜찮느냐, 그러니까 너는- 왜 이런 짓을!!"

“...저기, 제가 너무 뒤늦게 아파했다는 생각 안 들어요?”

“...왕을 조롱하다니. 정말이지.”

그가 눈썹을 꿈틀 움직이더니 당장 꿀밤을 때릴 것처럼 내 이마를 노려보았다. 노려보았지만 결국 제 이마를 내 이마에 대올 뿐이다. 댄 체로 안심한 것처럼 숨을 몰아쉬었다.

“정말 고통을 좋아하는 거냐. 대체 왜 이런 짓을 한 거냐.”

그는 내가 밟고 미끄러진 로맨스 소설에 새삼 시선을 주더니 미간을 찌푸렸다. 소설은 표지부터가 핑크빛이었는데 이 어둠 속, 이 상황에서도 존재감이 있었다. 더군다나 저 로맨스는 안에 치정이 섞인 만큼 표지가 아이러니하기도 했다. 그는 그건 모르겠지만. 아니, 그가 선택해준 거라면 알까.

"그대가, 저런 류의 소설을 좋아하는 줄은 몰랐군."

"설마요. 폐하가 넣어주는 거 아닌가요."

"내가?"

내 말에 그는 살짝 내게서 몸을 떼어 책을 집어든다.

"음?"

"폐하?"

"..."

"어.."

그가 골라준 게 아닐까. 그렇다면 조금 민망해진다.

"..."

책을 휘리릭 살펴본 셀리안이 책을 탁 접는다.

"누구의 선택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대는 지어낸 이야기는 별로 안 좋아하지 않나. 내일부터 그대 취향의 글을 넣어주지."

“아, 폐하가 직접 책을 가져다주시게요?”

“짐을 그렇게 보고 싶어했다니 기쁘군.”

셀리안이 나른하게 조롱한다. 그가 책을 휙 집어던지자, 핑크색 책이 펑하고 사라진다.

"유감이지만, 바빠서 말이다."

"바쁘다구요?"

태연한 척, 일부러 나를 피하지 않은 척, 내가 수선스럽다는 듯이.

“어쨌든, 오늘 봤으니 당분간은 됐군. 앞으로 시녀들에게 전갈을 넣도록 해라. 이런 짓을 하지 말고.”

“다 필요 없어요."

"?"

"책도, 폐하도... 시녀도. 제 다리가 낫기만 하면 책도 스스로 고르고, 폐하도 제가 만나러 갈 거니까요."

"..."

"내가 직접 만나러 간다니까 기뻐요? 우왓-"

셀리안이 내게서 몸을 휙 떼어놓는다. 떼어놓고 고개를 돌린 채 우물거린다.

"다리는 곧 나을 거니까, 그때까지-"

"셀리안!"

"..."

"그게 아니잖아요. 왜...왜 나를 회복시켜주지 않는 거예요.”

내 말에 그가 눈을 깜빡인다. 정말 바보다. 나른하게 조롱하고 피하고 싶었으면 나 같은 거 품에서 놓고 도망가면 되는 거다. 내일 정무가 있다느니, 어쩌느니 하고서. 하지만, 역시 걱정되었던 것이다. 어쩌면, 같이 있고 싶었던 것이다. 그도- 아니 나와 달리 그는 순수하게, 내가.

대단한 마법왕 주제에 마음은 항상 불안해, 소극적이고. 바보처럼.

“...오늘도 치료사가 온 걸로 아는데.”

셀리안이 떨떠름하게 이야기했다.

“왕궁 치료사가 이렇게 무능한가요?”

나는 그가 잡고 있는 다리를 들어보인다. 치마가 슥 올라가자 그가 눈썹을 꿈틀거리며 다리를 잡고 있던 손으로 치마를 내려준다.

“칠칠치 못하긴.”

“설렜나 보죠?”

“그렇게 여자가 궁하지 않은데.”

우와, 이 밉상.

“...치료사라고 만능은 아니지 않나.”

“그렇겠죠. 하지만, 이 다리가 아직도 안 나는 건 너무하잖아요. 보여 줄까요, 붕대 밑?”

“...”

“치료사가 이정도라면, 차라리 약을 바르는 게 더 빠르겠어요.”

내 말에 셀리안이 말이 막힌 듯 입을 다문다. 윤하영 따위에 말이 막히는 셀리안이라니, 정말 바보 같다.

“고쳐주세요.”

“...”

“그럼 만나게 해주시든지요.”

“누굴 말이냐.”

“폐하를, 그리고 히아신스랑 에드나도요.”

“...아직. 그리고 짐은...”

“셀리안이, 천하의 마법왕이 이렇게 시간이 걸린다는 건 무슨 문제가 있다는 거지요.”

“...”

그는 입을 다문다. 붉은 눈은 무감하게 아무 감정도 담지 않고 차갑게 나를 바라본다. 하지만, 이제 속지 않는다. 그 눈에 서린 감정을 알고 있다.

무서운 표정 지어봤자, 윤하영은 시선을 돌리지 않을 것이다.

다 좋아질 것이다. 다- 다 좋게 만들 것이다. 당신을 행복하게 만들 것이다. 나는-

“리안-”

그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여기서 나는 무슨 이야기를 할지 알고 있다. 당신을 안심시킬 말을, 당신이 엘킨에게 바라마지 않던 말을.

호흡을 가다듬는다.

“저는 떠나지 않아요.”

*

그것은 내가 아는, 최고의, 셀리안 크레이누가 사랑하는 자만이 그에게 해줄 수 있는 마법의 말이었다.

전생, 셀리안 크레이누가 엘킨 다이브에게 바라마지 않던, 윤하영이 아는 정답이었다.

“저는 떠나지 않아요.”

“...”

“무슨 일이 있어도요. 왕궁만큼 편한 곳이 없잖아요?”

설득하며, 미소짓는다. 나는 떠나지 않아. 여기서 몇 번이고 당신을 긍정하겠어. 긍정해주겠어. 당신이 망가지지 않도록. 그게 나의 역할이다.

[짐이 이루어주마. 이 세계에서, 그대의 세계 못지 않게 만들어주마.]

그리고, 이 세계에서 그가 알려준 정답을,

[그래, 죽죽 승진해 그대가 세르미아를 더 크게 부흥시켜보는 야망을 꿈꾸는 것은 어떤가. 그대는 꽤 야심가였던 것 같은데... 무엇보다, 엘킨은 매우 좋은 남자니까. 그러니까, 그대에게 분명 행복한 사랑을 줄 거야. 최고군. 일에서도 성공해,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평범한 여자로서의 삶에 그대다운 야심까지 이루고.]

어쩌면 그의 소망을.

나는, 그가 그날 산으로부터, 엘킨으로부터 나를 이동시켜 속삭여준 '이 세계에 머무는 윤하영'에 대한 구상을 열심히 입으로 옮겼다.

신이 나서 옮긴다. 그 날의 그처럼.

“여기서 직업을 얻고, 성공하고-"

"..."

"이왕 이렇게 된 거 세르미아도 부흥...”

“그걸로 충분한가?”

“네?”

어라?

"..."

"리안?"

“그대는, 정말로... 그걸로 충분한가, 라고 묻고 있는 거다.”

“충분하다뇨? 제가 원하는 건, 이곳에서 다 이루어질 수 있는 거잖아요.”

나는 조금 어리둥절해진다.

'충분하냐니?'

고개를 갸웃하며 남자를 바라보았다.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는 나를 사랑하는 게 아닌가. 곁에 두고 싶어서 에드나를 죽이고 살려, 호수를 제 손에 넣고, 진에게 찾아와, 지온으로... 게다가 치료까지 늦추고 있던 터인데.

“...”

“...리안?”

한 번 더 그의 이름을 부르면 셀리안의 눈동자는 복잡해보였다. 그 눈은, 조금 불안하다. 마치 엘킨이 왕궁을 떠나기 직전의 눈동자처럼.

나는 다급하게 그의 양 팔을 잡았다.

“리안, 진짜에요. 전 떠나지 않아요. 그, 제가 이야기하지 않는 게 많긴 하지만 저는...”

“그대는 정말 ... 닮았군.”

“네?”

“저 달과 같아.”

순간 셀리안의 미소가 부서졌다.

아니다. 미소는 그대로다. 그는 흐릿하게 미소짓고 있다. 오히려 그의 눈동자는 어느 때보다도 다정했다. 그는 지독하게 다정한 눈빛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너무나 상냥해서 어쩐지-

심장이 아프다. 욱씬 욱씬, 왜 저런 표정을 하는지, 결코 저런 상실된 표정을 짓게 하고 싶었던 게 아닌데.

“리안-!”

나는 손을 뻗어 나로부터 멀어졌던 그의 얼굴을 내 스스로 붙잡았다. 셀리안과 나의 얼굴이 가까워진다. 숨결이 닿을 정도로.

꿈 같은 사람, 꿈에서만 보던 내 전생의 마법왕이 내 눈앞에 있다. 난 눈을 감았다. 마치 당장이라도 꿈을 꿀 것 처럼.

그리고 다시 뜨고 지고의 마법왕을 바라보았다.

"..."

"..."

그래, 다른 말이 필요 한 게 아니다. 꾸며진 정답이 있는 게 아니다.

'나는 그저-'

눈을 감은 순간부터- 나는 줄곧 꿈을 꾸고 있었다. '나'를 가장 잘 이해하고 '나'의 아픔을 공감해주고, '나'를 대신해서 모든 죄를 지우고, 결국은 엘킨 다이브에게 사랑받는 한 사람의 꿈을-

그것은, 추잡하게 추락한 고독한 왕이 꿈꾸고 꿈꿨던-

"나는 당신을 위해 있는 거야."

입에서는 그게 당연한 것처럼 저절로 말이 흘러나왔다.

============================ 작품 후기 ============================

마사히 님, YouURin님, 이예슬님, 7678jun님 후원쿠폰 감사 드립니다.

Sisre 님 // ㅎㅎ 잊지 않고 엘킨을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ㅁ/

해랑나랑 님 // (동공지진) 과연 이게 계획대로 끝날지 저도 가슴이 마구 두근거립니다. 힘내서 쓰겠습니다.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ㅜㅜ// 열심히 두 사람이 꽁냥거릴 수 있게(?) 노력하겠습니다.ㅎㅎ

YouURin 님 // 오랜만에 뵈어요!><★ 셀리안의 심경은 하영이 시점이라 아직은 비밀입니다. ㅎ

스즈카 님 // 치킨과 델리만쥬를 함께 넣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델리만쥬는 따끈하게 구워서 먹는 순간 뜨거운 크림이 입천장을 데울 정도...(퍽퍽) 큼큼...! 네, 곧 히아도 엘킨도 등장시키겠습니다.+_+ 류와 하영은 현재 꿈을 공유하는 중인데, 셀리안은 과연... side story 같은 거 말고 제대로 외전 같은 외전을 쓰고 싶습니다. 현재 고민고민. ㅎㅎ 나중에 그에 대해서도 알려드리도록 할게요. 연재일에 대해서도, 이야기 주신대로 공지로 미리 알려드리겠습니다! 요즈음 진짜 너무 일이 많아서.;ㅁ; 물론 오늘은 토요일이고 미친 듯이 놀긴 했습니다만...ㅜㅜ ㅋㅋ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적매화 님 // 500화... ㅋㅋ; o-<-<  그렇게 이야기해주실 정도로 좋아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연참... 하아...;; ㅋㅋㅋ 연참하고 싶은데 이상하게 진도가 잘 안 나가네요. 막바지라 그런가봐요. 사실 막바지도 아닌 것 같은 전개인데...ㅜㅜ 죄송해요. 그리고 감사합니다.

여름날그하늘 님 // 셀리안은 멍청이니까요. 이런 멍청한 남자. 계속 멍청이로 있으면 하영이가 엄마에서 졸업을 못 할 텐데 과연...;ㅁ; ㄷㄷㄷ

체셔빈 님 // 쓰담쓰담을 받고 나무바라기의 가지가 1cm 자라...진 않았고요. 나이가 있어서...ㅜㅜ 마음의 키가 자랐습니다. ㅋㅋ 쓰담쓰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네, 넵! 기말고사가 있습니다. 뒤집어버리세요. 기말고사로! 중간고사도 잘 보셨을 거예요! 감금, 류의 꿈, 류의 부모님, 하영의 마음... 풀 게 태산인데 제가 농땡이를 부리고 있습니다. 화이팅 하겠습니다.ㅜㅜ

스페인어로 luna는 달이 중심 의미입니다만, 파생된 의미로 거울이란 의미도 있다고 하네요. 거울의 경우 남성명사는 espejo, 여성명사는 lu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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