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루나 패러독스-134화 (134/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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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아픈 게 좋다면, 짐의 앞에서만 아프도록 해라.”

“에-”

“걱정마라, 그대가 다쳐도 금방 낫게 해주지. 이렇게 주변에 꽃이 많으니.”

“아, 자, 잠깐-”

손이 장미 가시 바로 앞으로 다가간다. 천천히, 천천히- 천천히 움직이는데도 나는 저항할 수 없다. 휙 찔리게 할 수도 있으면서! 셀리안은 저항할 수 없는 강한 힘으로 움직여갈뿐이다. 그런 점이 심술 맞다. 그리고 이해할 수 없다.

셀리안 크레이누의 사랑은- 사랑은-

“잠깐, 잠깐!!”

곧 찔린다!

아마 저 가시가 내 손가락으로 천천히 파고들 것이다. 그 전만해도 분명 스스로 대수롭지 않게 상상했던 장면이지만, 실제로 타의에 의해 강요될지도 모른다는 것에 소리쳤다.

“리안, 셀리안!!”

"..."

"~~~~"

"..."

"...?"

셀리안의 손이 멈췄다. 움츠러들었던 몸을 펴 그를 조심스럽게 보았다. 보면-

“큭-”

“?”

“크, 하하하.”

탁 하는 소리와 함께 내 손을 놓은 셀리안이 크게 웃기 시작했다. 나는 그가 잡고 있었던 손을 든 채 멍하니 셀리안을 바라보았다.

“다행히 아픈 걸 좋아하는 건 아닌 것 같군.”

“리안-!!”

놀린 거다. 놀렸다. 간신히 깨닫고 얼굴이 새빨개져 항의하면, 셀리안은 나로부터 거리를 벌린 채 가볍게 자신의 머리카락을 쓸어넘겼다.

"후...이거군."

"네?"

웃음이 멈추고 그는 기묘한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그 표정은 후련한 것 같기도 하고, 그저 체념한 것 같기도 한 복잡한 빛을 띠고 있었다.

그의 감정을 따라갈 수가 없다.

"이거였어."

"뭐가 말인가요?"

방금 전까지 화가 났는데, 방금 전까지 그는 놀린 것처럼 웃었는데, 나는 또다시 초조한 마음이 들었다.

또 모르는 눈, 아니, 어쩌면 아는 눈. 아는 감정이지만 그것이 왜 나왔는지 알 수 가 없어 초조함을 느꼈다.

“이제 알았어.”

“셀리안?”

“내일, 가마.”

“에...”

“내일 오후에, 그대의 침소에 방문하지. 그때까지 그대가 궁금한 걸 정리하도록 해라. 짐도, 그때까지 결정을 내릴 테니까.”

셀리안은 다시 가면을 쓴 것 같은 무표정으로 돌아와 나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한참 나를 보았고 나 역시 그의 표정을 가늠하며 시선을 떼지 못했지만.

"내일 보도록 하지."

먼저 시선을 떼고 멀어진 건 이번에도 셀리안이었다. 나는 그 후에도 한동안 멀어지는 그의 등을 멍하니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

셀리안이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질 무렵에서야 나는 그와 있던 구역을 벗어났다.

어느새 석양이 지기 시작하는 장미정원은 색색의 장미 위로 내려앉은 주홍빛이 기묘한 느낌을 주고 있었다.

금빛으로 내려앉아 타오르는 태양의 부서지는 붉은 색은 체념과 깨달음으로 흔들리는 셀리안의 눈과 닮아 있었다.

[이제 알았어.]

뭘, 알았다는 거였을까.

나는 그저 그의 옆에서- 그의 정원에서 그를 인정하며 살기로 한 것 뿐인데. 그것만으로도 다 잘 될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그 결심을 굳히고 점점 알 수 없게 되어간다. 내가 파악할 수 있는 그는, 왕궁에 돌아온 첫날뿐이었던 것 같다. 언제부터 어긋났는지, 기억을 더듬어보면, 그는 무언가를 무섭다고 했다. 그때는 그가 불안정한 사랑의 감정에 헤매고 있다고, 그가 갖고 있는 근원적 트라우마 때문에 다시금 괴로워한다고 생각했지만.

'내일 저녁에 보면 돼. 그리고 물어보면 되는 거야.'

고개를 젓는다. 복잡하게 생각 할 건 없었다. 어떤 흐름인지는 가늠이 안 가지만 셀리안이 나를 피하는 걸 그만두기로 한 것이다. 애초에 남의 생각을 다 알려는 것 자체가 오만이니까.

'남이라고?'

그야, 셀리안이 나는 아니다. 아니겠지만.

‘그래, 일단 내 결심을 다시 전하자.'

나는 아니까, 그를 아니까. 그를 안심시킬 수 있으니까-

히아신스를 확인하고 에드나를 확인하고- 그 다음은 엘킨을, 엘킨...

엘킨을 생각하자 메슥거리고 답답한 느낌이 다시금 들었다. 아니, 들기보다는 문득 깨달았다. 동시에 내가 줄곧 엘킨에 대해 생각하는 걸 피해왔다는 것을 알았다.

“...”

천천히 셀리안이 잡고 있던, 손을 보았다. 가시 돋은 장미를 바라본다. 알 수 없는 셀리안, 마치 남처럼, 모르는 사람처럼 웃고 체념하고 나도 모르는 걸 이해한 눈으로 한참이나 나를 보았다.

‘아파.’

머리가 빙글빙글 돌고, 셀리안의 생소한 눈빛이 주는 감정은 엘킨이 주었던 감정과 비슷해서, 점점 알 수 없게 되어진다. 사랑이란 점에서는 비슷한 게 맞지만, 그걸 받아들이는 나는 그래서는 안 되는 건데.

상상도 못하는 것이 움직이고 있다- 변하고 있다- 사랑으로 변하는건 한 사람만이 아니다, 그것을 윤하영은 또다시 간과하고 있다. 윤하영은 또다시, 깨달은 척했지만, 아무것도 변하지 않아서.

"윽...'

몸이 비틀거렸다. 간신히 간신히 장미의 숲으로 넘어지는 건 버텨냈지만, 생각은 소용돌이 치며 나를 난도질하는 것 같다.

“당신-아직도 성에 있었어?”

"?"

점점 견딜 수 없어졌기에 그것은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혼자만의 생각에 골몰해 포화상태가 된 나를 끌어내는 타인의 목소리였다.

"염치를 모르는 치사한 여자네. 여전히."

고개를 돌려 상대를 확인하면, 이게 결코 다행이 아니라는 생각이 드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지만 말이다.

*

키오후를 만났던, 내가 꺼리던 정원, 결국 셀리안을 만나지 못했던 정원- 그리고 애리 공주가 아끼던 가시 없는 장미정원의 누래진 장미 나무들은 정리되어, 새로운 장미들이 심겨졌다. 다만, 아직 공사 작업은 끝나지 않았고, 옮겨진 묘목들도 덜 피어 있어 애리 공주는 자주 들르는 장미 구역을 잠시 바꾼 게 틀림없었다.

"염치를 모르는 치사한 여자네. 여전히."

다른 생각에 골몰한 탓일까, 나는 어느샌가 애리 공주가 임시로 향유하는 정원의 구역으로 흘러 들어온 것 같았다.

장미 덩굴로 꾸며진 새하얀 대리석 정자 아래, 방금 전 만났던 남자와 닮은 금발의 소녀가 앉아 있다. 애리 공주였다.

나는 얼른 무릎을 굽힌다. 언뜻 본 바로는 그 옆으로는 마놀공주와 세피오스 후비가 있었다. 그리고 하녀들과, 시동으로 보이는 남자 아이까지. 다른 두 공주는 시집을 갔고, 왕국의 또다른 왕자는 다른 영지를 맡아 다스리고 있으니 선황제와 헤르티아를 빼면 왕궁의 핵심 왕족들이 다 모여 있는 것이었다.

내가 그들의 환심을 사고 싶어하는 귀족영애였다면 매우 운이 좋은 거겠지만, 지금의 윤하영으로서는 영양가 없는 생각을 멈춰준 것 외에는 별로 메리트가 없는 만남이었다.

“이 아가씨는?”

마놀공주가 입을 열었다. 헤르티아와 달리 약소국이 아닌, 그럭저럭 힘을 가진 무역국에서 시집온 이 공주는 딸이 있는 나이에도 앳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녀의 주홍빛 눈동자가 호기심에 차 나를 보았다.

“그거의 친구랍니다. 어마마마.”

“그거라... 마놀, 아리나의 예절선생을 자르는 편이 좋겠네.”

마놀공주의 목소리에 애리가 대답하면, 세피오스 후비가 무심하게 이야기했다. 나이를 먹긴 했어도, 한때 사교계의 얼음꽃이라는- 내가 생각하기에는 지극히 민망한 별명이 여전히 잘 어울리는 날카로운 미녀였다.

“에? 그... 아니, 아니요. 아닙니다. 세피오스 님. 그, 제 말은... 그...”

애리는 안하무인에 제멋대로였지만 왕궁에서는 단 두 사람에게 약했다. 바로 셀리안 크레이누와 세피오스였다. 셀리안에 대한 감정이 동경과 선망이었다면, 세피오스에 대해서는 두려움에 가까웠다.

마놀공주가 금지옥엽으로 예쁨을 받으며 자란, 헤르티아와는 대척점에 선 느낌의 공주였다면 세피오스는 그야말로 왕비로서 교육받고 자란, 까다로운 미녀였다. 마놀 공주가 공주만 셋 낳은데 비해, 세피오스 후비는 왕자를 생산했다. 셀리안의 치세가 워낙 강고하긴 해도, 일단 셀리안이 후사를 보지 않은 현재 왕궁에서 제일 유력한 왕위 계승자는 그녀의 아들이었다.

선황제에게 가장 사랑받는 여자는 마놀이었지만, 셀리안이 황제인 지금 왕비 중 가장 강한 실권을 가진 자는 세피오스였다.

셀리안의 기억을 떠올리면, 그녀는 마놀공주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친하기야 친했지만, 그의 느낌상 헤르티아에게 좀더 마음을 쓰는 느낌이었다. 셀리안은 그것이, 엄격한 교육을 받고 자란 귀족 영애가 많이 부족한 공주에 대해 갖는 연민 정도로 여겼었다.

“검은 머리에 검은 눈동자... 고개를 들거라.”

“...”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면, 보랏빛 눈동자와 아름다운 은발을 가진 중년의 부인이 부채로 입을 가리고 나를 바라보고 있다. 오만한 시선이다. 그렇다고 깔보는 건 아니고 그녀가 원래 갖는 시선이 그랬다. 그녀로부터 저런 시선을 받지 않는 자는 선황제나 셀리안 정도일 것이다.

“후후.”

“?”

그녀의 웃음으로 갑자기 긴장감이 깨진다. 세피오스가 키득거리며, 부채를 접었다.

“너구나. 폐하가 친히 아리나를 혼내게 한 장본인이.”

“세피오스님!!”

“목소리를 낮추렴.”

“윽...”

그녀의 보랏빛 눈동자가 반짝거리며 나를 본다. 내가 시선을 맞추지 않으려 해도, 그녀가 일부러 맞춰오는 게 느껴졌다.

“어머, 건방진 눈.”

그녀는 나와 눈을 마주하다가 키득거렸다.

“죄송합니다.”

건방질 생각은 없었지만,셀리안도 이에 대해서는 지적한 적이 있다. 귀족을 모르고 신분을 모르는 눈, 세피오스도 그런 걸 느낀 건지도 모른다. 의도한 게 아닌 만큼 곤란한 일이었다.

“그렇죠? 완전 건방진 계집이라니까요! 저 계집이 오라버니에게!!”

“아리나 크레이누.”

“...”

애리를 제압한 세피오스가 자리에서 일어나 천천히 내게로 다가왔다.

“너에 대해서는 이것저것 듣는 게 있지. 세르미아 영애.”

살랑살랑 그녀가 부채를 움직이자 달콤한 향기가 코를 맴돈다.

“헤르티아는 에이나 영애로 착각하고 그 목을 조른 것 같지만, 내가 보기에는 헤르티아가 졸라야 하는 건 그대 목이 맞았던 것 같아.”

후후 하고 웃으며 물러나는 것도 순간이었다.

“나는 치정극도 팜프파탈도 아주 좋아한답니다.”

뜬금없는 단어 선택에 나는 나도 모르게 고개를 들었다. 애리가 무언가 다시 소리 치려 했지만, 세피오스가 부채를 들어 저지했다.

“그런 건방진 눈은- 마치 제가 좋아하는 소설들에 나오는, 주제도 모르는 하녀나 평민 아가씨 같네요.”

“...”

이 사람이다.

나에게 로맨스 소설을 보내준 사람.

셀리안이 아니라는 걸 알고 나중에 그전 책들을 가져다주던 하녀를 찾아 책의 소재를 물었다. 그녀 역시 내 시중을 간간히 들던 아이였는데, 사실은 내 전속은 아니라고 했다. 하녀는 곧 다시 제 주인에게 가게 되었다며 묘하게 웃었었다. 나에게는 왕궁에서 특별히 권한이 없었던 만큼 추궁까지는 생각하지 않고 그녀의 원주인을 물으면, 그녀는 나에게 관심이 많은 귀한 분으로부터라고- 애매한 말을 한 뒤 입을 다물었던 것이다.

나에게 관심이 많은 귀한 사람-

셀리안의 일도 있고, 더 이상 생각하기 귀찮아 신경쓰지 않았지만-

“제가 보낸 책은 마음에 들었나요?”

그녀가 웃으며 나를 본다.

"언젠가 공연도 같이 보면 어떨까요?"

언젠가라고 그녀는 이야기했지만 그게 멀지 않은 날일 거라고 어렴풋이 느꼈다.

*

장미정원을 빠져나와 걷는다. 하늘이 어두워지고 있었다.

세피오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모르겠다. 현재 왕궁 내 여자 중 가장 큰 권력을 갖고 있다고는 하지만, 셀리안이 절대권력을 가진 이상 그녀가 무언가 획책하고 있다고 생각하긴 어렵다.

문제는 내일, 내일 저녁 셀리안이 찾아오기로 한 일이 더 급선무였다.

“아가씨, 아가씨!”

그때 등 뒤로부터 뛰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아가씨라는 호칭은 익숙하지 않지만 그것이 나를 부르는 소리란 걸 알았다.

뒤돌아보면 모르는 소년이다. 은색 눈동자를 가진 작은 남자아이.

“?”

낯이 익다.

무언가 가슴이 술렁거린다. 갈색 머리카락은 평범했지만 은빛 눈, 기묘하게 반짝이는 은빛 눈동자.

진과 같은 은빛-

“방금, 정원에서 뵈...뵈었어요.”

아이는 내 시선에 당황한 듯 말을 더듬었다. 순간 상념이 깨진다. 잘 보면 은빛이라기보다는 잿빛 눈동자였다.

“저, 저는 세피오스 님의 시동인 안이라고 합니다. 그... 세피오스 님이 시간이 되신다면 내일 함께 공연을 보자고 하셨습니다.”

“내일이라고?”

공연을 보자고 한 게 방금 전인데 참 성격도 급하다. 멀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게 당장 내일이 될 줄은 몰랐다. 게다가 내일은 셀리안과 약속이 있는 것이다.

“저, 세피오스 님께는 정말 죄송하지만-”

셀리안 일도 있고, 지금은 새롭게 왕실에서 인연을 맺을 때가 아니었다. 어떻게 거절해야 할지 고민한다. 그러고 있으면 시동 아이가 다급하게 덧붙였다.

“원...원래는 에이나 영애와, 세피오스 님 두분이 보시기로 한 겁니다만.”

“에이나 영애라고?!”

“네. 에이나 영애가 최근 몸이 안 좋아, 세피오스 님이 친히 극단을 불러 왕실 살롱에서 영애를 위로하기로 했는데... 친우이신 세르미아 영애가 참여하시면 더 좋아할 것 같다고 하셨습니다.”

“...”

이건, 거절할 수 없다.

“그게 언제니?”

“아침부터 점심시간 때까지랍니다. 아가씨.”

내 말에 안이라는 소년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 작품 후기 ============================

마녀 공주님, 후원 쿠폰 감사합니다!!>ㅁ// 오늘은 수요일, 주중도 반이 지나가네요. 행복한 하루 되시기 바랍니다.

라이니엘 님 // 좋게 봐주시는 것 같아요.;ㅁ; 그런 거죠.;;; 제가 생각해도 뭔가 너무 하영이 시점에 집착하고 쓰는 것 같아서.ㅜㅜ 흑흑. 셀리안 외전이라고 해야 할까, 하영 외 시점 외전은 조만간 올라옵니다. 써놓기는 했는데 아직 올릴 타이밍이 아니라. 역시 저는 다시 한 번 생각합니다. 내가 왜 하영 1인칭을 선택했는가.

Gravas 님 // 저도 코멘트 달아주시는 분들 덕분에, 추가하는 내용도 있고 설명하게 되는 것도 있고 도움을 많이 받아요.ㅜㅜ

체셔빈 님 // 금요일이 공강이라니. 이런 꿀 같은... 저는 얼른 금요일 저녁 퇴근 시간이 되면 좋겠어요. 즐거운 불금을 즐기는 거죠. ㅎㅎ 외전은 조만간 나올 예정입니다. 아마도 10화 안에 나오지 않을까 생각하고요. 저도 꿈 속에서 잔 적이 꽤 된답니다. 체셔빈님도 같은 경험이 있으시다니 좋네요.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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