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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아신스를 만나기로 승낙한 날, 뜻하지 않은 그녀와의 만남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세피오스가 무얼 꾸미는지 신경도 쓰였지만 역시 히아신스가 보고 싶었다. 셀리안을 만나기 전, 그녀를 보고 어떤 상태인지 알아두는 것도 좋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두근거리는 마음을 안고 잠이 들면 그날도 어김없이, 꿈속에서 류를 만났다.
꿈의 공간은 전날밤 내가 바꿔놓은 그대로, 그가 갇혀 있다는 흰 공간이었지만 류는 딱히 그것을 바꿀 생각은 없어보였다. 그의 성격을 미루어보건대 단지 지금 이 순간 신경을 쓰지 않는 것뿐일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다만.
“우와, 얘 걔지?”
새하얀 공간, 그 꿈의 공간에 나와 류- 거기에 오늘은 다른 사람이 하나 더 있었다. 아니, 사람이라고 하기에는 뭐 하지만.
“얘가 그러니까...”
“...”
고개를 연신 갸웃거리는 류를 보며, 이 남자가 단지 무언가에 무심한 건지 아니면 그냥 멍청할 건 뿐인지 회의했다. 회의하며 뜻하지 않은 내방자를 바라보았다.
“으으- 그러니까.”
류가 머리를 감싸쥔다.
“히아잖아.”
“히아?”
그래, 히아.
히아라니, 나 자신이 한 말인데도 조금 놀랐다. 상대는 히아신스의 가위였으니까! 나는 은연중에 그녀가 히아라고 말하는데는 주저하고 있었다.
히아신스의 가위가 길인지 흉인지. 객관적으로 분명히 흉이었다. 설사 최근 그 규칙성을 잃었다 해도 이게 나타나고 변변한 일이 없었다. 없었는데도 어느새 나는 이게 히아라고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이것만이 히아라고.
‘당연하지. 모습도 같고... 달리 칭할 말도 없는데.’
어쩐지 불쾌한 구상에 나는 얼른 나 자신을 달랬다.
“히아가 뭐지?”
“히아신스라고.”
“그래-! 히아신스 에이나! 전장의 에메랄드!”
뻥 뚫린 듯 공허하게 벌어진 눈과- 피투성이가 된 검은 머리카락, 여전히 비참하고 애처롭게 그녀는 하얀 공간에 서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머리가 터졌네.”
“말도 참 이쁘게 하시네요.”
류는 언젠가부터 이 히아신스를 눈치채고 있었지만, 이렇게 명확하게 그가 그녀를 보는 건 처음이었다. 꿈이 연결되어서 그럴까.
류는 손은 대지 않고 히아신스 가까이 다가가 유심히 살펴본다. 류는 히아를 보고, 히아는 나를 보고 있었다.
“흠... 자세히 보고 싶었는데 잘 되었네. 근데, 만지면 역시 사라질까.”
“만져보던지.”
“좀 보고.”
만질 생각이구나.
어쩐지 그가 히아를 만지는 게 싫었다. 그녀는 약하다. 이제 그녀뿐이다. 히아신스 에이나는 오로지.
‘뭐지, 지금 생각은?’
미간을 찌푸리고 있으면 류가 고개를 끄덕인다.
“흐음. 소망실현의 집결, 같은 거네. 그리고 그 소망실현에 들러붙은 건가. 모습이 같으니까 아무래도 쉽게 피신한 거겠지.”
“류?”
“....흐음... 안 좋은데?”
“안 좋지 않아.”
반사적으로 대답했다. 분명 흉이라고 생각했는데, 모습조차 흉인데도 그가 이 히아신스를 나쁜 것으로 취급하는 걸 견딜 수 없었다.
"나한테 안 좋다는 거야."
"!... 만지지마!"
나는 몸을 움직여 그와 히아신스 사이를 파고들었다. 하지만, 류가 재빠르게 히아신스의 가위에게로 손을 뻗는다. 그녀는 다시 연기처럼 사라졌다.
"만지지 말라고 했잖아."
"아깐 만져보던지 라며?"
"..."
“다행히, 최소한의 방어본능은 있는 것 같아.”
“방어본능이라고?”
그는 내 질문에는 답하지 않았다. 불쾌한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히아신스를 잡으려던 제 손을 바라보았다.
“...설마, 아니겠지. 아닐 거야. 마법왕도 원하는 건 비슷하니까.”
“셀리안?”
갑작스레 셀리안이 나와 눈을 깜빡였다. 그의 말을 따라갈 수 없다. 불쾌한 표정을 짓고 있는 건 류지만 점점 내가 불쾌해져갔다.
"갑자기 왜 셀리안 이야기가 나와?"
“응? 아아. 어제 그 자식이...”
“어제?”
어제라면 잠이 들기 전일 가능성이 높았다. 그 전날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다. 그렇다면 셀리안은 나를 만나고, 혹은 나를 만나기 전에 류를 찾아간 걸까.
“...”
“어제 셀리안이 온 거야? 어제?”
재촉해 물어보면 류는 지긋지긋하다는 얼굴을 하다가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러더니 내 말에는 대답하지 않고 제 옆 자리를 툭툭 쳤다.
“그보다, 이야기를 하자.”
“류!”
“하겠다고 했잖아. 이야기.”
“...”
그의 눈은 흔들림이 없고, 내가 원하는 답은 하지 않을 것 같았다. 이 남자를 통제하는 법을 모르겠다.
'찜찜하게만 하고 도망가겠다고?'
하지만, 나는 셀리안에 대해 듣고 싶었다. 적당히 기회를 봐 다시 한 번 화제를 꺼내보자고.
"그래. 해. 이야기."
일단은 어느 정도 맞춰 주기로 했다. 그가 권한 옆자리보다 약간 옆에 앉는다.
"무슨 이야긴데."
"말했잖아. 하겠다고."
"...무슨 이야기인지 말을 하라고."
역시 말할 줄 모르는 남자다. 그저 느낌상, 처음 꿈이 시작되었을 때 그가 말했던 자신의 이야기인 것 같다고 생각했다.
[응, 내 이야기. 어린 시절이라거나, 취미라거나, 특기 같은- 그런 거.]
나는 이 남자와 얽히고 싶지 않았다. 그와 노예마차에서 만났을 때 품었던 불쾌함, 그것이 예전 함께 양파를 깎고 남자의 잦은 방문으로 희석되었다면 셀리안에 대한 그의 폭로로 다시 불쾌함은 증폭되었다. 그것이, 또다시 이 감각의 연결과 꿈의 연결로 남자에 대한 익숙함으로 바뀌어가고 있었다. 분하게도 말이다.
“이제 와서네?”
“응. 어디까지 했더라?”
류가 고개를 갸웃한다. 하나도 안 했는데, 이 바보남자는 하겠다고 했지만 실질적으로 자신의 이야기는 하나도 하지 않았다. 그걸 지적하려고 하면 그가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성녀와 신관이 서로 사랑하게 되었다는 데까지였지?”
“그 이야기였냐?”
기가 막힌다. 이야기라는 건 그 밋밋했던 로맨스의 뒷이야기였나 보다.
*
"둘은 사랑을 확인했고, 신관은 몸이 나았지.
성녀와 신관의 동화 같은 사랑 이야기, 그것의 뒷이야기를 하겠다는 남자를 어이없이 바라보았다. 로맨스의 후일담이라고 해도 밋밋할 뿐이다. 설사 반전이 있다고 해도 지루하게 맥이 빠지는 이야기일 것이었다.
"하지만 그에게는 자신의 일이 있었고, 돌아가야했어.”
“혹시 떠나서 안 돌아왔다거나 그런 거야?”
“오, 어떻게 알았어?”
후일담은 맥이 빠지는 이야기였다. 현실적이라고 해야 할지도 모르지만 꼭 헤어지거나 파국을 맞는 게 현실적이라고는 할 수 없기에 나는 한숨을 쉬었다. 밋밋한 사랑 이야기는 질나쁜 패러디 같은 뒷이야기까지 담고 있는 모양이었다.
“돌아온다고 했지만, 돌아오지 않았어.”
“흐응.”
“아니, 돌아오지 못했다-고, 성녀는 생각했지... 음... 이게 대체 무슨 차이야?”
류는 나에게 묻는 건 아니고 그저 고개를 갸웃했다.
돌아오지 않는 것과 못하는 것 그 차이에 대해 고민하고 있었다.
“어차피 돌아오지 않은 건 같은데. 어쨌든- 여자는 기다렸지. 기다리고 기다리고 기다리는 와중에 자신의 뱃속에 아이가 있다는 걸 알았어.”
"..."
기다렸다-
그 뒤는 그런 이야기가 지리하게 이어졌다. 성녀는 남자가 돌아올 걸 믿으며 홀로 아이를 품고 남자를 기다렸다고.
지순하고 한결 같은 믿음과 사랑의 이야기였다.
맥이 빠지고 지루하고 불쌍한 이야기. 하지만, 나는 전혀 관심도 없었던 성녀에게, 그녀의 기다림을 듣는 순간 의도치 않게 신경이 쓰이기 시작했다.
이런 이야기에 신경 쓸 생각은 없었는데 일단 류의 이야기가 아니었고, 성녀의 사랑은 맹목적이어서 내가 아는 사랑과 닮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처음으로 사람을 접한 성녀. 그녀에게 타인이란 그의 이야기에 언뜻 나온 어린 시절 방문한 젊은 여자 여행자와 사랑에 빠진 신관뿐이었다. 그런 그녀에게, 사랑을 모르고 사람을 모르는 소녀 같은 여자에게 처음 앓게 된 사랑은 분명히 이 세상 무엇보다 컸을 것이다. 그것에 몰입해 기다리고 기다린다.
성녀의 정신이 온전할 수 있었을까.
'로맨스에 이런 생각이라니.'
싶긴 했지만-
셀리안도- 첫사랑이었다. 그는 첫사랑을 놓을 수가 없었다. 곁에 두고 싶어했다. 성녀도 아마 그랬겠지. 그렇지만 타인이란 자신의 마음대로 되지 않아 두 사람 다 그게 불가능했다. 성녀는 힘이 없어 그가 돌아가는 걸 멈출 수 없었고 셀리안은 힘으로 멈췄지만 마음은 이미 떠나서. 떠난 걸 아는데도 기다림은 계속 되고, 마음은 망가져버린다. 사랑에 타락한다.
우스운 일이다.
“결국 10달을 채워 홀로 아이를 낳고, 그 후에도 계속 남자를 기다렸지만 그는 오지 않았어.”
성녀는 남자를 계속 기다리고 셀리안은 엘킨을 놓치 못했다. 그런 공통점. 나는 어느새 성녀의 타락을 기다리며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날- 아이가 크게 우는 날-”
오로지 윤하영만이 엘킨을 놓았다. 엘킨은 윤하영에게는 첫사랑이었지만 ‘나’에게는 첫사랑이 아니었다. 그래서 놓을 수 있던 걸까. 첫사랑에 배신 당한 ‘나’에게는 ‘내’가 더 소중해서.
아니, '나'는 이미 타락해서.
“여자는 아이의 목을 졸라 죽였다.”
“뭐?”
기대하긴 했지만, 성녀의 타락이 아이를 죽였다는 이야기에 나는 류를 보았다. 그는 그런 나를 물끄러미 보다가 웃었다.
이후 이야기는 그로테스크 하게 흘러갔다.
*
“죽였다고?”
“그래. 렌은- 여자가, 오지 않는 남자를 사랑했기에, 차마 그를 원망하지 못하고 남자와의 결과물인 아이에게 원망을 쏟았다고 하더라구.”
나쁜 여자라고 하던데- 라고, 류는 담담하게 덧붙인다.
구토가 나오는 이야기였다. 원망해야 할 건 오지 않는 남자. 지치고 미친 정신은 끝까지도 사랑하는 남자를 원망하지 못하고 애먼 아이에게 돌아갔던 것이다. 밋밋한 이야기는 맥이 빠지는 뒷 이야기를, 그리고 불쾌한 결말로 이어진 것이었다.
셀리안과 같다. 그의 타락은 엘킨 주변으로 퍼부졌으니까.
“하지만 진은- 여자가 후회하고 아이를 부활시켰으니 역시 아이도 사랑했을 거라고 이야기했어.”
"..."
"..."
"? ... 잠깐. 그게 뭐야? 부활이라고?”
성녀가 타락해 아이를 죽이고- 그걸로 끝이라고 생각했지만 이야기에는 뒤가 있는 것 같았다. 게다가 부활이라니.
"말도 안돼. 부활이라니."
"왜 말도 안돼?"
"그야-"
[관심이라기보다는... 키오스 국경 지역의 빈민가를 중심으로 제가 태어나기 전까지 비슷한 류의 사건이 꽤, 오랫동안 있었던 모양입니다.]
문득 언젠가 류와 엘킨이 나누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어느 한 순간 없어졌다고는 합니다만, 단순한 미신이 아니라. 누군가 의도적으로 퍼뜨린 ... 아니, 소중한 사람을 잃은 사람의 심리를 이용해 실험하고 있는 듯한 냄새가 나서... 어머니께서는 꽤 꼬리를 잡고 싶어하셨습니다.]
민간에 퍼졌다는 부활의 주문. 아마도 셀리안을 부활시킨 것과 같은, 안나‘들’에 의해서 퍼졌을 주문. 그것은 칼미온 기사단조차 괴담으로 취급했고 자세히 아는 건 셀리안이나 엘킨 정도였을 것이다. 그것을 류가 알고 있었다는 게 떠오른 것이다.
“실제 여자는 아이를 부활시켰어. 여행자 여자는 소녀에게 선물을 줬거든. 그때 전해준 마법 중에 소중한 사람을 부활시키는 주문이란 게 있었지.”
그리고 억측이지만, 지금 신관과 성녀의 이야기도 잘 생각해보면 시모갈과 관련되었을 가능성이 컸다. 성녀는 용에게 사랑받았다 했고 용이 시모갈에 잠든 흰용이라면. 무엇보다 시모갈은 키오스 국경의 빈민가 즉 지온에서 비교적 쉽게 밀항을 통해 갈 수 있는 지역이었다.
그녀가 만났다는 어린 시절의 여행자 여자는 혹시 안나가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혹시 이거 실제 이야기야?”
나는 설마 하면서도 류에게 그것을 물었다. 류는 새삼스럽다는 눈을 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어쩐지, 너무 뒷이야기가 많고 잘 짜여진 이야기다 싶었다.
“이거 그거지? 예전에 엘킨이-”
“...”
엘킨의 이름을 입에 내니 조금 갈비뼈 근처가 아려온다. 이건 아마도 죄책감, 죄책감이다. 갖는 것도 송구한 죄책감.
“그러니까, 엘킨이- 하아... 예전에 말한 흑마법을 이용한 부활 마법, 그 이야기니?”
“뭘 그렇게 어렵게 말해? 셀리안 크레이누를 부활시킨 것과 같은 종류야.”
“...”
“하하, 넌 진짜 셀리안 크레이누 이야기만 나오면 그 얼굴이야. 짜증나게.”
동시에 이번엔 에드나와의 대화가 떠올랐다.
[정말 인간이란 지독하지. 자신은 유지도 못하던 것이, 결국은 후손들을 통해 세계의 흐름을 어그러뜨려. 죽은 자를 두 번이나 부활시키고.]
안나의 흑마법은 두 번 성공했다고 했다.
그리고 이야기 속 성녀는 부활에 성공했다고 했다. 그렇다면.
“혹시, 그 부활했다는 사람 알아?”
다른 것에 굳이 신경쓰고 싶진 않지만... 안나의 주문으로 셀리안과 같이 부활했다는 사람을 그냥 지나치기 힘들었다. 누군지 알아봤자 찾을 것도 아니지만 그래도 상대도 안나에 의해 피해를 입은 것이다. 이것은 어쩌면 안나라는 여자에 대한 원망, 그에 따른 피해자의 동류의식일지도 몰랐다.
“응? 무슨 소리야?”
“무슨 소리냐니?”
류는 내 말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미간을 찌푸린다. 그러다가 가볍게 한숨을 쉬고 머리 나쁜 아이에게 다시 한 번 주지시키는 어조로 대수롭지 않게 이야기했다.
“처음에 말해줬잖아.”
“뭐? 언제?”
“한다고 했잖아?
“어?”
류의 황금색 눈이 나를 바라본다.
"설마-"
나는 곧 그 말이 갖는 의미를 알고 입을 다물었다.
그렇다, 류는 이야기했던 것이다. 지금부터 나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해주겠다고.
============================ 작품 후기 ============================
자정에 못 올린 이유는 조아라에 오류가 나 글을 날렸기 때문이죠. 흐허허ㅁ하너히노...ㅜㅜ
리돌님께서 팬아트를 주셨습니다. 짜란~ 꼭 엔딩에는 두 사람이 저런 모습일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해랑나랑 님 // 크흡. 근데 공지도 없이 지각... 해랑나랑님은 예언을 하셨던 거시다으다으다으... 저는 항상 말로만 이야기하는 나무바라기죠; ㅎㅎ 하지만, 언젠가는 지킵니다으. 언젠가는~ 저도 항상 코멘 주셔서 너무 감사해요.ㅜㅜ
체셔빈 님 // 세피오스랑 헤르티아 이야기도 풀고 싶은데 어디서 풀어야 할지 모르겠다. 외전인가. 다음 외전은 셀리안이 주인데. 또롱... ㅎㅎ 재미있게(?) 불안하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해피엔딩이니까 마음 놓으세요!! 마음을 안 놓는 건 저로 충분...(<<)
lokoko님 // 엘킨은... 저때가 석양이 질 무렵이니 밥을 먹고 있지 않을까요. 본격 왕궁을 벗어난 엘프의 아웃도어 식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