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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야 어찌 되었든 히아신스의 방에 내 발로 찾아가는 건 처음이었다. 언제나 나를 찾아오는 건 히아신스로, 나는 결정적인 순간조차도 그녀를 내 발로 찾은 적이 없었던 것이다.
안을 따라가는 것 뿐이긴 하지만 동시에 히아신스가 내게 알려준 히아신스의 방으로 가는 길을 더듬어 걷는다. 그녀가 약도까지 그리며 가르쳐준 길이지만 한 번도 가본적이 없었던 길.
진작에 갔어야 했다고, 후회했던 건 키오후가 그녀에게 무슨 짓을 한다는 걸 알았을 때다.
‘난 항상 후회만 하는 것 같아.’
정말 중요한 게 뭔지 모르고 말이다. 그저 히아신스가 가르쳐준 길을 걷는 것만으로도 그런 생각이 들었다.
셀리안에게도 오늘 저녁에는 솔직하게 좀더 솔직하게. 단지 그를 설득한다느니 정답을 말한다느니 그런 이야기가 아니라, 윤하영 스스로에 대해서도 이야기하겠다고 마음먹었다.
류의 이야기라든가, 내 고민이라든가. 솔직하게. 그러면 좀더 그는 안심할까. 객관적으로 나는 그에게 숨기는 게 너무 많으니까.
내가 누구인지는 아마 말할 수 없겠지만.
심경의 변화와 관계없이 이건 확실히 해야 할 일이었다. 이 세상에는 흔들리면 안 되는 몇 가지가 있는데 이 부분이 그랬다. 나에 대해 말한다면, 그는 분명히 상처 입을 것이다. 히아신스가 그의 전생과 관련 있다고 이야기했을 때 셀리안의 얼굴을 기억한다. 그가 용납한다 해도 다시는 그런 얼굴은 보고 싶지 않다.
의지하고, 솔직하게 이야기하겠지만, 좀더 생각해서 신중하게.
“에이...나 영애는 어...어떤 분이신가요?”
고민하고 있으면 안의 목소리가 들렸다.
“응?”
“저, 저는 왕궁에 와서 세피오스 님 밑에만 있었고, 사...사실 시동이 된지도 얼마 안 되어서요...”
“그렇구나.”
“그... 그분이 저희의 왕비님이... 되시는 건...가요.”
“...”
그래, 히아신스는 곧 왕비가 된다. 성군 셀리안 크레이누의 왕비가. 성군 셀리안 크레이누와 아름다운 왕비 히아신스 에이나. 그런 그림을, 이번에야말로.
- 셀리안은 나를 좋아하는 걸.
구토와 두통이 치민다. 셀리안이 나를 좋아해서? 아니다, 지금 윤하영은 셀리안 크레이누가 윤하영을 좋아하다는 것에-
“아니야.”
“세르미아 영애?”
“아, 아니야. 그렇지. 히아신스에 대해 물었었지. 아, 아아. 멋지고 아름다운 사람이야. 왕비에 걸맞는, 너무도 훌륭한 여기사지.”
나는 또 답지 않게 활짝 웃으며 덧붙였다.
이 마음은 진심이었다. 게다가, 셀리안이 나를 좋아하는 건 관계없는 일이다. 세피오스가 보내준 치정소설이나 로맨스 소설에 너무 많은 영향을 받은 것 같다.
“세피오스님이 보여준다는 공연은 뭐니?”
“사랑 이야기로 들었어요.”
“그래...”
나는 사실, 셀리안이 히아신스를 사랑하지 않아도 상관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히아신스와 셀리안 사이에는 연애 감정이 없고 신뢰만이 있다. 그게 더 심플하다. 그리고, 연애감정이 히아신스에게 싹 텄다 해도 전생을 키오후가 억지로 끌어낸 것으로, 그것도 지금은 잠잠해졌을 것이다. 키오후는 쫓겨났고, 셀리안이 그녀를 원래대로 돌려준다고 했기 때문이다.
“아! 그, 사실 이 공연 배우님들께... 연락을 넣었던 게 저예요.”
많이 주저하고 긴장하던 안이지만, 내게 스스럼이 없어졌는지 머뭇거리면서도 복도 내내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 중 그의 자랑인 듯한 게 바로 배우들과의 만남이었다. 주선은 좀더 위의 신하가 했겠지만, 그들을 데리러 주점에 갔던 건 자신이라고 자랑했다. 최근 고아원에 봉사차 방문한 세피오스님에게 거두어져 처음 맡은 일이었다느니, 시내에 나간 건 처음이었다는 이야기도 이어졌지만 반즈음은 흘려 듣는다.
‘나 좀 이상한 걸.’
알고 있었지만, 지금 내 생각으로 깨닫는다.
내 사랑 혐오는 조금도 낫지 않았다. 여전히 사랑에 대해 생각하면 울렁거린다. 없어졌다고 생각했지만 부활한 것 같다. 더군다나 나는 지금 미래의 왕과 왕비 사이에 연애감정이 없고, 두 사람이 신뢰로 이어지는 걸 더 안정적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애초에 나는 셀리안이 나, 혹은 엘킨을 좋아한 채로 히아신스와 이어진다면 불행해질 거라는 가정을 해본적이 없었다. 확실히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다. 히아신스도 셀리안도 서로에게 연애감정이 없고 그게 최고라고 은연중에 생각했다. 그녀는 셀리안에게 연애감정을 갖기 시작한 것 같았지만, 그 편이 이상한 거다. 불안한 것, 불길한 것, 더군다나 그게 전생에 영향을 받은 거라면-
‘아니 전생은 셀리안이 해결해주겠다고.’
해결한다고? 무엇을?
“도, 도착했습니다.”
복잡한 생각에 빠져 걷고 있으면 히아신스의 방에 당도 했다.
‘다 괜찮을 거야.’
뭐가 괜찮은지 감도 잡히지 않았지만, 마음을 다잡는다. 내가 그 방을 나올 수 있게 된 건, 어쨌든 하고 싶은 대로 하라는 셀리안의 암묵적인 허락을 뜻했다.
그러니 괜찮을 거라고.
-대체 뭐가 괜찮다는 걸까. 윤하영은 지금 셀리안 크레이누가 자신을 좋아한다는 것에 분명히...
“왜 그러니?”
안은 조금 긴장한 듯 망설이며 문을 두들기지 못하고 있었다.
“내가 할까?”
내 말에 아이는 구원이라도 되는 것처럼 고개를 세차게 끄덕인다. 안심하라는 듯이 생글 웃어주고 문을 두들긴다. 아이는 고개를 숙이고 있다. 긴장한 듯 제 발 끝만 보고 있었다.
‘수줍은 아이구나.’
왕궁에 들어온지 얼마 안 되었다는 걸 보면 이해할만 했다.
“누구세요?”
곧 히아신스의 목소리가 들렸다. 머리가 새하얗게 된다. 아이만큼 떨리기 시작한다. 이상한 일이지. 히아신스를 상대로 떨리다니.
“히아, 저예요.”
심호흡을 한다. 설레기도 하고, 무섭기도 하고- 건강한 얼굴을 보고 싶다고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
문은 열리지 않았다. 문은 열리지 않고, 방은 조용하기 그지없었다.
‘무슨 일이 있는 걸까.’
덕분에 나는 새로운 긴장감에 한숨을 내쉬며 다시 문을 두들기려 했다. 그때 내가 내쉬는 한숨에 섞여 가볍게 내 옆의 안이 숨을 들이키는 걸 알았다.
“안?”
그걸 의문으로 여겨 이름을 부르면 곧, 방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렸다. 소란스럽게 뛰는 소리가 들리고 벌컥 문이 열렸다.
“아-”
검은 머리카락을 위로 틀어올린, 아름다운 녹빛 눈동자의 여기사- 그 눈동자가 나를 보더니 커진다.
“...?”
마치 놀란 것처럼, 놀란 것처럼 커지더니 곧 곱게 휘어졌다.
“영-!”
“히아!”
*
안은 약간 시간이 있다고 이야기했고, 이것이 세피오스의 배려인지 모르지만 나는 히아신스와 오랜만에 티타임을 가질 수 있었다.
히아신스는 기묘하게 들떠 있었다. 마치 처음 나를 만나 처음 티타임을 가졌을 때처럼 긴장한 것 같기도 하고, 몹시 기쁜 것 같기도 해보였다. 오랜만에 만난 만큼 그럴만도 했다. 나 역시 기뻤으니까.
단지...
‘뭘까, 이 위화감은...’
셀리안은 아직 해결되지 않았다고 했다. 그때문일지도 모른다.
어쨌든 아침에는 구토가 치밀 정도로 넘어가지 않던 음식도 다행히 그녀와 함께 있으니 먹을 수 있었다. 거북함도 없이 나는 먹을거리를 입에 넣었다. 히아신스는 건강해보였고 여전히 달콤한 것도 좋아했으며 프릴 이야기도 즐거워했다. 모든 게 괜찮아 보였다. 그것이 나를 안심시켰다.
언뜻 이야기의 흐름을 보면 그녀는 현재의 칼미온이나 미실랭과 엘킨의 부재에 대해서는 모르는 눈치였다. 몸이 안 좋아서 거의 방에서 두문불출했다는 이야기였다.
“부끄러워요. 저는 제가 이렇게까지 건강하지 못할지는 몰랐어요.”
“긴장해서 그럴 거예요.”
“그럴까요.”
내 이야기에 히아가 고개를 들어 미소 짓는다.
셀리안은 정말로 내 소원을 들어준 것 같았다. 히아신스는 원래대로 돌아오고 있었고 문제 될 건 하나도 없다. 키오후도 그녀의 곁에는 없었다. 모든 게 잘 된 것이다.
‘뭘까.’
하지만, 역시 이상하게 찝찝함이 있다. 눈앞에서 웃고 있는 히아신스는 분명히 내가 아는 히아신스건만 기묘한 감각이었다. 문제는 이 감각이 낯설지 않다는 것이었다. 분명 누구보다 자연스러운 히아신스이며, 그녀에게 나는 애정을 느끼고 있었지만 약간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의 눈빛, 손짓, 모두 히아신스 같으면서도 히아신스 같지 않았다. 그때문일까. 그녀에게도 물어야 할 게 있지만 묻지 못했다.
묻는 순간 어떤 대답이 나올지 무서웠기 때문이다.
예컨대 키오후에 대해.
혹은 셀리안에 대해.
“몸은 정말 괜찮은 거죠? 방안이 조용해서 조금 걱정했어요.”
할 수 있는 말은 일단은 그뿐이었다.
“아, 그게 졸고 있었거든요.”
“하하, 그랬군요.”
“네!”
내 말에 히아신스는 가볍게 웃었고, 곧 안의 부름으로 우리는 세피오스의 방에 안내 되었다.
‘앞으로 만날 날은 많으니까.’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일단은 질문을 보류하게 되었다.
*
안내 되는 동안 안이 몇 번이고 히아신스를 힐끔거리는 게 느껴졌다. 소문의 차기 왕비를 보는 선망의 시선인 듯 했다. 다만, 히아신스가 그를 보며 다정하게 마주 웃을 때마다 소년의 어깨가 미세하게 떨렸다. 그것은 내가 그를 위해 답지 않게 활짝 웃었을 때 그가 보였던 반응과 언뜻 비슷한 것 같았다.
아니, 그보다 깊고 깊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