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루나 패러독스-138화 (138/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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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은 어떠셨나요?”

“재미있었어요. 감사합니다, 세피오스님.”

“즐거운 시간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공연이 끝나고, 히아신스는 정말로 즐거운 듯 눈을 빛냈고, 나는 애초에 지어낸 이야기를 좋아하지 않았기에 약간 예의를 섞어 이야기했다. 그럼에도 공연은 제법 재미있는 이야기였다. 세피오스가 공연이니 문화를 좋아하고 그 심미안이 높다는 건 사실인 것 같았다.

다만, 공연은 약간 짖궂게도 귀족남자와 귀족영애, 그리고 떠돌이 가희 사이의 치정극이었다. 소재 때문에 시시한 이야기라는 생각이 더 강해진 것도 있었다.

하찮은 가희와 고고한 귀족 남자의 사랑이야기. 가희는 귀족남자의 사랑에 만족하지 않고 귀족영애로부터 남자를 빼앗는다. 남자도 당연한 듯 가희를 선택한다.

마침 귀족영애도 악녀였다.

하지만 우린 다르다.

셀리안은 내가 원한다면 히아신스를 선택할 거고, 히아신스는 정말 좋은 사람이고, 나는 셀리안을 사랑하지 않는다. 사랑하지 않으니까.

“두 사람 모두 재미있었다니 다행이네요.”

내 반응에 세피오스는 시시한 것 같기도, 즐거운 것 같기도 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며 웃었다. 웃더니 가볍게 내게 몸을 기대 속삭였다.

“후후후, 왕궁 희대의 팜므파탈은 어린애네요.”

“네?”

그리고 휙 몸을 떼 생글 거린다.

“저는 어린 시절부터 ‘공연’이나 ‘소설’을 좋아했답니다. 특히 사랑 이야기요. 물론, 보는 것과, 실제는 또 다르지만요. 후후후-”

마치, 내가 소설이나 공연 등 지어낸 이야기를 바탕으로 사랑을 생각하고 있다는 것처럼-

과한 생각일지도 모르지만 그렇게 느낀다.

‘틀려, 나는- 알고 있어.’

셀리안 크레이누의 전생만 바라본 거라면 그녀의 이야기가 맞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나는 엘킨을 사랑했고, 그를 버렸다. '윤하영'의 얇고 얇은 사랑은 셀리안 크레이누에 대한 미련에 먹혀버리고, '셀리안 크레이누'의 깊은 사랑은 '윤하영'의 소망에 삼켜져버린 것이다.

“히아신스 님과 직접 이야기하는 건 처음이네요. 히아신스 님은 어린 시절, 공연이나 소설은 많이 보셨나요?”

그렇다면 ‘윤하영’의 사랑이란 애초에 존재하지 못한 것이 아닌가. 내 사랑은 지켜본 과거와 미련, 내 것이 아닌 그의 타락으로 점철되어 자신에 대한 에고로 가득 차- 무르익기 전에 부서지지 않았나-

“어린 시절...”

성가신 생각의 꼬리는 히아신스의 목소리에 끊겼다.

지나친 생각이다. 엘킨에게는 죄책감을 느끼고 있다. 일부러 그를 생각하지 않으려 했던 만큼 지난 꿈에서부터 간만에 그를 떠올리니 지나치게 생각한 것이다.

나는 다시 히아신스와 세피오스의 이야기에 집중했다.

“히아신스 님은 어린 시절부터 검술을 즐겼다고 들었는데, 역시 공연이나 소설은 많이 못 보셨을까요?”

“아-”

“?”

그녀가 검술을 즐긴 건 공인된 사실인데도 마치 히아신스는 그것을 부정하려는 것 같았다. 같았지만 착각인지 찰나적이었다. 히아신스가 나를 힐끔 바라보고 곧 매끄럽게 입을 열었다.

“네, 맞아요. 그래도, 아버지가 가끔 보여주셨어요. 그랬죠. 그랬어요.”

“에이나 경은 다정하니까요.”

세피오스는 제멋대로 재단하고 이야기하는 면이 없진 않았지만, 그녀와의 대화는 나쁘지 않았다.  그녀는 꽤나 유연한 사람이었고 함께 한 점심 식사도 티타임의 간식들도 모두 맛있는 것들이었다.

*

세피오스는 달변가였고, 공연을 보고 티타임을 갖고 나니 반나절은 금시에 지나갔다. 방에서 혼자 두문불출했을 때와는 정말 달랐다.

세피오스는 좀더 오래 이야기를 하고 싶어했고, 나는 셀리안과의 약속으로 인해 도중에 내가 이 모임을 파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파한 건 히아신스였다. 그녀는 그녀답지 않게 피곤하다고 먼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고, 세피오스와 나의 걱정에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아프거나 한 게 아니라 이상하게 피곤하다고. 최근에는 그런 일이 없었는데 오늘은 이상하다며 웃기까지 했다.

모임을 파하고, 세피오스는 다음에 또 기회를 갖자고 권했다. 그리고 히아신스에게 할 이야기가 있다며 내가 먼저 방을 나오게 되었다.

현 왕궁의 안주인과 차기 안주인이다. 이야기할 건 얼마든지 있을 것이었다.

나오면 방앞에는 안이 서 있었다. 내가 나왔지만 그는 인식하지 못하는 듯 조금 멍해보였다.

“안-”

“....아?”

그는 내 부름에 잠시 비틀 거리다 나를 보았다.

“몸이 안 좋니? 아니면 무슨 일이 있던 거야?”

나랑 히아신스는 물론 세피오스도 자주 안을 신경쓸 수 없을 것이다. 지금만 해도, 밖에 있는 사이 무슨 일이 있던 걸까. 새로 들어온 하인이 지나치게 세피오스님에게 신뢰를 받아 괴롭힘을 받았다던가.

불안하게 바라보면 안이 우는듯 웃는 듯 찡그렸다. 그의 잿빛 눈동자가 물에 젖어 일렁인다.

우는 걸까.

나는 눈앞의 아이가 제법 마음에 들었다. 눈치 빠르고, 배려심 있고, 서툴고- 세피오스가 이 아이를 시동으로 삼은 것도 이해가 간다.

“혹시, 누가 괴롭-”

답지 않게 오지랖을 부리려고 하면, 안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이해했어요.”

“어?”

“당신의 말이요. 어떤 것도 할 수 없어요.”

“안?”

“할 수 ...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웃는 듯이라고 생각했던 건 순간으로 그는 완전히 울 것 같은 얼굴을 했다.

“그렇지만, 해야 해요.”

거기까지 이야기가 끝나자, 히아신스가 나왔고 안은 조개처럼 입을 다물었다.

*

방에서 나온 히아신스는 세피오스가 헤르티아에 대해 물었다고 간단히 이야기해주었다. 안이 있어 자세히는 이야기할 수 없지만, 세피오스는 헤르티아가 크레이누 왕가에 시집 왔을 무렵에는 꽤 그녀와 친해서 그녀의 안부를 물어왔다는 것이었다.

아마도, 나를 공격하고 헤르티아는 줄곧 감금되어 있는 걸로 알고 있다. 세피오스가 헤르티아에게 여전히 관심이 있는 건 의외였지만 걱정할만 했다.

그렇게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며 히아신스, 안과 함께 나란히 복도를 걷고 있으면 곧 갈림길이 나왔다. 한 길은 내 방으로, 다른 방은 히아신스의 방으로 가는 길이었다. 마음 같아선 히아신스를 방까지 데려다 주고 싶었지만, 곧 셀리안과의 약속시간이었다. 그렇다고, 내 방에 들렀다 돌아가는 건 히아신스에게도, 안에게도 부담일 것이다.

나는 그들과 헤어져 혼자 방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히아신스는 아쉬워했지만 생각보다 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강행으로 함께 가자고 하는 것도 상정해보았지만, 그녀는 약간 피곤해보였다. 그녀 스스로도 체력이 많이 약해진 것 같다고 웃었으니까. 다만 미련이 남는 듯 오래도록 내 손을 잡았다.

“그럼, 나중에 또 봐요. 하영.”

“네, 아, 내일 제가 또 찾아가도 되나요?”

“그럼요. 그럼 너무 기쁠 거예요...”

“?”

“하영-”

내 이름을 부른 히아신스는 똑바로, 조금 열정적으로 나를 보았다.

“네?”

“자주 찾아와주세요. 하영에 대한 기억을 많이 만들고 싶으니까.”

“아, 저도요.”

“네. 제대로- 제가 기억할 생각이니까요.”

“?”

그렇게 히아신스가 뒤돌아서고 그녀를 데리고 돌아서는 안을 바라보며, 나는 몸을 돌린다.

돌리고 천천히 걸어, 그들의 발걸음 소리가 나로부터 멀어졌다.

*

복도를 걷는다. 복도를 지나는 하녀나 기사들이 있었지만, 기본적으로 내 발걸음소리만이 울리고 있었다.

셀리안을 만나면 정말 할 이야기가 많았지만, 무엇을 해야 하는지는 구체적으로 정해지지 않았다.

‘앞으로 시간은 많으니까.’

히아신스와도, 셀리안과도- 해야 할 이야기들을 정리하며 걷고 있으면 문득 내가 나아가는 길에 누군가 서 있는 걸 알 수 있었다.

누구일까. 모습을 봐서는 여자였다. 하녀? 혹은 귀족- 슬그머니 고개를 들면 나는 손끝이 차가워지는 걸 느꼈다.

“아-”

눈앞에 그녀가 있었다. 방금 전 헤어졌던 히아신스 에이나, 아니 다르다. 피에 젖은 새까만 머리카락, 텅 빈 녹색 눈동자, 벌어진 입-

"히아-"

나도 모르게 그녀를 부른다. 애칭으로, 마치 이 히아만이 내가 아는 히아인 것처럼.

순간 이 세상 오로지 하나뿐인, 찌꺼기처럼 남은 히아신스가, 아니 히아신스의 가위가 내가 멀어졌던 방향으로 손을 들었다. 히아신스와 안이 멀어졌던 그 길이다. 그 손을 나는 멍하니 바라본다.

그리고 다시 히아신스를, 히아신스의 가위를 바라보면, 그녀의 머리가 쿵 하고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머리부터 곤두박질쳐 쓰러진다. 마치 전생, 저 높은 에피룬 크레이누의 동상에서 쓰러지던 모습 그대로.

"아-"

마치 목구멍 안쪽이 막힌 것처럼 말은 나오지 않고 어느새 나는 미친듯이 달리고 있었다.

*

복도 끝에는 히아신스와 안이 있었다. 히아신스는 웃고 있었고, 안도 웃고 있었다. 다만, 히아신스는 내가 모르는 표정으로 웃고 있었으며, 안은 울 것처럼도 보였다.

뛰던 걸음을 천천히, 천천히 그들 가까이 다가가고 있으면 안과 눈이 마주쳤다. 이상도 하지, 기사인 히아신스가 나를 알아채지 못하고 평범한 어린 아이인 안과 먼저 눈이 마주치다니 이상한 일이었다.

그리고 더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나와 눈이 마주치는 걸 기점으로, 어느 순간 나는 하늘 위에 있었다. 아니, 엄밀히 말해 나와 히아신스, 안이 있던 그 복도만이 마치 누군가에 의해 통째로 펴져 하늘 위에 떠 있었다.

말도 안 되게 찰나적으로 일어난 일이었다.

그 기이한 현상에 놀란 듯 히아신스가 두리번거리다가 나를 발견했다.

"아- 하영-"

그녀는 내가 아는 얼굴로 웃었다. 다정한 미소, 나를 보는 기쁜 듯한 미소는 분명히 히아신스였다. 그리고 곤란한 듯 얼굴을 찌푸린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기사다운 날카로움은 아니지만 의아함이 눈에 깃들고, 그녀는 천천히 주변을 두리번거렸고 당연한 것처럼 안을 향했다. 마치 이런 일을 안이 했다는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히아신스가 안을 보았을 때 안은, 천천히 걸어 히아신스를 향해 손을 뻗고 있을 때였다. 마치 밀려는 것 같이 느껴졌다.

터무니없는 일이다. 기사인 히아신스가 저 작은 아이에게 밀릴리도 없고, 안이 히아신스를 죽일 이유도 없었다.

하지만, 어쩐지-

나는 이 장면을 알고 있었다.

먼 옛날, 일어나지 않은 옛날 히아신스를 에이나를 죽인 자는 은색 눈을 가진 평범한 외모의 청년. 자른 목의 주인을 찾으면 그저 주위에서 홀로 살고 있는 청년이라고 했다. 그 정도만을 셀리안 크레이누는 홀로 알아냈다.

왜 히아신스를 죽였는가.

“안돼-”

나는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중얼거리면 소년의 손이 멈칫했다. 히아신스는 그 위협에도 멍한 얼굴을 하고 있었는데 내 중얼거림에 그제야 놀란 것처럼 눈을 깜빡였다. 뻗어진 안의 손과 이상하게 무기질해 보이는 소년의 눈동자-

“진-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건가요?”

진이라고, 그녀는 그녀가 불러서는 안 될 사람의 이름을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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