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루나 패러독스-139화 (139/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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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건가요?”

안돼, 라고 이야기했던 내가 멈칫한다. 히아신스는 제 입에서 나온 이름에 의문도 갖지 않는 것 같았다. 잿빛 눈의 아이는 웃었다. 슬픈 것처럼 웃었다.

“방금 한 말은 사실이야. 안나- 기뻐. ‘너’를 다시 만나서. 그리고, 이건 말하지 못한 건데. 난 슬퍼. ‘너’와 헤어져야 해서.”

“무슨 이야기인지 모르겠어요. 진-”

히아신스는 나를 신경쓰고 있었지만, 그보다 안이라는 소년의 말에 당혹스러워하는 것 같았다. 내 눈치를 보면서도, 마치 생각지도 못한 것에 한 대 크게 얻어맞은 것처럼 소년의 손으로부터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녀는 ‘그’가 자신에게 해를 입힐 거라고는 생각도 못하는 것 같았다. 그에 아랑곳 않고 안은 한 걸음 더 내딛어 다시 그녀에게로 손을 뻗었다. 작은 손이 히아신스를 향하고 있었다.

“!”

굳어 있을 때가 아니었다. 저 손이 닿으면, 그녀는 분명히 여기서 추락하고 만다. 그건 왕궁의 복도가 하늘에 떠있는 것처럼 이치로는 설명할 수 없는 일이다.

“진!!”

멈춰야한다고 생각하는 순간 나도 당연한 것처럼 잿빛 눈동자의 소년을 진이라고 불렀다. 진이라는 이름을 가진 붉은 용- 그 이름을 히아신스와 똑같이 불렀다. 아니, 히아신스? 히아신스라고? 저게?

어쩐지 나는 도저히 그녀를 그렇게 볼 수 없었고, 그것이 구토가 날 만큼 끔찍하다고 생각했다.

순간 소년이 나를 보았다.

“이미 누나도 알겠지만- 그녀는 히아신스 에이나가 아니야.”

“뭐?”

“진!!”

비명처럼 소리를 지른 건 히아신스다. 히아신스 에이나는 결코 부르지 않을 이름을, 그녀답지 않은 톤으로- 움직이지 않던 그녀가 한 발 소년에게로 다가섰다.

“후후, 당황하는구나. 너답지 않게. 그런 모습도... 보게 되어서 기쁘지만. 너는 언제나 그래. 그냥 에피룬의 비위를 맞추고 싶은 것뿐이야. 이번에는 윤하영이라는 에피룬의 영혼을.”

“...”

녹빛 눈이 당황한 것처럼 나를 보았다. 진의 말마따나 내 비위를 맞추는 것처럼- 히아신스처럼 바라보려고 노력하는 게 보여서- 순간 내 머리를 스치는 기억이 있었다.

꿈속, 나를 막아서는 여자- 사랑스러운 듯 내 발목을 감싸는 갈빛 여자- 그녀를 뿌리치고 나는 히아신스 에이나의 가위를 끌어안는다. 히아신스 에이나를 선택했다. 여자는 그것을 침통하게 바라보았다.

“그래서, 윤하영이 좋아하는 히아신스 에이나의 흉내를 내는 거야. 그녀의 기억을 살피면서까지. 하영, 네 옆의 그거-”

진은 내 옆을 가리켰다. 내 옆에는 히아신스의 가위가 서 있다. 여기까지 쫓아온 걸까, 아니면 나타난 걸까. 알 수 없는 일이다.

“그것이 남아 있는 히아신스 에이나라는 여자의 자아다. 그리고, 안나는 그 기억을 훔쳐보며 네 앞에서 히아신스 에이나인 척 한 거야. 오늘 내내- 그녀는 너에게 미움받고 싶어하지 않아하니까.”

눈앞의 히아신스가 천천히 가위와 눈을 마주했다. 살아 있는 히아신스가 히아신스의 가위를 거울처럼 보고 있었다. 가위 역시 마찬가지다. 기묘한 광경이다.

기묘한 광경이었지만, 더 기묘한 말을 들었다. 안나라고?

에피룬과 관련된 전생- 그를 사랑했던 여자- 그게 히아라면, 사실 뻔한 이야기라면 이야기였건만.

“지금 내 옆의 히아신스 에이나는 안나야. 그냥, 안나일 뿐이야. 그래서- 셀리안 크레이누는 그녀를 가뒀어. 히아신스 에이나로서 재구성할까도 생각한 것 같지만 너를 생각해서 멈췄고- 아침까지도 우리를 보고 있었지. 너를 만난 그녀가 ‘히아신스 에이나’인 척 했기에 그는 너희들의 만남을 허락했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뻔한 일을 나는 인정하지 못하고 있다. 왜냐하면 안나, 안나라면 모든 일의 원흉이었다. 셀리안을 괴롭히고 류를 괴롭히고 나를 괴롭히고- 누구도 원망할 수 없게 된 윤하영이 지금 가장 원망하는 상대였다. 그게 누구라고?

“히아신스 에이나를 지운 건 키오후겠지. 하지만 네 곁에 그것이 있어서. 네가 히아신스 에이나를 계속 붙잡아 두고 있어서 시간이 늦춰진 것뿐이겠지. 그것도 때늦은 일이지만.”

진이 다시 손을 움직인다. 히아신스는- 아니 여자는 그제서야 뒷걸음질 치기 시작했다.

“진? 거짓말이지?”

“안나, 꼭 전생을 기억하는 게 좋은 건 아니야. 게다가, 이런 식이라면 네 영혼에도 무리가 가겠지.”

“진!! 나는-”

“그뿐 아니야. 너로 인해, 너의 아이들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알고 있어? 게다가 에피룬의 영혼도-”

“아아-”

나는 경악에 차 히아신스를 바라보았고 히아신스가 어깨를 가볍게 떨며 소년을 피해 가장자리로 도망갔다. 그것을 나는 멍하니 본다. 가장자리에 그녀가 서고 어린 아이에게 압박 당하는 기묘한 광경. 도망칠 데가 없어진 히아신스의 시선이 나를 향했다.

녹색 눈동자가 애원하듯 바라보았다. 살려달라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저, 만나고 싶었던 것 뿐이에요.]

누군가 속삭이는 것처럼 느낀다. 그리운 듯 애원한다. 변명한다.

[그러니, 그런 눈으로 보지 말아요. 에피룬-]

그녀의 녹음 속에서 갈색 눈동자의 사랑스러운 여자를 본다.

“나는 네 영혼을 지킬 거다. 안나- 네 영혼은 이제 안나로서의 삶을 끝내도 돼. 내가, 전부 없앨 거니까. 너를 혼란시키는 네 자식들도, 그리고 그 멍청한 뱀 녀석도-”

그게 촉발제였다. 나는 움직이지 않은 채 시선을 돌렸다. 눈앞의 여자로부터 시선을 돌리고, 진의 손이 그녀에게 닿고 그녀가 저항하지 못하고 비틀 허공으로 밀려나는 것을 외면했다. 외면하고 있는 나를 누군가 옆에서 껴안았다. 히아신스의 가위다. 그것이 나에게 진을 막아달라는 건지, 위로하는 건지 알 수 없지만 아무래도 좋은 일이다.

슬로모션처럼 여자가 허공으로 떨어지는 게 어렴풋이 느껴졌다.

“에피룬!!”

“!”

그 부름에 응한 건 정말 내 안의 ‘에피룬’일지도 모르지. 하지만 눈이 맞은 건 윤하영과 히아신스의 거죽을 뒤집어쓴 여자다. 다만 그 거죽의 눈은 히아신스의 것이었다. 녹음의 에메랄드 같은 투명한 눈동자에 내가, 내가-

“아.”

이미 늦었다.

*

나는 이제는 시선을 돌리지 않고 떨어지는 히아신스를 눈에 담고 있었다. 잿빛 눈의 소년은 무표정하게, 사랑스럽게 추락하는 여자를 바라본다. 울 것 같은 눈으로.

내가 어떻게 했어야 했을까.

“늦었어.”

어떻게도 할 수 없다.

나는-결국.

“늦지 않았으니까.”

그때 내 옆을 지나, 황금의 바람이 떨어지는 히아신스, 여자를 받아들었다.

*

황금의 바람이 히아신스를 끌언안듯 잡고 있다. 동시에 내 무릎이 힘을 잃고 주저앉고, 그것은 안, 아니 진도 마찬가지였다.

진이 멍하니 셀리안을 바라보았다.

“무슨 짓을 하는 거야. 그녀는-”

멍하니 더듬거린다.

셀리안은 무표정하게 소년을 바라보았다. 소년의 잿빛 눈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그는 내게로 다가오고 있었다.

“셀리안 크레이누!!!”

아이의 목소리가 절망적으로 셀리안을 붙잡는다. 셀리안은 그 목소리에 돌아보지 않았고, 천천히 황금의 바람이 히아신스를 복도바닥에 안착시켰다. 그 모습에 소년은 망연자실한 것 같기도 했고 안도한 것 같기도 했다.

“하영, 괜찮나.”

“리...안.”

“어째서 나에게... 아무것도... 안 해?”

라고, 소년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더 이상 그것이 순수하게 세피오스 시동 아이의 목소리로는 들리지 않았다.

히아신스를, 아니 안나를 죽이려고 한 자신을 왜 막았냐고 물었던 그는, 이제 자신에게 어떤 짓도 하지 않는 셀리안 크레이누를 탓했다. 전생, 그는 히아신스를 죽였고 셀리안 손에 죽었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다만, 죽은 건 정말로 진은 아니었지만.

“그건, 네 몸이 아니지 않나.”

셀리안은 주저앉은 나를 잡아 끌어안는다. 나는 저항하지 않고 그에게 안겨 일으켜 세워졌다.

“그래. 하지만, 너는 나를 죽일 거라고 생각했어.”

그것은 마치 죽고 싶다는 이야기처럼 들렸다. 죽어봤자, 그것은 진이 아니고 안인데 이상한 이야기라고 멍하니 생각했다.

“죽음의 유사체험이라도 하고 싶었나? 이런 저런 지독한 짓을 한 것치고는 지나치게 태연한 게 용들의 특성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녀’를 죽이는 건 죄책감이 드나 보지?”

셀리안의 목소리는 책망하는 것도 아니고 이죽이는 것도 아니었다. 담담하게 사실을 고하면 소년은 약간 절망에 찬 탄식을 내뱉었고, 곧 쓰러졌다. 마치 실이 끊어진 인형처럼 말이다.

“갔나-”

그리고 우리가 있는 복도도, 그것을 부유시켰던 주인을 잃고 급격히 추락하기 시작했다. 비명이라도 질러야 했지만 나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바닥에 눕혀져 눈을 감고 있는 히아신스를 보았다. 눈을 감고 말을 하지 않는 그녀는 히아신스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셀리안이 가볍게 손을 치자, 공간은 천천히 내려앉는다.

“남의 성을 멋대로 파가다니, 용은 역시 변변치 않군.”

천천히 내려섰다. 동시에 나는 눈을 들어 셀리안을 바라보았다.

셀리안 크레이누가 히아신스를 구했다.

윤하영이- 히아신스를 버렸다.

그렇게 살리고 싶었는데, 좋아했는데.

순간, 마음을 잠식한 건 셀리안 크레이누의 증오, 셀리안 크레이누의 원망, 그의 트라우마였다고. 아니 더 멀리는 그 셀리안 크레이누의 기억 속에서 사랑에 대한 트라우마와 비틀림 속에 있던 윤하영이다.

결국 가장 더러워진 셀리안 크레이누를 품은 나만이 몇 번이고 그녀를 죽이는 거다.

왜? 내가 왜-

“짐을 원망하는 건 번지수가 틀린 것 같군.”

“...”

“그리고, 실질적으로 일을 벌인 건 용이지. 그대가 잘못한 것도 없으니-”

“당신 때문이야.”

아냐, 정말이지 번지수가 틀리다. 하지만, 한 번 나온 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짐의 탓이라고?”

“그래- 그야- 이건 전부 당신의 감정인 걸!”

멈출 수 없다.

“왜냐하면! 원래대로 해주겠다고 했지만! 저건 안나였잖아!!”

“짐이, 짐의 힘으로 저 여자를 구성하라는 건가? 그 호수처럼 짐의 인형으로?”

“그럴 생각, 이었잖아? 그냥 내 비위를 맞추려고 그러려고 했잖아? 애초에 키오후를 방치한 것도 그러려고 한 거잖아.”

더러운 주제에, 비틀린 주제에- 이 세계의 셀리안 크레이누는 결정적으로 발을 뺀다. 아무도 상처 입히지 않는다. 전생과 달리.

하지만-

“게다가- 그녀를 방치한 건- 그래! 이제 알겠어. 당신은, 에피룬 크레이누의 전생과 관련 있는 히아신스를 용납 할 수 없었어. 없어서, 그녀를 위해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은 거야!!”

억측이다. 윤하영은 셀리안 크레이누에게 이래서는 안 된다. 나는- 이래서는 안 된다. 그럴리 없으니까. 영혼에 간섭하는 마법은 인간의 영역이 아니다. 아니, 어떤 생물의 영역도 아니다. 셀리안이 어떻게 하지 않았어도 한 번 진행된 이상 늦던 빠르던 히아신스는 안나에게 잠식당했을 것이다. 나는 그저, 내가 늦어서 내가 그녀에게 소홀해서 그녀가 잠식당한 걸,  셀리안에게 떠넘긴 것 뿐이다. 그를 상처입히면서까지.

실제 그는 나와 류에 대해서는 필사적이었지만 여전히 해결책을 찾지 못했다. 영혼이란 그런 영역인 것이다. 인간이 건들 수 있는 영역이 아니다.

그러니까 나는 이런 말을 해서는 안 된다.

“당신이 다!!”

“그래.”

“...뭐?”

내 말에 셀리안 크레이누가 천천히 대답했다. 나는 놀라서 그를 바라본다. 붉은 눈이 무감하게 나를 보았다.

“맞아. 그대가 히아신스가 에피룬 크레이누의 전생과 관련되어 있다고 했을 때부터 짐은, 히아를 더 이상 히아로서 볼 수 없게 되었다. 그저 안정만 된다면, 어느 쪽이든 상관없었어.”

“왜, 그런 이야기를 하는 거야? 영혼은 어떻게 할 수 없는 거잖아.”

그에게는 아무 책임도 없다.

“큭. 그대는 짐을 곧바로 위로하려고 하는군. 하지만, 할 수 없는 것과 별개로 할 수 없는 걸 방치한 의도가 없다고는 할 수 없지. 그대의 말대로야. 셀리안 크레이누는 그럴 수 밖에 없어.”

에피룬과, 전생과 관련한 히아신스, 안나를 용납할 수 없었다고. 방금 전의 윤하영 처럼.

그는 고해한다. 고해하는 그의 눈이 슬프게 가라앉는다고 생각했다.

어떻게 위로해야 할까. 어떻게 내 말을 주워담아야 할까.

또 그런 생각을 했다. 윤하영에게 있어 셀리안 크레이누는 가장 큰 원망의 대상이자 연민의 대상이었으니까.

그러고 있으면 그 슬픈 눈이 윤하영을 오롯이 담고 다정하게 흔들렸다.

“그런데도, 그대에게는 그럴 수 없다는 걸, 알았다.”

“에?”

“기가 막히는 일이야.”

가볍게 나를 안아들고 있던 셀리안의 손이 갑작스레 나를 꼭 껴안았다.

“히아신스보다도, 짐의 모친보다도- 누구보다도- 만약 짐이 세상에서 제법 증오해야 할 대상이 나타났다면, 그건-”

그의 손은 떨리고 있었다. 떨면서도 나를 놓지 않고 꽉 붙잡았다.

“그대겠지.”

“...”

“그럼에도, 그럴 수 없었어. 짐은, 여전히 그대가 사랑스러우니까.”

나는 그의 품에 안긴 채 멍하니 그의 붉은 눈을 올려다보았다.

“무...무슨 소리?”

해선 안 되는 질문이, 멍하니 새어나온다.

“...”

“...”

정적 속에서 그가 대답하지 않길 바랐다. 하지만-

“그대는-”

- 나인 거지?

라고-

나를 껴안은 채,  나의 전생이었던 마법왕이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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